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바보 성자가 되어보지 않겠소
“<한겨레> 기자 같지 않네요!”
취재원을 만날 때 가끔 듣는 말이다. 상대가 <한겨레> 열혈 독자라면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한다는 말일 텐데, 보수적인 매스컴만 접하고 살아온 분이 하는 말의 뜻은 그게 아니다. 머리에 뿔까지는 안 달렸어도 성마른 데모꾼에 지적질이나 해대는 피곤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의미다. 한겨레가 관료·법조인·교수·언론인·기업인·사회단체대표 등의 여론조사에서 신뢰도 1위를 하는 건 고려에 없다. 그저 상종 못할 찌라시 기자들은 안 봐도 뻔하다고 생각했는데, 달리 보여 희한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겨레 기자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하기에’라고 항의하거나, ‘보는 눈은 있으시다’고 감격할 수가 없다. 그는 한겨레 기자를 소문이 아니라 실제론 처음 보았을 뿐이다.
또 어떤 취재원은 냉큼 “전혀 기자처럼 안 보인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파리·모기떼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며 귀찮게 하는 기자들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세월호 참사 때 무례한 취재로 인해 ‘기레기’로 불렸지만, 사건이 아닌 일반적인 취재 때도 신문기자들이 그런 건 아니다.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된 이들이 기자들만일까. 정치인, 검사, 군인들은 어떤가. 정치인들의 언행은 모든 게 쇼라든가, 죄를 들추는 검사가 되면 눈빛부터 달라져 종국엔 인간성이 말살된다거나, 군인은 명령에 살고 죽다 보니 유연성이라곤 없다는데 그런가. 그러나 그건 그들의 일부 모습이지 전체는 아니다. 가까이 겪어 보면 정치인도, 검사도 큰 틀에선 우리와 다름없는 전문인이요, 부모요 남편이요, 친구요 동료요 인간이며,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 간에도 성격이 천양지차다.
1990년대 잠시 국방부에 출입하면서 군인들을 만나 본 첫인상을 잊을 수 없다. 전두환, 노태우 등 일부 정치군인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리 야전에서 일하는 많은 군 장교들에게서 내 선입견과는 동떨어진, 강직하고 검소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래서 잇따르는 군 폭력 사태에도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보았지, 모든 군인들의 인격 문제로 매도할 수는 없었다.
4일 갑작스레 인천을 찾은 북쪽 최고위급 인사들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더구나 이명박 정부 때부터 국방부 장관과 국가안보실장으로서 전쟁이라도 할 듯이 대북 강경론으로 일관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 북 권력 2인자인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손을 잡고 웃으면서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에 밀사로 파견한 뒤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래 두 차례나 남북 정상이 만나는 것도 보고, 200여만명이 금강산을 다녀오고, 2004년 개성공단이 가동된 뒤 123개 남쪽 업체가 입주하며 780명이 상주해 매일 북쪽 노동자 5만여명과 함께 일하지만, 악마적으로 비추는 화면만을 지속적으로 보는 사이 ‘저들도 인간임’을 어느새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평범한 손짓 발짓과 미소에도 화들짝 놀라게 된 것이다.
예부터 눈이 보배라고 한다. 몸이 10할이면 눈이 9할일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분을 전체인 양 비추는 매스컴에 의해서 진실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스스로 편견 때문에 진면목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적으로는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야 한다고 하고, 불교에선 여실지견(있는 그대로 봄) 하라고 한다. 편견을 넘어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건 쉽지 않다. 누구에게서나 불성(부처의 성품)과 영성(영적인 성품)을 본 부처와 예수처럼 바보스런 성자의 안목을 갖기는 더욱 어렵다. 거짓과 공작, 음모,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말이다.
그래서다. 지난해 2월 말 출범한 이후 종북과 공안몰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외면 등으로 ‘얼음공주’로 불린 박근혜 대통령도 붓다와 예수의 신뢰에 부응하리란 기대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창공을 바라보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