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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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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행복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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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수동-.JPG» 강원도 홍천 밝은누리

 

행복(happiness)이란?

 

행복이란 만족스러운 상태를 말합니다. 
비교적 지속적인 속성이 있고, 
여기에 망라되는 감정은 단순한 
만족감으로부터 살면서 느끼는 
깊고도 강렬한 기쁨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으며, 
그것이 지속되기를 자연스레 
바라게 된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그저 우연히 접하게 된 일 
혹은 자극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단순한 
쾌감과는 다른 것입니다

 

“행복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에셰르)이고, 관련된 동사 (아샤르)는 
“행복하다고 말하다”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히브리어 용어들은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참다운 행복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행복을 돈과 물질과 관련하여
찾으려고 합니다. 좋은학교, 좋은직장,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갖는일 등을 통해
참다운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준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다 누렸다 하여도
잠시 한순간 행복을 느낄뿐이며 살면서
찾아오는 허무한 감정, 이기적인 욕망, 다투는 일등
생활에서 겪게되는 수많은 문제들을 겪으면서
70년 80년 길면 100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참다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복은 너무나 단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행복이란 일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사람이 존재하는 한 지속적이며 영원한 것이며
사람이 존재하는한 늘 행복한 감정과 상태와
환경 가운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복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성경 디모데전서 1 장 11 절에서는
여호와 하느님을 “행복하신 하느님”이라 묘사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있는 지구는 세계 어느곳에나
참다운 행복과 만족이 없는 일시적인 상태지만
머지않아 창조주 하느님의 하늘 왕국통치아래서
참다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이 사람들에게 
영원할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행복을 누리려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행복은 어느 것이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충실한 봉사라는 기초 위에 실현됩니다.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고서는 지금 우리들이
살고있는 것처럼 참다운 행복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행복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축복만이 
참다운 행복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참다운 행복은 행복하신 하느님의
“좋은 선물”과 “완전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행복의 근원은 물질적 부나
힘을 축적하는 순간적인 육적인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 장 35 절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낮은 사람을 배려함으로 주는 행복을 맛보는 사람들은
지금도 참다운 행복의 비결을 알게되고 미래에 있을
참다운 행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성경 예레미야 9 장 2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부를 자랑하지 마라

 

참다운 진정한 행복을 맛보고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주의깊이 연구하여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바라며
참다운 행복의 근원이신 창조주의 승인이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이 글은 밝은누리 공동체 홈페이지(http://www.welife.org/)에 그린맨님이 쓴 글입니다.


재앙과 복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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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 속에 복이 깃들어 있고, 복 속에 화가 엎드려 있다.


                              -노자

희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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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희망은 길과 같기 때문이다.

 본래 땅에는 길이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에는 길이 생긴다.


                -루쉰

진짜 친구가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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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친구 관계, 돈과 나이에 얽히면 힘들어진다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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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 만난 케이팝 스타 아버지

대뜸 자기를 “형님으로 불러라”

 

나이 풍습은 글로벌 관습과 충돌

친구가 돈으로 보이면 관계 파탄

 

나이 때문에 가끔 황당한 일을 경험한다. 몇 년 전이다. 케이팝으로 한창 국제적 인기를 끌던 걸 그룹 출신 연예인과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그의 부친과 저녁 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딸의 매니저 역할을 겸하고 있었는데, 인사를 나누자마자 불쑥 반말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아, 그러면 나보다 한 살 아래구먼? 그러면 지금부터 나에게 형님이라고 해! 알았지? 술 한잔 따라봐!”

한 손을 내밀며 그렇게 명령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아니고 중년의 남자들이 모인 자리, 그것도 비즈니스를 협상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형과 아우라는 호칭을 강요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한눈에 무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연예인의 부친은 평생 건달 비슷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딸의 인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회사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그를 만난 것이지, 그보다 나이가 한 살 적은 ‘아우’로 만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날 미팅은 별 소득 없이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연예인과 그가 속했던 아이돌 그룹의 인기는 그 이후 급속히 소멸했다. 일본 언론은 한류의 일시적인 인기를 가리켜 ‘모에쓰키’ 현상이라 했다. 일본어로 ‘모에’는 ‘불이 붙음’ ‘불탐’이라는 뜻이고, ‘쓰키’는 ‘소진’이란 의미인데, 한류 스타들이 단기 수익에 집착해 에너지와 능력을 남김없이 모두 태워버려 남은 것 없는 상태를 꼬집은 표현이었다.


그 연예인 부친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나이와 관련해 지독한 서열 문화가 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에 형이나 언니, 그리고 동생을 구분하는 법부터 가르친다. 그런 까닭에 일단 서열을 정해야 호칭과 언어가 편해진다. 동네 형, 아는 동생, 선배와 후배란 말도 한국 아니면 듣기 힘든 단어다. 그 상하 관계는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지속된다.


나이가 같으면 당장 말을 튼 뒤 친구라 부른다. 같은 학교를 졸업하면 역시 친구라 한다. 그런 문화권에서 우리는 성장했다. 반면에 나이가 다르면 친구라 하기 힘들다. 이 같은 관습은 외국인들에게는 무척 낯선 모양이다. 가끔 참석하는 모임에는 두어 명의 외국인이 있어, 어느 날 그 모임에 친구를 데려오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그 외국인은 30대의 여성, 나중에 나타난 그의 친구는 50대의 외국인이었다. 그러자 다른 한국인 참석자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아니, 어떻게 친구예요? 이모 아닌가요? 최소한 큰언니라 불러야지!”

농담 섞인 인사말이었지만, 외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친구와 우리가 생각하는 친구의 개념은 달라도 너무도 달랐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아직도 수평 관계가 아닌 수직 관계, 그리고 서열 문화 속에 사는 것으로 비쳤다.


나이와 관련된 풍습은 글로벌 관습과 크게 충돌한다. 한국 사람이 나이 적은 직장 상사가 있으면 매우 불편해하는 상황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존대 어법도 낯설고, 연장자 앞에서는 솔직한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풍경도 그렇다.


“아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에요? 능력에 따라 상하 관계가 정해지는 게 당연하지, 어떻게 먼저 태어났다고 상사가 되고 나중에 태어났다고 부하가 되나요?”

한국 사회의 특성인 ‘빨리빨리 문화’는 사람 관계에도 적용된다. 만나자마자 빨리 서열을 정하고, 흉금을 털어놓으려 한다. 본인도 그렇고 상대에게도 그것을 강요한다. 일단 친구가 되면 모든 것을 까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인간적 모습’이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이유로 불쑥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해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과연 인간적인 모습일까?


빨리 달궈진 쇠가 빨리 식는다는 말처럼, 급하게 생긴 인간관계에서는 가끔 문제도 생긴다. 비밀을 지켜줄 것 같아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여기저기 그 이야기를 퍼뜨려 결국 곤경에 빠뜨리 는 사람도 있다. 기쁜 일이 있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더니, 영혼 없는 축하의 말을 하고 돌아서서는 시기심 가득한 말을 퍼뜨린다면 그는 친구가 아니다. 가끔은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해 낭패를 보기도 한다.


“한 달만 빌려줘. 요즘 회사 실적이 너무 좋은데 자금 회전이 잘 안 돼서 그러니 한 달만 도와줘! 고마움 잊지 않을게!”


애절한 그의 얘기를 듣고 적지 않은 금액을 빌려줬더니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 그가 잠적했다는 소식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황이었지만 나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 뒤 그는 다시 나타났으나 허세로 가득했다. 결국 그가 원한 것은 또 다른 돈이었다.


변함없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인생의 축복이다. 우리는 뭔가를 잃어봐야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다. 돈을 잃고, 직장을 잃고, 명성을 잃어보아야 진정한 친구가 보인다. 직장을 나오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저쪽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이쪽의 문제일 수도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늘 인식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도대체 누가 친구인가? 친구와 친구가 아닌 기준은 분명하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관계를 이용해 뭔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다. 만약 친구나 동료마저 돈으로 보인다면 그때는 이미 끝이다.

배신에 고립까지 더하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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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jpg


 "믿을놈 아무도 없어요"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행복하고 풍요로울까요?
아니지요

외롭고 지루하고 삭막해집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할 때 즐겁고 행복하고 건강해지는 것인데
사람을 멀리한다면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심리적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친구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털어 놓을수 있는 친구
같이 놀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들이 내 마음이 지옥이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신학자 정경일이 참선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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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일3-.JPG» 정경일 새길기독회연구원 원장 겸 새길교회 예배위원장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새길’을 여는 정경일(49)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을 찾았다. 정원장은 새길교회에서 예배위원장으로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있지만 목사가 아닌 평신도신학자다. 새길교회는 길희성, 김창락, 이삼열, 한완상 등이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1987년 설립해 지금도 교회건물이 없이 오산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 교회 사무실 구실을 한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인근 이화사거리의 한 빌딩 7층에 있는 이 사무실엔 ‘세월호’ 리본이 붙어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새길교회 교인들과 안산으로 내려가 유가족들과 매달 예배를 드렸으니 새길교회와 ‘세월호’는 둘이 아니다. 

 하지만 정 원장은 ‘사회적 이슈’에 나서는 운동가나 목사보다는 수도원의 노동수사나 산중 선방의 선승 같은 인상이 짙다. 실제 그는 내적 영성 수도와 사회적 참여 사이에서 적잖게 고뇌했다고 한다. 정원장은 80년대 후반 대학운동권이었다. 숭실대 총학생회에서 활동을 하느라 학점을 못 받아 6년이나 다녀야 했던 열성 운동권이었다. 그러면서도 태생부터 내향적 성격 때문에 외적인 활동이 마음에 부대꼈다고 한다.

 

4주기-.jpg» 지난 4월 경기도 안산에서 세월호참사 4주기 기억예배에서 설교하는 정경일 원장

 

 김경재 교수가 섬광처럼 빛
 “거대한 악과 싸우면서 일어난 분노가 몸과 마음을 덮칠 때면 ‘악과 싸우다 나도 악마가 되어가는 건 아닌가’라는 불안이 엄습하곤 했어요. 성격적으로 보면 조용히 홀로 있는 게 좋았지만, 역사적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한신대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는 군목의 아들이지만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적인 기쁨도 추구하며 사회적 책무를 하려면 ‘종교’분야가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김재준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안병무 등이 키운 한신대도 사회운동 기풍이 강해 뭔가 내적인 기쁨을 얻고 싶은 갈망을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그의 내면은 침묵수도나 관상기도를 좇고 있었지만, 이성은 대학시절과 다름없이 정의, 평등,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부르짖고 있었다. 내면과 외면의 부조화로 힘들던 시절 지도교수인 김경재 교수가 섬광처럼 빛을 비춰주었다. 신학생 전체 수련회를 갔는데 김 교수가 좌선을 지도했다.

 “만약 다른 분이 영적 수행을 언급했으면 의심했을 텐데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분이 좌선을 가르쳐주니 ‘아,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 둘이 아닐 수 있겠구나’란 생각으로 너무도 기뻤지요.”

 영적 수행의 기회는 뜻밖에도 군대에서 주어졌다. 강원도 양구에서 군종병으로 있으며 영외에 있는 교회에서 새벽마다 눈을 치우고 깊은 침묵기도를 하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군 제대 후 그는 서강대 대학원에서 종교학계의 거목인 길희성 교수의 지도로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때도 마음은 불교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선택한 것은 불교가 아닌 샤머니즘이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기득권 옹호 구실을 했고 샤머니즘이 오히려 ‘민중적’이었다는, 다분히 운동권적 시각에 따른 결정이었다.

 

채플-.jpg» 정경일 원장이 참선 모임을 이끌던 미국 뉴욕 맨하탄 유니온신학교 채플

 

 세계적 신학자인 스승도 참선 동참
 그런데 2005년 신학을 공부하러 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에서 불교 수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플실에 매일 새벽 6시 반부터 한 시간씩 열리던 참선반이었다. 일본 조동종 계열의 묵조선 수행을 그는 매일 아침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했다. 2년 뒤엔 일요일 저녁 참선모임도 만들었다. 그는 일요일이 되기전 참여자들에게 참선 명상과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글들과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며 참선모임을 이끌었다. 나중엔 세계적인 신학자인 그의 스승 폴니티 교수도 이 모임에 함께 했다. ‘유니온 참선반’은 코디네이터 구실을 한 그가 유니온신학교를 떠난 2013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참선은 그에게 빛만이 아니라 어둠도 직시하는 계기를 주었다. 2009년 가을 그는 갑작스런 ‘심리적 공황’을 경험했다. 참선이 잘 되고 있던 시절이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격렬한 불안이 2주 동안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그는 1년 동안 심리적 공황을 겪으며 명상의 평화 속에 방치한 깊은 상처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화 속에 억압해 버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는 영적 평화라는 외피 속에 개인적 상처도, 사회적 아픔도 덮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귀국 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있었다. 엄청난 트라우마 속에서도 자신의 치유를 제쳐놓고 싸워야 하는 유가족들을 지켜보고, 또 그런 유가족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도 긴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어두운 곳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는 세월호 유족들 뿐 아니라 쌍용차노동자와 굴뚝농성노동자, 성주미사일기지반대시위현장 등으로 늘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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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신부-목사 함께하는 모임도
 그럼에도 수행을 통해 내적 기쁨에 이르는 갈망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 둘 중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외향적인 활동에만 치중하면 금세 에너지가 소진되는 태생적 한계를 보충해주고 힘을 준 것은 ‘함께하는 공동체’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새길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지양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성’을 강화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또한 스님·신부·목사 등과 함께 공부하는 환희당모임, 관상기도모임인 렉시오 디비나, 신학연구모임인 ‘대구와 카레’등에도 참여하며 영성적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엔 남북평화체제에서 신앙과 교회, 신학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신학자공부모임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런 영성·공부모임이 사회현실에 나아갈 힘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전에 없던 감흥을 느낀다고 한다. 체질상 고독을 좋아하고 번잡한 곳에 가는 것을 꺼리는 그로선 전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하면서 마음 깊은 것들을 공유하다 보니 이상한 기쁨이 느껴져요. 슬픔과 함께 하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저에겐 영적 스승 만큼이나 큰 스승들이지요.”

 지성과 영성과 윤리의 일치라는 멀고도 요원했던 ‘새길’이 그의 오랜 고뇌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듯 그의 얼굴이 가을 하늘처럼 유난히 맑았다.

내 안의 더 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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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덴마크에서 ‘미아’ 라는 예쁜 여학생이 부모님과 함께 대원사에 내려와 하루 쉬어 갔습니다. 미아는 한국 아이인데 부모님은 덴마크 분들이었습니다. 다섯 살때 입양 된 것입니다. 미아가 이제 어엿한 아가씨가 되자 그리던 고국과 낳아주신 어머니를 뵈러 먼 길을 걸음 한 것이었어요. 조국의 산하에 다시 안긴 미아는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모국어를 모르는 미아가 낳아주신 어머니를 만나면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지 이 일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짠 해집니다.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그리움을 잃어버린 삶의 벌판이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저는 알뜰히 미아를 길러주고 지금도 늘 큰 사랑의 품으로 안아주는 미아의 양부모님들께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논어>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부모 없는 어린 아이를 내 아이처럼 거두어 키울 수 있는 이는 백리 안의  사람들을 다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그러니까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매 순간 행복한 통합을 이루어 내는 사람은 이렇듯 따뜻하고 숭고한 힘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두 가지에 크게 집착해서 살아갑니다. 첫째는 가족이며, 둘째는 현세입니다. 자기 가족만 중요하고 남의 가족의 소중함은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현세의 삶만 알지 전생과 내세의 삶은 생각할 줄 모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두 가지 집착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전생에 많은 가족들이 있었음을 알기 때문에 오늘 만나는 모든 이웃들이 내 어머니며 내 자식이라 생각하며 친절과 자비심을 키워갑니다. 내 아이 뿐만 아니라 남의 아이 모습이 바르게 보이려면 ‘나’라는 땅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아야 합니다. <논어>에도 ‘군자는 자기 자식을 너무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라고 했지요.‘나’ 라는 땅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보면 제대로 보이는 것이 어디 자식 뿐 이겠습니까?
 중국 강소성 양자강 강가에 ‘금산사’ 라는 아름다운 절이 있지요.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 절을 참배하고 나서 양자강을 바라보며 한 노스님과 차를 마시며 대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황제가 물었습니다.
 "이 절에서 몇 해나 사셨습니까?" 
 "몇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 저 강 위를 오가는 배를 몇 척이나 보았습니까?"
 "오직 두 척을 보았을 뿐입니다." 
 "어떤 배였습니까?"
 "한척은 이익을 쫒는 배이고 한척은 명예를 쫒는배였습니다. 오직 이 두 척의 배만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배를 타고 삶이라는 거친 강을 흘러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이익과 명예만을 구하는 배 위에서 한가로이 한 생을 보낸다면 백 리는커녕 한 집도 행복하게 만들기가 힘겨울 것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커녕 내 아이도 행복하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종교란 행복한 삶의 길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을 모르는 이를 요즘 말버릇에 따르면 종맹(宗盲)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앞 날의 종맹은 성경이나 불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 관계로서의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입니다.
 미아를 길러준 미아의 양부모님은 미아 말고 다른 아이를 갖지 않았습니다. 혼인해서 함께 산지 스무 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함께 차를 마시며 그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장님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혼인한지 서른 해가 되던 날 이 장님 부부는 기적처럼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부부는 처음으로 마주 바라 보았습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자 아내도 남편에게 인사했습니다.
 “그 동안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비로소 인사를 나누게 된 부부는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미아의 양부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도 혼인한지 서른 해가 되면 이와 같은 인사를 나누게 되기를 빕니다.”
 누구에게나 세 가지 ‘나’가 있습니다. 첫 째는 ‘내가 생각하는 나’ 입니다. 둘 째는 ‘남이 생각하는 나’ 입니다. 셋 째는 ‘나도 모르는 나’ 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생각하는 나 또는 남이 생각하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웃음을 웃을 때도 그렇고 옷을 입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나는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나도 모르는 ‘나’ 에 눈먼 봉사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나’ 이것은 관계로 목숨을 삼는 나인 것입니다. 관계로 목숨을 삼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나’ , ‘남이 생각하는 나’로 목숨을 삼을 때 우리 삶은 말할 수 없이 힘겨워지는 법입니다.
 ‘큰 태풍도 한갓 부평초 풀 끝에서 일어난다’는 장자의 말씀처럼  삶의 온갖 괴로움도 이 부평초 같은 ‘나’를 세우는 순간 생겨나는 것이지요.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49년을 잘못 살았음을 알았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혼인해서 아들 딸 낳고 이 일 저 일 두루 겪으며 한 평생을 꿈결처럼 보내기 일쑤입니다.

내 안의 다섯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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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g» 피레네산맥 스페인 보리사 인근 포행길

 

 날이 맑으면 멀리 산들 너머로 지중해가 보이는 피레네산맥 자락에 ‘보리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한국의 무상사에서 10년간 스님으로 있던 체코 출신의 톤다와 바르셀로나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던 바르바라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서 묵언할 수 있는 수행터를 제공하고 싶다는 공통의 꿈을 갖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취라고는 농부들이 떠나버린 빈 집 두 채 뿐인 외진 산골에서, 그 중 한 채를 세내어, 바르셀로나의 도반들과 함께 조금씩 수리해 가며 수행처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경치가 빼어난 산 속에 수도원이 있는 것은 유럽에서도 낯설지 않지만, 농가였던 보리사는 정말 소박하고, 법당은 돼지우리를 깔끔히 개조해서 씁니다.

 

1--.jpg» 참선수련회를 끝낸 참가자들. 맨 오른쪽이 필자 이승연 독일 심리치유사


 3년 전,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님의 49재까지 지냈는데, 갑자기 겉잡을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왔습니다. 산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바위와 물이 어우르고, 산세가 부드럽고 침엽수로 컴컴한 숲이 아닌 밝은 산, 말하자면 한국의 산과 비슷한 산이 어디일까 찾았습니다.
 제게 우리나라의 산은 ‘정복’하고 싶은 산이 아니라, 그 품에 안기고 쉬고 놀고 싶게하는 산입니다. 하나 더 중요했던 점은, 남들과 있되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지요. 보리사는 그런 제 욕구에 가장 잘 맞는 곳이었고, 그렇게 보리사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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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산 속에서 저는 다섯 살과 여덟 살의 제 어린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 제 눈 앞에서 졸도하며 쓰러지는 엄마를 목격한 후로 엄마에 대한 걱정은 그 산 만큼이나 거대한 마음의 짐으로 50년 이상 자리잡고 있었던겁니다. 어머니보다 2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편안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나타나, 이젠 네 걱정이나 하면 된다고 저를 위로하시는 목소리를 들으며,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느껴진 허전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나니, 마음은 다시 가볍고, 밝고, 이렇게 자연 속에서 묵언하며 지낼 수 있는 터를 마련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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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너무나 빠르게 우리를 생각의 태풍으로 몰아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내뱉아 버리지만 않아도, 마음 속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풍이 몰아치면 강은 위아래 없이 뒤죽박죽이 되고 흙탕물 속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지요. 바닥에 있던 것들이 들고 일어나 빠른 속도로 휩쓸려 갑니다. 하지만 바람이 잦아들면 떠내려 간 것들은 모여서 쓰레기섬을 만들고, 가라앉을 것들은 가라앉아 물은 다시 맑아지고 바닥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지요. 이런 생각의 바람을 잠재우고, 마음의 바닥에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볼 수 있기 위해 우린 발길을 멈추고, 말을 멈추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 처지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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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브루더호프의 한 마을인 우드크레스트에 딸과 함께 머물고 귀국할 무렵 브루더호프의 지도자인 크리스토프 할어버지와 그의 부인 버레나의 집에 방문했다. 우드크레스트에 머무는 동안 잔디 밭에서 거의 매일 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두 분은 매우 익숙했고, 더구나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몸임에도 한 형제 한 형제들을 온 마음으로 맞으며 환대하는 모습이 그토록 인상적일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 그를 보고 그에게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면, 이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있는양, 혹은 그가 예수님인양 그에게만 집중하면서, 불편한 걸음을 그에게 옮기고 그를 껴안았다. 그런 크리스토프 할아버지 곁엔 늘 부인 버레나가 있었다. 

 

113-.jpg» 크리스토프와 버레나의 집으로 초대 받았을 때 함께 한 조현(맨 오른쪽)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역시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는 듯이 온전히 내게 집중해주며 나를 맞아 주었다. 그의 부인은 좀 더 명랑하고, 호기심이 많았다. 버레나는 "기자가 왜 이런 공동체에 직접 살아보게 되었느냐"거나 "왜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린시절 고향집의 모습을 들려주었다. 농삿일을 돕는 분들만 아니라, 지나가는 장사들과 걸인들까지 집에서 재우고 먹여, 가족들 외에도 늘 20~30명이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사람이 많았던 우리 시골집의 모습이 바로 공동체였던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버레나는 "당신의 부모님 같은 분들이 바로 천국을 만드는 분이다"고 말했다.

 귀국 뒤 얼마 안 있어서 크리스토프 할아버지가 지난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아내 버레나 할머니도 별세했다는 것이다. 버레나 할머니는 남편에 비해 건강해보였는데, 이렇게 금세 남편을 따라갈 줄은 몰랐다. 너무도 사랑했던 남편 곁으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천국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갔다고 한다.

 버레나의 부음을 전해준 미국 브로더호프의 박성훈님의 글과 버레나 딸의 조사를 들으니, 다시 한번 크리스토프와 버레나의 아름다운 삶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다음은 미국에서 보내온 박성훈님의 글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114-.jpg» 전세계 부르더호프공동체의 지도자였던 크리스토프 장로와 그의 아내 버레나

        

지난금요일, 우리공동체장로였던요한크리스토퍼부인이신버레나께서천국으로부름을받으셨다. 다음날우리는장례식이있기전마지막으로  그녀의모습을보기위해문상을갔다.  80생의경주를끝내고머리에화관을쓰시고침대에조용하게누워있는오마버레나모습이평화롭고아직도살아계신했다. 이분의끝에는불이켜진아주촛대와꽃들이담겨진병들이놓여있었다. 바로촛대옆에는눈길이끌리는물건이하나보였다. 평소버레나가즐기던낡고헐은‘카드’가놓여있었다. 카드를보니  11기억이떠올라저절로미소가지어졌다.

“딱한번해요? 제발요.버레나는검지손가락하나를펴보이며크리스토프에게애교하듯간청했지만, 크리스토프는밑으로오른손을가로지르며“쉴료스(Schuss독일어로‘끝났다’뜻이다.)”라며단호하게게임을끝냈다. 이미  저녁식사시간을알리는종이울렸다.

후덥지근한더위가끝나가는 2007여름, 우리는 Parents all day trip으로연못에모여휴식을취하고있었다. 날은결혼한부모들이일년에한번아이들을하루종일공동체청년들에게맡긴근처에있는산에등산이나, 자전거하이킹, 수영등자유롭게부부끼리시간을보낸오후에는숲에있는공동체연못가에모여다른부부들과게임도하고함께아이들의교육에대한이야기도나누며교제하는날이다. 우리는돌이겨우지난어린유빈이와유치원생하빈이를떼어놓은(?) 부모로써의자유를한껏누리고있었다. 나는그늘진연못끝자리에자리를잡고앉아버레나와한팀이되어크리스토프와상대로 500카드게임을하고있었다. 태어나서처음해보는게임이라이날버레나에게게임룰을배워가면서  땀을흘리며쩔쩔매고했는데,  500게임은팀으로하는게임이라버레나가  아무리혼자서잘해도우리팀은게임을연달아지고있었다. 그런데막판에버레나손에아주좋은카드가들어왔다. 이제겨우한번이기겠다싶었는데, 마치는종이울리자베르나는크리스토퍼에게  한번만하자고졸랐던것이다.    

 

버레나가나를게임파트너로선택했는지지금도모른다아마도버레나도이민자였고영어를처음에못해어려움을겪은경험탓인지  미국생활과공동체생활이모두생소한나에게긍휼한마음을느꼈을것이다.   평생주변의연약한사람들에게손내밀어위로하고등을두들겨준사람이었으니까거의 11년이흘렸지만지금도일을또렸하게기억하고있다. 이후로 500카드게임을즐겼고, 지금은  500카드게임에베테랑이되었다.

 

2년전우리가 4개월동안다른주로미션을갔다온두분을개인적으로다시만나게되었다우리는 거의 2시간동안미션에대한많은생각들을나누었는데대화도중전화벨이끊임없이울렸다세계공동체에서크리스토퍼에게도움과조언을구하는전화였으리라얼마크리스토퍼는조용히전화수화기를들더니초롱초롱한눈으로우리를쳐다보시고씩웃으시더니옆으로내려놓으셨다이상전화벨소리가우리의대화를방해하지못했다앞에있는우리에게  마음을쏟으시는그의따뜻한마음과사랑이우리마음을젹셔왔다.

 

크리스토퍼와버레나는그런분이셨다처음우드크레스트를방문할때부터지금까지  거의 11우리가족을예수님께로이끌어주셨다우리가어떤문제로고민하면서편지하면우리가어디에있던지심지어다른나라에있어도  바로 FAX날라와우리를격려하시곤했다. 열린마음과듣는귀로우리부부의이야기를들어주셨고우리가그리스도께로성장하도록우리영혼에영양분을공급해주셨다참된목자가어떤모습이어야하는지누구보다도보여주셨다. 우리는그런마음을가지신크리스토프와버레나가  그리울이다.   

 

112-.jpg» 크리스토프와 버레나 가족들의 모습

 

아래글은 2018 9 24버레나의장례식에서그녀의에미마리아블라우가엄마  버레나삶에대해나눈이야기다.

 

엄마는 1938 5 16일 영국에서 한스와 마그리트 마이어의 첫 딸로 태어났다. 네 명의 아들 뒤에 태어난 딸이었다. 엄마의 부모님 한스와 마그리트 마이어는 스위스 출신으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바로 직전인 1933년 독일에서 브루더호프에 합류했다. 그뒤 공동체는 나치의 심한 압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게슈타포에게 몇 번이나 강제 급습을  당하다가 결국 1937년 독일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엄마의 아버지 한스는 나치에 체포되어 3개월을 감옥에서 지내시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이미 영국에 가있던 가족과 재결합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엄마가 태어났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브루더호프는 영국 안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이국인 신세가 되어 당시 유일하게 난민을 받아줬던 남미 파라과이로 이주하게 된다.  

엄마가 두 살이었을 때 할머니는 6명의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공동체의 멤버들과 함께 파라과이로 향하는 선박에 올랐다. 이미 남미로 떠난 남편을 만날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서 말이다. 엄마의 부모님은 열한 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숱한 어려움과 열대병과 싸우며 집과 농장, 선교 병원을 지었다. 그리고 엄마는 파라과이에서 아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우리에게 정글에서 겪은 모험담을 즐겨 들려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는 오빠들이 엄마가 가장 아끼던 구슬들을 타조에게 먹였던 일이다. 오빠들은 태연하게 ‘걱정하지 말아, 구슬을 곧 보게 될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그런데 정말 오빠들 말대로 입으로 들어간 구슬이 뒤로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엄마의 오빠 안드레아스는 친절하게도 구슬에 묻은 똥을 닦아서 엄마에게 돌려 주었다. 엄마는 운동을 진짜 좋아했는데 그 당시 학교에서 높이뛰기를 가장 잘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엄마는 한번 친구들하고 몰래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 누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담배를 집어 던지고는 부리나케 도망을 치는데,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닌가. 불을 냈구나 싶어 바들바들 떠는데 다행히 엄마와 친구들이 한 짓하고는 상관이 없는 걸로 판명이 났다. 그것이 엄마의 마지막 담배였다.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정은 고스란히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아주 빈궁한 상태였는데도  악기를 구해서 가족이 함께 연주를 하며 노래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노래의 중요성은 우리 가족에게도 전수되어 저녁 시간이면 온 가족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엄마의 이모가 천식으로 죽게 되면서 엄마의 가족은 8명의 사촌을 받아들여 아이들만 19명이 되는 대가족이 되었다. 엄마의 아버지가 공동체 일로 출장을 많이 다녔기 때문에 어린 여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엄마의 동생들 아가타와 프리실라에게 물어 보시라! 이때의 경험은 엄마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58년 엄마는 우르과이의 엘 아라도라고 불리던 하우스 공동체에 옮겨 갔다. 엄마는 거기서 다섯 달을 머무는 동안 세례를 받았다.

 

엄마는 교육을 계속 받는 일 보다는 손으로 직접 하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래서 공동체 병원 실험실에서 한 의사의 조수 노릇을 하며 박테리아나 혈액 세포를 현미경 렌즈를 통해 인식하는 법과 독사들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서 제대로 된 해독제를 처방하는 일을 도왔다. 나중에는 공동체 어린이집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뒤에 엄마가 애용했던 충고는 이랬다. “단순히 상식대로 하면 되!  

1961년 엄마는 몸이 아픈 한 공동체 일원을 돌보기 위해 우드크레스트로 이사 오셨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의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를 처음으로 만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첫만남을 “첫사랑의 마주침(sight of first love)”이라고 늘 말하시다가도 웃으시면서 “첫눈에 빠진 사랑(love at first sight)”이라고 정정하셨다. (역주: sight love어순을 실수로 바꾸어 말한것임) 천천히 두 분의 관계는 꽃을 피웠다. 두 분이 약혼했을 때 아빠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대체복무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서로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스마트폰은 존재하지 않았던 거다!) 떨어져 있는 시간 그래도 두 분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똑같은 달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두 분은 1965 10 10일에 약혼해 이듬해 5 22일 우드크레스트에서 결혼하셨다.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아주 수줍은 사람이었는데 아빠는 그런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어!” 아빠는 다음의 일화를 자주 들려 주셨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됐을 때 두 분은 공동체 출판사 플라우가 참여한 책 전시회에 파견됐다. 영어 실력이 별로 안 좋았던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무서웠다. 전시회 중에 아빠는 갑자기 누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면서 엄마더러 책 부스를 지키라고 했다. 그러고서 아빠는 모퉁이에 서서 줄곧 엄마를 지켜봤다는 거다. 두 분은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한바탕 웃으셨다.

 

111-.jpg» 크리스토프와 버레나의 결혼 당시 모습

 

그리고 우리들이 도착했다. 10년 사이에 8명의 자녀가 태어난 거다! 우리는 아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식사 때마다 우리는 식탁에 한 사람 자리를 늘 여분으로 차렸다. 예상치 않은 손님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런 손님이 진짜 찾아왔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일은 어느 날 엄마가 우리 집 계단 위로 올라오시면서 “우리 저녁 식사에 오시는 분이에요.”라고 하시며  공동체 입구에서 만난 한 남자를 데리고 오셔서 소개해 주셨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것이 바로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심어주신 거다. ‘기회를 놓치지 마라. 그 순간이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셨고, 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믿음을 지니길 바라셨다. 동시에 줏대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셨다. 어머니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작은 일에도 축 처지는 해진 행주 같은 사람이 되지는 말아.” 우리가 십대가 되면서 상황은 흥미진진해졌다. 엄마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셨다.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 특히 어머니에 순종해야 한다는 건 철칙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빠에게서 천둥이 터져 나왔다! 부모님은 자주 독일어로 말씀을 나누셨다. 우리가 못 알아 듣는 줄 알고 그러셨지만 두 분 사이의 독일어 대화는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독일어 수업이었다!

 

엄마는 우리를 놀 놀라게 했다. 내 남동생이 16살 된 날 우리는 생일 아침 식사를 위해 모두 식탁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킹스턴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 유니폼을 입은 엄마가 춤을 추며 들어오셨다. 어깨 보호대는 물론이고 헬멧을 쓴 채 한 손에는 미식 축구 공을 들고서 말이다. 세상에!

 

공동체에서 두 분이 맡은 책임이 점점 더 무거워지면서 부모님은 다른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방문하시거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일로 다른 나라로 여행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는 이 일에 아빠를 도우셨고, 가능한 동행하셨다. 아빠는 늘 우리들에게 엄마가 없으면 벌거벗은 느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엄마는 웃으면서 “쾃치”(스위스 말로 가벼운 욕)라고 하셨다. 부모님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려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사람은 저마다 모두 이야기가 있어. 그걸 들어줄 사람이 부족한 것 뿐이라고.” 그것이 바로 아빠가 11권의 책을 쓰신 이유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학력이 전부인 엄마만한 편집자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놓친 실수를 잡아내는 건 늘 어머니 몫이었다. 이건 내가 동생 해나와 함께 아빠 비서 역할을 하면서 타이핑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분명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일했던 것은 내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 분은 진실한 말에 담긴 사람들의 영혼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유머와 웃음을 즐기셨던 것도 사실 이런 면모와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웃음은 전염성이 있어. 그리고 최고의 약이지. 유머를 잊지마. 물론 깨끗한 유머여야 해! 

지난 10년은 아빠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점점 더 약해지고 아프셨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는 줄곧 아빠 곁을 지키셨다. 부모님은 종종 평화를 얻기 위해 자연 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생 동물을 관찰하시고, 500카드 게임을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 엄마는 용감하게 계속 길을 가셨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방에만 앉아서 맥 빠져 지낸다고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작년에 엄마는 호주의 공동체를 방문하셨고 올해에는 영국의 공동체들을 몇 번이나 찾으셨다.

 

지난 몇 주 우리 가족은 어머니와 함께 여러 번을 모였고, 그때 작별 인사의 시간도 가졌다. 쉽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아침, 9 21일 새벽 4 15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엄마는 놀라운 평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내 동생 프리실라와 내가 곁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말이다. 그 순간 나는 아빠가 엄마에게 종종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여보, 온 세상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때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여보, 온 천국이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나쁜 감정은 지나가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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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1-.jpg

 

좋지 않은 감정이나 습관이 감당하기 어렵게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온갖 개념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죄의식, 원망원한, 자책으로 즉효약을 찾고 전략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생각을 키우는 것이 습관을 키우는 것을 모르고 자신과의 갈등을 키웁니다. 
자신을 바꾸는 게 거의 불가능 한 일입니다.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죄의식과 자책을 키우지 않고 전략을 버리고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정이나 습관이 올라올 때 최대한 깔끔하게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업(마음의 경향)이 있습니다. 
습관이 올라올 때 
그저 지켜 보면 
저절로 가라앉게 내버려두면
지나가게 허용하면
업(습관)이 바뀝니다.

여태까지 다양한 전략을 활용해 오지 않았어요? 되는 전략이 있었습니까? 다짐도 하고 약속도 하고 규칙적으로 살기도 하고, 그래도 쉽지 않았죠.

전략을 꾸미지 않은 게 가장 좋은 전략 입니다.
답을 찾지 않는 게 답입니다. 
자신을 구체화하지 않는 게 자신을 바꾸는 방법입니다. 
업을 바꾸는 유일한 길은 버림속에 있습니다.

몰라도 되는 마음을 
늘 고집하세요.
Only Don't Know. 
개념없는 
경계없는 
고통없는 
깨어있는
마음자리를 
항상 보호하세요.

요점은 마음이 상하지 않게
신선하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데 필요한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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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란

깊이 느낄 줄 알고

단순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삶에 도전할 줄 알며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부터 나옵니다.

 

   -스톰 제임슨

 

깊은 후회의 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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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를 최대한 이용하라.

 깊이 후회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사소한 차이가 큰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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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강의 원천도 조그만 샘물에서 시작하듯이

아무리 커다란 사건도 가장 큰 원인은 대개는 사소한 것에 있다.

 

                 -스위프트

우리들의 밥상공동체, 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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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향1-.jpg» 왼쪽부터 조현, 이병남, 정명숙, 이죽정, 이재돈 신부

 

어제밤 특별한 만찬을 즐겼습니다. 최후의 만찬 아닌 최초의 만찬이자 최고의 만찬이었지요. 서울 성북동 최순우옛집 바로 옆집에 초대를 받아갔는데요. 그 집은 몇달 전까지 명동성당  부근에있는 백병원 앞에서 죽향이란 죽집을 25년간 하다 최근 그만둔 정명숙씨와 그의 모친 이죽정 여사 둘이 사는 단독주택입니다.

  두 모녀는 한글날 휴일날 저녁, 죽향 25년 역사에서 가장 고마웠던 손님 셋을 자기집으로 초대했는데요. 신라호텔 주방장이 요리를 배워갔다는 '숨은 고수'이죽정 여사가 옥상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해준 요리들이 어찌나 맛나던지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맛난건 두 모녀의 정성과 오랜 단골을 잊지않고 집에까지 초청해준 마음씀씀이였지요. 죽향은 죽이 대표적인 음식이지만, 비빔밥이나 국밥도 맛있었고, 밤엔 술안주가 될만한 요리들도 했지요. 그런데 죽향이 다른 음식점과 다른건 밑반찬까지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든다는 거였죠. 요즘 밑반찬들을 거의 중국에서 만들어들여와 식당에서 포장만 뜯어 차리는 많은 식당들과 달랐죠. 그것도 조미료를 쓰지않고. 요리를 한두개만 시켜도 덤으로 퍼주면서도, 술은 조금만 먹게 권유했죠.
 
  허나 그보다 더 죽향다은건 죽향은 사실상 밥상공동체였어요. 주인과 손님이 어울려 삶과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털어놓고 경청하고 울고 웃던 곳이었지요. 각기 따로 온 사람들도 주인장의 소개로 합석하기도하면서 말이지요. 저는 무엇보다 좋았던건 저녁에 벗들이나 신문사 동료들과 그집을 갈때 몇시에 몇명쯤 간다고만 얘기하지 무슨 음식을 해달라고 주문해본적이 없어요. 주인장은 어떤 사람들이 오느냐에 따라 취향대로 요리를 내놨는데, 데려간 사람들마다 넘 좋아했지요.
 

도올.jpg» 2008년 조현 저 <울림> 출간을 기념해 죽향에서 열린 조촐한 파티에 함께 한 도올 김용옥(왼쪽 두번째)선생 등 참가자들


  1층이 아닌 2층에 있는데도 단골이 끊이지않는건 이런  집이어서였지요. 저녁 자리가 10시가 넘어 주방 아줌마들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단골손님들이  미안해하며 자리를 다른곳으로 옮기려하면, "왜 돈을 쓰려고하느냐.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여기서 얘기하고, 술을 더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꺼내 먹고, 문만 잠그고 가라"면서 자기는 퇴근을 합니다. 그러니 단골 손님들이 좋지않을 수가 없지요.
 
 죽향은 영락교회 앞이어서 영락교회 신자들도 많이 오지만, 명동성당에서 신부 수녀들이 많이 왔지요. 싱글인 정 사장은 동변상련인지 독신수도자들인 신부나 수녀, 스님들에겐 공짜 밥도 잘 대접하고 각별하게 챙기기도 했지요. 그 뿐이 아니었지요. 어르신들도 잘 모셨는데, 리영희 선생님은 이곳을 너무 좋아해, 일본인들에게 이 죽집을 소개하는 일본어글을 써서 일본잡지에 실리게도 하고, 돌아가실 때도 이 죽집 앞에 백병원에 몇달간 입원해 계신 것도 이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저도 죽집에서 리영희 선생님과 자주 만났지요. 리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5~6개월 전쯤엔 제가 오지 암자를 기행하고 쓴 <하늘이 감춘 땅>을 읽어보시곤 밥을 사주시겠다고  죽향으로 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편찮으신 몸으로도 오지 암자 수행자들에 대해 궁금해하시면서 한군데라도 꼭 가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야말로 죽향은 공동체였어요. 정명숙 사장은 1993년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여성원정대 부대장으로 참여한 산악인인데 그 뒤 죽향을 시작했지요. 그 분과 인연이 된 건 2004 제 인도 기행서인 <영혼의 순례자>(<인도오지기행>으로 재출간)를 읽고는, 저를 죽향으로 초대했습니다.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자기 집에서 지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거였지요.
 

죽향2-.jpg

 

죽향3-.jpg» 이재돈 신부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는 이죽정님


 이날 단골로 소개 받은 이병남 서강대명예교수는 제 첫책인 2001년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재출간)을 읽고, 제 신문사 선배를 통해 만나고싶다고 연락이 와서 보게 돼 인연을 맺었지요. 그 분도 늘 죽향에서 만났는데, 두 분 다 제 책을 보고 연락을 해온 펜클럽 회원이라고 말하며 웃곤했지요. 그 이후 제 책을 내고 난뒤 출판기념회식의 조그만 파티도 열댓명이 들어가는 죽향의 방에서 하곤했지요.
 
 이날 초대받은 또 한분은 가톨릭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장을 한 이재돈 신부. 이 분은 이병남 교수의 고교와 대학 친구이기도 한데, 이 교수와 제가 이 집을 드나들기 훨씬 전 1990년대부터 이 집 단골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명동성당 신부들에게 이 집이 인기였지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않은 독신수도자들에게 늘 부담없이 식사하고 한잔도 할 수 있도록 잘 해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신부님이 몇년 그 집에 다니다 5년간 미국으로 유학을 간적이 있는데, 그 때 정사장 어머니 이죽정님에게 "5년간 못뵐 것 같다"고 하며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죽정여사가 눈물을 쏟고 말았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자기 나이가 많아서 5년 뒤에 살아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눈물이 쏟아졌는데, 이 신부도 뒤돌아보더니 눈이 빨갛게 붉어오더라는 것입니다. 80이 넘은 이죽정 여사는 이 신부와 그 인연을 나누며 10대 소녀처럼 다시 수줍게 웃었습니다.
 
 이 신부는 죽향이 다른 분에게 인계된 뒤 명동성당 신부들이 아지트를 잃어버려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병남 교수와 저도 마찬가지라고 동변상련의 아픔을 나눴지요. 그랬더니, 이 성북동 가정집에서 단골들만을 모시고, ‘성북동죽향’을 해보면 어떠냐는 애기가 오고갔고, 두 모녀는 "25년간 인연을 맺은 정든 분들을 못뵈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며 "정말 그래볼까 싶다"고 말했습니다.
 
 돈만이 오고가는 집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의 정과 정이 오가는, 공동체적 밥상공동체가 끊어지지않고, 곳곳에서 되살아나면 좋겠습니다. 모녀는 늘 그랬듯이 옥상정원에서 키운 채소를 넣어 정성스레 논미꾸라지를 끓인 추어탕을 팩에 담아 돌아가는 손에 들려보냈습니다. 마치 엄마처럼, 누이처럼 말이지요. 
 
 

융통성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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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에 바보 아들이 있었다. 바보 아들과 달리 그의 부모는 경우가 있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아들이 어디 가서 실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친척집을 다녀왔다. 부모는 걱정이 앞서서 잘 다녀왔는지 물었고,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또 밥을 어떻게 먹었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고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에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아들은 예의도 차리지 않고 밥그릇을 다 비웠으니 다음부터는 남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을 때 음식을 조금 남기라고 했다. 얼마 후에 아들이 다른 친척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밥이 나온 것이 아니라 인절미가 나왔다. 아들은 음식을 조금 남겨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인절미 한 조각을 집어서 2/3는 먹고, 1/3은 남겼다. 인절미 한 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상에 올라온 인절미를 전부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한 입만 베어 먹은 인절미를 나란히 줄지어서 남겨 놓았다. 아들은 집에 와서 아버지 말대로 음식을 남겼다고 자랑삼아 말했다. 부모는 기가 막혀서 이번에는 남기지 말고 통째로 다 먹으라고 했다. 다시 친척집을 갔는데 이번에는 귤이 나왔다. 아들은 귤을 보자마자 아버지 말이 생각나서 껍질도 까지 않고 통째로 다 먹었다.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서 자랑삼아 아버지 말대로 통째로 다 먹었다고 말했더니 그런 음식은 껍질을 벗기고 속에 있는 것만 먹어야 한다고 했다. 아들이 또 친척집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송편이 나왔다. 어떻게 먹었겠는가? 송편 껍질을 다 까고 먹었다.

+

아들은 음식을 먹는 특정한 방법은 배웠지만 음식을 먹는 원칙을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방법론만 배우면 어제는 맞았는데 오늘은 맞지 않습니다. 이집에서는 옳았는데, 저 집에서는 틀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신구약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신앙생활의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앞에 사는 것입니다.


서구 개인주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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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같은 대도시도 해법은 마을과 골목에서 찾아야”

 

[더 나은 사회] 박원순-데이비드 코튼 좌담

 

박원순 서울시장
“전환도시 방향 확고하게 정할 시점
협동으로도 경제 살릴 수 있어
1 대 99의 사회, 마을에서 눈으로 확인”

데이비드 코튼 교수
“현재의 경제체제는 ‘자살경제’
공동체에 보탬 되는 경제 틀 짤 때
부자들도 미래 없다는 걸 깨달아야”

 

1.JPG»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10일 오전 서울시청 6층 시장실에서 생태문명과 도시전환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생태문명 담론을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인 코튼 교수는 11~12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리는 ‘2018 서울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첫 만남이라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10일 아침 서울시청 시장실에서 열린 좌담에 앞서 박원순 시장과 데이비드 코튼 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시장실 내부를 장식한 다양한 지도와 전광판을 가리키면서 잠시 환담을 나눴다. 박 시장은 코튼 교수의 ‘생태담론’에 공감과 동의를 나타냈고, 코튼 교수는 친필 서명이 담긴 자신의 영어판 저서(국내엔 <이야기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라는 제목으로 2017년 출간)를 선물하며 서울시의 도시혁신 활동에 지지를 보냈다. 생태문명을 설파하는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인 코튼 교수는 11~12일 이틀간 서울시 주최로 열리는 ‘2018 서울 전환도시 국제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문명 전환과 도시의 실험’을 주제로 내걸고 열리는 이 행사는 서울시의 도시혁신 경험을 지구촌과 함께 나누고 도시 전환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다. 코튼 교수는 첫날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도시의 역할’이란 제목의 발제를 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마련한 이번 좌담은 한 시간 남짓 진행됐다.

 

2.JPG» 최근 유럽의 4개 도시를 다녀온 박원순 서울시장은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개발·원조 일하다 ‘자본주의 비판가’로
 인류가 끊임없이 물질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지구와 자연환경에 끼친 부정적 영향도 무시하기 힘들다. 지구의 나이를 가르는 구분으로 ‘인간세’(인류세)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인류 문명이 걸어온 길에 대한 두 분의 견해부터 듣고 싶다.
데이비드 코튼(이하 코튼) “인류란 무엇인가, 문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필요한 때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자연과 사람을 파괴하며 발전해왔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며, 대중과 생명체, 지구를 억압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재화를 창출하는 현재의 경제체제는 생명체를 파괴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자살경제’(suicide economy)라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박원순(이하 박) “큰 방향에서 코튼 교수의 이야기에 충분히 동의한다. 성장 일변도의 사회가 자연을 파괴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불평등도 키웠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재와 같은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다.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그리고 대안이 필요하다. 서울시는 원전하나줄이기 노력을 펼쳐오고 있고 보행친화도시로의 전환도 노력 중이다. 에너지 자립마을이나 에코마일리지 제도도 있다. 서울시도 전환도시로서 방향을 확고하게 정할 때다.”

 

3.JPG» 전형적인 미국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선진국의 개발과 원조가 원주민의 삶을 파괴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열정적인 ‘자본주의 비판가’로 돌아섰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37년 보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코튼 교수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국제개발처 고문으로 일하면서 서유럽 나라들의 개발정책이 개발도상국 빈곤층 주민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다 물질문명의 한계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비판가’로 돌아섰다. 그가 강조하는 생태담론이 과연 발전 단계와 상황이 다른 남반구와 북반구 모두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코튼 교수는 “외국에 나가기 전까지는 이상주의적인 미국 중산층이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대화를 이어갔다.
코튼 “20년 동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빈곤을 줄이는 운동을 했다. 개발과 원조가 공동체 중심의 삶을 일궈왔던 주민들과 공동체에 오히려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수도 없이 눈으로 지켜봤다. 그나마 도움을 준 거라곤 보건분야 정도뿐이다. 주민들을 땅에서 내몰고 공장의 싼 노동력으로 탈바꿈시켰다. 좀 더 발전한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돈이 중개자 노릇을 하는 사회가 됐다. 오늘 아침 여기 오기 전 레스토랑에서 밖을 바라보니 사람보다 차가 더 많더라. 차 안에는 죄다 한 사람만 타고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자문해봐야 한다.”

 

4.JPG»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이 10일 오전 서울시청 6층 시장실에서 열린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와의 좌담에서 코튼 교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사회적 경제가 대세구나’ 자신감 얻어”
박 “최근 도시 네 곳(바르셀로나·빌바오·취리히·탈린)을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에선 기존의 역사 흔적을 파괴하지 않고도 생활환경을 더 인간적으로 바꿀 수 있구나 느꼈다. 빌바오에선 서울시가 의장도시를 맡고 있는 국제사회적경제포럼(GSEF)에 참석했다. 86개 나라에서 1700여명이 왔다. 경쟁 아닌 협동으로도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시도 의욕적으로 힘을 쏟고 있는 사회적 경제가 세계적 대세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서울시는 도시재생 사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혹시 코튼 교수가 서울시에 한마디 조언을 한다면?
코튼 “박 시장의 이야기를 들으니 힘이 난다.(웃음) 도시는 중앙정부보다도 공동체를 좀 더 배려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중앙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다국적기업이나 대기업을 위한 정책이 대부분이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경제 틀을 짜는 일은 도시가 더 잘할 수 있다. 서울시가 노동이사제를 시행한다고 들었다. 아주 훌륭한 정책이다. 덧붙이자면 도시는 차보다 사람을 위해 디자인돼야 한다.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치, 제도, 인프라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도시의 전통을 살리는 도시재생도 그런 맥락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 코튼 교수는 시장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서울시 보행도로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멋지다, 훌륭하다”고 치켜세웠다. 이에 박 시장은 지난여름 강북의 삼양동 옥탑방 체험을 떠올리며 코튼 교수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박 “마을(옥탑방)에 살아보니 마을 경제가 다 무너졌더라. 골목식당, 철물점, 미용실 이런 건 다 사라지고 죄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뿐이다. 거기서 나온 수익은 전부 본사로 돌아간다. 1 대 99의 경제를 마을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도시재생 사업을 위해 서울시가 돈을 써도 정작 건설사 주머니로 돌아갈 뿐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서울시가 세금으로 쓰는 돈만이라도 동네 주민들한테 돌아가도록 하자, 이렇게 마음먹었다. 지역 주민들이 만드는 제품들이 팔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jpg»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서울시청 6층 시장실 전광판을 뒤로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혹시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박 “귀한 조언 잘 새겨듣겠다. 서울시가 마을공동체 사업을 처음 시작하자 대도시에 무슨 마을 타령이냐, 19세기 농촌경제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냐 반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다. 대도시도 마을부터 시작해야 한다. 서울 같은 대도시도 해법은 마을과 골목에서 찾아야 한다. 지역과 마을의 재생이 대도시의 성장과 대립하는 게 아니다.”
박 시장은 내친김에 코튼 교수를 향해 “아예 한달 정도 서울에 머무르면서 동네를 들여다보시라”고 웃으면서 권하기도 했다. 좌담을 마무리하며 코튼 교수는 ‘세가지 결론’을 하나하나 정리하듯 짚었다.
코튼 “첫째, 세계 리더십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만심에서 나오는 서구의 개인주의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아는 동양의 사고방식으로. 둘째, 이대로는 부자들도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과 지구가 죽으면 모두 끝이다. 부를 분배하고 공동체를 되살리는 사회로 가야 한다. 셋째,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도 너무 늦었다. 가능한 한 빨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행·정리 최우성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시민경제센터 연구위원 morgen@hani.co.kr

 

한 구석이라도 밝힐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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照千一隅 조천일우

此即國寶 차즉국보

 

천 구석 가운에 한 구석만 밝힐수 있다면

이사람이 바로 국보 같은 존재가 될지니라.

 

이 한시는 일본 교토 인근 히에이(比叡)산 엔랴쿠지(延曆寺)의 후문 방향 주차장 가는 길에 있는 돌기둥에 세로글씨로 새겨졌다. 석조물 자체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이끼도 끼지 않았고 물때도 없으며 색깔도 바래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다고 원문까지 요새 것은 아니다. 이 절을 처음 지은 사이초(最澄·767~822) 대사의 어록인 까닭이다. 궁궐처럼 화려한 도시 사찰에 머무는 것을 당연시 여기던 시절에 그런 식의 삶을 거부했다. 22(788) 때 깊은 산을 찾아가 토굴을 짓고 고행을 자처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손수 제작한 불상과 그 앞의 소박한 접시등잔에 불을 밝혔다. 사바세계의 수많은 어두운 구석 가운데 이렇게 한 구석(一隅)이라도 제대로 밝힐 수 있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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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초 대사는 804년 중국으로 유학해 저장(浙江)성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머물렀다. 그곳은 전설적 은둔자 한산(寒山)이 나무와 바위에 아무렇게나 써두었다는 시를 모은 한산시집(寒山詩集)의 무대이기도 하다. 5번 시에 언제나 저 뱁새를 생각하노니 한 가지만 있어도 몸이 편안하다네(常念鳥 安身在一枝)’라는 구절이 나온다. 많은 나무가 있어도 뱁새에겐 한 가지(一枝)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우연의 일치로 일지(一枝)’일우(一隅)’는 천태산이라는 지역적 배경을 함께한 셈이다.

 

일지는 조선 초의 선사(1786~1866)에 의해 전남 해남의 작은 암자인 일지암(一枝庵)까지 뻗쳤다. 한동안 끊어진 다맥(茶脈)을 되살리자 차 향기는 다시 한반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나뭇가지 한 개가 드디어 천 가지(千枝)가 된 것이다. 일우등잔불은 오늘까지 천년 이상 이어져 불멸의 등불로 불렸다. 동시에 일본열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등잔불 한 심지가 다른 심지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천 구석(千隅)을 밝힌 것이다. 결국 사이초 대사의 일우등잔불과 초의 선사의 일지암자는 두 나라의 보배가 됐다.

 

 

 

좋은 전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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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그림-.jpg» 파블로 피카스가 그린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새삼 존재의 이유를 묻습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하여 6년의 수행 끝에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고통이 무지와 욕탐이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평화로운 세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무지를 지혜로, 욕탐을 자애로 전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의 무지는 단순히 정보와 지식의 빈곤이 아니다. 모든 생명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연결된 존재라는 투철한 통찰과 인식이 결여된 상태라고 했다. 그런 무지의 맥락에서 살생과 전쟁은 욕탐의 최고 절정이다. 석가모니는 어느 한 개체에 대한 폭력과 죽임을 엄금했지만 전쟁의 행위 또한 전면 부정했다. 나쁜 평화라는 말이 형용 모순이듯이 좋은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님은 고향으로 돌아와 해탈과 평화의 길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어느 날 고향 마을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자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서로 자기 마을 논에 물을 끌어들이려고 언쟁이 일어났고 큰 몸싸움이 번질 상황이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부처님은 현장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처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다.

 

학살1.jpg»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들

 

“그대들은 어찌 생각하는가요? 물이 더 소중한가요, 사람들의 생명이 더 소중한가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꽃은 그 모습 그대로 기쁨을 준다. 물은 목마름을 해소하고 뭇 생명을 자라게 한다. 해와 달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존재하기에 모든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가 된다. “이것을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저것을 말미암아 이것이 있다” 어떤 존재가 생성하고 생장하는 인연의 이치가 이러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은 존재의 ‘본래 없음’을 통찰했다. 이를 ‘공(空)’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여러 조건이 결합하면 발생하고,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조건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가 본래부터 고정/불변/영속적이지 않고 관계와 변화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형태와 이름을 부여받은 세상 만물 중에서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고, 지금 존재하고 있더라도 영속적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존재도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그런 존재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나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 나의 생각이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 있다. 처음부터 유전인자와 같이 있었던 생각일까. 당연한 생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각일까. 그 어떤 생각은 결코 변할 수 없고, 변해서도 안 되고,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생각일까.

‘군대’라는 존재, 군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생각해 본다. 군대는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고, 지금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고, 항구적으로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군대가 굳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군대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바꿀 수 없는 생각일까?

 

석가모니.jpg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전쟁은 때로는 불가피하고 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차선/차악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한다. 이해관계가 이리저리 얽힌 현실에서 부정할 수만은 없는 생각이고 마냥 매도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다른 쪽으로 생각의 발을 옮겨봐야 하지 않을까. 그 발걸음은 질문에서 시작할 것이다. 군대! 그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가?
반전평화주의자 묵자의 말을 옮겨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복숭아를 훔치는 것보다 죄가 더 무겁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면 그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크게 나라를 공격하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칭송하면서 의로움이라고 한다. 이러고서도 의와 불의의 분별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묵자』 「소염」편


 

자기 마음 봐야 제자리 찾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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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홍성남강의.jpg

 

 

ㅡ자기자리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리가 있습니다
자기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당당합니다
설령 그자리가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누추보인다 하더라도ㅡㅡㅡ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제자리를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좀처럼 제자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꽤 오랫동안
홍신부라는 호칭에 낯설어했습니다
ㅡㅡㅡㅡ
그렇게 오랜 헤메임후
상담을 통해
제 마음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제 자리를 찾게 되고
제 인생을 사는듯한 행복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마음을 보지 못하면.
자기자리도 찾지 못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허덕이며 가던 길을
비로소 쉬엄쉬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기마음ㅡ잘 다독이시고 챙기셔서
당당한 자기자리 가지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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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g» 세월호 유가족들들 치유에 나선 정혜신 박사(오른쪽)

 

<당신이 옳다> 저자 정혜신씨와  ‘영감자’ 이명수씨 부부

 

마음 심폐소생하는 공감, 아픔 맨살에 맨가슴으로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즉각 심폐소생술을 하고 병원으로
밤낮 곁에서 뽀뽀하고 “멋있어” 격려, 1주일만에 아무 후유증 없이 ‘부활’

 

국가폭력 피해자들 속으로 들어가, 15년 동안 심리적 전선 참전용사로
‘태극기할아버지’의 ‘나’에 귀 기울이니, 과거 상처 토해내며 사과까지 했다

 

무작정 경청과 호응이 정답은 아니다. 존재 자체로 들어가 적정 처방 한다
문제아의 행동까지 동의하진 않지만, 인정해주면 안정 찾아 합리적으로

 

지난 14일 경기도 양평군 군내면 공세리. 정신과의사 정혜신(55)씨와 그의 남편이자 심리기획자인 이명수(59)씨 부부의 집을 찾았다. 집 앞에 서있는 이씨의 얼굴이 가을 햇살보다 따사롭다. 불과 몇 달 전 저승길에 다녀온 모습이 아니다.

 지난 5월8일 아침 그는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그는 구급차에 오르자마자 온몸이 새파랗게 변하며 뻗뻗하게 굳었다. 그리고 곧 심정지가 왔다. 아내 정씨가 즉각 심폐소생술(CPR)을 했고, 병원에서 심장 스텐트 시술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2만명의 심근경색 환자 가운데 생존율은 7.5%에 불과하다고 한다. 생존하더라도 상당수가 수족마비와 같은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그는 일 주일 뒤 병원을 두 발로 걸어나왔다. 아무런 후유증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즉각적인 심폐소생술 덕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병원에서 심정지가 와서 즉각적인 심폐소생술을 해도 그처럼 회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씨는 이를 “심리적 시피알 덕택”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4시간 아내가 곁에서 지키며 땀을 닦아주고 눈만 뜨면 뽀뽀를 해줬다. 얼굴이 퉁퉁 부은 몰골인데도 체면을 중시하는 나를 생각해서 ‘흉하지 않아’, ‘멋있어’라고 끊임없이 말해줬다. 세 아이와 형과 누나, 조카들까지 손발을 계속 주물렀다. 이들을 보면서 ‘아, 내가 잘못되지는 않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선을 넘나든 일 주일간 “인간은 의학적 처치도 처지지만, 이런 심리적 지지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완벽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완벽한 심리적 지지를 받으면 다시 심장발작이 와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게 된다”고 했다.

 

2-.JPG» 심근경색으로 심정지 됐떤 남편 이명수씨와 그를 물리적·심리적 심폐소생술로 살린 치유자 정혜신씨가 서로 "당신이 옳다"며 웃고 있다.

 

 고문 피해자·세월호 유족 등 400차례
 이씨를 살린 ‘심리적 시피알’이 뭘까.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당신이 옳다>(해냄 펴냄)가 그 궁금증에 답했다. 이 저서에서 단지 잉꼬부부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서로의 치유자이고 스승이자 도반인 이명수는 ‘영감자’로 저자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이 책엔 심리적 내상, 즉 트라우마로 신음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비법이 담겨있다. 그 비법의 핵심은 공감이다. 공감이란 말은 너무도 흔하다. 저자가 정신과의사 수련을 받을 때부터 그 중요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도 바로 공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혼을 불어넣은 작품의 키워드를 ‘공감’으로 정했다. 그것은 심리적 전선에 참전용사로서 산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심리적 참전 용사로 지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지만, 우연히 만난 ‘진도 간첩조작 고문 피해자’ 박동운씨의 깊은 심리적 아픔을 보고 치유상담에 나선 이래, 그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최전방에 섰다. 고문피해자를 돕는 ‘진실의힘’과 쌍용자동차 해고자 및 가족을 돕는 ‘와락’, 세월호 피해자를 돕는 치유공간 ‘이웃’에서 함께 했다.

 교련수업에서 부상자 치료 훈련을 받는 것과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전우를 돌보는 것과는 같아도 같은 것이 아니다. 의사 수련시절 그가 들은 공감과 참전용사 정혜신의 공감 역시 같을 수가 없다. 그는 국가폭력과 주위의 2차, 3차 가해로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죽어가던 이들 속으로 들어가 집단상담을 했다. 이명수씨는 무려 400회에 이르는 그런 상담 현장에서 ‘어떻게 심리적 심정지 상태에 있던 이들의 심장이 다시 뛰는지’ 지켜본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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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수 있어…네 감정이 옳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했길래’이다. 정혜신씨가 말하는 것은 무작정 들어주기만 하는 경청이나 무작정 호응만 해주는 공감이 아니다. ‘적정’ 처방이 필요하다. 그는 발이 가려운데 구두를 긁지 않는다. 가려운 맨살을 만진다. 맨살이란 존재 자체다. 아픈 이의 마음과 감정이다.

 “몇 시간이나 얘기를 들어줘도 말하는 사람도 경청한 사람도 개운치 않은 것은 과녁이 정확치 않아서다. 사건이나 상황 자체에 휘둘려 존재 자체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로 진입했을 때 치유된 건 국가폭력 피해자들만이 아니었다. 정혜신씨가 세월호 유가족들을 향해 행패를 부리던 ‘태극기 할아버지’ 옆에 앉아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으며 그의 존재에 집중했을 때 할아버지는 드디어 ‘세상’이 아닌 ‘나’의 얘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과거 상처들을 토해내며 사과까지 했다. 그건 정혜신씨가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충고·조언·평가·판단’하지 않고, 그 할아버지의 가슴으로 직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처럼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배우자들에게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사람들의 ‘나’에 초점을 맞춰 장대비 같은 공감을 퍼부으면 죽어가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이 책은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문제를 일으켜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 따위의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그때조차 사건이나 상황의 포탄을 피해 그의 감정에 주목해 듣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까지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감정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 ‘네 감정이 옳다’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그런 공감을 받은 후에야 안정감을 찾은 아이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길냥이들1-.JPG» 집없는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며 돌보는 이명수씨가 길냥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존중과 사랑의 꽉 찬 심리적 곳간
 트라우마 피해자들의 전선에서 이제 1.5진 혹은 2진으로 물러나 있는 요즘 부부는 시골집에서 배고픈 길냥이들을 돌보는 재미로 소일한다. 하지만 오직 공감해주고 돌볼 뿐 인간의 손길을 두려워하는 길냥이들에게 손길이나 재롱 같은 건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세 아이를 돌보며 그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세 아이 중 한 아이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를 마쳤지만, 다른 한 아이는 대졸 무직이고 또 다른 아이는 고졸로 전자제품 판매원이다. 

 그들의 진로와 직업에 대해서 한번도 강요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 배우자에 대해서도 오직 자신들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부와 아이들은 갈등 없이 사랑할 수 있었고 언제나 즐거울 수 있었다. 이렇게 에너지 손실이 없이 ‘심리적 곳간’이 찼기에 트라우마의 현장으로 달려갈 수도 있었다. 햇살 좋은 이 집 마당에서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던 길냥이가 말하는 듯 했다.

 “맞아. 치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야. 정혜신·이명수, 당신들이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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