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3천권 읽고 적고 음미, 독서수행
돈도 힘도 안 드는 선물 친절한 말과 눈길, 미소
자신을 받아들이면 갈등이 사라져 행복해집니다
» 사진 픽사베이.기대를 이루지 못할 때 슬픔과 분노와 답답함이 일어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삶의 목적은 갖고 싶은 것을 갖는 것 보다는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남을 있는 그대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변화를 일으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몸과 마음과 갈등이 없어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바라는 것이 없으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받아들이는 것이 목표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완벽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완벽해진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며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받아들임속에 완벽한 배우자와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괜찮습니다. 자신도 남들도 행복하게 합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을 괜찮게 하는 마술 입니다. 사실은 다 괜찮습니다. 실상을 알게 해줍니다.
받아들이는 것과 무기력은 완전히 다릅니다. 받아들임속에 스스로 나아지고 남을 돕고 세상을 더 밝게 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과 삶을 가장 자연스럽게, 가장 효율적으로 나아지게 허용하는 것입니다.
외모와 신체 조롱은 살해행위
혐오와 조롱의 손가락질, 결국 자신을 향한다
외모로 평가하는 사회에 스트레스 30대 직장인 “인격 모독인데…”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30대 직장 다니는 청년입니다. 한국 사회는 남의 얼굴이나 머리 크기 지적해서 웃고 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잖아요. 예능이나 인터넷 기사 보면 자로 재고 시디(CD) 같은 걸로 대서 비교도 하고. 누구는 굴욕이고 누구는 비율 ‘갑’이고….
얼굴 작아지는 성형수술의 사고로 사람도 죽고 했죠. 얼굴 크기 너무 따져서 희롱하는 문화, 이상하고 병적인 것 같아요. 단체 사진 찍을 때 얼굴 작게 나오려고 뒤쪽으로 옮겨서 찍질 않나. 이상하지 않나요?
제가 머리가 커요. 그런데 솔직히 모르겠어요. 나는 내 모습에 익숙할 뿐 아니라 눈이 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내 모습이 어떤지 매번 확인할 수가 없죠. 하지만 제 외모를 대하는, 모르는 사람들 태도가 늘 스트레스입니다. 길에서 쳐다보고 혼자 웃거나 유심히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어디를 가든 친구를 만나건 소개팅을 하건 공원 산책을 하건 운동을 하건 남자건 여자건 학생이건 중·장년이건….
아는 사람이 그러면 받아주고 받아칠 수도 있겠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그러니 이건 뭐…. 매번 스트레스이고 자존감, 자신감도 늘 떨어지고 고통스러운데 달리 방법이 없어요. 난 죽을 것처럼 괴로운데 아무도 이런 문제에는 별 관심도 없고….
누구는 웃겠죠. 여기도 제 고민 글 읽고 웃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남의 신체 특징 보면서 우스개 삼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언어폭력이고 인격 모독인데….
솔직히 다른 일로 힘들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을 땐 극단적인 생각도 들어요. 자살, 그리고 그 사람들 해코지해서 살해하는 생각…. 사춘기에 하는 한때 고민이면 지나가는 홍역처럼 넘기면 그만이지만 2000년대 초부터 스트레스받았고,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있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오늘 아침도 그랬고, 어제저녁에도 그랬고, 어제 아침에도 그랬고, 그제 저녁에도 그제 아침에도 날마다 그럽니다. 이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연나무
A 제가 연나무님의 글을 선택한 건 연나무님에게 드릴 조언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사연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엔 참 많습니다. 그들은 일상에서 상상할 수 없는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연나무님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외모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거나 타인의 비난과 조롱을 소리 없이 감내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면서요.
<나는 절대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다>에서 미즈시마 히로코는 ‘쁘띠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가 그것입니다. ‘쁘띠 트라우마’는, 초기에는 전형적인 트라우마처럼 심각하지 않지만 오랜 기간 반복해서 경험하면 그 역시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입니다.
사회가 지향하는 외모가 아닐 경우, 평균 범위에 속하지 않는 외모를 가진 경우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부정적 영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못생겼다고, 머리가 나쁘다고, 공부를 못했다고 특정인을 조롱하거나 손가락질합니다. 그들의 행동이야 웃음 유발을 위한 설정이겠지만, 우리는 왜 예능인이라도 된 듯 행동하는 것일까요. 저 역시 과거의 문제의식을 잃어버린 채, 엄숙주의자가 되지 않으려고 상처가 되는 농담을 해왔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네요.
외모 문제 말고도 웃음거리나 혐오의 대상이 된 이들이 많습니다. 힘이 없고, 소수라는 이유 때문에요. 여성이나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노인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사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역시 그들 중 한명이며, 내 가까운 사람들이 그들이기도 합니다. 결국 혐오의 손가락질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 조롱하고 조롱당하면서 끝나지 않을 전쟁을 하는 중입니다. 전쟁에서 서로가 만들어준 깊은 수치심으로 피 흘리면서 분노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연나무님이 말씀하셨듯 이상하고 병적인 문화입니다. 하루빨리 이 문화를 변화시키고 그 안에서 상처 입은 우리를 치유해야 합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은 브라질의 저 유명한 교육사상가 파울루 프레이리에게서 나왔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할 대상이 어디 아이들뿐일까요? 사회의 주류와 다수에서 배제된 채 ‘쁘띠 트라우마’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을 대할 때도 아주 각별하고 섬세한 태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외모에 대한 그 어떤 농담도, 심지어 그것이 칭찬일지라도 되도록 피해야 합니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셀프 디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상처 입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흘끔거리는 눈길을 보내는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는 이미 상처 입을 대로 입어서 그 어떤 눈길에도 예민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을 보며 함부로 손가락질하거나 웃는, 무감각하고 무례한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손가락질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조심스러운 건 부자연스럽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고통이 완전히 치유되기까지는, 이 비인간적이고 가학적인 문화를 끝내기 위해서는 차라리 부자연스러움과 불편함을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순리라거나 진리라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연나무님께는 병원을 찾아 정신건강과 관련한 진단과 상담을 받아보실 것을 권유합니다. 날마다, 하루에도 몇번씩 어디를 가나 그런 눈초리를 느낀다면 혹시 신경증이 깊어진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적된 상처가 만들어낸 분노와 우울감은 세상을 더 비관적으로 경험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지마요
마을 근처에 있는 주유소에 기름을 넣기 위해 들렀습니다. 진달래꽃과 같은 아가씨가 나왔습니다. 주유 호스가 좀 무거운 듯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자동차로 다가왔습니다. 카드로 결제하고 주인아저씨도 만날 겸 일부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저씨는 탁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김치찌개와 밑반찬 대여섯 개를 늘어놓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아가씨인데 누구예요?” “제 딸년입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서울에서 와서 저의 일을 거들고 있습니다.”
주유소 아저씨는 간암으로 투병 중에 있습니다. 쉽게 피곤해 하고 얼굴은 언제나 검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엷은 미소를 띠면서 말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얼마 전 공동체에 도로 보수 공사를 위해 포클레인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포클레인 기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상처로 수놓아져 있는 그의 과거를 들었습니다. 전 부인과는 이혼했고 지금은 재혼해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하나 있고 매달 그에게 생활비를 보내 준다고 합니다. 말하는 도중에 삶이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이 가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제 아내는 교회 다니는 여자였어요.”“교회 다녀도 별로던데요.”그는 교회 다녀도 특별히 다른 점이 없다는 뜻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교회 다니면서 신앙을 가져보라는 권면을 미리 차단하는 듯 했습니다.
주변 농촌 사람들의 얼굴은 지쳐 있고 침울해 있습니다. 농부들의 눈동자에서 순박함은 찾을 수 없고 ‘인생은 다 그런 거야, 별거 있겠어?’라는 표정만 읽을 수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살아오면서 수없이 벼랑 끝에 서 왔고 또 벼랑에서 추락하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벼랑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저 역시 수없이 벼랑 끝에 서는 경험을 해 왔습니다. 벼랑 끝에서는 앞을 보지 말고 뒤를 봐야 합니다. 벼랑이 높을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벼랑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억지로 끌고 갑니다. 그 후에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눅4:9).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성전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은 기드론 골짜기가 보이는 동남쪽인데 높이가 약 30m 됩니다. 마귀는 이곳에서 예수님에게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곳은 성벽도 아닌 성전 꼭대기였습니다. 가장 거룩한 곳이 시험 장소가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지켜 줄 것이라고 확실한 보장의 말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벼랑 끝에 서는 용기’에 대해서 듣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벼랑 끝에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더 나아가 벼랑 끝에서 앞으로 나가든지 혹은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말은 마귀의 속삭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번지 점프하듯이 멋진 자세로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천사의 도움이 없이도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은 다치지 않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벼랑 끝에는 서셨지만 뛰어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6:16).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시간적으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약 1500년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때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30m 아래에 관심을 갖지 않고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작고 큰 벼랑에 섭니다. 그럴 때마다 뒤를 돌아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삶속에 개입하셨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벼랑 끝에 서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 환경과 사람에 의해 서게 됩니다. 떠밀려서 서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벼랑 끝에 서야 삶의 본질에 대해서 숙고합니다. 이때가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정화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벼랑 끝에 서 있습니까? 벼랑 끝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뛰어내리려고 결심하지 마십시오. 만신창이(滿身瘡痍)만 될 뿐입니다. 오히려 수많은 벼랑 끝에서 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 보십시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순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지금 있는 벼랑 끝에도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겨드랑이에서 천사의 날개가 돋아나고 있지 않다면 벼랑 끝에서는 뒤를 보십시오. 벼랑 끝에서 내려올 수 있는 길은 앞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쪽에 있습니다. 그 길은 분명히 하나님이 나와 동행했던 길일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강하고 다급하게 명령하십니다.
“뒤로 돌아!”
두려워말고 쫄지말자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제 반년 지나면 40대의 나이와 작별을 하게 되는 남성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스스로는 청년이라고 자부하는데, 벌써 50이라는 숫자와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무척 낯설어 울적한 기분이 자주 든다고 했습니다. 승진을 하지 못하면 조만간 퇴직해야 하는 것이 그 직장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워 요즘 불면증이 심해졌다고 합니다.
가끔 고등학교 동창생 단체 카톡방에 들어가 보면 임원으로 승진해 축하 세례를 받고 있거나, 주요한 공직에 발탁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동창생의 소식에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당당하고 쿨하게 축하 인사를 건네려 하였지만 웬일인지 그렇게 되지 않았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없이 무기력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더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고도 합니다. 퇴직 이후를 대비해 많은 강연도 듣고 책도 읽었지만, 자신에게 적합한 뾰족한 묘책이 보이지 않아 더 답답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짜증을 내게 된다는 하소연입니다.
요즘 직장인들이 바라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돌파구’일 겁니다. 인생에 어떤 전기를 마련해줄 변화의 시점을 엿보고 있습니다. 사연을 보내주신 분처럼 운명의 전환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스로 사회생활의 패배자라 느끼는 루저 의식에 젖으면 젖을수록 그 절박함의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답답해요, 정말! 확실한 어떤 터닝 포인트 없을까요?”
회식 장소나 강연장에서 이런 하소연을 듣습니다. 꼬여버린 인생에 모두들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인생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잘난 부모 밑에서 뛰어난 두뇌를 갖고 태어나고, 잘생긴 용모로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인기를 독차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모의 재력을 믿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지인들을 보면 솔직히 부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확실하게 공평한 것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한번도 전교 수석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우등생 동창생과, 김태희 같은 미모로 평생 질투심을 유발한 잘난 친구도 나이를 먹습니다. 서른, 마흔, 쉰, 그렇게 세월 앞에 노출됩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성공한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 또 다른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는 ‘2막 인생’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2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3막, 4막까지 다양한 인생을 사는 분들도 보게 됩니다. 직업이 다르고, 여건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준비를 하라고 함부로 권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저의 경험을 빌려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아노미 현상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졸업하고 또 다른 세상에 나오게 되면 일종의 아노미 현상에 노출됩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규범이나 질서가 깨지고 새로운 것이 찾아오기 이전까지의 혼란스런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그 혼돈의 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에 따라 적응도 결정됩니다.
두번째, 2막 인생은 여행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여행은 미지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는 설렘이 있는 반면, 익숙했던 기득권에서 벗어나 아웃사이더가 되는 체험이기도 합니다. 잘하면 관습이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야를 발견하는 소득도 있지만, 언어가 안 되고 지리에도 서투르면 무능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자칫 바가지를 쓰거나 불쾌한 경험도 하게 됩니다. 설렘과 불안감, 어느 쪽에 방점이 찍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제2의 인생은 결정됩니다.
그런 점에서 소셜미디어에서 요즘 자주 만나는 한 분의 2막 인생은 신선하게 들립니다. 최근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분으로, 은퇴 후 곧바로 고향에 내려가 사과농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습니다. 노동의 아름다움과 고단함, 그러면서도 현장의 어려움을 가감 없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가끔 편의점에서 알바를 겸하고 있는데, 그 장면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 있게 전해옵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도 명문대학 교수를 지냈으면 체통을 지키라고. 퇴임 후 아무것도 없는 사과장수가 무슨 체통이 있나? 사과든 컵라면이든 잘 팔면 최고지. ㅋㅋ”
“한여름에 과수원에서 일하다 보면 사우나 저리 가라다. ‘내노남로’다. 내가 하면 노동이고 남이 보면 로망이다.”
세번째, 안정되고 흥미진진한 2막 인생이란 말은 형용모순입니다. 투자에서 고수익과 리스크는 언제나 동반하듯이 제2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리스크 없는 투자는 없습니다. 제2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위기인가, 기회인가? 피할 수 없는 게 2막 인생이라면 저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방점을 찍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사소한 차이가 결국은 인생의 태도를 좌우하게 됩니다.
네번째, 나만의 ‘골든 트라이앵글’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면서 누구보다 잘하는 일, 그러면서도 시장이 원하는 일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세 가지 조건이 합해졌을 때 비로소 나의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익과 보람, 미래가 함께 찾아오는 황금의 삼각형이지요.
이 시대는 하나의 직업, 하나의 직장을 완주하고 끝나는 인생이 흔치 않습니다. 끝없는 변신을 요구합니다. 무미건조한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힘들어도 이겨내야 합니다. 예상보다 흥미진진한 일이 많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다섯번째 말씀은 따라서 이겁니다.
“노 피어(No Fear)! 두려워 말자. 쫄지 마라!”
왕중 왕이 왜 그렇게 사셨나요
야곱에게서 한 별이 솟는구나, 이스라엘에게서 한 왕권이 일어나는구나. 그가 모압 사람들의 관자놀이를 부수고 셋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리라.’
하느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별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알려진 예수님을 일컬으신 것입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 분은 유다를 점령하고 핍박하는 로마인들의 관자놀이를 부수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저 고얀 대제사장과 바리사이의 후손의 정수리를 모조리 부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오히려 그들로부터 유다인의 왕이라는 비웃음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는 그나마 걸쳤던 천 조각마저 빼앗긴 채 도둑놈, 강도들과 나란히 나무 막대기에서 돌아가셨습니까.
그러고도 솟아나는 별이요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실 수 있습니까.
옆에서 조롱하던 도둑놈 말마따나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도 살고 우리도 살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하여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온통 맑은 수정 같은 순금으로 된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영원무궁 살게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 저 들판의 표범은 왜 저리도 순하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사슴을 잔인하게 찢어 죽이는 것입니까.
이 지구상에서 일 년에 1200만 명이나 되는 당신 자녀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어찌하여 다른 쪽에서는 곡물창고에 곡식을 수억 톤씩 쌓아놓고 썩지 않게 독한 방부제를 뿌려대고 있는 것입니까.
애당초부터 선악과도 안 만드시고 사탄도 안 만드셨으면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도 없었을 거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끔찍한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왜 그리 어렵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까. 야곱에게서 난 별이요 왕 중 왕이라는 분이 하필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나서 부귀영화 장수만복과는 거리가 먼 짧은 인생을 살다가 비참하게 가셨습니까. 평생에 데리고 다닌 자들도 왜 하필 거지, 창녀, 세리입니까. 그러니까 당신께서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극구 칭찬하신 세례자 요한조차도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은 것 아닙니까.
어리석은 우리 머리와 가슴으로는 당신 삶과 죽음이 왕의 그것, 하느님의 아들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또다시 당신 가르침을 우리 구미에 맞게 고쳐, 살아계실 때는 고난 중에 계셨지만 부활하신 뒤에는 왕 중 왕이 되시어 권세를 가지고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신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당신을‘주여, 주여’하고 불러대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 그 옆에서 권세를 조금 나누어 받고 장수만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왕이란 누구인가요. 남을 지배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왕 아닙니까. 당신은 도저히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삶을 사시고, 그 이름에 걸맞지 않는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돌을 빵으로 만드셨더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손으로 받아내게 하셨더라면, 더 이상 아무 말씀, 아무 행동 안 하셨어도 사람들은 당신을 왕 중 왕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받들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거지와 병든 자의 친구로 지내셨지만, 어리석은 우리가 믿는 대로, 부활하신 뒤에는 황금빛 도성 높은 옥좌에 앉으셔서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려도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는 권능을 누리시고 계십니까. 그래서 이를 믿는 자들에게도 역시 황금과 수정으로 둘러싸인 거룩한 성에 살도록 축복을 나누어주실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왜 세례 받으러 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한 저주와 욕설을 하는 것입니까.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이 독사의 족속들아, 누가 천당 가려면 예수를 믿으라고 가르쳐주더냐.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요 스승이라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하느님은 나, 예수의 이름도 모르는 채 한 세상을 살아간 어느 미개 부족 사람을 가지고도 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려 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게 하신다.’
예수님, 그런데 당신과 함께 숨 쉬고 땀 흘려 걷고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병을 고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제자들조차 누가 하느님 나라에서 옆자리를 차지할까를 놓고 서로 다투지 않았습니까. 당신께서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는데도, 그들은 그저 나중에 영원한 하늘나라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에서 이승의 고난쯤은 참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그렇지만 당신께서 말씀으로 행동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가르치신 것이 야곱의 별이니, 왕 중 왕이니, 죽어서 천당이니 하는 말들로 대변되는 부귀영화와 장수만복에 이르는 비결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 왕 가운데 왕이라는 당신께서 삼십 평생 짧은 삶을 그렇게 힘들게 보내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오래 전 던졌던 이 무지막지한,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 물음의 답을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김형태 <공동선> 발행인
<공동선 2018. 1, 2월호>
괴로움은 세가지가 부족한 때문
수행자라면 마땅히 나에게 닥치는 모든 일이 내가 뿌린 업보임을 알아야한다. 재산이 마음대로 늘지 않는다면 베풀지 않고 인색한 결과이다. 나의 말을 다른 이들이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은 쓸데없는 말과 거짓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나의 능력을 펼칠 기회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다른 이의 성공을 시기 질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내가 사람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생겨나는 모든 괴로움은 세 가지가 부족해서 생겨난다.
1.지혜가 부족하고
2.자비심이 부족하고
3.공덕이 부족해서이다.
내가 타고난 복의 그릇을 아는 지복(知福), 주어진 복을 아끼는 석복(惜福), 자비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복을 많이 짓는 작복(作福)의 한해가 되기를.ᆢ
새해에는 나이에서 앞자리 숫자 빼고 애들처럼 재미나게 살아요.
무엇보다 오늘을 즐기세요
예전에 초등학교 때 새 학년이 되면 선생님들이 [생활환경조사]를 했다.
부모님의 학력, 직업에서부터 사는 집의 평수까지 조사하는 일이었다.
하루는 어느 학급에서 생활조사를 하던 중,
'외식을 몇 번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1주일에 한 번 한다는 아이들이 가장 많았고,
1주일에 두 번, 2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한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은 끝까지 손을 들지 않고 그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학생을 보며 물었다.
"너는 왜 손을 들지 않았지?"
학생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저희는 1년에 단 한 번만 외식을 해요."
선생님은 더욱 궁금해졌다.
"1년에 단 한 번 외식을 한다는 녀석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고 있는 거니?"
그러자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그날이거든요!"
+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오늘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오늘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일부터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이 오늘을 죽이는 생각이며 다음부터 잘 대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관계를 망치는 길입니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인생’은 ‘오늘’이라는 한 페이지가 모이고 모인 두꺼운 책입니다. 행복한 책을 갖고 싶으면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행복한 글을 써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단이 모여 행복한 글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오늘은 행복한 날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듯이 하루 하루가 쌓여 생애를 형성합니다.그래서 오늘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야 할 시간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잘 살기를 소원합니다.
'금실'좋다는 것은
인도 동굴에서 조정래가 만난건
8년 뒤 인생 마지막 작품 ‘영혼과 내세’ 찾아 글 고행
<조정래 작가 북인도 3200㎞ 순례>
»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최초로 설법을 해 다섯명의 도반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바라나시 인근 사슴동산에서 명상 중인 휴심여행 참가자들
» 싯다르타가 6년간 고행한 둥게스와리(버려진 땅)의 산 동굴 안 붓다고행상 옆에 선 조정래 작가
‘버려진 땅’ 둥게스와리 동굴 2600년 거슬러 싯다르타 앞에 섰다
앙상한 고행상 오래도록 응시한 뒤 밖으로 나선 그의 얼굴이 빛났다
“동굴 속에서 느낀 영적 체험 소설 속에서 보게 될 것”
구원 품고 흐르는 갠지스강 물안개엔 그가 토해낸 현대사 피울음 아스라이
20여년 동안 꼬박 하루 16시간씩 스스로를 가둔 글 감옥
인간 존중 없는 문학은 문학 아니라며 중생이 아프니 그도 아팠다
» 인도의 고도 바라나시 강의 화장터
그의 아버지 ‘승려 조종현’도 아른아른
조정래(75) 작가가 인도로 떠났다. 구랍 21~31일 북인도 3200킬로를 달리고 또 달렸다. 8년 후 인생 마지막 작품으로 구상 중인 ‘영혼과 내세’에 대한 소설 취재를 겸한 순례였다. 그는 “더 나이가 들면 장거리 여행이 어려워질 수 있어 미리 왔다”고 했다. <한겨레> 휴심여행’에 참여한 40여명과 함께였다. 여행다운 여행의 마침표가 될지도 모를 조작가의 여정엔 조작가의 장편소설들을 탐독한 골수펜들이 빠지지않았다. 한 40대 여성은 해외 여행을 거의 해본적이 없지만, 조작가와 여행할 수 있는 기회여서 무조건 신청했다고 말했다. 조작가로부터 가보로 남길만한 글귀를 받고 싶어서 신청 마감을 넘겨 사정사정해 온 참가자도 있었다. 애장서인 조작가의 책에 사인을 청하는 것은 기본이고, 조작가의 부인 김초혜 시인과 손자가 주고받은 글을 담은 최근작 <행복편지>를 가져와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첫 방문지는 가장 인도다운 고도 바라나시였다. 짐을 풀고 마자 릭샤는 전장 같은 매케한 매연을 뚫고 갠지스강으로 향했다. 빼빼 마른 인력거꾼은 두사람의 무게가 실린 페달을 힘겹게 밟으면서도 인파와 소와 개들의 난장판을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나룻배를 타고 강으로 나아가자 화장터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강가 화장터에서는 대여섯 곳에서 동시에 주검을 태우고 있었다. 어느 곳은 불이 거세고, 어느 곳의 불길은 초라했다. 주검을 태울 장작 살 돈마저 부족한 빈자와 장작값 정도는 개의치않는 부자는 불길마저 확연히 달랐다. 그 건너편으로 영혼을 정화한다는 힌두교 의식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가촉천민’(접촉해서도 안된다는 최하위 계층)일듯한 빈자들마저 최상위 카스트(계급)인 브라만 사제의 근엄한 몸짓에 눈을 고정한 채 구원을 갈구했다. 여전히 관습상 카스트 계급이 사라지지않고, 이를 종교 진리의 이름으로 수호하는 갠지스강은 온갖 혼돈을 삼키며 유유히 흘렀다.
» 생의 마지막 작품 취재를 위한 이번 여행에서 느낌을 기록중인 조정래 작가
고타마 싯타르타는 영롱한 설산 옆 고향을 떠나 왜 이 아수라장으로 나왔을까. 조작가는 안개속 어둠을 응시했다.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찾으려는 순례자의 눈빛이었다.
자욱한 강 너머엔 그가 토해낸 현대사의 피울음이 아스라하게 물안개로 피어올랐다. 만해 한용운이 만든 항일독립운동지원단체 만당의 자금책으로 활동하다 해방 후 서북청년단에게 맞아 엉덩이에서 구더기가 슬던 그의 아버지 ‘승려 조종현’을 그린 <태백산맥>의 ‘법일’이 거기 있었다. 분단된 땅에서 불가촉천민이나 개·돼지처럼 취급됐던 빨치산과 좌익들의 한도 서리처럼 어려있었었다.
중생의 병은 무지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심에서 온다고 했던가. 중생이 아프니 그도 아프지않을 수 없었다. 조 작가는 1983년 인도 초행길에 문학인들과 갠지스강에 왔을 때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당시 문학인들이 ‘저게 사는건가’라며 인도인들을 짐승처럼 경멸하자 가슴에 비수가 꼿히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고 했다.
‘혁명가 붓다’의 삶과 길 따라
다음날 일행은 애초 예정에도 없던 둥게스와리행을 감행했다. ‘둥게스와리’는 ‘버려진 땅’ 이란 의미다. 싯다르타는 ‘주검을 버리던 땅’으로 찾아들어 6년간 고행했다. 조작가는 무리한 일정으로 초반에 감기에 걸렸음에도 흔쾌히 산중턱에 올랐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신분을 버리고 고행승이 된 싯다르타가 주검을 싸맨 옷을 주워 맨몸을 가리고 오르던 그 길이었다. 산길엔 여전히 버려진 사람들이 구걸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동굴의 출입구는 몸을 낮추게 했다. 허리를 깊숙히 숙이고 들어서자 어둠 속 대여섯평쯤의 동굴이 드러나고, 정면에 고행상이 있었다. ‘구원의 손길을 청할 데라곤 없는 이 버려진 산의 동굴에서 갈비뼈가 훤히 드러나도록 고행한 그 싯다르타였다. 원불교 서울교구장과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원로인 이선종(74) 교무는 “사람들은 보통 깨달은 뒤 석가모니의 광명만을 기억하지만, 그 빛을 낳기 전 처절한 고행이 있었다”고 말했다.
싯다르타가 스스로를 가둔 동굴은 조 작가에겐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고싶으냐며 경영학과를 가 편히 살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청을 물리치고 ‘굶는과’로 불린 국문과를 택한 결단이었고, 20여년간 하루 16시간씩 자신을 가둔 글감옥이었다. 또 빨치산들을 다룬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빨갱이 아니냐’며 11년간 조사를 받아야했던 굴욕이었다.
» 싯다르타가 왕위계승자의 지위를 버리고 탁발 고행승이 되어 찾아온 둥게스와리산을 오르던 조정래 작가가 구걸하는 아이들과 옆에 앉아있다.
»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대탑에 있는 석가모니 불상의 모습
그 어둠의 동굴에서 조 작가는 2600년의 시간을 넘어 고행승 싯다르타 앞에 섰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급 차별이 가장 심한 이곳에서 왜 당신은 ‘모든 사람이 다 부처’라고 했나요. 귀족이 노예쯤은 때려죽여도 별 죄가 안되는 그 시절에 왜 어떤 생명이든 해쳐서는 안된다고 했나요. 왜 신으로 숭배 받을 수 있었는데도 자신을 숭배하지말고 진리를 깨달아 스스로 그 길을 가라고 했나요. 그 오랜 화두를 묻듯이 싯다르타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 동굴을 나섰을 때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깊고 빛났다. 조 작가는 그 산을 내려와 “동굴 속에서 느낀 영적 체험을 소설 속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순례는 ‘사람이 곧 부처’라는 <법화경>을 설한 영축산과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 길에서 죽는 순간에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구제하려 최선을 다했던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로 이어졌다. 그 모든 여정엔 버러지 취급을 받는 당신도 바로 부처라는 ‘혁명가 붓다’의 삶이 있었다.
“아내는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
참가자들은 고단한 순례중 ‘인간 조정래’에 대한 탐구도 놓치지않았다. 단연 인기를 끈 화제는 조작가와 부인 김초혜 시인과의 러브스토리였다. 대학 2학년 때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잘 나가던 김초혜’와 일등병으로 결혼을 감행한 조 작가는 신혼초부터 자신이 연탄을 다 갈고 연탄재를 버리고, 김치독을 묻고 설거지를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도 부인에게 커피 타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않은 채 김 시인이 섬섬옥수와 감수성을 유지케 돕고있다고 한다. 조 작가는 부인에 대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라며 닭살 돋는 자랑을 태연자약하게 했다. 여성참가자들은 “붓다만 혁명가인줄 알았는데, 벌써 50년 전부터 조작가도 남성우월주의를 벗은 혁명가였다”고 호응했다. 특히 외아들에게 자기 욕심을 투사해 삶의 결정권을 침해하지않고, 그 아들 결혼식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않고 양가에서 50명씩 딱 100명의 가족들만 불러 치른 철저함엔 ‘또다른 수도승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노성자 교무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누구나 홀로 선 나무/서로 가지를 뻗어/어깨동무를 하여 숲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조 작가의 시를 읊조리며 삶을 평했다.고행승 싯다르타가 45년간 길에서 고통 중생들과 고락을 함께 했듯이, 조작가가 글감옥에 있으면서도 가족 및 현대사의 상흔을 지닌 이들과 어깨동무하여 아픔을 나누며 숲을 이루어가도록 추동해왔다는 것이다.
인도 휴심여행 순례기
송태호씨(63)
이번 인도 여행은 그동안 해외여행에서 느낄 수 없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충격과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과 유익함이 혼재된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인도라는 나라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사상, 종교, 계층, 인종, 문화가 서로 뒤엉켜 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포용하면서 다름을 녹여내어 현재의 인도라는 주형물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서 ‘혼돈의 용광로’라는 표현을 해 보았습니다.
길가에서 본 최하층민들의 모습에서는 ‘불결하다’는 단어를 모르고 사는 것 같은 충격과 그런 최악의 환경에서도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에 경외감마저 느꼈습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볼 때마다 같은 인간으로서 왜 저들은 저렇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함께 슬픔과 괴로움이 교차하면서 여정 내내 제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이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준 것은 여행을 함께한 주변분들의 따스한 마음과 살갑게 대해 주는 친밀함이었습니다.
특히나 조작가님의 특강에서 말씀하신 투철한 작가의식과 올바른 역사의식. 나아가 한 여성만을 지고지순하게 평생동안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 이 말씀은 저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시는 사자후로 들렸습니다. 앞으로 제 삶의 지향점에 이정표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인도와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책 내용만 전달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달해 주셔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조기자님의 그간의 지난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칠순이 넘으신 연배에도 활기차게 제반 사회운동을 하시고 계시면서 느끼신 생각을 실감나고 유머스럽게 토로하신 이선종 교무님을 통해서는 앞으로 나이든 분들이 본 받을 롤 모델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행적을 볼 때마다 초라하고 못난 저로서는 그저 감동과 반성만을 되풀이 했을 뿐이었습니다. 책을 보는 것과 현장에서의 느낌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라는 것도 절감했습니다. 이제 저는 종종다리 까치걸음으로 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열흘 동안 제가 보고 느낀 소중한 추억들을 제가 괴롭고 흔들릴 때마다 호미로 캐면서 위안 삼으면서 살아가렵니다. 이번 한겨레 인도 여행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서 부처님의 위대하고 숭고하신 깨우침을 화두 삼아 각성하시면서 살아간다면 보다 의미 있고, 보람 있고 향기 나는 삶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옥자씨(66)
서둘러 나선 여행길에서 문득 떠오른 단어가 ‘빛’이었다. 볼 수있는 유일한 것-빛! 빛이란? 솔직히 빛 너머의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 인도의 빛깔(빛의 겉모습. 색?)은 다양했다. 색 밀도 세계 제일일듯. 가이드의 설명도 5km 밖은 다른 모습이라 하였다. 내 눈엔 1m 밖이 다 다른 색이었다. 찍은 동영상을 소리없이 틀어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너저분하고 위험해 보이고 뭔가를 깨달아야하는데 어렵기만한 3D의 나라가 시간이 지날수록 역동적이고 다양하고 명확한 답을 주는 나만의 3D로 다가왔다.
이제 그 너머로 가고 싶었다. 몸? 마음? 영혼? 하드웨어, 전기에너지, 소프트웨어? 재미없다 싶어 내 주의를 이리 저리 마구 옮겨보았다. 재밓었다. 400nm에서 800nm까지의 세계를, 빛의 세계를 벗어나는 재미를 맛보았다. 짧은 시간에 이런 찐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는 것은 무엇보다 조현기자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태초에 빛이있어라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사랑)이 있어 빛이있었다는 성경말씀(펙트첵크 안됨)처럼 빛은 소리에너지의 전환인지 조현 기자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빛 넘어의 세계를 넘보게 해주었다. 더불어 함께한 여러분들의 한결같이 잔잔한 파동이 거슬림없이 공진되어 요동치는 강력한 에너지 장이되어 여행의 피로감을 완전 녹여버렸다. 나는 그 넘실되는 파동에 몸만 실으면 되었다. 정말 여행의 피로감이 이리도 없음에 놀랍다. 아니 한꺼번에 닥쳐올까는 의심이 들어 살짝 두렵기도 하다.
장권익씨(61)
눈에 보여진 것들을 지워야 본질을 알 수 있을까? 온갖 다양한 삶들 속에 인도의 신비가 감춰져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젠 휴심여행을 잊고자 한다. 온전히 내 것으로 소화를 시키고자 함이다. 인도 어린이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겐 지어낸 애처로움은 있을지라도 그들의 눈동자에는 사악함이 없었다. 빈부의 격차 따위는 자신들하고 상관없는 것이고 오롯이 지금 살아내는 것일 뿐이었다. 전정각사에서 만난 한국인 장도연씨의 눈동자에는 연약함에서 강인함이, 강인함에서 초연함과 평온이 담겨 있었고, 중생을 위한 열정이 가득했다. 나에겐 ‘이대로 괜찮은가?’를 화두로 출발한 여행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알고 있지않는가. 지금 내 모습은 거짓일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다. 이젠 제 2의 삶인 후반전을 지금껏 살아온 정신으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이름도 지위도 다르게 받지만 오직 행위만이 남아 삶이 결정된다는 환생! 환생을 망각한 비빔사라왕의 감옥터에서 우리는 앉아 있었다. 조기자님은 불교는 끊임없는 혁명 즉 자기혁신이라고 했다. 스스로 허물을 벗는 행위일 것이다. 누구나 부처이다.
“삶은 앵무새 꼬리를 잡아 계단을 질질 끌고 내려가는 고양이였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그의 머리가 부딪쳐 쿵쿵 뛰어 올랐다.” (시대의 소음 중 발췌)
내 삶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달 돈에 휘둘리며 일희일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겹고 삭막한 일인지 안다. 산다는 몫의 부채일 뿐인 삶을 이해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 나는 인도에 갔는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 나는 인도로 갔는가?
이은정씨(46)
삶 죽음 삶..그 윤회의 여정을 극명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열흘이지만 천년같은 시간이었습니다.‘몇 년 전 부터 포장된 역할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참나’로의 인생여정에 들어섰어요. 그 동안 제 인생 중에 몇번의 유사죽음의 시간의 줄에 걸린 거미같은 절 느끼게 됐어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쳤지만, 역설이 필요한 때에 극과 극의 모순의 덫에 들러붙어 있으면서 지치고 숨만 꼴딱거리며 죽지도 못하고 버둥대는 삶이었지요. 이런 삶의 순간에 양극단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역설은 ‘공부와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자체가 공부지만,내면으로의 여행이 배제된 외부로 향한 여행은 죽음이 없는 삶이나 삶이 없는 죽음처럼 허망한 가면축제마냥 진실된 자연과 역사와 문화을 만나는 자신을 기만하고 나아가 만물에 깃든 영혼을 조롱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인도 휴심여행은 내면과 외부로의 여행이 선명하고 깊이있게 잘 조화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공부였으며, 제 앞으로의 삶에 꼭 필요했던 보석같은 자원을 캐어내고 지니고 가게되는 운명적인 만남이고 기회였습니다.(굿)
다시한번 그 여정을 동행해주신 여러 선생님과 긴밀한 애정으로 함께 해주신 부처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엔 파도 사이에서도 쉬세요
새해를 맞는 자정을 기해 독일 전역의 밤하늘은 현란한 빛깔과 다양한 모양의 폭죽으로 가득합니다. 동네 거리에서 공원에서 부두에서 어디서건 누구나 쏘아올리는 폭죽의 빛깔은 환상적이지만, ‘불꽃놀이’라는 예쁜 우리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은, 폭발하는 소리와 화약냄새, 자욱한 연기가 아마 전쟁터가 이럴 것이라는 연상을 일으키기 때문일겁니다. 어린이와 노인들, 특히 개들은 폭죽소리에 엄청난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모든 창문을 닫고, 안심시켜 주어야 합니다. 지나간 나쁜 일들은 폭죽에 날려 버리고, 새해에 끼어들 ‘액’은 폭죽소리에 겁이나 도망가기를 기원하는 것인데, 매해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독일에서 공중에 쏘아올리는 돈은 수 십억에 달합니다. 전세계적으로 살상의 전쟁 무기에 쏟아붓는 돈을 생각하면, 폭죽에 쓰는 돈은 새 발의 피 정도도 아니고, 아무도 죽지않고, 악귀를 쫓아내는 굿 같은 심리적인 효과도 잠시나마 있을 듯 합니다. 설날 아침, 거리는 아직도 매캐한 화약냄새와 폭죽의 쓰레기들로 환상적이던 전날의 불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고, 파티로 늦게까지 술 마시고 춤 춘 도시는 늦잠을 자고 있지요.
아직 여섯 식구가 한 지붕 아래 함께 살던 시절 우리 집의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온 집안을 환기하신 어머니, 아버지는 맞절을 하셨고, 떡국을 먹기 전, 우리 삼 남매는 할머님과 부모님께 세배를 드렸습니다. 맑은 공기와 햇빛, 온화한 안방의 장판지 색깔, 흥미진진하게 기다리던 세뱃돈, 애써 만든 만두를 드디어 먹는 기쁨. 그 당시 한국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고, 성탄과 신년 전야에만 해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는 자정엔 서울시내가 북적거렸고, 종각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시장이 33번 종을 쳐 새 하늘을 조각조각 열었습니다. 서양의 종은 그 자체가 흔들리며 화려하고 연속적으로 울리는 반면, 한국의 종은 사람이 온 몸으로 직접 치고, 소리는 깊고 온화하며, 한 타종에서 다음 타종 사이에 쉼이 있습니다. 그 쉼 속에서 우리는 종소리의 여운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침묵합니다.
타종 사이의 쉼을 생각하며, 예술은 ‘한 파도와 다음 파도 사이’라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달려가면서는 제대로 볼 수 없고 제대로 들을 수 없지만, 멈추어 쉬면서 우리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촛불집회 때의 ‘파도타기’가 생각나는데,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 참 부럽습니다. 거기에도 쉼이 있었습니다. 촛불의 파도가 끝을 알 수 없는 저 만큼 뒤에 있는 곳에 닿을 때 까지 먼저 일어난 파도들은 쉽니다. 기다려주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기준을 고수하기 위해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마음을 열어놓아 아주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촛불집회의 파도타기가 그렇게 감동적인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이면서도 하나로서 깨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폭죽의 화려함과 악귀추방의 기원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라면, 파도타기는 우리 자신들의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소리없이 일렁이는 파도로 흘러나와 대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동은 순간으로 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올 한 해, 갓난아이처럼 모든 것이 아직 열려있는 한 해. 작고 큰 파도들 사이에서, 타종과 타종 사이에서 쉬실 수 있길 빕니다. 그리고 부디 옆사람들도 좀 쉬라고 격려해주세요.
침묵하며 산골을 둘러보니
» '맨발의 성자'고 이현필 선생이 설립한 벽제 동광원 방문 때. 사진 조윤하 기독교청년아카데미 사무국장 제공
한국의 여러 공동체와 수도원, 템플스테이, 농촌체험마을 등을 침묵수련 겸해 다닌 적이 있다. 말없이 다닌 것이라 사람들과 얘기 나누고 사귀지는 못했지만, 말로 얻을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기도에 집중하는 것도 좋았고, 하늘땅 느끼며 말없이 걷는 것도 나를 새롭게 해 주었다. 다니면서 말을 할 필요 없게 미리 준비하고 떠났지만, 산골을 다니는 버스도 드물고 차 시간도 미리 알아둔 것과 달라 난처한 일을 자주 겪었다.
입 가리개를 하고 꼭 필요한 소통은 쪽지 글로 하다 보니, 말 못하는 사람인 줄 알고 도와주려는 분도 있었다. 말은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니, 오히려 말을 더 걸어오기도 한다. 조용히 홀로 다니며 기도하는 데 방해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고마운 마음이다.
며칠 씻지 못한 채 말도 하지 않고 다니다 보면, 괜한 경계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아빠, 저 아저씨 도와드려야하지 않아?” 하는 아이도 있다. 눈빛은 잔뜩 경계하면서. 어떤 애기는 나를 한참 봐서, 나도 웃어주었더니, 무섭다며 운다.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일도 생기지만, 다니면서 만난 많은 사건들은 그것대로 다 좋았다. 방문한 곳에서도 말없이 기도하며 많은 걸 보고 느꼈다.
벽제 동광원. 사진 조윤하 기독교청년아카데미 사무국장 제공
알려진 것과 실제 모습 간에 차이가 큰 만큼 위태롭다. 프로그램이 잘 갖춰지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때부터 위험이 시작된다. 정부나 지자체, 기업 후원을 받아 큰 건물을 짓고 화려한 선전을 한 만큼 그것이 오히려 자기 생기를 짓누르는 짐이 되는 곳들이 많았다. 마을 지원 사업을 많이 유치해 잘 알려진 분은 이제 정작 본인은 그 마을에서 살기 어려워졌다고 하소연 한다. 마을에 돈이 많이 들어오고 유명해지면서 오히려 위기가 찾아 왔다고 한다. 돈과 명예 때문에 관계가 뒤틀어지고, 지원금으로 세운 건물은 운영이 어려워 방치되는 곳이 많았다. 실제 삶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돈 벌이를 위한 체험이나 교육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삶과 사람은 사라지고 돈만 남은 거다. 생태, 영성, 마을, 힐링이라는 말들이 생기 없이 포장만 남은 상품이 된 현장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래도 곳곳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희망을 보았다. 깊은 산골 마을에서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백발노인들을 통해 역사를 잇는 희망을 보았다. 며칠 동안 하루 종일 앉아 성경을 읽으며 생명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을 통해 새 힘을 느꼈다. 자연과 벗하여 단순 소박하게 살며, 가난하고 애통한 생명을 서로 치유하는 이들을 보며 실현된 희망을 보았다. 믿고 고백한 대로 살기위해 힘쓰는 젊은이들을 기억하며 행복했다. 생명평화의 씨알은 이 땅 곳곳에서 새 문명을 잉태하고 있다. 진실이 결코 침몰하지 않는 것처럼, 희망도 침몰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례였다.
행복하고, 해탈하고 싶다면
분노를 충분히 느끼세요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보세요
딸 살림에 함부로 개입하는 친정아버지와 마찰, 40대 주부 “분노 치밀어올라 너무 속상”
Q.올해 41살 되는 주부입니다. 제가 작년부터 일을 다시 하게 되어 친정부모님이 아이들 하교 후 돌봐주고 계세요. 얼마 전엔 친정 근처로 이사하게 되었고, 제가 평일에 근무하다 보니 아버지께서 손수 정돈을 해주시는 일이 있었네요. 문제는 어제 제가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요, 당신이 오늘 하루 했던 업적을 알아주기 바라셨나 봐요. 에어컨 기사가 와서 에어컨 연결한 것, 제가 요청하지도 않은 식기 선반 달아주신 것과 저희 집 가구 리폼한 것을 보여주십니다. 감사한 일이나, 저는 그 마음 이전에 제 살림이고 제 가정인데 저에게 사전에 아무 알림도 없이 그렇게 하신 게 못마땅했어요. 특히 가구 리폼은 제 의도와 너무 다른 방향으로 하셔서 밥 먹다 무심결에 투덜댔어요. 아버지 맘대로 이렇게 하면 어떡하냐구요. 그랬더니 대뜸 버럭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고맙다, 수고했다 해야지, 넌 왜 내가 도와준 일에도 늘 시비냐!” 하시면서요. 밥 먹다가 어이가 없었죠. 내 살림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아버지 맘대로 하시니 말씀드린 거라 했더니, 신발을 식탁 위로 집어 던지며 “넌 나쁜 새끼다! 네 자식들도 버릇이 없는데, 다 네 탓이다” 하며 광분하시더라구요. 저도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젓가락 내려놓고 “네, 저는 나쁜 새끼 맞습니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인가요!” 하며 또 강을 건넜습니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오순도순 놀다가 또 올 것이 왔다는 듯 자기들 방으로 피하더라구요. 어머니가 보다 못해 아버지더러 집에 가자고 재촉하시니 나가면서 저희 아이들 방으로 가서 “나 내일 안 올 거다! 니들 알아서 해라!” 하시네요. 늘 하시듯요. 제가 어릴 땐 그렇게 저희 엄마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아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더니, 이제 그 공포를 제 아이들에게도 대물리시려나 봅니다. 아버지가 평생 제 삶을 존중하지 않고, 본인 뜻대로만 조정하려는 게 너무 속상합니다. 저를 도와주시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자꾸 이 분노가 치밀어올라 관계가 꼬이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하고 슬픕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도 저처럼 마음의 상처를 갖게 된 것 같아 너무 후회되고 비통합니다.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캐더린
A.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을 잊지 못하며 평생 분노에 시달리는 딸들이 참 많습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으니 성장해서도 아버지가 용서되지 않습니다. 돈 리처드 리소와 러스 허드슨이 함께 쓴 세계적인 저서 <에니어그램의 지혜>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결.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용서하기를 결.정.할 수 없다…. 용서는 우리가 자신의 분노, 미움, 적개심,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완전히 경험한 후에 - 그러한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 일어난다.” 다시 말해 용서의 마음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며, 상대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감정을 충분히 느낀다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그 자체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데다 상대가 가족이라면, 게다가 그가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는 중이라면 죄책감까지 더해져 복잡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감정이 됩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가능한 한 자기 비난 없이, 그 감정을 충분히 느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생긴 감정은 내 의식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사라지게 강제할 수 없고, 다만 바라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분노를 없애려는 무모한 노력을 포기하시고, 그 분노를 온전히 느끼세요.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시되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행동으로 옮기면 다시 불화가 발생할 것이고, 그러면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면서 상처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실 저는 부녀간 싸움의 원인이 당신의 분노에 있지 않고, 아버지를 대하는 당신의 모호한 태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더린 님은 얼마 전 친정 근처로 이사 가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으며, 특히 아버지가 당신의 살림살이에 깊이 개입하도록 허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당신의 태도가 아버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를테면 내 살림의 어떤 것도 건드리지 말라는 식의 명확한 경계선 긋기 없이 아버지가 당신의 살림에 개입하게 하고, 나중에 불평하는 방식으로 말이지요.
인간은 행복하기를 갈망하면서도 불행했던 경험을 자꾸 반복하려는 무의식적 경향성을 보입니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반복 강박’이라고 일렀습니다. 어린 시절 경험한 갈등이나 충격을 꿈이나 일상에서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반복 강박의 심층에는 과거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목적성이 잠재해 있다고 하지요. 반복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이 준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고통의 당사자였던 아버지와 맞서려는 시도는 위험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막강한 존재이며, 아버지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처 입은 당신 내면의 희생자 모드만 강화되겠지요. 심지어 당신은 아이들마저도 할아버지의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애초 의도가 사랑의 희구였든 미움의 결과였든 쓰디쓴 과거의 감정을 반복하면서 상처만 더 깊어질 겁니다.
캐더린 님, 당신의 분노가 아직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해주세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아버지와 거리 두기를 시도함으로써 분노가 행동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당신의 집을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맡기지 마시고, 아버지가 함부로 당신의 살림에 개입하지 않도록 경계를 명확히 하세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당신의 삶을 존중해주는 것이, 당신이 아버지에게 가장 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세요. 그러는 사이 분노가 잦아들고 천천히 용서의 마음이 당신의 가슴에 찾아들 것입니다. 용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다려주세요.
사피엔스가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나
인지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ㅅ애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피엔스의 언어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기에 사피엔스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까.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우리의 언어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한된 개수의 소리와 기호를 연결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뭏나한 개수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주위 세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하며 소통할 수 있다.
두번째 이론은 인간의 언어가 진화한 것은 소문을 이야기하고 수다를 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협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개별 남성이나 여성이 사자와 들수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보다는 무리 내의 누가 누구를 미워하는지, 누가 누구와 잠자리를 같이하는지, 누가 정직하고 누가 속이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우리 언어의 진정한 특이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사피엔스뿐이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도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원숭이를 설득하여 지금 우리에게 바나나 한 개를 준다면 죽은 뒤 원숭이 천국에서 무한히 많은 바나나를 갖게 될 거라고 믿게끔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 국가의 민족주의 신화와 같은 공통의 신화들을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개미나 벌도 많은 숫자가 모여 함께 일하는 능력이 있지만, 이들의 일하는 방식은 경직되어 있으며 그것도 가까운 친척들하고만 함께한다. 늑대와 침팬지의 협력은 개미보다는 훨씬 더 유연하지만, 협동 상대는 친밀하게 지내는 소수의 개체들뿐이다. 사피엔스는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과 매우 유연하게 협력할 수 있다. 개미는 우리가 남긴 것이나 먹고 침팬지는 동물원이나 실험실에 갇혀 있는 데 비해 사피엔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금,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김영사 펴냄)에서.
발전과 편리함의 대가
인간은 영구 정착촌에 살면서 식량공급이 증가하자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방랑하는 삶을 포기하자 엿어은 매년 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기는 젖을 일찍 뗐다. 죽 같은 이유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밭에는 추가 일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먹을 입이 늘면서 여분의 식량은 재빠르게 고갈되었고, 따라서 경작지를 더욱 늘릴 필요가 있었다. 질병이 들끓는 정착지에 살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모유를 덜 먹고 곡물을 더 많이 먹게 되면서, 아이들이 죽을 더 먹으려 형제자매들과 경쟁하게 됨녀서, 어린이 사망률은 급격히 치솟았다. 대부분의 농경사회에서 최소한 어린이 세 명 중 한 명이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하지만 출생률 증가가 사망률 증가를 앞질렀다. 사람들은 계속 이전보다 아이를 더 많이 낳았다.
시간이 흐르자 '밀 거래'의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아이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어른들은 땀에 젖은 빵을 먹었다.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면 삶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추가로 생산된 밀은 숫자가 늘어난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초기 농부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아이들에게 모유를 덜 먹이고 죽을 더 많이 먹이면 면역력이 약해져 영구 정착촌이 전염병의 온상이 도리란 사실이었다. 그들은 또한 단일 식량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가뭄에 더욱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또한 풍년에 넘쳐나는 창고는 도둑과 적을 유혹할 것이며 이를 방비하려면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서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렇자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따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을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따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 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모든 발전들은 고가의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김영사 펴냄)에서
인공 섬에 갇힌 인간
농경 덕분에 인구가 너무나 급격하고 빠르게 늘었기 때문에, 수렵과 채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농경사회는 하나도 없었다. 농업으로의 이행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10000년경 지구에는 5백만~8백만 명의 방랑하는 수렵채집인이 살고 있었다. 기원후 1세기가 되자 수렵채집인은 1백만~2백만 명 밖에 남지 않았으나(주로 호주, 미 대륙, 아프리카에 있었다), 같은 시기 농부들의 숫자는 2억5천만 명으로 수렵채집인을 압도했다.
농부 대다수는 영구 정착지에 살고 있었고, 방랑하는 양치기 부족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곳에 정착을 하면서 사람들의 세력권은 대부분 극적으로 좁아졌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수십, 수백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영토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에게 '본거지'란 언덕과 시내, 숲과 열린 하늘을 포함하는 땅 전체를 말했다. 하지만 농부는 종일 작은 밭이나 과수원에서 일했고, 가정생활은 나무나 돌, 진흙으로 지어져 면적이 몇십 제곱미터에 불과한 비좁은 구조물, 즉 집에서 이뤄졌다. 전형적인 농부는 이 구조물에 매우 강한 애착을 느꼈다. 이것은 건축학뿐 아니라 심리에도 큰 영향을 미칠 커다란 혁명이었다. 이리하여 '내 집'에 대한 집착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 된 존재의 심리적 특징이 되었다.
새로운 농업 영토는 고대 수렵채집인의 것보다 훨씬 더 좁았을 뿐 아니라 훨씬 더 인공적이었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주변 자연환경에서 힘을 떼어낸 인공적인 섬에 살았다. 집 주위로는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다. 지구 표면은 약 5억1천만 제곱킬로미터인데 이 중 1억5500만 제곱킬로미터가 육지다. 비교적 최근에 해당하는 기원후 1400년까지만 해도 압도적 다수의 농부들은 본인들이 기르는 동식물과 함께 모두 1100만 제곱킬로미터, 즉 지표면의 2퍼센트에 불과한 좁은 지역에 몰려 살았다. 다른 지역은 모두 너무 춥거나 덥거나 건조하거나 습하거나 해서 경작에 맞지 않았다. 지표면의 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좁디좁은 지역이 이후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공 섬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쉽게 옮길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한 장소에 매였다.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김영사 펴냄)에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는가
기원전 1776년 바빌론은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였다. 1백만 명이 넘는 국민을 거느린 바빌로니아 제국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을 것이다.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는 함무라비법전을 통해 이상적으로 여기는 사회질서를 제시했다.
이 법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개의 성별과 세 걔의 계급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다. 사람은 성별과 계급에 따라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닌다. 어린이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이다.
하지만 미국 신이 부료는 정의는 바빌론의 신들이 불러준 내용과는 상당히 달랐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함무라비 법전과 미국독립선언문 둘 다 스스로 보편적이고 영원한 정의의 원리를 약속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인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평등한 반면 바빌론인들에 따르면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미국인들은 잣니들이 옳고 바빌론 사람들이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함무라비는 당연히 자신이 옳고 미국인들이 틀렸다고 받아칠 것이다. 사실은 모두가 틀렸다. 함무라비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평등이나 위계질서 같은 보편적이고 변치않는 정의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을 상상했지만, 그런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는 장소는 오직 한 곳, 사피엔스의 풍부한 상상력과 그들이 지어내어 서로 들려주는 신화 속뿐이다. 이런 원리들에 객관적 타당성은 없다.
우리는 사람을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하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 또한 신화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서로 평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어딘가에 우리가 진정으로 평등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평등한가? 미국 독립선언문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생물학 용어로 한번 번역해보자.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다. 진화했다. 또한 '평등'하게 진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평등사상은 창조사상과 뗄수 없게 얽혀 있다. 미국인들은 평등사상을 기독교 신앙에서 얻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은 신이 창조했으며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신앙 말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신과 창조와 영혼에 관한 기독교 신화를 믿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모든 사람은 얼마간 차이 나는 유전부호를 가지고 있으며, 날 때부터 각기 다른 환경의 영향에 노출된다. 그래서 각기 다른 특질을 발달시키게 되며, 그에따라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난다. 따라서 '평등한 창조'란 말은 '각기 다르도록 진화했다'는 표현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에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기관과 능력과 특질이 존재할 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진화한 특질은 무엇인가? '생명?'당연하다. 하지만 '자유?'생물학에 그런 것은 없다. 평등이나 권리, 유한회사와 마찬가지로 자유란 사람들이 발명한 무엇이고,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민주사회에 사는 인간은 자유롭지만 독재하에서 사는 인간은 부자유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행복'은 또 어떤가? 생물학 연구에서는 지금껏 행복을 명확히 정의하거나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생물학 연구는 쾌락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인정한다. 쾌락은 좀 더 쉽게 정의하고 측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로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가 특정한 질서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란 사악한 음모도 무의미한 환상도 아니다. 그보다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함부라비도 자신의 위계질서 원리를 동일한 논리로 옹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기억해두자.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는 귀족, 평민, 노예가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다르다고 믿으면, 우리는 더 안정되고 번영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사피언스(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김영사 펴냄)에서
사막에 가고 싶다
이집트에 갔을 때 영화에서나 보았던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 만든 것일까? ’
하지만 가이드의 말은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없었다고 합니다. 피라미드는 무임금으로 노예를 부려 쌓아올린 잔인한 축조물이 아니라, 밥벌이를 하게 해준 고마운 공사였답니다. 나일 강이 범람하는 동안에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고, 그동안 먹고 살기 위한 돈을 마련하라고 피라미드 공사를 했다는 이야기이지요. 피라미드를 폭정의 상징물로 보았던 것은 편견이었습니다.
피라미드는 그 웅장함에서 이집트 여행에서 가장 볼 만한 구경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온 지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집트를 떠올릴 때면 피라미드가 아니라 사막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사막으로 가는 길, 차 안에 탄 사람들이 한결 같이 궁금해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 용변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
가이드가 간단히 말했습니다.
“ 안 보이는 곳에서 해결하시면 됩니다. ”
“ 화장실이 없나요? ”
“ 없습니다. ”
다들 웅성거렸습니다. 용변은 어떻게 하나, 밤에는 몹시 춥다는데 잠은 잘 수 있을까, 사막에서의 하룻밤을 앞두고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로 사막의 유일한 도로를 세 시간 동안 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프를 타고 한 시간을 더 들어가니 목적지가 나왔습니다. 베두윈 족 청년들이 텐트를 쳐주고 모닥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각자 용변도 해결했습니다. 걱정한 것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용변을 보고 나서 모래로 덮어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요. 애꿎은 물을 사용할 일도 화장실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으니 오히려 편리한 시스템입니다.
밤이 되면서 몸 상태가 영 시원찮아졌습니다. 할 수 없이 먼저 이인용 텐트 안으로 들어가 옷이란 옷을 죄다 주워 입고 잔뜩 웅크린 채 잠을 청하는데 이건 도무지 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텐트 사이로 들어오는 칼바람에 정말 오랜만에 살을 에는 추위를 느꼈습니다. 텐트 안이 더 추울 거라던 가이드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지요.
반면 베두윈족 청년들은 모래 바닥에 매트리스 한 장 깔고는 모포를 둘둘 말아 몸을 감싼 채 드르렁드르렁 마음껏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잘 자는지 부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베두윈족들의 삶은 너무나 간결합니다. 매트리스 한 장, 모포 한 장, 그리고 아주 기본적인 취사도구만 있으면 어디서든 만사 오케이입니다. 사막으로 오는 길에 군데군데 벽돌을 쌓아 벽만 세워놓은 집들을 보았습니다. 지붕이 없어도 사방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을 바람막이만 있으면 괜찮은 것입니다. 문명이란 이름의 기구들에 내가 얼마나 길들여져 있는지, 그런 것들에 얼마나 많은 돈을 소비하고 사는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지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추위에 떨다가 견디다 못해 텐트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닥불에 다가앉아 불을 쬐니 신기하게도 몸에서 냉기가 금세 빠져나갔습니다. 그렇게 모닥불 곁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지요.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모닥불 가로 나와 앉기 시작했습니다. 옹기종기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새벽이 왔습니다.
새벽의 찬 기운 때문인지 배가 살살 아파 와서 작은 돌 언덕 뒤로 돌아갔지요. 그런데 용변을 보려는 순간 너무나 환상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하늘에는 밝은 둥근 달이 떠 있고, 그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사막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달빛 아래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사막, 백사막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습니다.
사막에 은둔하며 수도생활을 했던 수많은 수도자들이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했는데, 사막의 아름다움 앞에 서 보니 알 것 같았습니다. ‘ 아! 사막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라서 수도자들이 여기서 하느님 체험을 하고, 평생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구나. ’
사막은 황량한 곳이라는 그동안의 생각은 편견이었습니다. 오히려 문명을 자랑하는 도시들이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내 방에는 이집트에서 사 온 그림 한 장이 걸려 있습니다. 사막에 낙타 한 마리가 덩그러니 서 있는 그림이지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 사막에 가야지. ’
살아가면서 가끔씩은 사막을 찾아가 문명에 찌든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질 생각입니다. 내 마음에 사막 하나 만들고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