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구름, 마음으로 마시는 차 벗
삶의 나락에 선 노숙인 그 당당함이 참 고맙다
» 노숙인. 한겨레 자료 사진.서울역 근처에서 노숙하는 분들을 위해서 반찬을 준비해주시는 수녀님이 계시다. 한번은 노숙인 한 분이 오셔서 김치를 좀 싸달라고 하셨단다. 사실 한 사람에게 따로 많은 양의 김치를 싸주는 일은 하지 않고 또 배추김치가 떨어져 마침 냉장고에 있는 갓김치를 드렸단다. 그 다음주에 빈 김치통을 가지고 나타나신 그 아저씨, 또 김치를 얻어가면서 당당하게 한 말씀, “거 다음에는 맛있는 겉절이 좀 담가 놔요” 하시더란다. 수녀님이 너무 웃겨서 말도 안 나오더란다. 그리고 그 아저씨의 당당함이 참 고맙더란다.
지방에 강의를 다녀올 때면 늘 강의를 한 곳에서 한아름 간식을 준다. ‘기차 안에서 드시라, 저녁도 못 드시고 가시는데 간식이라도….’ 무거운 간식 가방을 가지고 서울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러 지하도를 걸어오는 동안 그곳에 계신 많은 노숙하는 아저씨들 앞에 개수가 되는 대로 ‘이것 좀 드시고 주무세요’ 하면서 하나씩 간식을 내려놓는다.
얼마 전 서울역의 긴 계단 중간에 앉아 계신 아저씨에게 떡과 빵 한 개를 놓아 드리고 계단 위까지 다 올라왔는데 그 아저씨의 우렁찬 소리가 내 뒤통수를 울렸다. ‘음료수도 주고 가야 할 것 아니야, 목 메는데….’ 순간 폭소가 터졌지만 갈등도 생겼다. ‘그냥 갈까? 몇 시간 지방 강의를 다녀오는 길이라 내 몸도 천근인데….’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한참을 걸어가서 편의점에서 우유 한 병과 생수 한 병을 사 가지고 다시 그 계단을 내려가 아저씨 앞에 드렸다. 다시 계단을 올라오면서 나는 속으로 ‘아저씨, 멋져, 짱이야’ 하면서 웃었다.
서울역 근처 쪽방에서 생활하시던 김씨 아저씨가 대장암에 걸려서 주민센터의 요청으로 모현호스피스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한 달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 늘 반찬 투정을 하고 우리에게 담배 심부름까지 시키시던 그 아저씨가 하늘나라로 떠나시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지난 병원에서는 치료를 받는 동안 너무나 무섭고 아프고 힘들어서 안락사를 시켜 달라고 했다. 자살 시도도 했고 또 쥐약이라도 사다 먹고 죽으려고 여러 번 결심했다. 그런데 이곳 호스피스에 오니 안 아프고 너무나 행복해서 살고 싶어졌다. 살려고 갔던 병원에서는 죽고 싶었는데 죽으려고 온 병원에서는 살고 싶어졌다. 행복하게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참 고맙다. 삶의 나락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 아저씨들의 모습이 고맙고 또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감을 보여주기 위해 현존하는 우리의 삶 안에 함께해 주어서 고마운 분들이다.
손영순 까리따스 수녀(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세계 불교 3대 스승
» 현대 불교 3대 스승으로 꼽히는 달라이라마(티베트불교 지도자), 틱낫한(베트남 출신의 프랑스 플럼빌리지 창립자), 성운(중국 본토 출신의 타이완 불광산사 창설자)
현대 세계에 불법의 공덕을 전파하는 세 분의 위대한 스승이 계신다.
첫째는 티벳의 달라이 라마이다.
첫째는 티벳불교의 법왕으로 세계 종교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둘째는 수많은 저술과 전념수행으로 사람들을 불법으로 인도하는 베트남 출신 틱냩한 스님이다.
셋째는 대만 불광사를 창건하고 세계각지에 불교대학과 분원을 만들고 불법을 전하는 성운대사이다.
달라이라마는 금년 나이 82세 틱냩한은 92세 성운대사는 95세이다.
세 분 스승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모두 나라를 잃은 망명객 신분이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티벳 침략으로 인도로 망명하였고 틱냩한은 베트남 전쟁으로 프랑스에 망명하여 프럼빌리지를 만들었다.
성운대사는 중국대륙의 공산화로 장개석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망명한 분이다.
조국을 잃고 수도하던 사원을 잃고 맨 몸으로 오직 불법에 의지하여 지혜와 자비의 꽃을 피워낸 대표적인 사례이다.
2013년 8월 28일 대만 불광산사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베풀어 졌다.성운대사의 법맥을 전수받는 전법의식이 그것이다.선종의 비밀한 전법의식이 사부대중의 찬탄속에 70명의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전수된 것이다.
» 필자 현장 스님과 불광산사의 성운 스님
이제 휠체어에 의지해서 움직이는 성운노사께서 깨침과 실력.원력을 갖춘 믿음직한 제자 70명에게 임제정맥을 전수하는 행사 모습이다.
부처님으로 부터 달마대사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불법의 지혜 등불이 끊이지 않게 하고 불법을 세상에 널리 전해 세상의 고통을 구제하고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더욱 정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제자 한사람 한사람 이름을 호칭하며 108염주를 걸어주고 전법게를 내리는 모습은 불법의 태양이 빛나고 진리의 수레바퀴가 힘차게 돌아가는 환희심을 갖게 하였다.
전세계에 불교 가르침과 함께 자비 봉사활동을 펼치는
타이완 불광산사 성운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아프리카인들
불광사에서는 아프리카에도 십여개의 분원을 운영하는 탓으로 다섯명의 아프리카 흑인스님들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그들이 계.정.혜삼학을 닦고 경.율.논 삼장을 정밀하게 연찬하여 지혜가 밝아 지면 흑인스님들이 백인들에게 불법을 설파하는 모습도 머지 않아 보게 될것같다.
프란치스코교황, 남북간 화해 촉구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 종교지도자들을 만나 남북 간 화해를 촉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일(현지시각) 바티칸 사도궁에서 한국 종교지도자협의회의 예방을 받고 “한국인에게 평화와 형제간 화해라는 선물이 주어지길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은 “우리는 단지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라 소매를 걷어붙이고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며 “그 미래는 개인, 공동체, 인민, 국가 간 분쟁을 거부하고 조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황은 “종교지도자들은 인류의 복지와 화해를 장려하도록 부름 받았다. 우리는 비폭력적인 평화의 언어로 공포와 증오를 야기하는 것들과 맞서야 한다”며 “여러분을 보니 아름다운 한국 땅으로 향했던 지난 순례길이 생각난다. 우리가 하나 되어 나아갈 힘을 주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종교지도자협의회 의장이자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를 비롯해 원불교 한은숙 교정원장, 천도교 이정희 교령, 유교 김영근 성균관장,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이경호 주교 등 22명은 이날 낮 12시 20분부터 20분가량 교황을 예방했다. 김 대주교는 교황에게 국내 7대 종교 수장이 서명한 서한을 전달하며 한반도 긴장 상황을 설명했다.
종교지도자들은 교황에게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자수와 원불교, 천도교 등 민족종교의 영문판 안내서를 선물했다. 이에 교황은 천주교 성물인 메달을 답례품으로 건넸다. 메달에는 마태오 복음 25장 35절(‘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들였다.’)이 새겨져 있었다.
교황은 면담을 마친 뒤에는 몸소 문간에서 방문객을 배웅했다.
교황은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평소에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신도로부터 신앙이 전파된 한국 가톨릭의 특수성을 종종 언급하는 등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바티칸시티=한국풀기자단, 조현 종교전문기자. 사진 교황청 기관지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제공
실패도 때론 유용하다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실패도 유용하다
지속 가능성을 넘어서는 원리와 경로 <퍼머컬처>(데이비드 홈그렌 지음, 이현숙 신보연 옮김, 보림 펴냄)에서
내면아이에게 말 건네기
마음이 허기질 때 당신은 무엇을 하나요?
오늘도 하루분의 외로움을 스마트폰과 SNS에 의지하지 않았나요?
외로움이 키운 슯관들을 알고 나서야...내 마음이 보였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힘들어서 회피하고 싶고,
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이 외로움이 버겁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이걸 알아주기만 해도 나는 `지금 여기'
현실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면 아이에게 `사랑스럽게'말을 건네는 것이다.
약간 오버해도 좋다. 약간 오글거려도 좋다.
한번 해보자. 그때야 알게 된다.
내가 나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음을.
<어쩌면 조금 외로웠는지도 몰라>(김용은 지음, 애플북스 펴냄)에서
김용은
청소년 교육 수도회 살레시오수녀회 소속 수녀.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방송학괄르 뉴욕대 대학원에서 미디어생태학을 공부했다. 시대의 언어인 미디어에 영성을 부어 마음의 울림을 녹여내고 싶다는 갈망으로 버클리 시학대학원 살레시오영성센터에서 살레시오영성을 수학했다.
현재 서울 `살레시오사회교육문화원'원장으로 있으며, 미디어와 내면을 접목하는 연구와 글쓰기, 강연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저서로 <영성이 여성에게 말하다>, <고민하는 내가 아름답다>, <3S행복 트라이앵글>이 있다.
죽는순간 가장 청명한 빛을 보리라
많은 문헌들은 마음 혹은 거친 의식부터 미세한 의식까지 의식의 다양한 법주를 소개하고 있다. 가장 거친 수준의 의식은 시각, 후각, 청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의 감각기관과 연관되어 있는 의식이다. 그보다 미세한 의식은 심의식 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 또는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 자체가 일반적인 생각 같은 거친 의식부터 깊은 잠 속의 의식과 숨이 멈춘 채로 기절한 상태의 의식 같은 가장 심오하고 가장 미세한 청명한 빛의 마음까지 걸쳐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록 거친 의식들은 그 시작과 끝이 있지만, 미세한 마음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미세한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이 끊임없이 항상 거기 있으며, 따라서 업의 인연과 결과 역시 그 시작이 없다. 아주 특별한 명상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이 가장 미세하고 가장 깊은 의식은 오직 우리가 죽을 때 드러난다.
그러나 이번 생과 아직 덜 단절된 상태의 청명한 빛의 마음은 아주 짧은 순간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잠에 들기 일보 직전이나, 꿈에서 막 빠져나올 때, 재채기나 하품을 할 때 그리고 성적 희열을 느낄 때이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청명한 빛의 마음이 드러나면, 우리 삶에서 헛되이 늘어나기만 하는 망상이 모두 청명한 빛의 마음속으로 사그라진다.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달라이 라마 지음, 제프리 홉킨스 편역, 이종복 옮김, 담앤북스 펴냄)에서
자기를 버리고 따르라
여러 갈래 길
김 형 태 (<공동선> 발행인)
“여러 갈래 길.
누가 말했나. 이 길 뿐이라고.”
40여년 전 학교 안에까지 형사들이 들어와 학생들을 감시하던 박정희 정권시절. 김민기는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이, 어른, 장사꾼, 노동자, 사장님, 군인, 시인, 스님, 가수, 공무원, 운동선수, 거지...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이. 빨갱이, 자본가. 멍청이, 똑똑이. 이들은 저마다 제 길을 갑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빨갱이’는 물론이고 머리가 긴 것도, 치마가 짧은 것도, 게을러 빈둥거리는 것도 도무지 그 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가고, 죽고, 본인들은 물론 그 주변사람들까지 사회에서 매장되었습니다.
독재자 그 사람은 아마 자신의 길만이 옳고, 모든 이들이 마땅히 그 길을 따라 걸어야한다는 확신에 차서 그리했을 겁니다. 결국 그는 술 마시다 부하에게 총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딸이 다시 아버지의 길을 흉내 내다 감옥에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이 길 뿐이 아니고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엊그제 대통령 인사를 평하는 한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황우석 사태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20조원 규모의 과학 기술 지원금을 좌지우지하는 자리에 앉히고도 탕평인사라고 대통령이 자화자찬해서는 안 된다, 지지율이 7,80퍼센트를 유지한다고 자만하지 말고 지금이야말로 겸손하게 뒤돌아보아야 할 때다’ 대통령이 잘하기를 바라는 노파심에서 나온 지극히 지당한 충고이건만 많은 댓글들이 늙은이는 입 닥치라는 식으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노무현, 문재인은 무조건 옳다?
심히, 아주 많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럿이 같이 공부를 하는 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는 스님이 어느 날 불쑥 이러시는 거였습니다. “변호사님, 기독교는 죽은 사람 시체를 십자가에 높이 걸어두고 떠받드니 참 이상한 일 아닙니까.”
“스님 그게 아니구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당신의 몸과 마음, 마지막 목숨까지 버리고 비워 이웃을 섬기는 본을 보여 주신 거랍니다. 나를 비우고 이웃을 섬기면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게 되어있고 그게 십자가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금강경에서 ‘나’라는 상(相)을 버리라 하셨듯이 나에 대한 집착을 각자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모범을 보이신 거랍니다.”
“아,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저 당신의 그 십자가를 믿으면 내 죄가 사해진다는 식의 무슨 기괴한 마술 주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십자가를 이런 마술 주문쯤으로 알아들으면 이건 스님 말씀마따나 시체 하나를 높이 걸어두고 떠받드는 이상한 짓거리에 다름 아닐겝니다.
어느 찬송가 대목처럼‘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가 아니라, 우리도 당신처럼 바로 그렇게 각자 제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입니다.
일찌기 석가세존께서도 ‘멸하여 사라지는 내가 아니라 법(法), 곧 나의 가르침을 귀의처 삼으라 ’고 마지막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웃을 향한 자기 봉헌이 아니라 ‘나를 영생으로 인도해줄 예수’라는 이름에만, 세존이 가르치신 무상(無常, 無相)의 법(法)이 아니라 ‘나를 극락왕생 시켜줄 절대자 석가모니 불’의 이름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제자들은 ‘석가세존’과 ‘예수’라는 서로 다른 이름의 길을 걷는 상대방을 향해 바보들이라고 비웃어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존이나 예수님 두 분 다, 이 개체 ‘나’에 대한 상(相), 집착을 버리고 자유로워지심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자비,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으니 두 분이 걸어가신 길은 짐짓 달라보여도 도달하신 데는 한 곳이어라.
우리 집 마당 풀밭에는 여치가 삽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창 밖 거미줄에 내가 애지중지하던 그 여치가 걸려들었습니다. 얼마간 발버둥 치더니 거미에 진액이 빨려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거미의 길, 여치의 길.
세상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길, 불교의 길, 공자의 길, 노자의 길, <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여러 갈래 길...
제 욕망을 좇아 죽어라 달려가는, 도둑놈의 길, 남을 어거지로 제 길로 끌고 가는 독재자의 길, 미치광이 트럼프의 길...
이 길, 저 길. 빨갱이의 길, 자본가의 길. 멍청이의 길, 똑똑이의 길. 바지런의 길, 게으름뱅이의 길..
그리하여 이 모든 길의 끝은 마침내는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의 품안에 이를 것입니다.
이 글은 <공동선> 9, 10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인사동을 가도 아는 사람만 보인다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그리고 디지로그 세대
영남지방에서 ‘고딩(고등학생)’들이 찾아왔다. 이 친구들 덕분에 청와대 앞길 개방 후 처음으로 걸었다. 그런데 그 길은 말할 것도 없고 북촌길 삼청동길도 모두 시큰둥한 반응이다. 더위 탓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신구세대간에 느낌이 서로 달랐던 까닭이다. 일단 걷기를 중단하고 빙설가게에 들러 차가운 음료로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을 식히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코스를 바꾸어 인사동 쌈지길 상가건물로 향했다.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이 돌아온다. “바로 우리가 찾던 곳이예요!” 층층이 알록달록한 디자인과 함께 정신줄 놓게 만드는 시끄러운 공간이다. 아예 멀찌기 서서 지켜보기만 할 뿐 제멋대로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시간 남짓 후 소품 몇 점을 구입하고서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대뜸 도장파는 집으로 가자고 조른다. 인터넷으로 인기있는 가게까지 미리 확인해 두었다고 한다. 1020세대가 즐겨 찾는 도장가게인 모양이다. 컬러풀한 돌을 고르더니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약 30분 정도 걸렸다. 인사동 관광기념 선물로 제격이다.
얼마 전에도 도장 때문에 이 거리를 다녀왔다. 그동안 사용하던 한글도장이 너무 닳아버린 까닭에 은행에 비치해 둔 인주를 먹여도 글자가 뭉개져 제대로 찍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저 녀석들과 비슷한 나이일 때 손재주 있는 같은 반 급우가 한글로 새겨준 푸른 프라스틱 도장이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 뿐인 오랜 연륜의 수제도장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신문에 자주 광고를 내는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유명한 도장가게로 갈까? 아니면 주간지 기사에서 봤던 숨어있는 장인이 새긴다는 을지로 가게로 갈까? 이런저런 망설임 속에서 시간만 보냈다.
그 날 인사동 길을 따라서 숙소로 오다가 지인을 만났다. 방문한 가게 안에서 유리창 너머 필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고서 반가움에 뛰어나온 것이다. 종로에서 머문 세월만큼 아는 이가 늘어나고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그만큼 많아졌다. 안내 하는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붓과 벼루만 파는 곳인줄 알았더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였다. 스텐드 불빛아래 부지런히 능숙한 칼놀림으로 의전용 낙관을 파고 있는 주인장의 포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외국 유명정치인들의 방문사진과 그들이 새겨간 도장까지 광고삼아 붙여 놓았다. 진짜 실력자라고 지인이 추임새를 넣는다. 그렇칞아도 도장포을 찾고 있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실생활에 어울리는 중후하면서도 진한 갈색 재질의 나무를 골랐다. 둥근 모양과 정사각형을 한 개씩 선택한 후 한글과 한문이름을 동시에 주문했다. 드디어 한달만에 전통에 충실한 묵직한 도장 한 쌍이 내 손에 쥐어졌다. 이후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가게 쪽으로 눈길이 향한다. 그 때마다 안경을 코에 걸고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새김작업을 하는 그 신실한 모습은 여전히 변함없다.
이제 도장 대신 사인으로 대부분의 서류가 해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 벵킹의 대중화로 인하여 도장은 고사하고 은행에 갈 일 조차 없어진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장은 여전히 또다른 권위로써 나름의 영역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으로 가벼운 디자인과 부담없는 가격으로 젊은이까지 끌어들이는 변신을 거듭했다. 인사동에도 많은 각수(刻手)들이 골목골목 포진하며 활약 중이다. 전통가게와 현대식 쌈지길 상가가 공존하면서 양 세대를 이어주고 전통형 도장과 새로운 감각의 도장이 또다른 모습으로 구세대와 신세대를 연결하고 있다. 고딩들 덕분에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라는 ‘디지로그’가 어우러지는 인사동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아니 경험한 만큼 보인다.
아이 한명을 잘 키운다는것
“아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죠”
10년 만에 한국 찾은 브루더호프 공동체 원마루·원아일린 부부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 ⓒ복음과상황 오지은
영국 남동부 로버츠브릿지로부터 한국을 방문한 부부를 만났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일원으로 본지에 ‘브루더호프 통신’을 보내주었던 원마루(45) 씨와 원아일린(36) 씨. 지난 4월 이 땅에서의 소명을 다한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추모식과 그의 새 책 출간 기념회를 위해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 브루더호프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 비폭력을 추구하는 국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성원으로서 브루더호프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마루: 브루더호프는 1920년 독일에서 시작됐어요. 우리나라의 평양 대부흥운동처럼 독일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회개하며 여생을 예수의 길을 따르며 살겠다고 결심하는 청년운동 콘퍼런스가 있었어요. 그 운동에서의 만남으로 개신교 신학자 에버하르트 아놀드와 아내 에미, 그리고 에미의 자매인 엘자 폰 홀란더가 자네츠(Sannerz)라는 외진 시골에서 처음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방을 빌려서 시작한 것이죠. 얼마 안 되어 이들은 나치의 박해를 받아 추방당했고, 전쟁이 커지면서 1936년에 영국 코즈월드 지방의 농장을 구하며 새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추방되어 남미 파라과이에 정착하게 되지요. 1960년대에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에 굶주린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파라과이에 와 일원이 되었어요. 너무 많이 오게 되니까, 미국에서 공동체를 다시 시작했죠. 현재는 4개 대륙에 스무 곳 넘는 공동체가 있고 구성원은 약 3천 명 정도 됩니다. 모든 구성원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으로 모든 것을 나누며 살아요.
― 격동의 역사를 겪고 현재에 이른 거네요.
마루: 그렇습니다.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간추려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요. 10년 넘게 살면서 경험했지만, 모르는 게 많아요. 그만큼 제가 부족하기에 공동체가 저를 받아주고 있는 거겠죠?(웃음) 더 관심 있는 분들은 브루더호프 홈페이지(bruderhof.com/ko)에서 더 객관적인 설명을 접할 수 있을 겁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라는 질문 많이 받으시죠?
마루: 미국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만났어요. 저는 펜실베이니아에 머물 때였고, 아일린은 뉴욕에 있을 때요. 한국 손님이 뉴욕에 가셨는데 그때 제가 통역을 하러 갔다가 만나게 되었죠.
아일린: 저는 뉴욕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태어나서 자랐어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공동체로 살기로 결정했고요.
― 프로필에 보니 자녀가 셋이라고….
아일린: 네. 10살, 6살, 5살. 모두 남자아이들이에요. 큰애가 이번에 한국에 같이 오고 싶어 했는데 일 때문에 온 것이라 함께 오지 못했어요. 지금 공동체에서 돌봐주고 있죠.
― 저도 사내아이 하나를 키우지만, 남자아이들 셋, 힘들지 않으세요?
아일린: 재밌어요. 물론 늘 평화롭지는 않지요.(웃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우리에게 선물이라는 거예요. 가족을 이루는 기쁨도 있고요.
마루: 크리스토프 할아버지께서 아이들 관련 조언을 자주 해주셨습니다. 내가 뭔가 거창하고 장황하게 아이들에 관해 말하면, 할아버지는 “지금 너희 아이들을 사랑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다잡아주셨어요.
아일린: 할아버지께서 “아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어요. 큰일을 하는 거죠.
이번에 1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신 이유가 크리스토프 할아버지의 책 출간 기념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마루: 크리스토프 할아버지는 많은 이들의 벗이며 형제였습니다. 지난 봄에 돌아가셨는데요. 사실 이번 모임이 추모식이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이 책 《희망이 보이는 자리》(비아토르)가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몰랐고요.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메시지를 한국에 계신 분들과 더 나누고 싶었어요.
― 크리스토프 할아버지의 책들을 많이 번역하셨잖아요. 마지막 책이기에 더 애착이 가겠어요.
마루: 할아버지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도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특별히 이 책에는 탈출구 없이 지친 영혼들이 어떻게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묘사되어 있는데요.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뿐 아니라 길 잃고 방황하는 세계의 모든 외로운 영혼들이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아요. 저도 이 책 작업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네요.
― 그분의 이야기 중 꼭 함께 나누고픈 게 있다면요?
마루: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6일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 중 아무라도 자그마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뛰어나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줄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서로 작은 역할을 하며 힘을 합치면, 하나님 나라의 진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누고 싶었어요.
― 어제 추모식 사회 때 맨발로 오르셨어요. 발이 꽤 거칠게 보여서 일상이 궁금해지더라고요.
마루: 사는 게 다 똑같죠. 밥 먹고 일하고 차 마시고. 아이들 재우고 함께 모여 이야기하고. 예배를 드리거나 누군가를 초대해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우리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손님을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때가 재밌죠. 우리 공동체는 300명 정도 되는데 서로의 숟가락 젓가락 다 알아요.
― 주로 어떤 일을 하나요?
마루: 가구도 만들고, 건축도 하고, 출판 일도 해요. 바빠요.
아일린: 저는 간호 일을 해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아일린 씨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했는데,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공동체에 남기로 결심한 이유가 뭔가요?
사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공동체를 떠나고 싶었어요. 대학에서 간호사 공부를 하던 때였는데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그때 공동체의 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까, 얼마나 어렵게 예수님 믿음을 붙잡고 싸우셨는지 아니까 저도 도전을 받았어요. 예수님 따라 살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 형제자매와 함께하는 삶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나 새삼 깨닫게 되었고요. 어디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인 것 같아서 남기로 했어요.
― 마루 씨는요?
10여 년 전부터 평생 살고 싶은 공동체를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그게 브루더호프는 사실 아니었어요. 한 번 방문한 후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았죠. 내 계획과 이기심을 버려야 하니까 자신이 없더라고요. 지금도 자신 없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공동체 삶이 이상적이고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런데도 형제들과 뜨겁게 마음을 나누는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살며 배워가고 있어요.
» ⓒ복음과상황 이범진
― 갈등 해결에 관한 지혜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텐데요.
마루: 공동체 초기 에버하르트 아놀드가 자네츠에서 만든 첫 번째 약속이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형제자매에 대하여, 또 그들의 개인적인 성격에 대해 그들이 없는 곳에서 험담하거나 빗대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갈등이 있을 때 서로 솔직한 대화로 풀어야 앙금이 남지 않아요. 갈등을 풀어가는 근간은 마태복음 18장에 두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인터뷰를 통해 우리 공동체나 우리 두 사람의 삶이 주목받기보다, 지금 각자 자기 자리에 계신 분들의 소중함이 더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이 글은 <복음과 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것입니다
경전 역경(번역)이란 역경인가
세운 서원은 역경(譯經), 현실은 역경(逆境)?
» 파업과 탈레반들로 인해 곧장 남하할 수도, 스와트 계곡으로 갈 수 없어 ‘해방 카쉬미르’를 뜻하는 아자드 카쉬미르를 지났는데 이곳이 슈라이만 산맥 언저리다. 바슈샬 고개 아래에서 지나온 길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벌써 6년 전이다.
지난 2011년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대장경 :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이 학회에 티벳 대장경에 대해 발표하러 인도에서 잠시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 때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이사장인 종림 스님의 옆방에 짐을 풀었다. 하루는 스님께서 당신께서 낙향하실 예정인 고반재(考般齋) 팸플릿을 보여주셨다. 당시 용수의 6대 저작이라는 『중관이취육론』을 티벳어에서 우리말로 옮기는데 한창 빠져 있을 때라, 그 후속 작업인 『중론』 8대 주석, 그리고 쫑카빠나 렌다와의 티벳 주석 등을 우리말로 옮기기에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처럼 보였다.
“그럼 같이 내려가시지요.”
아무 것도 없어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지혜를 생각하는 집’, 고반재(考般齋) 팸플릿.
» 고반재 개관식
그리고 2년 후 무턱대고 들어온 한국 땅, 섬진강 하류에서 자라서인지 남강 상류를 보고 ‘저것도 강이라고!’라며 함양 안의에 와보니 ‘반야(지혜)를 생각하는 집’이라는 고반재는 3×6m짜리 컨테이너 두 동이 전부였다! 이후 2년 여 동안 책 박물관 고반재가 세워질 때는 감독관을, 그리고 공양주, 부목, 매니저로, 때로는 관람객을 대상으로 대장경에 대해서 설명하는 ‘문화 해설사’로 변신하며 살고 있다. 역경의 서원은 이미 한 귀퉁이로 내팽개쳐 있고 트랜스포머도 아닌 ‘멀티 플레이어’가 된 신세를 한탄하면, 스님께서는 ‘종이 쪼가리 하나에 속은 놈’ 또는 ‘중관사상을 전공한 놈이 그것도 몰랐냐!’라고.
“그러게 말입니다. 괜히 역경의 서원을 세워가지고!”
‘세운 서원은 역경(譯經)인데 현실은 역경(逆境)인 셈이라고? 그렇지 않다. 고통[苦]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지나간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오면 파수를 지나치게 된다. 인더스 강의 상류를 따라 내려오면 현지인들이 건너다니는 오른쪽에 놓인 이 다리를 보게 된다.
»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오면 파수를 지나치게 된다. 인더스 강의 상류를 따라 내려오면 현지인들이 건너다니는 오른쪽에 놓인 이 다리를 보게 된다.
» 옛 간다라의 영화를 뒤로 한 탁실라의 다르마라지까(Dharmarajika) 대탑에 앉아 잠시 쉬고 계시는 종림 스님.
그러면 파미르 고원을 넘는 풍경과 간다라가 떠오른다.
불교를 배우러 인도로 오갔던 세 명의 대표적인 승려는 육로로 갔다가 해로로 돌아왔던 『불국기(佛國記)』의 저자 법현(法顯, 337~422?), 육로로 왕복했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저자 현장(玄奘, 602?~664), 그리고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의 저자 혜초(慧超, 704~787)라고 ‘조선 3대 천재 중의 한명’이라던 최남선이 정리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파미르 고개를 넘을 때면 법현이 먼저 다가온다.
법현 등 세 사람은 남쪽으로 나아가 소설산을 넘었다. 소설산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으로 덮여 있었다. 산 쪽을 올라가고 있을 때 차가운 바람이 사납게 휘몰아치자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도 못 내고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가운데 혜경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고 입에서는 흰 거품을 토하면서 법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또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군요. 빨리 가십시오. 우물쭈물하다가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
-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 문화와 역사』, 민족사, p. 92에서 재인용.
여기서 말하는 소설산은 파미르 고원을 넘으면 마주치는 힌두쿠시 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슈라이만 산맥(Sulaiman Mountains)을 가리킨다. 법현 일행은 파미르 고원을 무사히 넘었지만 결국 두 번째 고개를 넘다 변을 당한 셈이다. 그리고 인더스 강을 따라 남하하다 마주치는 간다라의 풍경은 한 때의 영광을 뒤로한 채 폐허의 유적으로 변해 있다. 그 풍경은 무상(無常)함을,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도 항상하지 않음을 떠오르게 한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히말라야 산맥, 파미르 고원이나 서티벳의 곤륜 산맥의 그 헐벗은 고산 고원을 지나다 보면 한 때 바다 밑의 낮은 곳이었음을 상기시키는 강바닥의 자갈 위를 걷게 된다. 인간이 쌓고 부순 그 폐허의 역사와 고산의 고갯길의 고운 자갈들 하나 하나가 한 생의 덧없음을 가르치는 큰 스승이었던 지난날이었다.
움켜쥔 모래 한 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 놓인 자신의 삶에 대한 직시란 저마다의 몫이고 한 생의 고(苦) 또한 마찬가지, 나는 그저 그것을 육로로 인도를 오가며 뼛속 깊이 새겼을 뿐이다. ‘벽에 못을 박지 않는다.’라는 브레히트의 시의 한 대목처럼 하룻밤을 지내면 떠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은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역경의 서원은 그 어떤 것보다 앞선다. 결국 불가역적인 시간의 축을 거스를 수 없는 한 생을 이끄는 역경의 서원은 현재적인 자기 의지를 구현하는 수단에 불과하고 그렇게 떠돌며 배운 게 고작 책상머리와 밥상머리의 수평 이동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의 집인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 곧 행복이다. 오직 이것 하나를 알기 위해 떠돌았다면 지나온 길들이 너무 멀고 거칠었던 셈인가!
지금 울리는 종은 누구를 위한것인가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수도원의 뾰족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어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 볼 여유가 없었다.
많은 수도사와 신부들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수도사가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수도원의 형편을 늘 가슴아파했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를 받아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다.
어려서 자기를 키워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것을 보고자란 고셰는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기억해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불로장생주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불로장생주는 프랑스 전역에 팔리기 시작했다.
가난에 허덕이던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고셰는 이 일로 신부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다.
어느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는데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고셰 신부였다.
불로장생주를 만들기 위해 시음을 하다가
알코올 중독이 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신부들은 고셰 신부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다음날 수도원장이 그를 찾아가 앞으로는 수도원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 빚으라고 했다.
마음이 착한 고셰 신부는 수도원장의 말을 듣고
그곳에서 계속 불로장생주를 만들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수도원장이 다시 고셰를 찾아가자
그는 눈물로 애원하며 제발 이곳을 나가게 해 달라고
이제 술을 그만 만들고 예전처럼
수도 생활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원장은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다만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회중들에게 말했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고셰는 양조장에서 시름시름
영혼과 육체가 죽어갔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Alphonese Daudet)가 쓴
꽁트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이다.
+
돈에 구애 받지 않는 행복한 생활을 하고자 열심히 돈을 법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어 간다 것입니다.
이것을 가치의 전도라고 합니다.
가치에는 수단적 가치와 목적적 가치가 있습니다.
목적적 가치란 사랑, 우정,이해력, 화평, 긍휼과 같은
정신적인 만족을 주는 가치라면
수단적 가치는 돈이나 직위, 권력등과 같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는 가치를 말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수준 높은 삶은
수단적 가치를 통하여 목적적 가치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수단적 가치가 목적이 되는 삶을 살아갈 때
가치가 전도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께 잘 예배하기 위한 수단인데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버렸다면
이것은 가치의 전도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로 시작한 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되어 간다면
그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나만 억울한게 아니다
남자는 하늘에서 왔고 여자는 지구에서 왔습니다. 같이 지내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남자는 여자처럼 돼야 되고 여자는 남자처럼 돼야지 잘 지낼 수 있다고 봅니다.
여자들을 위한 조언.(남자들은 보지 마세요)
남자는 원래 생각이 없는 존재입니다. 무뚝뚝한 고릴라입니다. 일부러 마음을 아프게 한 게 아닙니다. 나쁜 존재가 아니고 멍청합니다. 바보 입니다. 여러분처럼 섬세하고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나쁘지 않습니다. 착합니다. 그래서 봐주세요. 여자가 할 일은 조용히 참고 참고 참는 것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상처를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멍청한 놈을 나쁜 놈으로 만들지 마세요.
두번째, 여자가 할 일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자의 기억력이 지나치게, 엉뚱하게 좋습니다. 남자가 생각이 없다면 여자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기억 상실이 필요합니다.
세번째, 여자가 할일은 궁금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알아서 뭐하게요? 마음만 아플 것입니다. 모르는 게 약입니다. 남자처럼 뭘 모르고 살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요.
하늘에서 오신 우리 남자/바보/고릴라 잘 모셔야죠.
남자들을 위한 조언.(여자들은 읽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취약하고 예민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꽃처럼 지극히 조심스럽게 대해야 합니다. 호르몬이 남자와 달라서 언제 삐지고 언제 기죽고 언제 아프할지 모릅니다. 은하계의 원리는 알 수 있지만 여자는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부처님도 모르실 겁니다. 알려고 하면 안됩니다. 머리가 터질 수 있습니다. 그냥 호르몬의 불균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남자가 할 일은 2% 친절입니다. 2% 더 친절하고 2% 더 따뜻하고 2% 더 관심을 가지고 2% 더 신경 써야 합니다. 부드럽게 상냥하게 온화하게 대해야 합니다.
두번째, 남자가 할일은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디 가지 마세요.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겁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관심입니다. 작은 관심과 배려와 격려가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세번째, 남자가 할 일은 집안 일을 돕는 것입니다. 많이 도우라는 말은 아니지만 마음을 좀 내라는 말입니다. 여자들이 고맙게 생각합니다. 집안 일 돕지 않는 남자는 현대시대에 잘 맞지 않습니다.
사실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살면 잘 될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나마 잘 하고 있는 거죠.
나만 억울하다는 생각은 정말 아닙니다. 서로 억울한 겁니다.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는 영원한 코메디이자 비극입니다.
남자는 바보,
여자는 좀 미쳤어요.
서로 봐줘야죠.
홍목사가 예수 믿으라 말하지않은 이유
내 마음 아프게한 곳이 고향
요즘처럼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살기보다는 다른 고장에 가서 사는 경우가 허다한 때에는 고향이라는 말이 참 무색해진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다 이북에서 오셨고 이사를 많이 다닌 제게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늘 난감했습니다. 복숭아 꽃, 살구 꽃이 피는 고향? 그게 어디지? 그래도 명절에 부모님께 가는 길은 귀향길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딱 부합하는 단어가 없는데, 독일어로 고향은 ‘하이마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세대는 고향이라는 말에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데, 거기엔 나치 독일이 ‘고향’을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사회국가주의 이념을 심기위한 방편으로 왜곡시킨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일환으로 많이 부르던, 한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까지 배우는 독일 민요들은 나치 독일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거의 불려지지 않고, 영화에서 보던 술집에서 목청 높여 함께 노래하던 독일인들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독일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진 제게 독일 친구들이, 함부르크가 저의 제 2의 고향이냐고 묻습니다. 국적을 바꾸지 않았어도 생활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고, 독일어로 토론하고, 심지어 독일인을 상대로 심리치유사로서 일하면서도, 이게 내 고향? 이라고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에 좀 답답한 느낌이 있습니다 .
가장 어려운 고비는, 결혼했을 때와는 달리 아이를 낳고나서였습니다. 이젠 정말 이 땅에 말뚝 박았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에 좀 들지않았던 독일 말, 기후, 거칠은 태도, 덤도 에누리도 없는 철저함 등등 거의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지고,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오그라드는 듯 했습니다. 애꿎은 남편을 향해 비판하고 짜증을 내지만, 화풀이가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불만과 우울 덩어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친구에게 그런 제 마음을 호소했더니, 자기는 독일인이면서도 늘 이방인이라는 느낌으로 산다면서, 그런 자기에게 도움이 된 책이 있다고 추천했습니다. 빌렘 플루써라는 분이 쓴 ‘이민자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책입니다. 그 책 속의 한 줄이 저의 고향이라는 관념의 감옥에 갇힌 마음을 풀어줄지 몰랐지요. 나치를 피해 어려서 브라질로 망명가 60여년을 살았던 그 분은, 자기에게 고향은 브라질이라는 땅이 아니라 자기가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독일 땅에도 작게는 제 가족에게, 크게는 저의 삶과 연결된 이 사회에서 제가 책임질 사람들이 많더군요. 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곳이 고향이구나! 한국과 독일에 있는, 또한 독일에 살고 있는 너무도 다양한 나라에서 온 수 많은 다른 ‘이방인‘들과의 연계가 바로 내 고향이구나!라는 생각에 미치자 내가 어디에 사는지는 그리 중요하지가 않아졌어요.
매일 아침 손짓으로 인사를 주고 받는 야채가게의 터어키 아저씨 투란, 유기농 슈퍼 앞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신문을 파는 루마니아 아줌마 아르젠티나, 시리아에서 동생과 둘이 피난 온 모하메드, 가나에서 온 청소도움이 에스터, 우리 집주인 독일 할머니 헬비히...모두가 제 고향들입니다. 이제는 한국에도 (다행히) 전보다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또 거주합니다. 그 분들에게 고향이 되어주시고, 그 분들이 당신의 풍성한 고향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승연(재독 심리치유사)
욕망과 괴로움을 벗어난 자여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모든 속박을 끊고
괴로움과 욕망이 없는 사람
미움과 잡념과 번뇌를 벗어 던지고
맑게 살아가는 사람
거짓도 없고 자만심도 없고
어떤 것을 내것이라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떤 세상에 있어서도
삶과 죽음에 집착이 없는 사람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다니며
다섯 가지 감각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
모든 의심을 넘어선 사람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이것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사람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는 사람
<숫타니파타>
학생 부모 교사가 서로 배우는 산골학교
» 강원도 홍천 밝은누리의 삼일학림 교육 모습
삼일학림은 고등 대학 통합과정으로 이뤄진 배움터다. 청소년, 청년, 교사, 부모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배움 숲인 학림이다. 과학, 수학 등 다른 과목 교사와 부모, 청소년이 함께 철학을 공부하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 하늘땅살이(농사)와 집짓기를 함께 배우는 동료 학생이 된다. 역량이 있으면, 청소년이 가르치기도 한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 신기했어요. 내용이 좀 어려웠는데, 질문하고 토론하는 걸 보고 많이 배웠어요.” “어른들도 우리처럼 어려워하는 게 재밌고 자신감도 생겨요.” ‘현대과학과 철학’ 수업을 마치고 청소년 학생들이 나눈 얘기다. 함께 공부한 어른들은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청소년들이 새로운 관념을 더 잘 흡수하는 게 놀라웠어요. 기존 삶에 익숙한 우리보다 더 잘 배울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밝은누리는 서울 인수마을에 어린이집과 마을초등학교, 강원도 홍천에 생동중학교와 삼일학림에서 함께 가르치고 배운다. 홍천에서는 초등대안학교를 하지 않고, 폐교 위기에 있던 작은 학교를 살리며 공부한다. 교육청과 함께 ‘온마을 배움터’를 만들어 가르친다. 마을공동체를 토대로 공교육과 대안교육이 어우러지는 교육이다.
삼일학림은 교과 선택 학점제로 운영한다. 철학수신, 마음 닦기, 역사, 하늘땅살이(농사), 집짓기, 생활기술 등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역량을 익히는 게 필수과목이다. 수학, 과학, 다른 나라 말글, 검정고시 등은 선택과목이다. 원하는 때, 주체적으로 선택하기에 수학을 포기한 채 왔던 학생이 몇 일간 하루 종일 수학만 공부하는 집중학습에 참여하기도 한다. 자기를 다시 발견하는 사건이다. 원하는 과목을 요청하거나, 스스로 기획해 공부할 수도 있다. 운동에 열심인 학생은 몸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동의보감, 침구학을 자율과목으로 설정해 공부한다. 악기를 배우거나 노래 만드는 걸 자율과목으로 신청해 공부하기도 한다.
직장생활하며 주말에 학림에서 가르치고 공부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주로 휴가 내고 연구발표를 준비할 정도로 열심이다. 공학 기술자인 친구가 학림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철학을 배우며 숨겨진 인문학 역량을 발견한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가 영어를 가르치고, 철학수신과 마음 닦기를 배운다.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는 청년이 학림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철학수신과 마음 닦기, 하늘땅살이(농사)를 배운다. 신학과 철학을 관념으로만 공부하며 살던 이들이 머리 쓰는 일을 내려놓고, 밭일과 집짓기를 배우며 철학을 몸으로 다시 익힌다.
강원도 산골마을이 노동과 기도, 쉼이 어우러지는 배움 숲이 된다. 생명평화, 생태, 서로 살림이라는 가치가 실제 삶에서 무기력하고 공허한 관념이 되지 않으려면, 관념을 현실화 시키는 교사와 부모의 삶이 중요하다. 삶은 관념을 검증하고 살아있게 하는 힘이다. 새로운 교육은 더불어 사는 새로운 삶을 토대로 할 때, 살아있는 교육이 된다.
초의와 추사의 아름다운 우정
추사가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겨있다는 소식은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에게 전해진다.
초의스님이 제주도 산방굴사에서 6개월을 지낸 이야기다.
함께 살던 아내가 죽었을때 애닲은 심정으로 애도한 시를 도망시悼亡詩라고 한다.친구가 죽었을때는 도붕시 悼朋詩 라 하고 자식이 죽었을때 남기는 시를 곡자시哭子詩라고 한다.사람들은 병에 들어서 신음할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스스로 짓는 시가 자만시이다.
한평생 시름속에서 살다보니
밝은 달도 제대로 보지 못했네
이제 머잖아 길이 길이 대할것이매
무덤가는 이길도 나쁘지는 않으리..
조선 중기때 이식이란 선비가 큰병을 앓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남긴 자만시自晩詩이다.새해를 맞이하기전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만시 한편씩 작성해 보면 어떨까요?
조선시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많은 시가 있다.그 중 추사가 먼저 떠난 그의 아내 예안이씨에게 남긴 도망시를 백미로 꼽는다.추사는 15세에 결혼하여 첫 아내를 얻었으나 일찍 죽는다.16세에는 어머니가 36세로 사망한다.어머니 나이 20세에 추사가 태어난 것이다.
추사 나이 23세에 두번째 아내를 얻으니 예안이씨이다.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 할때 뒷바라지 하던 아내가 죽는다.추사 나이 57세이니 34년의 부부인연이다.아내의 영전에도 가보지 못하는 비통한 심정을 시로 남긴다.
어찌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하소연 하여
다음 세상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날까
내가 죽고 당신은 천리 떨어진 곳에 홀로 남아
당신에게 이 비통한 마음을 알게 하고 싶다오.
추사 김정희와 그의 글씨들
추사가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는 소식은 시간이 지나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에게 전해진다.초의스님은 바로 행장을 차려 제주행 배에 몸을 싣는다.다행히 초의스님 주관으로 예안이씨의 49재를 치를수 있었다.
유배생활중 추사적거지는 외부 사람이 머물수 없었다.초의는 산방산 중턱의 천연동굴 산방굴사를 정진처로 삼아 6개월을 머물렀다. 아내를 잃은 추사의 슬픔을 위로하고 유배생활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이때의 일을 제주 대정읍지는 짧게 기록하고 있다.
초의스님은 산방굴사에서 수도하셨고 추사에게 밀다경 (반야심경)쓰기를 권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제주도 산방산 산방굴사에는 산방덕이 전설만 적어놓고 있다. 추사와 초의스님의 아름다운 우정이 깃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취는 소개하지 않고 있다.역사에 소홀하고 불교를 업신여기는 우리 나라와 관광제주의 부끄러운 한 모습이다.
난방도 없는 동굴에서 정진하는 초의를 위하여 추사는 초의 독송용 반야심경을 서첩으로 만들어 선물한다. 서첩은 목판본으로 제작되어 추사 반야심경이 유명해진 계기가 되었다.
추사가 쓴 반야심경 서첩 뒤에는 서첩을 쓴 유래를 밝힌 기문이 적혀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속의 때가 묻은 몸으로 이 경을 기록하는 것은 화중연화가 더러운 곳에서도 항상 정결하다는 것이다.생각컨데 초의가 이경을 보호하지 않으면 불교를 지키는 금강역사에게 웃음을 살것이다.단파거사(추사)가 초의가 정결한 마음으로 경전을 읊게 하려고 썼다..
추사는 시.서.화.향.차로 초의와 가장 높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추사의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으며 문중사찰을 운영하였다.그절 입구에는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는 문패가 추사글씨로 적혀 있어 웃음짓게 한다.해동의 유마거사로 불리면서 불교에 깊은 조예를 지닌 추사는 초의와 우정을 나누면서 자신의 호를 단파거사 찬파거사로 호칭했다.
단파거사는 자신의 재능을 사람들에게 베푼다는 뜻이다.보시를 인도말로 단나 파라밀이라고 한다.불심이 깊은 추사는 자신의 호를 단나 파라밀을 줄여 단파거사로 부른것이다.찬파거사라고도 하였는데 자신은 인욕보살이란 뜻이다.
육바라밀의 세번째는 인욕바라밀이다.인욕바라밀의 인도 발음이 찬제 파라밀이다.찬제 파라밀을 줄인 말이 찬파거사이다.제주도 귀양살이의 고통과 사람들의 질투와 모함을 참고 이겨 내면서 해동의 유마거사가 되고자 했던 추사를 다시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황국의 봉오리는 초지선
비바람 울타리에 정연를 맡겼구나
시인을 공양하여 최후까지 기다리니
백억의 온갖 꽃속에 너를 먼저 꼽으리라
가을 서리를 맞고 황금빛으로 피어나는 황국을 보고 추사가 읊은 시이다.
학대하는 어머니에 대한 대책
박미라의 <삶의 주인 되기>
어머니와 감정적 채무 청산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머니의 학대에 시달리는 가장, “엄마라 부르기도 싫어”
감정적 채무관계 청산이 우선
그러려면 냉정·단호해져야
경제적 독립도 필요한 듯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야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돈 없는 죄로 부모가 가진 집 두 채 중에 한 채에 얹혀사는 한심한 가장입니다. 저희 부부는 애초에 결혼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서 울산으로 도망가면서까지 아이도 낳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살았어요. 한 2년 정도.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전화를 해서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올라와서 결혼식도 하고, 아이도 봐줄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하더군요.
시작은 거기서부터입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몰래 들어와 집안을 엎어놓고. 처음엔 도둑 든 줄 알고 깜짝 놀라 시시티브이(CCTV, 폐회로텔레비전)를 확인하면 엄마입니다(엄마라는 표현도 쓰기 싫네요). 혹시나 하고 물어보면 오히려 화내며 발뺌합니다. 시시티브이를 확인했다고 말하면 집안 꼴이 뭐냐며 되레 화를 냅니다. 정말 너무 화가 나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집 한 채를 볼모로 시도 때도 없이 나가라고 합니다. 울산에서 올라올 때 5000만원을 드렸는데, 그러면 나갈 테니 그 5000만원 돌려달라고 하면 그동안의 월세라며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한테 월세를 달라고 합니까?
제 아들이 10살인데 저희가 맞벌이고 아이도 방학 기간이라 점심때 김밥이 먹고 싶다길래 돈을 싱크대 위에 놔두고 갔습니다. 그런데 또 엄마가 찾아와 그걸 보고 노발대발합니다. 아이에게 김밥을 먹이느냐고. 식당일 하는 저희 집사람더러 남의 집 식모살이하는 무식한 년이라고 욕하고, 돌아가신 장모까지 욕합니다.
솔직히 아이가 할머니 때문에 심리치료를 받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 무슨 꼬투리를 잡아 성질을 부리며 아이를 문 앞에 버려두고, 네 엄마가 올 때까지 밖에 서 있으라고 했답니다. 아이가 8살 때 맹장 수술받고 병원에 누워 있는데, 병신같이 그거 하나 못 이기고 누워 있느냐고 도끼눈을 뜨고 아이를 째려보며 말하더군요. 그때 병실 다른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친할머니 맞느냐며 혀를 차더군요. 할머니가 돌아가고 난 뒤 아이가 묻더군요. “아빠! 내가 아픈 게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아이 마음에 얼마나 상처였으면 그런 소리를 할까요? 아빠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진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가 싶었어요. 언제 한번 따뜻하게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누구 때문에 아이가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정말 그 사람에게 살의를 느끼네요. 제가 부모를 정신병자라고 표현한 것에 거부감을 느끼신 분도 분명 계실 겁니다. 허나 저는 분하고 원통해서 참을 수가 없네요. 이걸 어찌 해결할까요? 안정현
A안정현님, 저는 당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선을 넘은 행동, 사람을 무시하는 그 안하무인의 태도, 폭력적인 독설에 대해 화내고 그녀를 미워해도 됩니다. 만천하에 어머니의 악행을 고발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당신에게 위안이 된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를, 그리고 당신 자신을 그토록 오랜 시간 무방비로 어머니의 폭력에 노출시켰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머니에게 빼앗긴 돈 5000만원 때문입니까? 집이 없고 가난해서였습니까?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나요? 정말 그런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까?
제 생각은 좀 다른데, 당신이 어머니로부터의 심리적 독립을 망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선의를 기대하는 마음과 어머니의 뜻을 어기고 결혼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한데 뒤엉겨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지요. 부모-자식 관계라는,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값이 나오지 않는 관계에 빠져 현실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요?
또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미워하기 때문에 느끼는 죄의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죄의식 때문에 어머니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 어머니에게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명분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분석심리학자 융은 가까운 사람에게 느끼는 분노나 미움을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느끼는 증오나 미움 같은 감정은 심리적인 독립에 필수 요소라는 것이지요. 그는 그것을 개별화의 충동이고 본능이라고 했습니다. 즉 지나치게 밀착된 관계에서 벗어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으로 거듭나고자 할 때, 애착했던 상대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안정현님, 어머니를 미워하는 데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의 불편감, 분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세요. 당신의 극단적인 분노는 어머니와의 감정적 독립을 너무 오래 미뤄두었다는 신호입니다. 자신의 불편감을 인정하고 대책을 세웠더라면 아마 살의를 느끼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제 어머니와 당신 사이의 감정적인 채무관계를 청산하세요. 사실 감정적 채무는 편견이나 착각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감정적 채무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채무관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는 어른이라면 이제 어머니는 당신에게 타인입니다. 그녀는 당신에게 5000만원의 돈을 받고 집을 빌려준 집주인이고, 당신은 집을 사용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임차인입니다. 아이를 돌봐줬다면 그에 상당하는 비용도 내야 합니다. 형편이 안 된다면 그 또한 갚아야 할 금전적 빚으로 계산하세요.
그녀는 당신이 세 들어 사는 집의 성격 나쁜 집주인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스크루지 영감처럼 말이지요. 월세가 밀려도 임차인을 당장 내쫓을 관계가 아니니 그건 다행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녀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당신의 집에 그녀가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대책을 세우고, 당신의 가족사에 함부로 간여할 수 없게 하세요. 그럴 때 당신은 냉정하고 단호해야 합니다. 한편으론 그녀를 잘 달래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녀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원하는 게 뭔지도 들어줘야 하지요. 적절한 협상도 해야 하고요. 그건 절대 비참한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경험해야 하는 일이며, 터득해야 할 기술일 뿐입니다. 당신의 가족이 안정적 기반을 마련할 때까지 그녀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세요. 물론 완벽한 화해 같은 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세요.
큰뜻을 세웠거든 일희일비 마라
순례 중 한 청년이 이현필에게 와서는 “하나님께 큰 뜻을 품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이현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시오. 사람이 산을 등산하는 것과 같소.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큰 뜻을 중단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큰 뜻을 세우고 가다가 거의 문 앞에 다달았는데, 그곳에서 중단하고 마니 참 아쉬운 일입니다. 큰 뜻을 세웠거든 10년, 20년 만에 가서야 그 뜻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니 끝까지 참고 가야합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