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은?
며칠 전 사과의 고장인 충주에 있는 산으로 시인 두 분과 함께 등산을 다녀왔다. 그날 산행을 마치고 천천히 내려오는데, 산모롱이를 돌자 잎은 지고 붉은 사과만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이 나타났다. 앞서 걷던 백발의 시인이 사과밭을 보고는 왕방울만한 눈을 뜨며 소리쳤다.
“오, 풍요 자체야, 풍요!”
“정말 그러네요!”
사과밭 가에 털썩 주저앉은 우리는 경이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수천수만의 불타는 작디작은 태양들을. 형언할 수 없는 환희에 젖어들게 만드는 붉은 환희의 빛덩이들을. 그날 우리는 나무에 매달린 사과를 따서 한 입 깨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놀라운 경험을 했다. 따먹지 않아도 배부른 포만감, 우리는 그 풍요를 온몸으로 느꼈다. 우리가 꿈꾸는 낙원이 결핍이 들어설 곳이 없는 곳이라면, 우리는 사과밭에서 그런 낙원을 보았다. 우리가 꿈꾸는 하늘나라가 위선이 들어설 곳이 없는 곳이라면, 알몸을 드러낸 사과밭에서 그런 감흥에 젖어들었다.
산의 끝자락을 빠져 나오면서 옷을 벗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세속에 살면서 덕지덕지 껴입은 불만과 결핍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껴입은 위선도 벗어버릴 수 있었다.
그날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두 분 시인에게 일본의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 시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들려주었다.
신이 대지와 물과 태양을 주었다
대지와 물과 태양이 사과나무를 주었다
사과나무가 아주 빨간 사과 열매를 주었다
그 사과를 당신이 내게 주었다
부드러운 두 손바닥에 싸서
마치 태초의 세계처럼
아침 햇살과 함께
어떤 말 한마디 없어도
당신은 나에게 오늘을 주었다
잃어버릴 것 없는 시간을 주었다
사과를 길러낸 사람들의 미소와 노래를 주었다
어쩌면 슬픔도
우리들 위에 펼쳐진 푸른 하늘에 숨은
저 목표도 없는 것에 거슬러서
그래서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새
당신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나에게 주었다
내 시낭송을 듣고 난 백발의 시인이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영혼의 맛있는 부분’이란 시구가 감동적이구만. 그런데 우리가 방금 보고 온 사과나무나 자비로운 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당신 자신도 모르는 새/당신 영혼의 맛있는 부분’을 줄 수 있겠어?”
나는 시인의 진지한 감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소유를 누구에게 내어줄 때 떠들썩하게 광고하며 준다. 그리고 자신에게 돌아올 보상을 구멍가게 주인처럼 따져보고 준다. 또 어떤 이는 자기가 주는 것을 받는 사람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헤아려보고 준다. 사과나무나 우주나 신이 무엇을 줄 때 우리에게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요구하던가.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준다.
*제주의 삼나무숲. 정용일 기자
하지만 우리 사람도 생명의 본성을 깊이 이해하면 나무나 신처럼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생명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말이다. 모름지기 생명은 운동이고 흐름이다. 그 흐름이 정지할 때 죽음이 찾아온다. 만일 사람이 운동이고 흐름인 이런 생명의 본성을 거부하고 자기가 지닌 것을 움켜쥐고만 있으려 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호흡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자기가 들이마신 숨을 내놓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칼릴 지브란도 <예언자>라는 시집에서 과수원의 나무들과 목장의 가축들을 예로 들면서 말했다.
“저들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준다. 주지 않고 아끼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에.”
시인의 말처럼 주지 않고 아끼는 일은 나무나 가축들 같은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생명의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것이 곧 자기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경구처럼 자연은 이처럼 우리 삶의 본보기가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우주만물의 사랑에 감전된 듯 시인은 자신이 선물로 받은 기쁨과 환희를, 실제로 자기 삶 속에서 나누며 살아간다고 한다(다니카와 슌타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 해설 참조). 그는 일본의 한 양로원에서 치매 걸린 노인들을 섬기는 생활을 한다고 한다. 매일같이 양로원으로 오던 길도 잊어버리고, 가족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치매노인들을 위해, 그들이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주문 받아 만들기도 한다고. 하여간 그렇게 노인들과 불꽃놀이도 즐기고 바비큐도 함께 구워 먹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요리 체험에서 영혼의 ‘맛있는’ 부분이란 아름다운 시구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고 보면 다니카와 슌타로는 ‘영혼의 요리사’란 표현이 어울리는 시인이 아닐까.
당신을 사랑하기에/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용서해주세요/나의 서툰 침묵을/나는 당신을 에워싼 공기가 되고 싶어/당신의 살갗에 맺히는 이슬이 되고 싶어//시선을 준 것만으로/이미 작은 새는 날아가버린다/다만 작은 속삭임 하나로/이 밤은 밝아지지 않는가/다만 한 방울 눈물로/사랑은 응고되어 버리지 않는가//나는 꼼짝할 수가 없어요/이 너무나 완벽한/당신과 이 밤에
―<11월의 노래> 전문
영혼의 요리사인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서툰 침묵과 공기와 이슬을 버무려 사랑하는 이와의 합일에 이르고자 한다. 합일은 곧 사랑의 종착점이다. ‘작은 속삭임 하나로 이 밤이 밝아진다’(같은 시)고 믿는 시인의 사랑은 겸허하면서도 자부심에 차 있다. 자신의 그런 행위는 곧 ‘세계의 풍요로움 그 자체’가 된다고 여기니까 말이다(<소네트 62> 참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가는 세계의 풍요는 곧 시인의 풍요이며, 시인의 행복이다.
예수 또한 영혼의 요리사로, 자기 존재를 세상을 살리기 위한 밥으로 지어 허기진 이들의 배를 채워주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발동해서가 아니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행전 20:35)는 숭고한 가치를 온몸으로 호흡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무의 폐를 자기 가슴에 얹어 숨 쉬듯, 그는 주는 것이 신성을 부여받은 이의 신성한 호흡임을 늘 자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생명을 세상의 밥으로 내어줄 때 ‘당신 자신도 모르는 새/당신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내어주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하듯’ 그렇게. 만물의 깊은 눈을 꿈꾸는 시인 예수, 그는 세상에서 이런저런 까닭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속마음을 헤아려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고, 덧없는 욕망에 끄달리는 이들을 그 욕망에서 해방되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선사한 ‘당신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이 아닐까.
영원한 우리의 멘토인 예수는 시인의 음성을 빌어 나와 당신에게 묻는 듯싶다. 당신이 세상에 내어줄 ‘당신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이 무엇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