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돈과 권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인명인가 보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인 삼성 이건희(72) 회장이 지난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많이 회자되는 말이다. 이건희 회장이나 70살을 못 넘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돈이나 의술이 없어서 그리되었겠느냐는 것이다. 세계 최고 부자였던 스티브 잡스도 3년 전 56살로 생을 마감했다.
돈과 권력이면 안 되는 게 없는 것 같은 세상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결국엔 자신의 생명은 어쩌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세계대왕 알렉산더도 33살로 생을 마감했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의 불로초를 구해 먹던 진시황도 50살을 채 넘기지 못했다.
*왼쪽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그러나 한 시대의 걸물인 이들은 이름을 남겼다. 그리스 <오디세이아>에서 ‘반신반인’으로 태어난 절륜의 전사 아킬레우스(아킬레스)는 ‘신으로서 무사태평하게 영원히 살 것이냐’, ‘젊은 날 죽어서라도 영원히 이름을 남기느냐’의 선택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한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은 모래에서 황금을 찾는 것만큼이나 드물다.
최근 개봉해 잔잔한 감동을 불러온 <안녕, 헤이즐>이란 영화는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10대 남녀의 사랑과 죽음 이야기다. 폐를 점령한 암세포 때문에 항상 산소통과 호흡기를 몸에 달고 다니는 16살 소녀 헤이즐은 골육종을 앓아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의족을 달고 다니는 어거스터스를 암환자 모임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암이 갑자기 온몸에 퍼지는 바람에 헤이즐을 제치고 먼저 죽음을 맞게 된 어거스터스가 말한다. “난 내가 영웅이 될 줄 알았어. 내 이야기가 책이나 신문에 실리게 될 줄 알았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토록 허망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며 비탄하는 어거스터스에게 헤이즐이 말한다. “넌 나에게 한정된 나날 속에서 영원함을 줬다”고. 그리고 단 한 사람에게 새겨진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영화 <안녕, 헤이즐>의 어거스터스와 헤이즐(왼쪽 사진), 채희동 목사
내게도 역사책엔 씌어지지 않은 나만의 위인전이 있다. 내 가슴에만 살아 있는 나만의 영웅들이다. 내 친구 채희동 목사도 그중 한명이다. 충남 아산에 코딱지만한 교회를 세우고, 들판에서 시골 아이들과 공을 차고, 시를 읊다가, <샘>이란 잡지를 펴내던 채 목사는 40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
그는 신문 부고란에 날 만한 직함이나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날이면 많게는 수백명, 적게는 수십명이 그와의 따뜻했던 만남을 되새길 만큼 사랑의 불꽃을 심어준 이였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되는 오는 11월10일 마지막 추모예배가 열린다. 이제는 그런 행사조차도 없어질 것이지만, 그의 잔잔한 평화와 기쁨은 여전히 내 가슴에 살아 있다.
역사책엔 살아 있지만 단 한 명의 가슴에도 진정한 사랑을 주지 못한 위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채 목사 같은 사람은 아닐까.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사자의 물음 같은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듣고도 회한보다는 자족의 미소를 지을 그런 사람을.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