인간 프란치스코
축구 즐기던 소년, 유머있는 문학청년
응원하는 축구팀 ‘산로렌소…’
추기경때 라디오 중계 듣기도
종교와 문학 좋아해 미사 강론서
도스토옙스키 등 종종 언급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프란치스코 교황의 본명)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민들이 사는 플로레스 마을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인 아버지는 철도회사 경리사원이었다. 가족 중 생존자는 그와 12살 아래인 여동생뿐이다. 베르골리오는 인근에 사는 조부모로부터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그중 신심 깊은 할머니는 성인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면서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죽을 때는 돈 한 푼도 저세상으로 가져갈 수 없으니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독일 출신의 <바티칸 라디오> 기자인 위르겐 에어바허는 <프란치스코 교황>(가톨릭출판사 펴냄)에서 “베르골리오는 어릴 때 자주 아버지와 카드놀이를 했고, 주일에 온 가족이 산로렌소 클럽에 가서 농구 경기를 보기도 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축구클럽인 ‘산로렌소 데 알마그로’를 사랑해 훗날 추기경 시절에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라디오 중계로 듣곤 했다”고 썼다.
베르골리오의 고등학교 동창생 카라바조시는 “호르헤는 월요일 오후만 되면 아주 열을 올리면서 일요일에 있었던 경기에 대해 얘기하다 참지 못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 축구를 했다”며 “그가 깬 유리창만 해도 한두 장이 아닐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199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 슬럼가에서 빈민들과 함께 현장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 로이터
베르골리오는 어린 시절의 누구나처럼 예쁜 여자아이를 사랑하기도 했다. 얼마 전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레스에 사는 아말리아 다몬테(76) 할머니가 “12살 때 동갑내기였던 베르골리오에게서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빨간 지붕에 하얀 벽이 있는 작은 집이 그려진 그 편지엔 ‘우리가 결혼하지 못한다면 사제가 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는 내용을 한 방송 인터뷰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베르골리오의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는 “오빠가 신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한데 어울려서 탱고를 추러 다니는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베르골리오도 훗날 추기경이 되었을 때 “잠깐 동안이지만 신학교에서 나오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종교 과목과 함께 문학을 좋아했다는 베르골리오가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그는 미사 강론 중에 보르헤스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함께 단테의 <신곡>, 만초니의 <약혼자들>을 종종 언급했고, 톨킨의 작품 <반지의 제왕>에도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그가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스승은 누굴까. 남미 상황에서의 실천자들인 해방신학자들 말고도 독일 유학 중 그가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연구한 <권력>이란 작품을 쓴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인 듯하다. 과르디니는 권력은 필요하지만 나치의 권력 남용에서 보듯이 권력엔 제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인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그는 “사제 시절 가장 존경하던 고해신부의 관에 꽃 한 송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장미꽃 한 다발을 갖다 놓다가 손에 쥐여 있는 묵주를 발견해 묵주에 매달린 작은 십자가를 떼어내 훔친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은 “늘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오빠가 교황에 선출된 직후 가족 친지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면서 만약 여기서 일일이 전화를 다 걸면 바티칸 금고가 금방 바닥날 것이라고 했다”며 “오빠는 곤란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책상 앞엔 성요셉상이 놓여 있다고 한다. 그의 방문 앞 탁자 위에도 그와 비슷한 상을 놓아두고 있다. 교황과 대담한 예수회 신부이자 <라 치빌타 카톨리카>의 편집장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는 “이 상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는 말을 형상화해 베르골리오의 불굴의 순종을 드러내는 표상인 듯하다”고 해석했다. 성모마리아와 성요셉은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