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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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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니에가 연약한 인간을 대하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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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 가면 주로 10여 명이 모이는 조그만 교회를 간다. 이런 교회의 특징은 사람이 많은 교회에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진지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 가서 회중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큰 교회에 나가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는 것 보다 훨씬 은혜로움을 느낀다. 한 번은 울산 등대 교회 이종호 목사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목사님은 술술 이야기를 잘 하게 만드시네요. 지 목사님은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기술이 있는 것 같네요."라고 했다.

 

그건 맞다. 만나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법, 그것은 그냥 쉽게 배운 것이 아니고 힘들게 배운 것이다. 나에게 사람을 만나서 무장해제를 가르쳐준 사부는 바로 '장 바니에'라는 사람이다. 장 바니에는 전세계에 퍼져있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슈(노아의 방주)’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이다.

 

20년 전 호주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늦은 밤 시간인데 집 근처에 있는 가톨릭 여학교 주차장은 물론이고 학교 주변 골목까지 차가 빈틈없이 주차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가 조용하고 학교안도 너무 조용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는 체질이어서 살금살금 학교 안으로 잠입을 해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강당으로 침투했다. 살그머니 열린 문틈으로 정탐을 해보니 강당 안의 대부분의 전등은 꺼져 있고 원형 테이블 마다 초가 밝혀져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상태에서 사람들이 수십 개의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는데도 마치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무대의 연사가 있는 테이블에만 작은 등이 켜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어떤 늙은 남자가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분위기에 그만 기가 질려서 살금 살금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청중이 전부 백인들이기도 했고 영어로 하는 강연을 알아듣는 것도 효율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오면서 안내판을 보니 유명 인사의 유료 강연회였다. 그런데 나중에 놀란 것은 그 때 강연을 하던 그 사람이 오랜 동안 내가 책을 읽고서 큰 영향을 받았던 장 바니에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장 바니에가 우리 동네에 와서 강연을 할 줄이야! 당시는 내가 아직 호주에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현지 상황을 잘 몰라서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던 기회를 놓치고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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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그 후에 장 바니에 인터뷰가 TV 방송에 나와서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용은 잘 못 알아 들었지만 나는 그의 인터뷰에서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더 큰 수확이었다. 그것은 보통의 인터뷰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니에는 자기가 인터뷰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진행자를 대상으로 상담가가 상담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TV 카메라 앞이 아니고 그들 앞에 다른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오직 대담자에게 100%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는 ! 바로 저런 바니에의 모습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에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그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키게 했고 그 힘으로 그 많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리 중요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할 때라도 전적으로 집중이 되지 못하고 슬쩍 슬쩍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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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엄마에게 느끼듯 누가 나를 100% 믿고 신뢰를 보내준다는 인상을 주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장 바니에가 상대방이 누구이든지 그에 대하여 100% 신뢰를 보내는 모습! 아마 예수가 그랬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면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끝까지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해당이 없었지만…….

 

장 바니에는 1928년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고, 1942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1950년 해군 장교로 제대했다. 그 후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토론토 대학에서 가르치다 프랑스의 정신요양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정신지체 장애인을 만나 자극을 받고 1964년에 프랑스의 트로즐리 브로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두 사람과 함께 노아의 방주라는 뜻의 라르슈공동체를 세웠다. 가장 작고 가난하며 연약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발견한 그는 1968년 복음 말씀을 나누는 '신앙과 나눔'공동체, 1971년에는 장애인과 그의 부모와 친구들이 함께 만나는 믿음과 빛공동체를 만들었다. 오늘날 라르슈는 전 세계 28개국에 103개 공동체로 확산되었다. 1981년 라르슈 공동체 책임 자리를 물러선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상담·강의·피정 지도·공동체 봉사자 동반 등을 통해 더욱 나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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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간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고백이 더 많은 소유와 더 높은 상승을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는다. 헨리 나우웬의 삶을 변화시켜 하버드에서 라르쉬로 가게 한 장 바니에. 그는 고통과 경쟁, 증오와 폭력, 불공평과 억압이 있는 이 세상에서 생명과 구원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약하고 소외 당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하며, 그들과의 우정이 가져다 주는 엄청난 선물을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해 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라르쉬를 돕기 위해 찾아 오고 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신 지체 장애자들과 함께 나누는 경험을 한다. 이런 선택은 `상승'을 요구하는 현대의 사회적 가치관을 거스르는 것이다.

 

지성수 sydneytaxi@hanmail.net

 

이 글은 <당당뉴스>(나는 한국에 가면 주로 10여 명이 모이는 조그만 교회를 간다. 이런 교회의 특징은 사람이 많은 교회에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진지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에 가서 회중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큰 교회에 나가서 일방적으로 설교를 하는 것 보다 훨씬 은혜로움을 느낀다. 한 번은 울산 등대 교회 이종호 목사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목사님은 술술 이야기를 잘 하게 만드시네요. 지 목사님은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기술이 있는 것 같네요."라고 했다.

 

그건 맞다. 만나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법, 그것은 그냥 쉽게 배운 것이 아니고 힘들게 배운 것이다. 나에게 사람을 만나서 무장해제를 가르쳐준 사부는 바로 '장 바니에'라는 사람이다. 장 바니에는 전세계에 퍼져있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슈(노아의 방주)’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이다.

 

20년 전 호주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늦은 밤 시간인데 집 근처에 있는 가톨릭 여학교 주차장은 물론이고 학교 주변 골목까지 차가 빈틈없이 주차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가 조용하고 학교안도 너무 조용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는 체질이어서 살금살금 학교 안으로 잠입을 해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강당으로 침투했다. 살그머니 열린 문틈으로 정탐을 해보니 강당 안의 대부분의 전등은 꺼져 있고 원형 테이블 마다 초가 밝혀져 있었다. 그렇게 어두운 상태에서 사람들이 수십 개의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는데도 마치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무대의 연사가 있는 테이블에만 작은 등이 켜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어떤 늙은 남자가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분위기에 그만 기가 질려서 살금 살금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청중이 전부 백인들이기도 했고 영어로 하는 강연을 알아듣는 것도 효율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오면서 안내판을 보니 유명 인사의 유료 강연회였다. 그런데 나중에 놀란 것은 그 때 강연을 하던 그 사람이 오랜 동안 내가 책을 읽고서 큰 영향을 받았던 장 바니에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장 바니에가 우리 동네에 와서 강연을 할 줄이야! 당시는 내가 아직 호주에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현지 상황을 잘 몰라서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던 기회를 놓치고만 것이다.

 

다행히도 그 후에 장 바니에 인터뷰가 TV 방송에 나와서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용은 잘 못 알아 들었지만 나는 그의 인터뷰에서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더 큰 수확이었다. 그것은 보통의 인터뷰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니에는 자기가 인터뷰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진행자를 대상으로 상담가가 상담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TV 카메라 앞이 아니고 그들 앞에 다른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오직 대담자에게 100%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는 ! 바로 저런 바니에의 모습이 오늘의 그를 있게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에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그 모습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키게 했고 그 힘으로 그 많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리 중요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할 때라도 전적으로 집중이 되지 못하고 슬쩍 슬쩍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가 엄마에게 느끼듯 누가 나를 100% 믿고 신뢰를 보내준다는 인상을 주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장 바니에가 상대방이 누구이든지 그에 대하여 100% 신뢰를 보내는 모습! 아마 예수가 그랬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든지 예수를 만나면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끝까지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해당이 없었지만…….

 

장 바니에는 1928년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고, 1942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1950년 해군 장교로 제대했다. 그 후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토론토 대학에서 가르치다 프랑스의 정신요양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정신지체 장애인을 만나 자극을 받고 1964년에 프랑스의 트로즐리 브로이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두 사람과 함께 노아의 방주라는 뜻의 라르슈공동체를 세웠다. 가장 작고 가난하며 연약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을 발견한 그는 1968년 복음 말씀을 나누는 '신앙과 나눔'공동체, 1971년에는 장애인과 그의 부모와 친구들이 함께 만나는 믿음과 빛공동체를 만들었다. 오늘날 라르슈는 전 세계 28개국에 103개 공동체로 확산되었다. 1981년 라르슈 공동체 책임 자리를 물러선 그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상담·강의·피정 지도·공동체 봉사자 동반 등을 통해 더욱 나은 공동체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25년 간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그의 고백이 더 많은 소유와 더 높은 상승을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는다. 헨리 나우웬의 삶을 변화시켜 하버드에서 라르쉬로 가게 한 장 바니에. 그는 고통과 경쟁, 증오와 폭력, 불공평과 억압이 있는 이 세상에서 생명과 구원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약하고 소외 당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하며, 그들과의 우정이 가져다 주는 엄청난 선물을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해 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라르쉬를 돕기 위해 찾아 오고 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신 지체 장애자들과 함께 나누는 경험을 한다. 이런 선택은 `상승'을 요구하는 현대의 사회적 가치관을 거스르는 것이다.

 

지성수 sydneytaxi@hanmail.net


이 글은 <당당뉴스>(www.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



성인과 내가 같은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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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가 등나라의 문공이 아직 세자였을 때 들려준 말이다.


 "요 순같은 성인의 도나 우리 같은 범인의 도나 지키고 행해 나갈 도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한 본성을 살려서 그것에 따라 행하고 그것을 모든 일에 미루어 나가면 누구나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애제자였던 안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보람 있고자 하여 무슨 일을 이룩하려고 크게 힘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순임금같이 훌륭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나라의 현자인 공명의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문왕은 내 스승이다. 내가 그를 본받아 노력하면 그가 도달한 현성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주공의 교훈을 믿고 그대로 행하기에 노력하면 주공의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서경>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이란 것은 그것을 복용했을 때 눈이 캄캄하고 어지럽게 될 정도가 아니라면 그런 약은 복용해도 병이 낫지 않는다.'

 괴로움을 무릅쓰고 현성한 선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맹자>(차주환 역저, 명문당>에서


진정한 대장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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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대장부로 말할 것 같으면 넓은 천하를 자기 집으로 인식하면서 살고, 온 천하에 인정되는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에 통하는 대도를 당당히 실천하며, 자기의 뜻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될 경우에는 백성들과 함께 그와 같이 해나가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물러나서 자기 혼자서 그와 같이 해나가는 것이오. 


 뜻을 이뤄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해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뜻을 이루지 못해 빈천에 시달려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변하지 않고 어떠한 무서운 무력의 압박이 있다 해도 굴복시켜 내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라야 비로서 대장부라 할 수 있는 거요."


 <맹자>(차주환 역저, 명문당 펴냄>에서

위대한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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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행동은 우연과 행운이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철저한 전략과 천재성에서 나온다. 

 위대한 인물이 가장 위험한 시도를 할 때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카이사르, 한니발,구스타프 대왕과 그 밖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성공한다. 그들이 행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자신의 행운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위인들의 성공의 원동력을 연구해 보면 그들이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나폴레옹이 라스 카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기전 제자 뺨을 때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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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봉1.jpg» 열반 3일 전의 취봉 노스님


모든 기억이 사라졌을 때 누군가 "너는 누구인가?"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저승의 눈으로 이승을 바라봅시다.

 

송광사 취봉(1898~1983) 노스님 이야기입니다.

 

 피어난 꽃은 반드시 시들어서 떨어집니다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죽음은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 삶에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죽음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먼 곳의 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죽음을 당하게 되면 주민등록증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런 준비없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처럼 뜻밖에 찾아온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스스로의 죽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슬프고 원통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준비 없이 맞아야 하는 죽음 그 자체보다 더 슬프고 원통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삶의 순간들은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흐름입니다. 삶만을 보고 죽음은 눈감아 버리는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라 반쪽의 삶일 뿐이지요. 죽음에 깨어있는 삶은 집착이 없고 평화로우며 이웃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함께합니다.

 

호스피스 교육의 목적도 그렇지요. 이것은 임종하는 이를 돕는 일일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이를 통해 죽음을 배워서 스스로의 삶을 온전하게 하는 데 있어요. 죽음에 대해 깨어 있게 해 주는 임종자야말로 삶의 가장 큰 스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광사에 취봉 스님이라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송광사 주지를 네 번이나 맡으신 스님이신데 공과 사가 아주 분명하셨던 분이십니다.

 

절일로 나들이하시면 남은 차비는 반드시 절에 되돌려 주셨고 몸이 노쇠해 대중과 함께 공양을 못 드실 때도 대중 스님들의 상에 오르지 않은 음식은 잡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여든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앞서 지장전에서 몸소 당신의 사십구재를 지내셨습니다. 절에서는 이런 의식을 예수재(預修齋) 또는 역수재(逆修齋)라 하는데,

 

저승의 내가 이승의 나를 지켜 보고 생각하고 참회하는 의식입니다.

 

스님께서는 보시던 책은 도서관에 기증하시고 입으시던 낡은 옷가지들은 다 태우셨습니다. 몇 점 안 되는, 쓰시던 물건들도 모두 다른 이들에게 주셨습니다.

 

사십구재의 끝날인 단칠일(斷七日)을 마치시고는 절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모두 불러 모아 봉투를 돌렸습니다. 일하는 이들이 받지 않으려고 하자 노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취봉2.jpg» 송광사에서 취봉 스님 제사를 모시는 제자들

이 사람들아, 내가 죽으면 자네들이 고생해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스님께서는 열반하시기 앞서 제자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방안에 모인 제자들을 둘러보신 스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문을 여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제자로 삼아만 놓고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다. 세상을 떠나기 앞서 마지막으로 너희들에게 선물을 하나 주고 싶구나

 

하시고는 첫번째 제자를 불러 앞으로 나와 앉게 했습니다. 물끄러미 제자의 얼굴을 바라보시던 스님께서는 빈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철썩! 하고 사랑하는 제자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명초(名草)라는 풀이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풀인데 이 풀을 먹으면 스스로의 이름뿐만 아니라 온갖 기억들이 다 사라지고 만다고 하지요.

 

우리가 죽어 저승에 태어나도 이와 같을 것이니, 모든 기억이 말끔히 사라졌을 때 누군가 너는 누구인가?”고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바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죽고 또 죽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죽음에 깨어 있지 못할 때마다 취봉 노스님의 자비의 손길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석현장 스님(전남 보성 대원사)

요즘은 기도가 잘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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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jpg


요즘은 기도가 잘 안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마태 17,14~20)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발하시고 구마와 치유의 은사를 주셨습니다제자들은 파견나가 악령을 추방하고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문제가 생겼고 드디어는 몽유병 아이를 치유해 주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발단입니다.


스승님왜 저희가 마귀를 쫒아내지 못했을까요?”

믿음이 약한 탓이다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길 것이다.”


제자들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자괴감도 컸을 것입니다.

누구나 무엇을 청할 양으로 열심히 기도하는데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예수님 말씀을 따르자면 믿음이 약한 탓이라 하고요손톱만큼 한 진실한 믿음이 없어서라는 것이니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요즘 산위의 마을은 가족들이 줄어들고 농업은 힘들고 해서 아주 많이 어렵습니다그럴수록 마을을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필요한 것을 간청드리며 왜 힘들게 하시느냐고 기도드렸더니,


내가 너의 기도를 안 들어 준 게 뭐냐땅 사고 집 지으라고 필요한 돈 줬지매번 마음 좋은 가족들 보내줬지자연재배 농사 아주 잘되게 해주지아이들 정말 잘 크게 해줬지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들어 줬다네 할 일이나 열심히 하면 돼....”


기도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주신 은혜를 잘 활용하고 감사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자신의 능력 부족만 도드라 집니다기운이 나질 않습니다그래도 루가복음 18장 과부와 재판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하신 격려 말씀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1,000일 기도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마을 시작할 때 천일기도를 두 번 바쳤습니다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기도를 바칠 때는 찔찔 짤짤하게 하지 말고 최소한 한 달백 일천일이렇게 장기전으로 바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청원기도를 줄기차게 오래 바치면 나의 기도가 질적으로 정화됩니다.


사실 원하는 기도에는 자기 행복이 중심에 있는 이기주의적인 내용이 많습니다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싫어하십니다싫어하시는 기도를 계속 바치면 하느님도 짜증나십니다.


내 기도가 어떤 것인지 무엇을 청하는지사실 나도 알지 못하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머지않아 나는 죽게 되는 건 아닌지.....

기도를 오래 하다보면 내 기도의 여러 차원을 보게 되고 정화됩니다그래서 진실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달렸고 하느님의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기도입니다.


같은 내용의 다른 복음에서는 믿음이 약한 탓이다!” 대신에 기도하지 않고는 안되는 일이다!” 고 말씀하십니다믿음이 기도고 기도는 믿음에 기초합니다그 믿음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몸을 움직이게 할 때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은사가 베풀어집니다겨자씨 같은 살아있는 나의 믿음으로 인하여 하느님의 손이 산을 옮겨놓습니다. (2017.8.12.) *


도둑고양이들이 어스렁거려도 내버려 뒀더니 방에까지 들어 온다.

어흥나한텐 어림없어!!


내가 존귀하니 당신이 참 존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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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스님1-.jpg» 새정부에 의해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임명된 전남 장성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맡은 지선 스님


지난 3일 전남 장성 백암산 백양사를 찾았다. 작열하는 태양 빛이 천년 고찰마저 녹일 듯한 날씨였다. ‘더위를 어떻게 피할까.’ 백양사에서 선풍을 드날린 전 조계종 종정 서옹 스님(1912~2003)은 “추위와 더위를 어떻게 피하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에 가면 된다”고 했다. 제자가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추울 때는 그대를 춥게 하고, 더울 때는 그대를 덥게 하면 된다”고 했다.

 그 서옹 스님의 제자인 방장 지선 스님(71)이 객을 맞는다. 그 역시 이런 날씨에 에어컨도 켜지 않고 더위 속에 들어앉았다. 지선 스님은 방장직 말고 세속 소임을 더 맡았다. 6·10항쟁 30돌을 맞은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 임명한 것이다. 그는 30년 전 6·10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았다가 내란음모죄로 옥고를 치렀고, 1989년 조선대 학생 이철규씨 변사 사건 때 의문사 진상규명운동을 하다가 다시 광주교도소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세상이야 춥든 덥든 모르쇠로 일관하고 은둔해 수행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던 절 집안에서 그는 1980년대 소장파 승려들과 실천불교승가회를 조직해 독재에 맞서 싸웠다. 그 때문에 ‘지선’이라는 법명은 절 안보다 절 밖에서 더 유명해졌다. 그래서 그를 세속인 보듯 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해다.


가장 많이 찾는 곳이 폐사지인 까닭

 그는 운전도, 카메라 조작도 못 하는 옛날 촌 스님이다. 15살 어린 나이에 출가해 뼈빠지는 절 집안 노동으로 잔뼈가 굵고 ‘중물’이 뼛속까지 스민 천상 스님이다. 그는 휴대전화조차 없는 ‘천연기념물’이다.

 지선 스님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는 처사에게 물어보니 “스님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폐사지”라고 한다. 안거(봄여름 90일씩 참선정진 기간)만 끝나면 전국의 폐사터를 찾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적막한 산속에 기와 몇 조각만 남아 있는, 옛 스님들의 터에 묵연히 앉아 한나절씩 홀로 있다 오곤 한다는 것이다. 올 들어서도 그렇게 강원도 영월 새달사지와 강릉 굴산사지, 충북 충주 청룡사지, 전남 광양 옥룡사지를 다녀왔다고 한다. ‘왜 그렇게 폐사지만 찾아다니는 것 같으냐’는 물음에 처사는 “요새 스님들이 보기 싫고, 옛날 스님들이 그리운 모양이지요”란다. 세속인인지 출가자인지 중도 중 같지 않은 요새 중들을 마음에 들어 할 스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선 스님은 절 집안의 일을 외부에 떠벌리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혁도 필요하지만,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부도 서품을 받을 때 순명을 다짐하고, 승려들도 출가해 첫 경전인 <초발심자경문>에서 ‘내 집안의 추한 일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것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외부의 불의와 투쟁해온 실천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보수적’인 모습에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스님이 어떻게 세상 일에 뛰어들었을까’란 물음에 처사는 “오죽했으면 스님 같은 분이 나섰겠느냐”고 되묻는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양심에 찔려서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나섰을 거란 얘기다.


염화실-.jpg» 백암산을 뒤로한 백양사 염화실


급료 안 받는 무료봉사 당연한 일

 지선 스님은 전날 출타했다가 정읍역에서 내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았다고 했다.

 “택시 기사나 힌츠페터 기자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우러나는 자연스런 행동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당연한 일’이 이처럼 감동을 주다니!”

 그는 ‘당연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슬퍼했다. ‘비행기 위에서 밤에 내려다보면 종교적 초월처럼 보석같이 빛나는데, 정작 내려와 보면 온갖 자기주장과 이해관계만이 난무한 아수라장’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당연히 받아야 할 급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세속에선 있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무료봉사’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이제 과거를 기념하는 수준을 넘어서 서로를 사람답게 대접하는 민주시민 교육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최근 독일 불자 초청으로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15일간 머물렀다.

 “시민교육이 잘돼 있고, 중요 현안을 늘 합의제로 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시민교육은 주입식이 아니다. 그는 “일베들이 ‘너 민주화시켜 버리겠다’고 말하듯 ‘민주화’라는 말조차도 오남용이 되는 시대이니 민주화니, 시민이니, 교육이니 말도 내세울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신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뇌하고 대화하며 자기다움, 인간다움, 양심을 찾도록 도와주자”는 것이다.

 그는 보편주의나 글로벌이라는 명분으로 ‘자기다움’을 무시하며 민족마저 고리타분시하는 시각을 경계한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한다. 자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병아리도 감별사가 있고, 잡초에도 뿌리가 있다. 그런데 인간이 어찌 자기 뿌리를 부정해버릴 수 있겠는가. 자기의 근본을 알고 자긍심을 갖는 것이 자주고 민주다. 그래서 남의 근본도 존중해 주는 것이 평화다.”


내가 존귀하니 당신도 참 존귀

 그런데도 약소한 개인이나 민족을 소멸시키려던 나치즘이나 파시즘, 시오니즘, 일본의 천왕주의의 논리에 은연중 동화돼 자기다움을 찾아야 할 약소국의 노력을 오히려 국수주의라고 폄하하는 걸 ‘전도몽상’이라고 염려했다. 그는 “남북 문제도 강대국들처럼 힘으로 제압하거나 흡수한다는 것의 한계가 드러났으니 이제 상호 공존으로 해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했다.

 “법도 약자의 안위를 돌봐주기는커녕 강자의 입장에서만 적용하면 악법이다. 남북관계도 미국 같은 강자의 입장대로 억압하려만 해서는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지선 스님의 시선은 밖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이른바 ‘진보’ 자신부터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악인과 싸우다 닮았다고 악이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상대방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일 줄도 알고 인내심을 갖고 설득할 줄도 아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운동이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게 ‘운동’이다.”

 예전 체중보다 20여킬로그램이나 줄어든 50킬로그램대 가벼운 체구의 스님이 고개 숙여 합장하며 배웅한다. 그의 겸허한 두 손에서 그 마음이 전해진다.

 ‘내가 존귀하니, 당신도 참 존귀합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당신 안의 쪽빛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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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가 아프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면서 자라나지 못하듯이, 모든 소중하고 귀한 것들은 아픔과 기쁨을 함께 어우르면서 생겨납니다. 진흙탕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스스로는 한방울의 흙탕물에도 젖지 않는 연꽃은 바로 그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연꽃보다 우리의 일상에 더 가까이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블루진스 - 청바지의 푸른 색입니다.

 

4년마다 중부독일의 카셀이라는 도시에서는 세계현대미술박람회 도쿠멘타’’가 열리는데, 올해의 도쿠멘타에서, 아부바카 포파나(Aboubakar Fofana)라는 아프리카 말리 출신의 작가가 쪽물을 들이는 과정자체를 예술로 보여주는 것이 보도됐습니다. 오래 전 쪽물에 감동했던 제 마음이 되살아나며 묘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블루진스는 온세상 구석구석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입는 옷이 되었는데, 원래 그 불루진의 남색이 바로 쪽물이지요. 서양에서는 인디고라고 불리는 의 원산지는 이름에서 보듯 인도인데, 쪽의 꽃은 주로 노란 색이나 분황색입니다. 콩을 보면서 간장을 볼 수 없듯이 쪽이라는 식물에는 파란 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쪽물을 얻어내는 과정은 기적같습니다.

 

100여년 전 남색을 화학염료로 얻어내기 전까지는, 쪽을 커다란 나무나 질그릇 통에 담고 사람의 오줌을 뿌려 며칠동안이나 썩혔다고(발효) 합니다. 얼마나 냄새가 진동했겠어요. 나뭇가지나 해초를 태운 석회도 꼭 넣어야 한답니다. 이렇게 쪽이 썩은 물을 걸러 하얀 천이나 실을 담그는데, 쪽물은 아직 무색입니다. 이제 그 천을 꺼내 여러번 헹군 후 햇빛에 널어 바람을 쐬이면’, 그때서야 바로 우리가 아는 푸른 색이 드러납니다’! 노란 꽃을 피우는 쪽이 보색인 파란 색을 숨기고 있었던겁니다


청바지의 빛나는 푸른 색이 되기까지는 여러번 담그기와 바람쐬기를(산화) 반복해야 합니다.이렇게 공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쪽이라는 식물이 유럽에서는 인도에서 만큼 잘 자라주질 않으니, 파란 색은 귀하고 비쌀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림에 쓰이는 물감도 파란색은 붉은 색보다 귀하고 비싸서, 파란색은 귀한 사람, 즉 성모 마리아나 예수의 옷자락 정도에나 쓰였지요. 부족함은 그런데 창조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독일의 바이어르씨 집안의 아들 아돌프도 이 귀한 파란 색에 깊이 매료되었었는지 13살 때 부터 25년간 이 쪽물의 화학적변화에 몰두했더랍니다. 25년 후 그가 화학적 인디고 염료를 만드는데 드디어 성공하고 (1870), 레비 슈트라우스의 블루진스는 1873년에 탄생합니다. 하지만 완벽한 화학염료로 세계시장에 자리잡을 때까지는 30여년이 더 걸립니다. 그러니 쪽물이 오늘날의 불루진의 한결같은 색채를 줄 수 있는 염료가 되기까지는 고대로 부터 몇 천 년이 걸린겁니다.

 

오줌과 함께 썩어가는 쪽의 악취와 그것을 견디어가는 기다림과, 바람과 햇빛이 주는 자연의 도움이 없이는 쪽물의 파란 색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인간의 슬기는 바로 이 조화를 알아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쌓여있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안에 빛나는 남색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졸업장보다 더 소중한 동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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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때 혁명가는 준비운동 한 거다” “살림과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남자는 구원받기 어렵다” 함께 사는 친구들과 한동안 되뇌던 말이다. 결혼임신출산육아 과정은 청년 때 직면한 과제와 전혀 다르고 복잡했던 거다. 


 스물세 살 때, ‘밝은누리’ 운동을 시작했다. 80년대 한국사회가 처한 아픔과 희망에 함께 하고싶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친일매국과 독재라는 역사의 질병이 가시지 않았기에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요구됐다. 혁명가가 지닌 현실 비판의식과 수도자가 지닌 영성을 겸비하고싶었다. 


 싸워야 할 대상은 우리 안팎에 동시에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소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며 외치고, 기도했다. 졸업장이라는 상품 보다 우리에겐 동지가 더 절실했다. 서로 지키고 추동하고 돌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우리는 공사판, 슈퍼마켓, 주유소에서 일하며 조금씩 돈을 모아 임대보증금을 마련했다. 나는 신문배달을 했다. 노동의 거룩함과 노동이 처한 어려움을 동시에 배우는 시간이었다.


 조그만 돈을 모아 작은 방 하나를 얻어 함께 공부하며 살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정과 신념으로 뭉쳐 있었지만, 결혼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며 예기치 않은 위기에 직면했다. 청년 때 신념과 결단, 청년운동에서 얻은 많은 열매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았다. 함께 살다보니, 한 사람이 하는 결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늘 배우자와 자녀들 삶이 얽혔다. 다루는 돈 규모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친정, 시댁, 처가 새 가족관계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다. 어려움을 투명하게 얘기하기 어려웠다. 어디까지 자기 마음이고, 어떤 게 핑계인지 조차 모호했다.


 자본 학벌 부동산 분단 등 시대우상들은 먹고, 자고, 입고, 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교육하고, 소비하는 일상생활에서 집요하게 작동했다. 


 대안을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대안은 결국 ‘더불어 사는 삶’을 토대로 이뤄진다. 생각은 진보와 개혁이나 실제 삶은 시대우상을 따라 사는 기만을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이제 <밝은누리> 청년들은 서로 힘을 모아 방을 얻고, 마을을 토대로 다양한 과제를 풀어간다. 조작된 욕망과 조장된 불안에 맞설 지혜를 함께 공부하며 동지가 된다. 단순 소박한 삶을 배우고, 결혼식과 혼수자금에 도사린 허상에서 해방된다. 청년실업은 마을 살림 돕고 배우며, 새 꿈을 꾸는 시간이 된다. 마을 이모삼촌 되고 때론 선생님 되어 생명을 함께 키우며, 결혼 후 살아갈 지혜들을 미리 배운다.       


 마을밥상과 찻집, 문화예술 등 다양한 마을사업이 청년창업 운동과 맞물려 일어난다. 청년은 활기를 주고, 마을은 청년을 주눅 들게 하는 허상을 제거해준다. 비판을 넘어, 대안을 현실화 하는 지혜가 ‘더불어 사는 삶, 마을’에 있다.


예술을 창조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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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표현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결국 창조 작업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걷고 갇혀 있는 무언가를 풀어주는 것이다.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에코의서재 펴냄)에서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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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다


                     양관 선사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하는 바 있으면 만사가 궁하다

 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

 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

 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

예수께서 고독하게 머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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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를 위한 고독


 마가복음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는 낮이 아니라 `아주 이른 새벽'에 홀로 고요히 기도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과만 함께 있는 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고독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고독만을 원하셨다면 예수는 광야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지 않으셨겠지요.


 예수에게 새벽의 고독은 낮의 공동체를 위한 예비였습니다. 고독을 통해 길러진 내적 힘으로 구원을 갈망하며 찾아온 사람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치유하며 사랑하셨습니다. 만약 그 이른 새벽에도 공동체의 일이 있었다면 예수는 당신의 고독을 기꺼이 포기하셨을 겁니다. 고독의 목적은 공동체입니다.


 묵상을 위한 물음

 이 시간 내가 경험하는 고독이 나의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2017 한국기독교 부활절맞이 묵상집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한국기독교협의회, 한국YMCA전국연맹, 동연 펴냄)에서


종교도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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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소외다. 소외란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 세계의 모든 것이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물건들, 사회 제도나 문화 현상들, 자연계, 그리고 종교 등 마땅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인간을 위한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의미를 상실하고 나와 무관하고 무의미한 물체 덩어리처럼 느껴지는 사물화 현상을 가리킨다. 인간 주체와 끊임없이 교섭하고 교감하면서 살아 움직여야 할 대상들이 경직된 죽은 물체처럼 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간 자신도 대상계에 관여하면서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게 되어 정상적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자기소외를 겪게 된다. 대상계가 의미를 상실한 채 아무 말 없이 거대한 물체로 변해서 우리를 가만히 지켜본다. 의미가 없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우리도 그냥 무관심하게 쳐다 볼 뿐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우리 주위의 사람들도 타자처럼 느껴진다.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타자화 되고 비인간화 된 인간관계를 나와 그대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표현했다. 인간은 이제 각자 자기 자신에 갇혀 고립된 삶을 사는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더 이상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무상이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악이 아니라 바로 삶과 존재의 무의미성이다.


인간소외의 가장 대표적인 삶의 영역은 의외로 종교의 세계다. 우리는 종교에 심취한 사람, 종교가 사회생활의 전부가 되다시피 한 사람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 신앙심이 깊다는 것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종교가 삶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사람이 종교의 노예가 되어 종교를 위해 살다시피 하는 데 있다. 종교가 한 사람의 이성적 사고나 비판적 의식을 철저히 마비시켜서 그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문화생활을 못하게 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사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종교에 의해 철저히 지배받고 조정 받는 타율적 인간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망친 사람도 많지만, 우리사회에는 이렇게 종교에 의해 소외되고 비인간화된 사람도 허다하다. 특히 한 종교 지도자에 의해 몸과 영혼이 완전히 지배를 받은 사람이 지금 감옥신세를 지고 있는 유명한 사람 말고도 허다하다. 종교의 노예가 된 사람들,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순명의 이름으로 복종하는 사람들, 마치 무슨 강박증에라도 걸린 듯 똑 같은 종교 의례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리를 아무런 생각 없이 맹신하는 것을 신앙인양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신앙은 인간의 말을 신의 말씀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말씀에 비추어 인간의 온갖 편견과 거짓을 식별하고 고발하는 데 있다. 경전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외우거나 심오한 교리를 뜻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 혹은 그 너머로 들리는 영적 메시지를 들으려는 것이 신앙이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종교의 진정한 정신이다. 종교의 사명은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의 소음과, 편견을 조장하는 인간의 언어를 돌파해서 신의 음성을 듣고 세상과 사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 이전의 삶의 방식이 확 바뀌고, 나아가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이런 힘이 없는 종교는 더 이상 존재 가치나 이유가 없는 종교일 것이다.


종교에 의한 인간소외를 막으려면 우선 종교라는 것이 신이 제정해준 절대적이고 성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일단 접어야 한다. 종교도 세상의 여느 사회 제도나 문화 현상처럼 우리 인간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경전이 제아무리 일반인이 이해 못할 성스러운 고대 언어로 쓰여 있다 해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사용한 언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쓰여 있다. 신이 마치 우리 인간처럼 입이 있어서 특정인에게 불러 쓰기를 시킨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신성한 경전이라 해도, 학자들은 그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역사적 조건 하에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신앙인들도 이 사실을 알아야 맹목적인 경전 숭배를 벗어나 경전의 우연적인 요소들과 부차적인 것들을 넘어 그 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전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 여타 사물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상황에서 쓰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무조건 믿어야 된다는 묻지 마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런 사람의 말을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 좋다. 가령 성경이 하느님의 계시나 말씀을 담고 있다 해도, 이 계시가 우리를 위한 말씀이 되려면 여전히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어야만 한다. 신이 마치 인간처럼 입이 있어서 한 말을 누군가가 듣고서 고대로 받아쓰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린아이라면 몰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에 의한 인간의 비인간화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전을 신처럼 절대화하거나 숭배하는 문자주의 신앙에서 온다. 좀 더 본질적으로,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적 실재 자체가 인간소외를 조장하기 쉽다. 가령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의 세계를 엄격히 구별하는 유일신신앙의 경우, 인간의 지성과 이성, 건전한 상식과 판단능력, 자유와 창의성을 전지전능한 신에게 모두 돌리는 한편, 현세에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몽땅 내세나 천상의 세계를 위해 양도해버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소외를 조장하기 쉽다. 그런가 하면, 만물과 인간의 내면 깊이에 현존하는 신의 내재성을 강조하며 신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를 강조하는 동양종교들은 참나를 실현하기 위해 영적 수행을 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억압하는 지나친 금욕주의로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종교의 세계가 이렇게 주체와 객체의 분리나 대립, 양자의 상호성의 회복과 화해의 시각으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영성은 이러한 주객의 구도 자체를 넘어서는 절대주체와 절대객체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대주체와 절대객체를 한 번도 접해본 일이 없는 사람은 결코 종교의 진수나 영성의 세계를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종교도 이 세계에 발을 붙이고 존재하는 한,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의 지배와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도 인간이 산출한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이며, 여타 제도나 문물처럼 객체로 존재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여타 제도나 문물은 오히려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변해가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생겨난 것들은 성스러운 전통으로 간주되면서 쉽게 변하지 않고 경직화된다. 절대화되고 사물화 되기 쉽고 인간소외를 야기하기 쉽다. 종교에 의한 인간소외는 종교의 불가시적인 측면보다는, 본래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들기에 인간적 의미를 담고 있는 종교의 가시적인 요소들 제도, 경전, 교리, 성직, 건물, 각종 의례나 상징물 등 을 초월적이고 신비스러운 권위를 지닌 것으로 간주하는 종교적 우상숭배에 기인한다. 종교적 우상숭배는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 우상숭배보다 더 위험하다. 성스러운 권위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간파하기 어렵고 비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간이 산출한 객체들임에도, 일단 종교의 탈을 쓰면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것으로 절대화 되고 사물화 됨에 따라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기제로 둔갑하기 쉬운 것이다.


대상계에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은 종교만이 아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비합리적 사회제도나 문화적 관습이나 관행들, 일반인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정치 형태나 정치인들의 작태, 무엇보다도 누구도 벗어날 길 없이 우리 모두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질서가 인간소외의 주범들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돈의 마력과 유혹, 자본의 횡포, 거대한 생산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온종일 단조로운 일을 기계처럼 반복해야 하는 임금노동, 상상조차 못할 인격 모독을 허용하는 갑을 관계들, 이런 것들이 모두 인간을 비인간화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괴물이 현실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고용 없는 성장의 딜레마에 빠져 탈출구를 못 찾고 있는 세계경제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종교든 예술이든, 친구든 친족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관계 어디나 파고드는 돈의 힘과 경제논리,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이 인간소외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상업화된 문화산업과 각종 이벤트, ‘힐링은 물론이고 각종 명상과 영성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골행이나 귀촌을 감행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산에 들어가서 혼자 살아도 별 수 없을 것 같고, 별 수 있다 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된다. 그나마 크든 작든 자기가 하는 일에서 돈벌이 이상의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는 행운아에 속한다.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 저녁이 있는 삶을 외치지만 구호에 그칠 뿐, 민초들의 고달픈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인간소외의 문제를 의식하는지 고객감동의 경영, 감성 마케팅, 사람 냄새가 나는 제품, 진정성이 느껴지는 서비스 등 구호를 외치고 각종 문화강좌나 인문학강좌를 통해 고객을 끈다.


이 글이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비관적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동기야 어떻든, 위와 같은 노력들이 그나마 우리 삶에 작은 활력소가 되고 우리 사회를 조금씩이라도 밝게 만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과연 어떤 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인간으로서 의식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소외가 소외인 줄을 알아야 점점 더 비인간화 되고 있는 현대문명에 돌파구는 아니라도 작은 구멍 하나 틈새 하나라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냥 남들 하는 대로 적당히 따라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체념해버리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다. 영원한 국외자로, 방관자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며, 아니면 고작해야 혼자 잘났다고 착각하면서 자기 모습은 생각지도 않고 무슨 일에든 반대와 비판만 하는 냉소주의자다. 대체로 지성인을 자처하는 자들에게서 흔히 보는 모습이다.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그나마 자본의 논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야 할 우리 삶의 성역이 있다면, 나는 그래도 교육과 종교를 꼽고 싶다.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려는 것이 교육과 종교의 근본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근본에서 흔들리고 무너지면 정말 우리 사회, 우리 문화는 희망이 없을 것 같다. 무너진 지 이미 오래라고, 그래서 이제는 구제불능이라고 항변하는 소리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2000여 년 전에 이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고 위대한 인간해방의 선언을 하고 치열하게 운동을 벌이다가 비명에 간 한 청년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사는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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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잘 맞춰야 합니다. 무엇을 이루고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하는데 초점을 맞추면 성공을 해도 중요한 사람이 되도 큰 일을 해도 오래가는 참된 행복은 찾기 어렵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자비심과 깨어있음에 초점을 맞추면 하루하루가 달라지며 점점 행복해집니다.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누구 되지 않아도 큰 일을 하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사는 목적은 큰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순간순간 깨어있고 자비심을 유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밤과 낮으로 찰나찰나 자비심과 깨어있음을 신중히 보호하세요. 매순간 여기에 마음을 두세요.

We should have our priorities straight. If our priority is to achieve something, to become someone, or do something; then we may very well become successful or become an important person. However this will not bring us true and lasting happiness. 

If our priority is living day to day, moment to moment, in awareness and compassion; then things will change day by day. Then it won't matter if we achieve something or become someone. We will become more and more happy, which is what we are truly looking for. 


The purpose of life is not to achieve something grand, it is happiness which comes through living in awareness and compassion. This should be our perpetual intent, day and night.


감정 조절 못하면 일 그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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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부정적인 감정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GettyImages-533780315.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013pixel, 세로 3415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4년 08월 14일, 오후 2:11

 

교통사고가 가장 잘 나는 때가 언제일까요?

1. 곗돈 타러 나갈 때

2. 애인 만나러 나갈 때

3. 선물 받으러 나갈 때

4. 기분 전환하러 나갈 때


답은 4번입니다. 마크 W.베이커(Mark W. Baker)라는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우연하게 사고가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사고는 기분 전환하러 나갈 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나간다는 것은 이미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대상에 눈이 고정되어, 주변 상황들을 돌아볼 여지가 없어 사고를 내게 되는 것이지요.

몇 년 전, 자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지방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 남편 이야기를 하다가 점점 화를 내며 흥분을 하는 것입니다. 운전 속도도 덩달아 빨라졌습니다. 보다 못해 말했습니다.


천천히 가세요.

자매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지금 천천히 가고 있잖아요.

그런데 저 앞에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줄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차들이 안 가나 봐요. 천천히 가세요.

그래도 자매는 남편에 대한 불평을 계속하면서 여전히 차를 몰았습니다.

, , !

급기야 앞에 서 있는 차를 들이받고 말았지요. 나중에 말하기를, 차가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기분을 전환하러 나간 부부가 말다툼을 하다가 부인이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 목숨을 잃은 경우도 보았습니다. 제가 그 부인의 장례 미사를 치루었지요. 그 뒤로는 누가 기분 전환하러 나가자고 하면 절대로 같이 안 나갑니다.

 

자신의 기분을 잘 조절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더욱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기 어렵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결국 일을 그르치고 나쁜 결과를 초래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건강한 부분까지 오염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기분이 들 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다른 건강한 감정이 오염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교정하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배운 것을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 습관적인 활동으로 만드는 데는 63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긴 인생에서 두 달이란 긴 시간은 아닙니다. 잠깐의 투자로 평생을 가는 좋은 습관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습관이 성공적인 인생을 만듭니다.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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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아들을 용서하기까지, 노교수의 인생 여정

서광선 명예교수 1945년 8월 15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글은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8월 7일 서울 수유동 마을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열린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추모 모임'에 초대되어 이야기한 내용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원고 전문을 싣습니다. 


1931년 4월 15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다.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88선언’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복음과상황 이범진


만주 산언덕에서 맞이한 8.15


서광선교수.jpg» 서광선 목사 겸 이화여대 명예교수


저는 1945년 8월 15일, 8.15 날 저 만주의 한 도시 산언덕에서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만주에 아버지가 식구들을 끌고 망명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압록강 근처에서 교회 전도사로 시골 교회를 개척하는 고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 교회목사님들과 전도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전도사는 왜 일본 귀신들 앞에 가 절을 해야 하나, 우상을 섬길 수 없다고 반항했습니다. 경찰에 끌려가 매도 맞고 별아 별 수모를 당하다가,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항일 전도사였습니다. 뼛속 까지 일본 제국주의를 증오하는 애국자 전도사였습니다.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의 할아버지는 고종 밑에서 무과 과거에 합격한 조선 군대의 대장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1905년 을사늑약을 밀어붙이고는 조선 군대를 강제 해산했습니다. 이에 반발하고 반항한 조선 군대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함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로는 우리 할아버지는 의병대장이라 말 타고 칼을 휘두르며 일본 군인들과 싸웠는데, 단칼에 일본군인 목 다섯을 쳐서 떨어뜨리는 맹장이었다고 자랑하시곤 했습니다. “단칼에 어떻게 일본군인 목 다섯을 벨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면서도 한 번도 입 밖에 내 놓고 질문하지 못하고 그냥 와아 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지는 결국 기관총을 쏴 대는 일본 침략군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고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할머니는 나라 잃은 백성, 의병대장의 부인으로 일본 밑에서 살아갈 이유도 없고 살아갈 길도 없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자신도 자결했습니다. 그러나 두 살배기 갓난아이, 우리 아버지는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서 살려 두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된 우리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이 거두어서 저 평안북도 두메산골에 있는 고모를 찾아 맡겨 주었습니다.


우리 아기 아버지는 고모 슬하에서 준수한 소년으로 자라 산골짜기에서 염소치기가 되었습니다. 어엿한 소년 염소치기가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쪽 복음이라고 하는 성경 책, 가령, 마태복음만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고 나누어 주면서 전도를 하는 판서원이라고 하는 전도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주머니가 주는 성경책으로 한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소개하는 강계 고을에 있는 미국 선교사 감부열 목사님이 교장으로 있는 영실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천애 고아 우리 아버지는 교장선생님댁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평양 신학교에 진학합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시골 마을에 개척교회 전도사 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사참배 반대한다고 한국에서 쫓겨나다시피 만주로 떠났던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


만주에서 한국 아이들을 위한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 가야 하는데 만주의 우리 동네에는 한국 중학교가 없었습니다. 한국에 유학 보내기도 형편이 안 되고 해서, 아버지는 우리가 살던 공장지대에 와 있는 일본 사람들을 위해서 세운 일본 중학교에 진학하게 했습니다. 항일 운동하시는 아버지가 왜 저더러 일본 중학교에 가라고 하시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하시는 말씀 “너는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 해. 너 성경책에서 모세 이야기 읽었지? 모세가 원수의 나라 애급 궁전에서 자라면서 애급 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해서, 애급 말도 배우고 애급 정치도 배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해방자가 됐지 않아? 너는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 해.”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어서 한국 학생이 들어가기에 어려운 일본 중학교에 합격을 했던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무더운 여름 방학인데도 우리 중학생들은 산에 올라가 구덩이를 파고 있었습니다. 8월 7일엔가 소련 군대가 만주로 쳐 내려온다고 탱크를 몰고 내려오다가 우리가 판 구덩이에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도 그 무더위에 땀을 흘리며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12시 5분 전에 일본인 담임선생이 학생들을 불러 모아 차려 자세를 시키고는 라디오를 틀어 놓고 경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2시 시보가  울리자, 일천황의 음성이 흘러나왔습니다. 목이 쉰 것 같은 늙은이 목소리로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했고 전쟁이 끝났다고 하는 말이 들렸습니다. 일본 학생들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눈물을 닦으면서, “이제 집에 가서 짐을 싸 들고 고향 땅 일본으로 돌아가자. 사요나라…….”하며 소리 내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물은커녕, 만세를 부르고 싶은데 그랬다간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 것 같은 공포심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선생님의 사요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걸음아 날 살려라, 헐레벌떡 산언덕을 뛰어 내려왔습니다. 집 앞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시며, “대한독립 만세.”소리 지르며 저를 환영했습니다. 어머니와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를 얼싸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만세를 몇 번이고 소리 질렀습니다.


분단 된 북한 땅으로


우리는 급하게 짐을 싸서 메고 이고 손에 들고 하면서 한국으로 오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양에 도착하자 기차에서 모두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우리 고향 땅 강계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차를 그대로 타고 있으면, 서울로 아니면 부산이나 목포로 그냥 타고 갈 수 있는데 내리라는 것입니다. 강계로 가서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는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백두산이 보이는 시골 동네에서 목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강계 중학교에 편입학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는 동안에 한반도가 38선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북에는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남에는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평양에 김일성이라고 하는 공산당 장군이 들어 와서 공산주의 나라를 세운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공산당 경찰들이 아버지를 보안서라는 경찰서에 끌고 가서 반공 설교를 하면서, 이제 미국이 우리분단된 조선을 통일 시킬 것이라는 설교를 그만하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항일 목사 아버지는 졸지에 반공 목사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설교하실 때 만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우리 한국 민족을 해방시켜 주셨으니, 이제 무신론 공산주의 독재로부터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큰 소리로 자신 있게 설교하셨습니다. 공산당 보안서 경찰은 거의 매 주일 목사 아버지를 데려다가 협박을 하고 야단을 치면서 우리 목사 아버지를 친미 반공 목사로 찍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땅을 뺏기고 야반도주해서 월남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 아버지를 찾아와 어서 짐 싸 들고 야반도주해서 북한을 빠져나가라고 강권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어떻게 어린 양과 같은 교인들을 이런 공산당 독재 치하에 버리고 가느냐 못 간다, 우겼습니다. 결국 강권에 못 이겨 우리 식구는 야심한 밤에 평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우선 평양에 가서 있다가 기회가 되는대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월남한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평양,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시작하자 공산당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졌습니다. 목사 아버지의 반공 설교는 유명해졌습니다. 김일성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는 강양욱 목사가 기독교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고 목사들이 공산당 김일성 정권에 복종하고 협조하는 친공 교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불려가서 연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공산 당국의 미움과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6.25 발발


1950년 6월 25일은 2017년 올해처럼, 일요일 주일날이었습니다. 그날 우리 목사 아버지의 설교는 정말 신나는 설교였습니다. 김일성이 뭘 모르고 전쟁을 시작해서 38선 넘어 남쪽으로 진군한다고 소리 지르지만, 이제 곧 국군과 미군이 반격해서 쫓겨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분단된 조국이 한 나라로 통일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대략 그런 설교였습니다. 교인들과 나는 너무도 신나서 이제 곧 통일이 될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은 인민군이 승승장구, 괴뢰 이승만 군대를 밀어붙이고, 이제 곧 부산까지 밀고 내려간다고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흉흉한 소문은 제가 다니던 평양신학교 교장 선생님과 다른 유명한 목사님들이 납치되거나 북한 군인들에게 어딘지 모르게 끌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사 아버지는 내가 군대 갈 나이 19살이라고 교회 목사관 마루를 뜯고 그 밑에 땅을 파고, 나를 그 속에 밀어 넣고 숨어 있으라고 하고는 마루를 덮어 버렸습니다. 낮에는 하루 종일 흙구덩이 안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다가, 밤늦게 기어 나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다시 흙구덩이 안에 들어 가 자고…….그렇게 지냈습니다.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평양 시내를 폭격하고 공장지대와 군부대가 있는 데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목사 아버지는 교인들 심방 나갔다가, 보안서원들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가셨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저의 동생들은 모두 시골에 있는 친척 집에 피난을 가고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저와 어머니만 목사관에 남아 있었습니다.


“너는 환자야!”


8월이 되었습니다. 그해 평양은 너무 더웠습니다. 우리 집 마루 밑 땅 구멍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공습이 지나간 틈을 타서 맑은 공기라도 마시려고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동네 구석진 데 산책 나왔다가, 그만 보안서원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기다리고 있던 트럭에 올라탔습니다. 저 말고도 숨어 있다가 붙들려 나온 동네 청년들이 트럭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 다리를 건너서 어느 고등학교로 끌려갔습니다. 신체검사장이라고 하는데 신체검사 할 청년들이 서 있는 줄이 꽤 길었습니다.


내 차례가 돼서 헌병의 안내로 군의관이 있는 작은 방에 들어섰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50대로 보이는 군의관이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너 어디 아프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사실대로 “아닙니다. 아픈 데 없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대답을 해 놓고는 후회했습니다. ‘아니, 아프다고 해야, 신체검사에 떨어져서 군대 안 가게 되는데…….’ 그런데 그 군의관은 더 큰 소리로 “넌 기관지염으로, 군대 갈 수 없어. 여기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써 줄 테니, 어서 여기를 나가 집으로 가.”하면서 불합격증에 뭔가 쓰고 큰 도장을 꽝 꽝 하고 찍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누군데, 우리 교회에 나오는 의사 선생님인가 생각해 봐도 난생처음 보는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들고 그 방을 다시 나왔습니다. 신체검사를 기다리는 길고 긴 줄을 따라 반대쪽으로 걸어 나오는 데, 누가 뒤에서 “형”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다보니 저의 바로 밑 동생입니다. 17살 겨우 된 남동생이 나를 보고 “형 어디로 가는 거야?” 신체검사 불합격증을 보여 주면서, 집으로 간다는 말을 힘없이 했습니다. 동생은 내 두 손을 잡고 맥없이 “그래 형은 군대 가면 안 되지, 내가 대신 갔다 올게…….” 우리 형제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올해까지 67년 동안 우리는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시 대동강을 건너 평양 남쪽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오면서 “왜 그 난생처음 보는 면색 없는 북한의 군의관이 나를 살려 주었을까?”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이건 하나님이 날 살려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나를 살려 주셨을까? 뭐 하라고?” 이 질문은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의 평생의 질문이었습니다. 어떻든 여러분, 저는 그렇게 살아남아서 오늘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1950년 9월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


나는 마루 밑에 숨어 있으면서도 전쟁 소식은 모두 다 듣고 있었습니다. 늦은 9월의 어느 날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고, 서울로 진격해서 서울을 탈환했다는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10월 초에는 UN 군과 국군이 평양에 입성했다는 기쁜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평양 시민들은 엉성하게 그린 태극기와 그리기 어려운 미국 성조기를 손수 그린 깃발을 들고나와서 군인들이 평양에 들어오는 것을 소리 높이 환영했습니다. 815 해방되던 날보다 더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곧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평양 정부 청사 광장에 나타나서 평양 해방을 선포하고 통일이 다 된 것처럼 환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일이 있었습니다. 행방불명이 된 목사 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평양 대동강 남쪽 산언덕에서부터 시작해서 강가와 경찰서 감옥을 찾아다니며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기진맥진하고 있던 차에 교회 장로님들이 목사 아버지를 대동강 강가에서 시체로 찾았다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목사 아버지는 다른 네 분의 목사님들과 한 밧줄로 묶여서 총살당한 체 누워있었습니다. 아버지 시체를 부둥켜안고 인민군 따발총 총알이 박혀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버지, 이 원수를 어떻게 같아야 합니까?” 하면서.


아버지를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뒷산 언덕에 묻어 드리고, 우리는 중공군이 치고 내려온다는 소식과 함께 후퇴하는 미군과 국군들을 따라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나는 부산에서 대한민국 해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해군 소년 통신병으로 훈련을 받고, 얼마 있다가 미국 해군에서 훈련을 받을 기회를 얻어 1953년 미국 해군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미 해군 친구의 덕분에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 초였습니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다시 배우고 기도생활을 하면서 당시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 뛰어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적 인권 운동이 어떤 것인지 신학생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나치에 저항해서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했다가 붙들려 감옥에서 쓴 옥중서한들을 읽으면서, 우리 목사 아버지의 순교정신, 항일저항운동, 그리고 공산 독재에 대한 저항, 그것이 신앙운동만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의 신앙과 행동을 곰곰이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의 의미, 실제 행동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운동, 반독재 운동


반공 순교자 목사의 아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여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하기시작했습니다. 그때가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하고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저는 경험적인 반공주의자입니다. 공산 독재의 총탄에 순교하신 목사 아버지의 아들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한민국에서 인권을 무시하고 민주인사와 언론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학생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군사 독재 정치를 “반공”의 이름으로 찬성하고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을 하는 선배 목사님들과 한국 NCC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그리고 기독자 교수들과 함께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유신 정권을 반대하는 민주화 인권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미움을 사서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합동수사 본부에 잡혀가서 해직당하고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4년 동안 아주 작은 교회에서 목회 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학살한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것,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결국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최선의 반공은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 허덕이고 배고프고 아프고 서러운 한 맺힌 암흑의 삶을 살아야 하는 동포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신군부 아래서 광주 민중항쟁의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이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평화와 통일을 이룩해야겠다는 데 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지 않고서는 북에서나 남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하기는 힘들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1980년대 신군부 정권의 감시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협의회는 남북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선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84년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움으로 남과 북의 교회 지도자들이 일본에서 만나서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한 운동을 개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교회 지도자들과 남한 교회 지도자들이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앉아 세계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의 평화 통일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님의 성찬을 남북 교회지도자들이 함께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는 감격적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의 기쁨을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하여 1988년 우리 NCC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이른바 88선언을 공표했습니다.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아들과의 만남


이렇게 우리 한국 교회 에큐메니컬 운동 지도자들은 5.18 이후 전두환 정권의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기독교도연맹 지도자들과 제네바와 미국 등에서 끊임없이 접촉하고 모여 앉아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 통일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 사람도 끼어 있었습니다. 1991년 가을, 제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였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에서 북한 그리스도교도 연맹 이른바 조그련 대표 목사님들과 세계교회협의회 여러 유럽과 미국 교회 지도자들, 평화운동가들과 만나는 모임에 한국대표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북한에서는 조그련의 총무격인 강영섭 목사가 다른 4명의 대표들과 함께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만사 제쳐 놓고 치과병원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강영섭 목사는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북한의 영양문제와 위생문제가 컸으면, 강영섭 목사의 치아가 엉망이 돼서 외국에 나오자마자 치과병원을 찾아갔으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우리 순교자 아버지의 원수 강량욱 목사의 아들과 마주 앉아서 우리나라 평화와 통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감격과 기쁨보다는 마음속의 갈등과 혼란을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1950년 6 25 전쟁 통에 평양에서 순교자 아버지를 교회 뒷산에 묻고 대한민국으로 내려와 해군에 입대한 이 순교자의 아들이 아버지 원수의 아들과 마주 앉아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운명, 저의 고민과 번민은 옛날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면서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순교자 아버지에게 호소했습니다. 밤새 기도했습니다. 순교자 아버지는 침묵했습니다. 내 기도에 응답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저의 가슴에 와 닿는 소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원수를 도와주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침 우리 대화 모임의 회의장으로 입장했습니다. 벌써 북한 그리스도교 연맹의 목사님들과 참석자들이 들어 와 앉아 있었고 미국과 유럽의 교회 대표들 그리고 캐나다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대표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내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그 개회식에서 저는 남한 교회를 대표해서 주제 강연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자리를 찾아 좌정하자마자, 북조선 조그련 대표 목사인 강영섭 목사가 나를 보더니만,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저더러 자기가 하는 주제 강연을 조선말로 하는데 영어로 동시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순교자 목사 아버지 원수의 아들이 나더러 자기 연설을 통역해 달라니? 이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을까?” 화도 나고 불쌍하기도 해서,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니 강 목사님, 통역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하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아니야…….” 손을 흔들면서 그 사람은 영어를 못 하고 자기를 감시하러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내가 영어를 제일 잘한다고 해서 부탁하는 거라고 머리를 숙여 가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건 이적행위다. 우리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에는 북한의 적을 이롭게 하고 도와주면 배신자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감옥에 가야 한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극단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잠깐, 우리 대표들과 의논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한국에서 온 대표 목사님들과 의논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우리 친구 대표들이 모두 돌아앉으면서 “그건 서 박사가 알아서 해야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날 새벽 나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내가 할 거다. 강영섭목사에게 다가가서 “하겠습니다. 원고를 주십시오.” 강 목사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아하면서 주제 강연을 하기 위해 강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동시통역하는 좁은 통 속으로 들어가 땀을 흘리면서 한마디 한마디 북한 교회와 북한 정부의 입장을 영어로 번역해 나갔습니다. 밖에 앉아 있는 강 목사를 감시하러 왔다는 북한 통역관은 내 통역을 검열하는지 강연 원고와 내 통역을 열심히 비교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습니다. 동시통역 통 속에서 땀을 닦으며 나오는 저에게 강목사가 먼저 달려와 감사의 박수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온 대표 친구들이 몰려와 내 손을 잡으면서 강 목사 우리말 강연보다 영어 통역이 더 분명하고 명 통역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거 틀림없이 국가보안법에 걸렸구나…….” 하면서도 나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강영섭 목사의 주제 강연은 북한 정권 선전이 전부였지만, 내가 원수가 부탁하는 일을 해냈다는 데 나 스스로 감격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우리 남한 교회의 평화 통일을 위한 염원을 담은 주제 강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영어 동시통역을 부탁한 우리 순교자 원수의 아들 강영섭 목사에게 한없는 사랑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강 목사는 원수라고 하는 남한의 순교자 목사 아들인 저에게 스스럼없이 통역이란 어려운 일을 부탁했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어색해하지도 않고, 내가 혹시 통역을 잘 못 하거나 왜곡하거나 의심하지도 않고 허심탄회하게 마음 문을 열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나를 믿고 통역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감사했습니다. 나는 아버지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해방감을 실감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 북한 동포들에 대해서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과 동정과 대화와 기도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의 조그련 대표 목사님들과 평신도를 만나서 대화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양 봉수교회에서의 만남


저의 평양 방문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10여 년 전, 제가 홍콩에서 아시아의 기독교 대학을 지원하는 미국 재단의 일을 보고 있는 동안, 평양에 시작하는 과학기술대학 건립을 지원하는 방문단에 끼어서 평양에 가게 되었습니다. 평양 과기대 총장으로 초대된 재미 교포 김진경 총장과 함께 봉수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봉수교회 앞마당에서 10여 년 전 제네바와 미국에서 만난 북한 조그련 여성 대표였던 김혜숙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혜숙 선생은 1986년 첫 번째 제네바와 글리온 남북 교회 대표자 회의에 통역으로 왔다가 거기서 남북교회 대표들이 세계교회 대표들과 함께 한 성찬식에서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어 평양으로 돌아 가 봉수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공산당원이며 북한 정부의 고급 관리였습니다. 제네바 회의가 끝나고 한국 식당에서 작별의 점심을 먹다가 이 양반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서 박사님, 저는 남조선의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영어 공부를 더 해서 정말 훌륭한 통역이 되고 싶어요. 저를 꼭 불러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작별한지 10년이 넘도록, 서로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2005년엔가 평양 봉수교회 앞뜰에 만난 것입니다. 자기는 1986년 글리온 남북 교회 지도자들과 나눈 성찬식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와 세례를 받고 성가대원이 되었고, 이제는 집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이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간 지 얼마 안 됐다고 가족 자랑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봉수교회 교인들 앞에서 인사말을 하라고 해서 앞에 서서 교인들을 둘러보았습니다. 300명 가까운 교인들이 줄을 정돈해서 앉은 것처럼, 정렬해 앉아 있었습니다. 모두들 얼굴이 까맣게 보이고 야윈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온 힘을 모아서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평양을 떠난 지 벌써 60년이 되어 옵니다. 대동강도 옛날 같이 흐르고 있고, 모란봉도 옛날과 다름없이 푸르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남과 북은 아직도 갈라져 있습니…….” 저는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남조선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있는데, 앞에 앉은 교인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평양을 방문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마지막 말로, “여러분 얼마 안 있어 다시 오겠습니다. 통일된 평양에 서울서 기차 타고 다시 오겠습니다. 살아생전에…….” 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여러분, 분단된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살아생전에 평양 가는 기차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서 봉수교회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는 형제자매들을 얼싸안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그 날, 그 날을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광선

1931년 4월 15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났다. 1960년 미국 로키마운틴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뉴욕유니온 신학대학원을 거쳐 1970년 밴더빌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일있다. 1978년 동 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83년 기독교학회장,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88선언’이라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작성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등이 있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당신 말이 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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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소1.jpg» 삼소회 초창기 멤버인 000수녀, 하정 교무, 그리고 정목 스님.(위 왼쪽붜터) 아래 사진은 여성수도자 모임 삼소회 주관으로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음악회 모습. 

여성수도자 모임 삼소회의 씨앗은 처음 서울 법련사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법련사에서 불일서점 불일회보 소임보던 시절이다. 복자회 김옥희 수녀님이 방문하여 차 한 잔 할 때 지정 교무, 하정 교무님이 찾아와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정담을 나누다가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인사동 산촌에서 저녁을 함께하게 된 것이다. 걸림없는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길에 다음에 한 번씩 만나 산행도 함께하고 각 종단 행사에 초대해서 이웃 종교와 교류하고 배움의 기회를 갖자고 하였다.


 원불교의 지정, 하정 교무, 천주교의 김옥희 수녀, 000 수녀님이 북한산 산행을 함께 하였다. 그 자리에 산행 전문가 청전 스님과 용산교당의 이성택 교무님. 그리고 정목 스님이 함께 하였다. 그 이후에도 도봉산 산행을 함께하며 격의 없는 우정과 친교를 나누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이 열리게 되었다. 원불교 지정 교무님의 제안으로 장애인돕기 여성수도자 음악회를 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성수도자 모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그때 바로 떠오른 생각이 호계삼소의 옛 이야기였다.

 

  중국 남북조시대 정국이 혼란할 때 혜원 법사는 여산의 동림사에서 백련결사를 맺었다. 명리와 이익을 추구하는 세속의 마음을 버리고 산문 호계교 다리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학문을 연찬하고 계율과 염불 수행에 전념하기를 서원하였다. 그런 서원을 가지고 동림사 입구의 호계교를 건너가지 않기로 하였다. 그때 유교를 대표하는 도연명과 도교를 대표하는 육수정이 혜원을 찾아와 차 한 잔을 놓고 종교를 떠나 뜻이 서로 통하였다. 밤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다가 바래다 주는 길에 얘기에 취해 걷다 보니 호계교를 건너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의 현자가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호계삼소도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세 사람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생몰 연대가 20년 이상씩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설화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그당시 종교간 반목과 대립이 컸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다른 종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기를 바라는 민중의 염원이 그러한 설화를 만들어 낸것으로 생각된다.

 남-북의 갈등, 동-서의 갈등, 이념의 갈등, 종교간의 갈등이 풀리고 통일과 평화의 시대를 주도하는 한반도가 되기를 기원한다.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듯이.

 초창기 멤버는 천주교 김옥희 수녀님, 원불교 하정 교무,  불교 현장 법사와 청전 스님 등이다. 우리사회에 유명한 정목 스님도 삼소회 사회를 보면서 세상에 데뷔한다. 정율 스님도 삼소회 합창단 멤버였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삼소만 잘하면 만사형통이다.


 1.당신 말이 옳소 !

 2.당신 말이 맞소 !

 3.당신 말이 좋소 !


어머니는 무덤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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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mas-1038369_960_720.jpg» 사진 픽사베이.어머니의 승천
성모승천대축일에

우리 집안은 모두 가톨릭이지만 음력으로 제사를 모십니다. 저의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지 그저께로 1주기를 맞았습니다. 다시한번 어머님의 선종을 맞아 기도와 조문의 위로를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어머님은 열여덟에 박씨 집안으로 시집 오서셔 서른여덟에 5남매를 낳고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홀로 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기고 가신 빚잔치와 50년 동안 자식들을 기르시고 집안을 지키셨습니다. 행상과 파출부와 고속버스 청소부.... 온갖 일을 다하셨고 둘째 아들이 노동운동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는 등 남다른 인고의 세월을 사셨습니다. 어머님은 생전에도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싫어하셨었고 포천 천보묘원의 아버지 곁에 합장되셨습니다.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리라.”
‘내가 세상에 강생시켜 보낸 종은 할 일을 기꺼이 다하고 누웠으니, 
내 품에 안으리라.’

성모님께서도 우리 어머니께서도 하느님의 사랑받고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았으니 순종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늘로 들어 올림 받으시어 이제 하늘에 계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안계시고 십자가와 성체성사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모님은 무덤에 안계시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어머님은 무덤에 안계시고 저의 기억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성모님 어머님은 하늘이 되셨으니
이제는 푸른 하늘이시고 흰 구름이시고 석양이시며 은하수이십니다.
어머니는 천인결사이시고 남한강이시며 산위의 마을이십니다.
연립주택 창문이시고 나무지팡이이시고 성당이시고 동네 할인마트 이시고
갈치 서대 양태 건어물이시고 외발꽃게간장 밥상이십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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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다.
다 큰 아이가 아버지의 나이도 모르는데 
기가 막힌 아버지가 소리쳤다.
"아니 너는 벌써 열 살이나 된 놈이 아빠 나이도 몰라?"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아빠, 저 올해 열 두 살이에요."
그러자 아빠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열 두 살이나 된 놈이 아빠 나이 모르는 건 더 나빠."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보고 자기와 맞지 않는 것은 좀체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고,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자기가 알고 싶어하는 것만 알려고 듭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이 자기 관심의 결과물입니다. 신념이나 직관이라는 것도 사실은 자신이 관심을 둔 것에 결과물일 뿐이다.
childrens-1922949_960_720.jpg» 사진 픽사베이.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1979년 의미있는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학생을 두 팀으로 나눠 이리저리 움직이며 농구공을 패스하게 하고, 이 장면을 찍어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실험 대상자에게 검은 셔츠 팀은 무시하고 흰 셔츠 팀의 패스한 수만 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동영상 중간에는 고릴라 의상을 입은 여학생이 약 9초에 걸쳐 무대 중앙으로 걸어와 선수들 가운데에 멈춰 서서 카메라를 향해 가슴을 치고 나서 걸어 나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험 대상의 절반은 패스 수를 세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 여학생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실험 후 두 심리학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마는 현상을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이름 붙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보고있으면 다 보고 있다고 착각을 하지만 실제 눈뜨고 보고 있어도 다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업의 임원일수록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즉 자신이 성공했다고 느낄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느라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렇게 절규를 해도 눈도 깜작하지 않고 도리어 유가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무주의 맹시'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기준을 넘는 다른 것을 보고 듣고 알려면 먼저 귀와 눈과 머리가 아닌 침묵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우러져 살면 쓸모없는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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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방의북소리.jpg
    ① 경남 합천 오두막공동체

종교1.jpg» 오두막공동체 마을의 ‘막장’(이장)이라는 이재영 장로와 최영희 권사 부부가 ‘느리게 지은 예배당’ 앞에서 대화 중 파안대소하고 있다.

이재영 장로·최영희 권사 부부
부산 달동네서 출소자들 돌보다
 
알코올중독자, 지적장애인 등도 모아 
30여명 ‘따로인 듯, 함께인 듯’ 공동체 
 
혼자선 제 한 몸 건사도 버겁지만
끼리는 문제점 상쇄되고 말썽 줄어
 
정부 예산도 큰 후원도 없어도
적게 쓰고 주워 쓰고 느릿느릿
 
“밀식사육 닭이 병들 수밖에 없듯
사람도 고효율만 추구하면 병나
 
도시교회 교인 ‘밀식사육’ 말고
시골 농촌으로 출애굽 시켜야”
 
억지로 바꾸려 하면 결국 제자리
‘이 모습 이대로 함께 성전 이루는 삶’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기존 교회에 정면으로 맞서는 ‘95개조의 의견서’를 교회에 붙였다. 그 500돌맞이 행사와 성지순례가 많다. 그러나 루터가 질타한 본질적 부패는 그 잔치 속에 묻혀 더욱 심해진다.

혁명은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된다던가. 신자가 많고, 돈이 넘치고, 힘이 있는 대형교회나 연합기관이 아닌, 보잘것없고 힘없는 이들이 궁벽한 벽촌에서 혁명적 삶을 시작했다. 그야말로 맘몬과 욕망의 홍수에 쓸려 내려간 세상의 방주다. 루터는 젊은 날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일기장에 썼다. 오늘 묵묵히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교회공동체를 차례로 찾는다.

아침예배_1.jpg» 경남 합천 오두막공동체와 이재영 장로가 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가장 느린 사람 속도와 눈높이 맞춰

지난 18일 경남 합천군 쌍백면 하신리 오두막골을 찾았다. 형제봉 아래 2킬로미터의 좁은 골짜기에 ‘오두막’들이 있다. 출소자, 알코올 중독자, 지적장애인, 그들의 보호자 등 30여명이 ‘따로인 듯, 함께인 듯’ 살아가는 희한한 공동체다. 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것도 아니고, 큰 교회나 부자 후원자에게 의존하지도 않은 채 경제적으로 무력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오두막공동체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종교2.jpg» 아침예배 뒤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오두막공동체 사람들. 오두막공동체를 이끄는 이재영(67) 장로와 최영희(64) 권사 부부는 이 ‘먹고사니즘’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게 없긴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형제들이나 이미 장성한 네 자녀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긴 하지만 남 보란 듯 살아보려고 돈벌이와 고효율에 목매는 삶은 접었다. 고효율에 매달린다고 해봤자 이곳에서 효율성 높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운 이들이 다수다. 따라서 우선은 적게 쓰는 게 중요하다. 이곳에서 쓰는 물품의 대부분은 주워 온 것들이다. 따라서 농사일을 할 때도, 집을 지을 때도 ‘성급함’은 금물이다.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에 맞추는 게 불문율이다.

오두막골_1.JPG» 경남 합천 오두막골.오두막골을 중간쯤 오르다 보면 매일 아침 7시20분 예배를 보는 집이 있다. ‘오두막’ 식구들은 50평짜리 이 황토 너와집을 짓는 데 7년이 걸렸다. 터 닦는 데만 5년, 집 짓는 데 2년이 걸렸다. 가장 느린 사람의 속도와 눈높이에 맞춰 짓다 보니 그랬다. 그것만이 아니다. 최소한 2억원을 들여야 할 이 집을 이들은 2천만원에 지었다. 대부분의 건축자재는 주워 오거나 얻어 왔다.
화해일치집_1.jpg» 경남 합천 오두막공동체의 '화해와 일치의 집'

“왜 속 뒤집어지는 일 없겠냐만…”

하신리 마을에 지난 1월부터 짓고 있는 행정관 2층 건물도 돈 안 들이기는 마찬가지다. 행정관 가운데 먼저 지어 사용중인 식당 바닥의 타일 문양이 제각각이다. 멋을 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주워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자이크가 더 멋스럽다.
타이루_1.jpg» 경남 합천 오두막공동체 마을의 식당 타일.“깨진 유리 조각 한 주먹으로 모자이크를 만들면 훌륭한 작품이 된다. 그런데 거기서 유리 파편 한두 개를 빼내버리면 작품이 망가져버린다. 함께 어우러지면 쓸모없는 파편은 없다. 세상 사람들은 무능하고 병들고 장애가 있으면 유능한 사람들이 던져주는 거나 얻어먹는 부스러기 같은 존재로 봐 비참하게 만들지만 어떤 조각도 빼내지 않고 조화롭게 하나가 된 게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재영 장로의 말에서, 골칫덩어리로 취급될 수 있는 이들이 이곳에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5년 전 이곳에 온 정동장애인 전용기(44)씨는 식사 후 즐겁게 설거지를 하면서 아내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그는 이곳에서 비슷한 증세의 아내를 만나 결혼해 알콩달콩 살고 있다. 경계성 기능장애를 가진 아들과 함께 들어온 화가가 운영하는 산골 카페 한편에선 심신미약자들로 ‘독수리 5형제’라고 불리는 이들이 ‘이번 주말엔 영화를 보러 갈까, 목욕을 하러 갈까, 등산을 갈까’ 하며 자못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독수리형제_1.JPG» 오두막공동체 마을의 ‘독수리 5형제’카페 옆엔 ‘의사선생님’의 거처가 있다. 뇌 이상이 생겨 자살할 곳을 찾아다니다 이곳에 정착한 중년 의사선생님도 ‘오두막’이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들꽃카페_1.JPG» 오두막공동체 마을의 카페.
최영희 권사는 “여러 사람이 사는데 왜 속 뒤집어지는 일이 없겠느냐”며 웃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장로님(남편)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다. 사람들이 미워하며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게 예수님 아니냐’고 하는 바람에 참고 참다 보니 우리 식구들이 자신도 모르게 내공이 생긴 것을 느낀다.”
 
정 술 먹고 싶어 하면 내버려둬
식사1_1.JPG» 오두막공동체 마을 ‘화해와 일치의 집’의 식사시간.
번갈아 저녁을 준비해 함께 먹는 공동식사에서 달걀부침이 별미다. 밖에선 말썽이지만 오두막 사람들처럼 자연과 벗하며 자란 닭들이 낳은 달걀은 안전하다.
“밀식사육하는 닭이 병들 수밖에 없듯이 사람도 좁은 구조 안에서 부대끼며 고효율만 추구하는 기계처럼 살면 병나게 되어 있다.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만약 도시에서 산다면 정상 생활이 가능하겠는가.”
이 장로는 1983년 부산에서 출판사를 하던 때 교도소에 보낸 전도지를 보고 온 출소자들을 달동네에서 돌보며 공동체살이를 시작했다. 말썽 많은 그들을 돌보며 ‘언젠가는 변하겠지’ 했지만 1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11년 전 이곳에 들어와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러자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서로의 문제점이 상쇄되고 보완되면서 말썽이 현저히 줄었다. ‘오두막’은 여러 가구가 한집에서 살지 않고, 적어도 부부싸움이 안 들릴 정도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구조가 삶의 안식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로는 도시 교회들이 에녹성, 즉 ‘자기만의 아성’을 구축해 교인들을 ‘밀식사육’하려 들지 말고 출애굽을 시켜 ‘넉넉한 구조’인 시골 교회로, 농촌으로 내보내거나, 플랫폼 구실을 해줄 것을 권한다.
그는 이제 사람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알코올중독자가 정 술을 먹고 싶어 하면 먹으라고 내버려둔다.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면 강제성이 해소된 후 원래로 돌아가는 것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예배당 앞 글귀가 ‘오두막’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말해준다.
‘이 모습 이대로 함께 성전을 이루는 삶’

이재영장로_1.JPG» 오두막공동체 마을의 ‘막장’(이장)이라는 이재영 장로..종치기_1.jpg» 경남 합천 오두막공동체 '화해와 일치의 집'에서 신자가 종을 울리고 있다. 합천(경남)/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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