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가지 일만 할 줄 안다. 하나는 단순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복잡한 일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프랑스 철학자)
나는 두 가지 일만 할 줄 안다. 하나는 단순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복잡한 일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프랑스 철학자)
애연가 곁에서 들은 이야기
1.이야기 하나
아파트는 담배문제로 사소한 충돌이 적지 않다. 사생활 공간인 까닭에 A씨에게 어느 정도 흡연권이 보장된 곳이지만 가족성화에 못이겨 그 권리마저 포기하고 베란다까지 나간다. 한 모금에 천하를 품고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이내 인터폰이 울렸다.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윗층에서 담배연기를 불편해 한다는 전언이다. 순간 행복감을 박탈당하니 갑자기 마음균형이 깨지면서 욱하고 성질이 올라왔다. 윗층에 들리라고 “연기가 디귿(ㄷ)자로 올라간다는게 말이 되냐고?”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담배연기는 일단 입김의 힘으로 바깥방향으로 일(一)자로 나간다. 대기권에 노출되면 니은(ㄴ)자를 그리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 후에 다시 윗집 창문으로 들어가려면 연기가 디귿(ㄷ)자로 굽어져야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었다. 굴뚝연기 원리까지 인용하면서 씩씩거렸지만 별 수 없이 담뱃불을 꺼야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깃장이다. 문제는 연기가 아니라 냄새인 까닭이다.
2.이야기 둘
B씨는 흡연에 대해 안주인이 뭐라고 해도 못들은 체 했다. 이미 담배피는 것 알고 결혼했으니까 그건 기득권 존중차원에서 감수해야할 일이라고 여겼다. 딸도 유난히 담배냄새에 민감했지만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시집간 후의 말까지 귓등으로 흘러들을 수 없었다. “외손자 안고 싶으면 끊으세요.” “큰일인데. 이를 어쩌지!” 안절부절했다. 친정오는 날마다 재떨이 치우고 환기하고 양치질하고 향수를 뿌리고서 손자를 맞이한다고 한다.
3.이야기 셋
중등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한 교사는 골초였다. 학교에 근무할 때 일이다.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기호품을 한 개피 즐긴 후 교실로 들어갔다. 한 학생이 코를 싸잡아 매며 ”선생님! 냄새나요.“라고 하더란다. 순간 당황했지만 표정관리를 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는 대충 얼버무렸다. 며칠 후 생활지도부에서 소지품 검사를 했다. 담배지참 혐의로 붙들려 온 일군의 무리 가운데 그 학생이 있는게 아닌가?
”이런 가증스런 녀석!“
4.이야기 넷
동해 바닷가 백사장 언저리 흡연부스 앞을 지나갔다. 안에 있는 몇 개의 재떨이에는 이미 꽁초가 수북하다. 흡연을 위해 온 일행들이 문을 열다말고 한 마디 했다. “안의 냄새가 너무 심한데. 그냥 옆에 서서 피자.” 담배를 피는 사람조차도 흡연실을 피할만큼 그 냄새의 농도는 만만찮다.
다른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는사람들이 잇습니다
"걔 내가 키운애야 걔 엣날에는 내앞에서 머리도 못들었써"
라면서 뒷전에서 개무시하거나
당사자앞에서는 "내가 선배야","고참이야"하면서 을러대는 사람들
왜 그런것인가?
이들은 다른사람들을 무시하는 행위를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남들을 무시하는 말을 할때 사람의 마음안에는 변태적인 쾌감이 올라옵니다
웬지 자신이 아주 괜찮은 사람인듯한 자기착각현상이 생기는것입니다
이들은 다른사람을 칭찬해주거나 인정해주면 다른사람이 자신을 무시할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심리적 이유는 무엇인가?
속이 좁아서, 시야가 좁아서 그런것입니다
우물만 개구리 같은 열등컴플렉스가 심한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병적인 심리를 갖고 삽니다
그리고 그 속내에는 무능감 열등감 자기혐오감이 깔려있습니다
가진게 없고 할줄아는게 없다는 병적인 자의식이 다른사람들을 개무시하는 역작용을 유발한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까이 하지않는것이 좋습니다
이런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하는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간혹 이들이 호의를 베풀때가 있는데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에게 복종 충성 혹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싶을때 그럴뿐입니다.
» 서울 홍대입구역 부근에서 메디힐요가원을 부인 이정수 박사와 함께 운영하는 이동환 원장(왼쪽)이 부인과 함께 서있다.
남방불교수행법인 위파사나의 여러 전통 중에서도, 고엔카(1924~2013)에 의해 전세계로 퍼져 이른바 ‘고엔카 위파사나로’불리는 명상법은 석가가 수행한 원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얀마에 이주한 인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20대에 청년재벌이 된 고엔카는 심각한 편두통으로 고생하던중 스승 우바킨을 만나 위파사나를 14년간 수행하고, 1969년 인도로 건너가 ‘10일코스’를 운영해 위파사나를 전했다. 15세기 이후 사실상 종주국임에도 불교가 소멸된 인도에서 불교를 되살린 인물로 고엔카는 불가촉천민 출신 인도 초대 법무부장관 암베드카르(1891~1956)와 함께 양대산맥으로 손꼽힌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라 매일 두시간씩 한다는 명상도 바로 이것이다.
인도에서 그 고엔카를 만나 위파사나를 수련한 이동환(50)은 한국인 최초의 ‘고엔카 위파사나’ 법사다.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197의39, ‘연트랄파크’로 불리는 경의선철길공원 옆 메디힐요가원에서 그를 만났다. 이 원장은 1996년 인도에서 10일코스를 처음했고, 2003년 법사가 되었다. 고엔카위파사나는 전세계 140개 고엔카위파사나센터에서 고엔카의 생전 법문에 따라 수행하는데, 한국어통역 녹음이 이원장의 목소리다.
인도 푸나에서 15년간 함께 머물며 요가수련과 학문을 병행했던 도반이자 부인인 이정수 박사(요가철학)와 함께 운영하는 요가원은 작지만 단아하고 고요했다. 오후 6시가 되자 수련생들이 입실했다. 몸 위주의 하타요가지만, 시종일관 깊은 호흡을 통해 근육을 이완시키는 수련이 이어졌다. 몸을 움직이는 듯하지만, 그 이완과 고요함이 명상과 둘이 아닌게 분명했다.
이원장이 요가의 세계에 들어선것은 인도로 떠난 1994년이었다. 그는 푸나의 아헹가요가연구소에서 근현대 인도 하타요가의 전설 아헹가(1918~2014)를 만나 수련을 시작했다. 부인을 만난 곳도 그곳이었다. 그는 요가수련과 위파사나 수행, 석가 당시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공부를 병행했다.
그러나 그가 수련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그를 처음 몸수련의 세계로 이끈 것은 태권도였다. 그는 인천 구월중학교 태권도부 창단 당시 주장이었다. 구월중은 그 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문대성을 배출한 태권도의 명문팀으로 부상했다. 그는 신생팀을 이끌고 태권도대회 종합우승까지 시켜 태권도 명문팀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인문계고로 진학했다. 그러나 수련에 대한 미련은 버려지지않았다. 도서관에 앉아 눈을 감으면 대련이 실전처럼 펼쳐졌다. 화장실에 다녀온 친구가 그를 건드리면 자신도 모르게 방어를 해내곤 했다. 그는 새벽마다 수봉공원에 가서 몸수련을 하고, ‘불교무술관’도 다녔다. 때마침 나온 <단>이란 소설 속의 호흡법을 홀로 해보기도했다. 그런 수련에 몰두하면서 다음날 일어날 일이 눈에 보이는 신비한 현상을 체험하곤 했다. 그는 이런 현상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한마디로 깨달음을 얻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수행이나 깨달음을 운운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천주교 순교자까지 낸 7대째 천주교 집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부가 되어서 수도할 작정으로 서울가톨릭대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깨달음을 포기할 수 없어 1년만에 중단했다. 그리고 숨은고수들을 찾아 수련을 하다 인도까지 간 것이다.
“아헹가는 처음 만난날 ‘나는 명상은 안가르친다’고 하데요. ‘뚱딴지 같은 소리’로 여겨 ‘어떻게 명상 없이 요가가 된단 말이냐?’고 묻자, 자신은 ‘육체적 단련과 호흡을 명상적 단계로 승화시킨다’고 하더군요. 대단한 자부심이었지요.”
실제로 아헹가는 귀신처럼 몸을 다뤘다. 한국에선 기마자세를 할 때도 달달달 떨면서 근육의 힘으로만 버텼는데, 그의 지적대로 동작을 하고, 호흡을 하니 근육이 아닌 다른 힘으로 설 수 있었다. 아헹가가 요가를 통해 환자들을 쉽게 치유하는 것을 보고, 그도 원리를 터득하기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가 필생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한 이는 아헹가가 아닌 고엔카였다. 고엔카는 그가 이전에 만났던 ‘이른바 고수’들과 달랐다. 그가 만난 도인들도 남다른 능력자이긴 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비전’이라며 쉽게 내놓지도 않았다. 더구나 위파사나를 수행해 일체가 산산히 부서지는 체험을 해보니, 공능을 과시하고 도력을 겨누어 더 센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던 모습이 우습고 부끄러워졌다.
“고엔카는 담마(진리)를 공중에 살포하더군요. 실제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그 귀중한 담마를 아무런 조건없이 나눠주었지요. 그를 만나 투정을 해보기도 했는데, 그를 만나고 나올 때쯤엔 속이 말랑말랑해진 아기가 된 느낌이었어요. 내면에 아무 것도 남지않아 비워진 것같아, 이 분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란 생각이 들었지요.”
» 1994년 인도 푸나의 아헹가요가센터에 인텐시브코스에 입문했을 당시. 두번째줄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아헹가. 세번째줄 맨왼쪽 빨간셔츠를 입은 이가 이동환 원장, 두번째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부인 이정수박사다.
이원장은 20세기 대표적인 명상스승으로 꼽혔던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와 고엔카와 아헹가가 가진 인연도 소개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회원들에 의해 메시야로 발탁돼 훈련받아 신지학회 수장이 되었지만 32세에 수장직을 사입하고 모든 종교적 관념과 종교적 단체와 관계를 끊고, 권위자로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적 가정을 의심하며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관찰자로서 여생을 보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마음으로 직입하면 되지, 어떤 테크닉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했지요. 고엔카가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일반인이 마음으로 직입하는게 쉽지않기 때문에, ‘10일간 첫째날은 이렇게, 둘째날은 이렇게 점차 매일 기법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게 한다’고 설명했지요. 그러자 크리슈나무르티도 ‘그런 테크닉을 사용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도록 이끈다면 그건 테크닉이 아니라 전법(진리를 전함)입니다. 그러니 지도하십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아헹가는 브라만 집안이어서 산스크리트어와 요가수트라를 공부는 했지만 명상을 따로 하지않고, 주로 자체 체험을 통해 터득했기에 표현이 좀 거칠었지요. 아헹가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찾아 기기묘묘한 요가 동작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크리슈나무르티가 ‘유아 프로페셔날’(당신 프로군요)라고 했는데, 이건 칭찬같지만 ‘당신 꾼이구만’이란 비난으로 들릴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자 아헹가가 ‘지금 돈과 명예가 따르긴 하지만, 한번도 돈과 명예를 보고 수행한 적이 없다’고 했다는군요. 크리슈나무르티는 ‘오해하지 말라’며 자기가 매일 40분씩 한다는 요가를 보여줬는데, 아헹가가 보고 ‘호흡이 잘못 됐다’며 몇가지를 지적해 다시 하게 하자 호흡이 아주 편안하게 잘 되는 것을 보고 크리슈나무르티도 ‘당신으로부터 요가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푸나에 머무는 3개월 동안 일주일에 두세차례씩 아사나 동작과 호흡을 지도 받고, 또 2년 후에 방문했을 때도 3개월간 아헹가로부터 요가를 지도받았다고 해요. 요가에 있어서마는 크리슈나무르티도 아헹가를 인정한 것이지요.”
이 원장은 2009년 귀국한 뒤 10일 코스가 열릴 때면 위파사나를 지도하면서, 코스가 없을 때는 아무도 몰래 ‘막일’을 해서 생계를 잇기도 했다. 고엔카위파사나는 법사라고 해도 아무런 보수를 받지않고 일체를 봉사할 뿐이다. 그는 2년 전에야 이 요가원을 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철저히 요가만 가르치고, 명상단계는 고엔카 위파사나 10일코스에 가서 하도록 안내한다.
그는 불면증, 급성요통 등 스트레스성 질환들을 요가 동작과 호흡을 통해 개선시키는 내공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남다른 점은 몸과 마음을 함께 아우르는 통합에 있다.
“극진가라데의 고수 최배달이 몸수련만을 한 것이 아니지요. 최배달은 ‘방심하지 말고, 당신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알아차리도록 깨어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것이 바로 위파사나의 ‘알아차림’과 다름이 없지요”
그는 몸수련도 그런 깨어있음과 자기 중심을 잃지않은 균형과 평정심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태권인 출신으로서 현대 태권도가 점수 몇점 얻기 위해 자기 중심도 잡지못한채 자신을 상대에게 던져버리는 식으로 변질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태권계 후배들에게 몸의 균형을 잃지않은 ‘요가식 태권도’를 익혀보면 좋겠다는 제안도 했다. 상대를 때리기 위해 상대만 보는 무술이 아니라 자신을 보면서 평정심을 갖는 무도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몸과 마음이 결합되어서 일어나는 감각들에 대한 알아차림을 계발하라’고 했지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이나 소리, 냄새 등을 쫓아 밖에 온통 의식을 빼앗기며 살아가지요. 요가가 운동은 운동이지만 자기 몸과 자기 호흡을 지켜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계발할 수 있게하지요. 몸과 호흡에 온전히 깨어있어야 쓸데 없는 긴장을 풀 수 있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이 원장은 소방관들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나 학교내 왕따와 폭력도 요가를 통해 도울 수 있다고 했다. 이완과 알아차림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지켜보는 힘을 길러야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홍천 밝은누리에서 아이들(서있는 아이는 자기 아들, 앉은 아이는 공동체의 아이)과 놀고 있는 한 아빠
“남자가 육아와 살림을 함께하지 않으면 구원받기 어렵다” <밝은누리>에서 독박육아와 가부장질서를 극복하는 마을문화를 만들어 갈 때, 자주 서로 독려했던 말이다. 이런 노력 덕에 지금은 아빠가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부모뿐 아니라 마을 청년들이 이모 삼촌 되어 함께 하기에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함께 한다’는 말을 늘 실감하며 산다.
‘알아서 긴 다’는 말이 있다. ‘지배의 내면화!’ 지배받는 이들이 자기가 지배받는 걸 모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지탱하는 생각을 하고, 지배를 재생산하는 욕망과 정서를 갖는 거다. 옛 것이 생명력을 다하고 새 질서와 법으로 대체되어도, 옛 관습과 문화가 여전히 힘을 갖고 작동하게 하는 힘이다.
<밝은누리> 인수마을을 만들어 가던 초기, 아빠들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법으로 보장된 거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할 문제였다. 인사 불이익에 대한 걱정,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회사에서 나름 능력을 인정받던 이는 다른 사유로 휴직처리 해주겠다는 회유를 받았다. 인사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배려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육아휴직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는 거였다. 실효 없는 법 보다 ‘서로 눈치 보며 알아서 기는 관습’이 깨지는 게 더 위험했던 거다.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런 거 다 포기하고 일하는 동료들 안 보이냐?” “다른 회사 갈 거냐?”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 후에는, ‘잔머리 굴리는 놈’, ‘다른 회사 갈 놈’이 되어 버린다. 이런 대화가 오가고, 회사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면, 계속 요구하기 어렵다. 시간이 갈수록 제 풀에 지친다. 자기도 겨우 설득된 거라 오래 가기 어렵다. 아이 돌보고 살림하는 것 보다 오히려 회사 일이 편하니 못이기는 척 체념하기도 한다. 혹 간절함이 있어도 여러 걱정과 불안, 질질 끄는 대응에 지쳐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우리는 그 관습과 정서를 함께 넘어 섰다. 재미있는 일은 육아휴직 후 누구도 걱정했던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거다. 부딪혀 보기도 전에 과도하게 걱정하고 두려워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아서 기게 하던 관습의 힘’은 우리에게서 그렇게 사라져갔다.
공부하러 오던 한 학생과 상담을 했다. 친구들이 무서운 영화 보는 걸 즐기는 데, 자기는 너무 힘들다는 거였다. 따돌림 당할까 두려워 말도 못하겠단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걸 배려해 주지 못할 친구라면 미련을 갖지 말고 얘기하라고 했다. 다음 주에 밝은 얼굴로 찾아왔다. 친구들이 잘 들어 준 거다. 같은 고민을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대신 얘기해 줘서 고맙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한다. 이래저래 우리 삶에는 부딪혀 보지도 않고 미리 체념하고 포기하는 게 참 많다. 혹 어려움을 겪더라도 가야할 길은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 새로운 삶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니!
지난 12일 서울시가 3개월마다 한번씩 여는 전직원 조례시간에 서울시청 8층 대강당에서 박원순 시장님을 비롯한 간부들과 전직원 800명을 대상으로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제 책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전직원 조례 시간이 1시간20분으로 제한돼 있어서 강연시간이 적어 아쉬움이 있었지만, 박시장님을 비롯한 전직원들이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주고, 박시장님이 이렇게 시간 쫓겨가며 해야되느냐, 한나절은 이걸로 모두 한번 듣고 얘기해보면 어떠냐고까지 말씀해주셔서 감동이었습니다.
오늘 강연에서는 먼저 탐사한 마을공동체 모습을 PPT를 보여주며 설명했고, 이어 ‘진짜 한국병의 원인’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이를 간단히 요약합니다.
한국 청년들의 5포, 7포, 저출산, 높은 자살율과 OECD 3~4의 존속살해율 한국병의 진짜 원인은 드러난 것만 아닙니다. 1970~9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아기 때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해 무의식에 안전기지를 상실한데 큰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선 아기의 입장에 서서 얘기해보겠습니다.
196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아기 원숭이 격리 실험이 말해주듯이 아기 때 어미와 격리돼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그 아기는 정상적인 사회성을 갖기 어렵게 됩니다. 한국은 서구 국가들이 200~300년간 변화시켜온 것을 50년만에 급격히 변화시켰습니다. 1960년 250만명이 채 되지않았던 서울시는 이제 천만명이 넘었고, 도시 인구는 40프로 미만에서 90프로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촌마을 사람들은 기회를 찾아 도시로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그 사이 대가족도 사라지고, 마을도 사라져갔습니다. 불과 40~50년 전만에도 어느 골목에서 아이들이 있었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선 어느 골목에서도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고도성장기에 어른들은 살기 위해 고생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신이 났습니다. 그 전에는 뭘 해볼래야 해보기도 어려웠지만, 1962년 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시작되고, 공장이 돌아가고, 도시가 만들어지고, 건축붐이 일고, 일자리가 생기고, 기회가 생겼습니다. 과거엔 논밭을 파도 세끼 밥도 해결하기 어려웠지만, 아메리칸 드림 이상의 드림을 가지고 기회를 잡기 위해 애썼습니다. 힘도 들었지만 어른들은 신이 나기도 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무력한 아기들의 입장에선 온전히 어미들로부터 돌봄을 받던 포유류로서 300만년만에 최초의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부모는 대가족과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핵가족으로 고립된데다, 그 부모마저 많은 이들이 일터로 떠나거나 일을 해야했지요. 아이에 대한 집중도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졌습니다.
어려서 애착이 형성되지 못하면 분리 불안이 생기고, 안전기지가 형성이 되지 못합니다. 안전기지가 형성된 아이가 넓은 바다에서 7함대를 타고 있다면, 안전기지가 없는 아이는 조그만 돛단배를 타고 있는 격입니다. 태풍 제비는 일시적으로 핥퀴고 지나가지만, 안전기지가 내면에 구축되지 못하면 평생 내면의 지진을 겪게 됩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인간을 믿을 수 없어서 인간관계를 회피하고 싶고, 숨고만 싶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10~20년 전부터 복지가 생겨나서 아이들의 충격을 조금 완화할 수 있는 시스템들이 조금씩 갖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요소들은 그보다 더 빨리 증가했습니다. 일에 지친 부모들은 퇴근 뒤나, 주말에도 자신들의 스트레스도 해소해야 했고, 취미 생활도 해야했습니다. 텔레비전도 봐야하고, 홈쇼핑도 검색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하고, 게임도 해야하고, 인터넷 에스엔에스도 해야하고, 무엇보다 스마트폰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의 부모들은 어미새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늘 새끼들을 돌보거나, 새끼들을 먹일 먹이를 구하기 위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지요. 과거에 우리의 부모들도 그랬기 때문에, 조금만 크면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부모를 이해하고, 가엽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어른들이 포유류로서 자식에게만 집중하는 본능보다 자신의 재미와 욕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의 차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아기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구와 달리 한국과 같은 압축적인 성장을 이룬 중국에서도 벌써 저출산이 문제되기 시작했듯이 그런 압축성장 과정에서 그 시기를 지나왔다면 그런 트라우마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분리불안으로 안전기지가 형성되지 못하면 내면이 불안하고 두려움의 정서가 지배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가 어렵습니다. 대한민국 청년들 상당수가 모험에 나서기보다는 공무원이 되고싶어하는 것도 그 무엇보다 가장 안전한 곳, 더 흔들리지 않을 곳이 필요한 때문입니다.
오늘날 다시 마을공동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땅에서 넘어진 자들은 땅을 집고 일어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상처 받은 이들은 인간을 통해 치유해야 합니다. 숨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마당과 마을공동체를 잃어버려 포유류로서 엄청난 상실을 경험한 그들에게 최고의 치유책이 마을공동체이기 때문에 그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숨어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힐링 프로그램이나 정신 상담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도 인간 사이에서 웃고 울면서 자기도 모르게 트라우마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마을공동체가 최선의 치유의 장입니다.
마을공동체가 가부장적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냐는 염려도 있지만, 실제 공동체나 공유주택을 가보면, 그곳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여성들이고, 아이들입니다. 약자들이 가장 혜택을 받고, 그들이 다른 세상을 경험합니다.
자기의 고향, 자기의 바다로 돌아가야 할 이는 고래 제돌이만이 아닙니다. 인간도 포유류로서 행복한 기억, 그 삶으로 돌려보내야합니다. 욕망을 쫓는 소수, 혼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살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외로 허약하고, 다수는 서로 돕고 의지하고 함께하지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암자나 오두막에서 홀로 보냈던 법정스님조차도 고독할 수는 있지만 인간은 고립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시정은 그런 다수를 향해야합니다. 에스에이치 공사 같은 곳에서는 적어도 한층 정도는 공동체층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대가족들이 식당이나 거실이나 서재만 공유하는 2~3인집도 만들고, 서로 어울려 살고 싶은 사람들이 밥 먹을 때만 함께할 수 있게 4~5인 집도 만들고, 그런 식으로 모델을 만들어주어 우리 가까이에서 인간다운 어우러짐의 모습이 실제하도록 하는게 좋습니다. 건물만 짓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정을 나눌 수 있는 '케미'를 더하게 해야합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맛 나게 해주는 주거가 되게 해주세요.
또한 파주 문발동이나 성남 논골처럼 보통의 마을, 그것도 남들이 선호했던 마을이 아닌 달동네들조차 공동체적인 어우러짐으로 살고싶은 마을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서울시민들이 가장 살고싶지않은 마을 100곳을 선정해 여러가지로 자발성을 살려내서 제가 가서 살고 싶은 마을로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그린벨트를 훼손해 아파트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그런 공동체 마을로 서울을 둘러싼다면 나무와 숲이 둘러싼 것 이상으로 향기가 될 것입니다. 민속촌처럼 가짜 말고, 진짜 인간들이 어울려 행복을 만들어가는 마을, 그런 마을을 만든다면, 그린벨트를 그런 행복벨트로 만든다면 저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이 히키코모리가 되어가고, 스마트폰에만 빠져 단절되지않고, 인간들 속에서 어우러지도록 만나게 하고, 어울리게 하고, 즐기게 하고, 서로 돕게 하고, 그런 자발성을 부추겨주고, 지원해주고, 시스템을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바로 서울시민과 세상을 구하는 천사이고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라이브서울의 강연 녹화 방송입니다. 3분기직원조례 시작 20분뒤쯤부터 강연, 박원순 시장과 대담이 이어집니다.
http://tv.seoul.go.kr/new/src/onair/vod_about.asp?cid=122897
몇년 전 8월, 성모병원 21층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물론 수십여년을 문학계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명성을 알고 또 그분의 몇몇 작품들을 통하여 내 인생의 수없는 조각보를 이어 붙여 가면서 성장과 성숙을 해 왔던 나였기에 그 분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내게 큰 기쁨과 경이로움일 수밖에 없었지만 침샘암으로 마지막 삶의 여정을 고단하게 견뎌내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다가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복도를 지나다닐 때 가족 휴게실에 반쯤 누운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 분의 뒷 모습을 살며시 바라볼 뿐이었다. 세상, 그가 이제 이별해야 할 세상, 그 곳에는 한강이 흐르고 이별과 만남이 교차되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이름 모를, 한 번도 인연을 맺지 않았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없는 아파트가 있었다. 아주 친숙했던 세상이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낯설어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세상을 바라보는 그 분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는 듯 했다.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그런 그 분의 모습과 마주칠 때, 또 어쩌다 그 분의 눈빛과 마주칠 때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나는 가벼운 목례를 했고 그 때마다 그분은 눈가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답 인사를 해 주시고는 했다. 손녀들이 할아버지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어설프지만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쪽지와 카드들이 촘촘하게 붙어 있는 병실 문을 열고 그 분께 다가갔을 때에도 말없이 그렇게 엷은 미소를 보여 주셨다. 삶의 마지막 여정을 ‘암’이라는 놈과 힘겹게 싸워 가는 그 시간들안에서 얼마나 갈등과 고통, 번민이 있었겠냐마는 마치 그분은 이미 하늘나라에 평화로이 안긴 그런 여유롭고 해탈한 모습이었다. 작품이 곧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분의 삶이 작품안에 온전하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십 여차례 그 분을 뵈옵는 동안 난 어느 날 그 분에게 조심스럽게 안수 기도와 축복을 청했다. 이미 그는 여러 작품을 통해 내게 인생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지만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삶의 마지막 여정을 가고 있는 그 모습 또한 내게 충분히 스승이며 교재였다. 하지만 그 분은 마치 ‘어떻게 평신도가 수도자에게 안수를 해 주냐’는 마음이셨는지 손사래를 치셨다. 나는 응석을 부리듯이 “선생님은 이미 저의 스승이고 어른이고 선배이십니다. 그러니 인생 후배에게 잘 살라고, 또 수도자의 길을 잘 걸어가라고 축복해 주세요”라며 그 분의 한 손을 내 머리위에 가져다 얹었다. 그러자 그분은 그냥 그렇게 기도를 해 주셨어도 괜찮은데도 온 힘을 다해 침대에서 일어나 걸터 앉으셨고 병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내 머리위로 두 손을 포개 얹으셨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도를 해 주셨다. 내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그 분의 존재감이 전기가 지나가듯이 휘돌아쳐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분의 인생의 일부가 내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환자로 죽지 않고 작가로 죽겠다’며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 ‘최인호’ 그 분은 그렇게 내게 큰 스승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래서인지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 년이 지나고도 해마다 그 분이 돌아가신 9월이 되면 긴 여운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마을공동체 고수들이 함께 한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12일 서울시청 3분기 직원 조례에서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를 주제로 강연한 조현기자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공개 대담하고 있다.
제가 지난 12일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를 주제로 서울시청 3분기 직원 조례에서 강연을 했지만, 실제 정말 강연을 해야 할 분들은 따로 있습니다.
제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서울 수유동과 강원도 홍천에 있는 밝은누리공동체 설립자 최철호 대표, 서울 도봉동 은혜공동체 설립자 박민수 대표, 경기도 성남 남한산성 아래 논골마을 윤수진 논골작은도서관 관장, 파주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한귀영님입니다.
밝은누리는 1990년대부터 공동체에 뜻을 두고 몇명이 모여서 시작을 했는데요. 그들이 돈이 전부인 듯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다른 삶을 선택해 가치 있게 살면서도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혼삶 시대인데도 인수동밝은누리엔 싱글들도 30~40명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함께 사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정말 행복하려면 서로 돕고 의지하고 보듬고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려 결혼을 하고, 출산까지 하는 것은 보통의 한국사회에선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지요. 공동체에 태반이 아이들이지만, 독박육아에 대한 부담 없이 함께 아이를 키우면서 스트레스보다는 마음이 정화되고, 행복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는 밝은누리는 희망이 아닐 수 없지요. 그 중심에 최철호 대표가 있습니다.
도봉동 은혜공동체는 집값 아우성으로 신음하는 서울에서 1인당 1억원도 안되는 비용을 들여, 집안에 카페와 바와 천문대와 도서관과 게스트하우스, 세미나실, 공동식당, 댄스실, 운동실, 옥상정원까지 갖춘 특급호텔같은 곳에서 사는 신비를 창조한 것에 놀라게 됩니다. 은혜공동체 건물은 최근 서울시 건축대상 최우수상과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불가능해보이는 이 모든 것이 함께하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혜공동체는 50명이 함께 살아가는 공유주택입니다. 저녁마다 공동식당에서 화려한 파티가 펼쳐지는데, 한달 1인당 식비가 10만원입니다. 여성들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살림에서 해방되어서 저녁에서 수영 등 취미생활을 할 수 있지요. 아이가 있더라도 말이지요. 함께 사는 집에 이모 삼촌이 너무 많아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 귀찮이즘이 보편화한 시대에 그들은 시간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더 가까이 보내고 싶어하니, 조직의 단맛, 함께 하는 맛을 알아버린 때문입니다. 박민수 대표는 부인과 함께 심리상담가여서 치유를 시켜 훨씬 더 관계와 소통을 잘 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밝은누리나 은혜공동체 처럼 만들어진 공동체만이 아닙니다. 논골마을같은 보통의 마을들도 공동체적 어우러짐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지주고 있습니다. 논골마을은 서울에서 철거민들이 집단 이주해 10평 정도의 작은 빌라 6천세대가 빼곡하게 들어선 곳입니다. 10년 전까지만해도 마지못해 사는 곳, 누구나 떠나고 싶어하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윤수진 관장이 들어가 마을을 살리면서 놀랍게 변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스스로 마을활동가가 되어 스스로 그런 달동네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면, 인간의 힘이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만든 논골작은도서관만큼 작은 공간이 엄청난 구실을 하는 곳을 저는 지금까지 본적이 없습니다. 그곳은 마을 사람들의 도서관이자 놀이터이자, 문화센터이자 게스트하우스이자 아이들의 방과후 학교이자 파티장소이자 뭔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희한한 곳입니다. 이 마을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하는 다양한 축제들은 신바람납니다. 가난하기에 돈이 드는 여행을 선뜻 갈 수 없던 던 사람들이 남한산성에 하룻밤 캠프나 영화캠프 등을 열어 즐기고, 온갖 재밌는 축제를 통해 신나게 놉니다. 예전엔 아래를 내려보며 시끄럽다고 민원이나 넣던 고층아파트 주민들도 이제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지요. 부자가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프레임 속에 갇힌 세상에서, 부자 동네에 살지 않아도, 더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논골은 이 시대의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수진관장이 들어간 뒤 가장 살고싶지않은 마을이 살고싶은 마을로 변했습니다. 논골 빌라들은 워낙 오래되고 낡고 비좁아 지하는 대부분이 비어갔는데, 요즘은 이 재밌는 마을에서 함께 살려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지하층까지 채워지고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는 신도시 가운데서도 변방이지요. 문발동 공방골목도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그냥 살기 위해 한집 두집 이사오거나 집을 지어 생긴 동네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이제 저도 가장 살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한 분이 자기집 1층 공간에 헌탁구대를 주어와서 놓고, 누구나 칠수 있게 했지요. 그 탁구대에 사람들이 모여들여 우리동네탁구모임(우동탁), 금요일인 불금탁, 부부들끼리 부부탁, 아이들은 아동탁 모임을 만들었지요. 그렇게 신나게 놀면서 언제부터인지 밴드에 누군가 공지하면 요리 하나씩을 가지고 와서 포트럭 파티를 엽니다. 탁구대를 중심으로 남성혼성합창단을 만들어 노래도 불러요. 사람들이 모여서 어울리는 재미에 맛을 들린 사람들은 두셋만 모이면 동아리를 만듭니다. 지금은 50여개 정도 모임이 있는데요.
이곳에 함께하는 이 중에서 한겨레신문 한귀영 여론데이터센터장도 있습니다. 한 센터장은 산부인과질환으로 몇년전 병원에서 자궁을 도려내라는 권유를 받았는데요. 그는 8개월간 휴직을 하고, 이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그런 모임을 함께 하고, 8개월 뒤 병원에 가보니 병이 싹 낳았다고 했답니다. 다만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재밌게 놀았을 뿐인데 말이지요. 사람들과 노는데 재미를 붙인 그는 자기 집에 사비로 빔프로젝트를 설치해 토요일밤이면 마을 사람들을 초청해 영씨네마의 밤을 갖습니다. 영화를 본 뒤 포도주를 한잔씩 하면서 영화 얘기를 통해 자기의 삶들을 얘기하며 웃고 우는 밤을 보낸답니다. 또 천불퀸이라는 여자들끼리 모임도 있는데요. 늦은 밤 여자들끼리만 모여 ‘천불퀸’모임을 합니다. 그날 생일인 사람을 퀸으로 모셔, 그가 살면서 속에서 천불이 난 애기를 터놓게 하고, 모두 응원하고 지지하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보듬어줍니다. 이웃들끼리 그렇게 지내면, 그간 살면서 생긴 상처들이 치유 되지않을 수 없습니다.
» 경기도 파주시 논골마을 공방골목을 중심으로 온갖 동아리를 만들이 공동체적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마라톤모임에서 왼쪽에서 두번째가 한귀영씨
이렇게 귀한 4분을 한 자리에 모셨습니다. 마을공동체에 관심이 있으신분, 인간관계를 좀 더 잘하고 싶으신 분, 관계를 통해 치유하고 싶은 분, 몇명이서 마을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분들. 기존 공동체에 합류하고 싶으신 분들. 어떤 분들이라도 이 분들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모시기 어려운 이분들을 모시고, 저와 함께 토크쇼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셔서 궁금한 걸 물을 소중한 기회입니다. 한분 한분 따로 뵙기가 쉽지않은 이들입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이 분들을 모셨으니, 실기하지않고, 한꺼번에 만나는 혜택을 놓치지않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않도록 공유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곳에 들어가 신청하면 됩니다. 30초도 걸리지않습니다. 19일(수) 오후 7시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3층 청암홀에서 마을공동체 촌장님들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675553&memberNo=42610428&vType=VERTICAL
‘애나 매리 로버트슨 모세스(Anna Mary Robertson Moses ,1860~1961)는 미국에서 ‘국민화가’로 불리웠다. 그녀가 ’모세스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인기를 누렸던 것은 놀랍게도 76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 되던 해 세상과 이별하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스는 평범한 시골 주부였다. 그녀는 작은 농장을 꾸려가며 10명의 자녀를 출산하고 그 중 5명을 잃고 난 후 자수(刺繡)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72세 때 관절염 때문에 바늘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녀는 대신 붓을 들었다. 우연히 수집가 루이스 칼더가 시골 구멍가게 윈도에 있는 그의 그림을 사 갔고 이듬해 미술 기획가 오토 칼리어가 그의 그림을 뉴욕의 전시관에 내놓으면서 할머니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모세스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 1949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그녀에게 ‘여성 프레스클럽 상’을 선사했고 1960년 넬슨 록펠러 뉴욕주지사는 그녀의 100번째 생일을 ‘모세스 할머니의 날’로 선포했다. 모세스는 시골의 풍경을 그렸으며 그의 화풍은 단순하면서도 밝았다. 그의 밝은 심성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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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늙었거나 늦은 사람은 없습니다. 희망과 소망과 사명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도 젊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기에 살아있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나이가 들었다고 이젠 내가 할 일을 다 했노라고 '완성형'인생을 살기보다는 아직도 나는 할 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사는 ‘현재진행형’ 인생을 살아갑시다.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질시와 부러움도 나이를 먹는 걸까. 학창 시절에는 공부 잘하는 친구가 부럽더니 청년 시절에는 연애 잘하는 친구를 눈여겨보게 된다. 사회생활할 때는 모임에서 계산을 도맡아 하는 친구가 멋있어 보이다가, 건강진단 하러 간 병원에서는 다른 것 필요 없고 신체 건강한 사람이 최고라 생각된다. 아이들이 진학할 무렵에는 자식을 잘 키운 부모가 가장 잘났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도 잘난 자녀를 둔 사람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한다. 그러다가 정년을 맞거나 명예퇴직을 하게 되면 부러운 대상도 변한다. 개인 사업체를 가진 이들과 프리랜서가 되어 계속 일하는 동료들이다. 월말마다 수금이 안 되어 쩔쩔매고, 자금 회전이 안 되어 노심초사하는 어려움은 애써 잊은 채 말이다.
살면서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를 크게 부러워해본 적도 없는 나였다. 하지만 최근 무척이나 부러운 대상이 생겼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이다. 밀림처럼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가끔 삐져나온 새치를 뽑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서 시기심마저 생긴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정도다.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하나라도 더 많으면 좋지, 왜 머리카락의 색은 차별하나? 탈모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흑모백모(黑母白毛) 이론이 있다는 것을 모르나?’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다는, 중국 개혁·개방 지도자 덩샤오핑이 말한 ‘흑묘백묘’(黑苗白描)를 패러디한 주장으로, 나는 이 이론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었다. 기업의 대표이사 시절 시작된 탈모는 하루가 다르게 외모를 바꿔놓아 지금은 거울을 보기가 두렵다. 혹시 탈모기를 장착한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다. 정말이지 스트레스가 육체에 미치는 영향은 무서울 정도다. 언젠가 아프리카 사파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털이 빠진 수사자의 처량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누구에게나 탈모는 반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는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탈모에 효능이 있다고 선전은 요란하지만, 확실한 탈모 치료제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강연은 무대 위에 서는 직업이다.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일정 부분 ‘있어 보이는’ 게 중요하다. 내용이나 정보 전달이 물론 중요하지만, 평소보다는 옷차림과 외모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디자인과 마케팅 관련 강의를 하는 어떤 분은 무려 100개가 넘는 안경을 갖고 있다. 의상이나 장소, 혹은 주제에 맞게 다른 안경을 쓰고 강단에 선다. 이 경우 안경은 잘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잘 보이기 위한 도구다. 프레젠테이션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무대 위에 서거나 중요한 발표를 할 때는 ‘오버드레스'(overdress)하라고 강조한다. 평소보다 더 잘 챙겨입으라는 뜻이다.
시각적인 요소는 이처럼 매우 중요하다. 카페에서도 커피를 소비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인테리어 감각을 소비할 때가 많고, 외국의 서점이나 도서관에 방문할 경우에도 책이 아닌 멋진 디자인을 보는 데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 디자인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외모와 디자인은 맥주의 거품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맥주에 거품이 전혀 없으면 건조하고 풍미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거품이 지나치게 많으면 싱겁기 짝이 없고 때로는 본질마저 희석된다. 무대 위에 서는 사람도 그렇다. 비주얼이 중요하기에 머리카락에 자신 없는 사람들은 가발을 쓰거나 모자 같은 것으로 부족한 부분을 감추려 한다. 이건 약점을 위장하는 것이 아니다. 청중들에 대한 배려라고 보고 싶다. 시각적 서비스일 테니까. 그런데 관건은 어느 정도 ‘오버'하느냐, 그 정도의 문제다.
강연이건 글쓰기 강좌이건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거품이다. ‘오버'가 넘치고 또 넘친다. 지식인일수록 실제보다 더 아는 척, 뭔가 더 있는 척한다. 영어로 ‘오버스테이트먼트’(overstatement·과장, 허풍)라 하는 과도한 거품 현상이다. 인문학 분야에도 ‘4차 산업’이라는 용어를 쓰거나 블록체인을 들먹거린다. 지금은 말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글의 전성기다. 모든 게 문자로 이뤄진다. 보고서, 직장의 메신저, 페이스북, 카카오톡의 문자에 이르기까지 글로 의사소통하는 시대다. 글쓰기 강좌가 성황을 이루는 이유다.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이겠지만, 과도한 것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적정량을 넘은 설탕과 소금이 몸에 좋지 않듯, 실제보다 부풀려 표현하려는 언어 습관도 좋지 않다.
호칭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 서구에서는 ‘미스터 손’, 일본에서는 ‘손상’, 그리고 중국에서는 ‘손 셴성(先生)’이라 부른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호칭은 뭐가 뭔지 나 자신도 헷갈린다. 대표님, 교수님, 작가님, 위원님, 하나같이 무거운 타이틀이다. 그냥 ‘손 선생’ 하나면 족하지 않을까. 지나친 거품은 결국 허세다. 실제 이상의 견장을 어깨에 달고 다니면 부담이 된다. 마치 심리적 디스크에 걸린 사람 같다. 화가 피카소는 이 문제와 관련해 명언을 남겼다.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외 없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 날개는 걷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데서 오는 결과물이다. 나는 결심했다. 국가의 위기에서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했던 것처럼, 탈모의 위기를 ‘백모종군’으로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 흰머리든 없는 머리든 구애받지 않고 당당히 무대에 선다는 뜻이다. 만약 자유로운 삶을 주장한다면 먼저 백모종군 대열에 동참하는 게 어떨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삶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첫영성체를 축복하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먹어야 산다.
밥이 생명이고 하늘이다.
풀도 나무도 까치도 강아지도 닭도
심지어 바위도 남한강도 먹어야 살지.
음식이 뱃심이 되어 생명의 힘이 나오는 거니까
좋은 음식을 먹으면 건강한 몸이 되고 좋은 힘이 나오고
나쁜 음식은 병을 만들겠지.
그렇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셨어.
음식에도 혼이 있다는 말씀이거등.
미국 몬산토 기업의 탐욕이 세계 어린이들에게
아토피와 자폐, 행동장애, 성조숙증, 유사암으로 고통을 주듯이
음식에 깃든 혼이 나의 몸과 영혼과 정신을 만드는 거란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먹고 사느냐에 따라서
내 생각과 정신이 만들어 지는 거라.
무엇이 좋은 음식이고 나쁜 밥인지를 알고 먹어야 돼.
뇌물을 먹으면 뇌물 준 자의 탐욕과 속임수와 병든 정신이 나를 더럽히니
나쁜 기업의 음흉한 장사속으로 준 장학금을 받아먹고 공부한 사람들이
장사꾼의 음흉하고 병든 마음의 씨앗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꼴이 된거거등
일본 돈을 먹은 자는 친일파가 되고 미국돈을 먹은 자는 미국을 우상하며
삼성 장사치들의 돈을 먹은 정치인 법관들은
삼성의 머슴이 되는 이치가 당연하지.
예수님의 성체를 양식으로 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정신과 사랑으로 살게 되어야 하는 될 것이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과 죽음의 역사가 담긴 음식이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랑과 헌신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체를 모시면서서 그 분의 사랑과 정신으로 살지 않으면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겠지.
내가 먹는 음식과 옷과 신발, 집, 그 모든 돈은 무엇에서 오는 거지?
빵과 포도주, 성체성사가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이라면
딱 답이 나오지 않나?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빠는 아침에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일터로 가시는데
갑질 당하고 자존심 상해도 가족을 위해 인내하며 일하고 받은 돈으로
내 입에 밥이 들어가는 거 아냐?
한 수저의 밥을 먹는 것은 부모님의 땀과 눈물과 고난을 먹는 것이지.
그것을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예수님을 모르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과 같은 독성죄가 되는 거지.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으로 살기가 어려운 시대
구원의 삶을 사는 길은 예수님의 진리와 사랑뿐이라.
성체성사의 사랑과 은총이 너희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힘으로 성장해 가야 하겠지.
그리스도의 몸! 아멘!
축하하고 사랑한다. 샬롬 알렐루야.
부처님께서 선지식(善知識)이 도道의 전부라고 하셨어요. 도반이 도의 전부라고 하지 않았어요. 선지식은 Kaliyanamitra 선한 친구 바로 깨우친 스승을 뜻합니다.
참된 스승은 수행의 기초입니다. 기초가 좋지 않으면 집이 무너지듯이 수행의 기반은 스승에 달려있습니다.
도반은 도움이 되는 것보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도반'이라고 하는 분과 만나면 구업을 쌓고 시간 낭비합니다. 마음도 일어나고 유익한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정말 도움이 되는 도반은 찾기 어렵습니다.
참된 스승과 한시간만 있어도 마음이 달라지며 일주일 옆에 있으면 3달 집중수행한 것보다 더 큰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다.
제 은사스님과 같이 다니면 전과후의 차이가 틀림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이 달라졌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달라진 것은 확실합니다.
스승 옆에 있으면 알아차림을 쉽게 기르게 된다고 입보리행론에서 나옵니다. 스승님의 수행력으로 우리도 명상체험을 합니다. 스승님의 자비심으로 우리에게도 자비가 생깁니다. 향을 쌓은 신문지처럼 우리 마음에 배이게 됩니다.
어제 밍규르 린포체님의 태국 8일 집중수행을 잘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린포체께서 당신이 작년 보다 살이 좀 쪘다면서 스승은 살이 좀 있어야 된다고 농담하셨습니다. 이제 저에게도 스승의 자격이 하나 생겼네요!
점쟁이와 상담가
저보고 점쟁이 같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끔 사석에서 그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예측해주기 때문인데ㅡ이것은 제가 점쟁이의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라ㅡ오랫동안 상담을 해오면서 나름대로의 촉이 생겨서입니다
사람의 삶은 강물과 비슷합니다...
구비구비 흐르기 때문에 과거의 물줄기를 보면 앞으로 어디로 흘러갈지도 대략 예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측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는 강물과는 달리 여러가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변수는 은총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쟁이들이 패가망신할거라 예언했던 사람들이 성공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인생의 물줄기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물줄기는 숙명이나 운명이 아닙니다
마음가짐에 따라서 물줄기는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불행으로 치닫는다 여겨질때 ㅡ기도하시고 마음가짐을 다듬으시기 바랍니다
큰변화는 이루어내지 못할지 몰라도 작은 변화는 만들수 있습니다
»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28통 공방골목 마당에서 포트럭 파티를 여는 마을사람들
경기도 파주 교하도서관. 주민들과 학생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초기부터 아예 독서실을 만들지않아 도서관다운 도서관으로 자리잡아 교하 사람들은 교하도서관을 전국 대표도서관이라고 자랑한다. 이 도서관에서 20일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북토크를 했다. 교하도서관 내 수많은 동아리 중 하나인 책벗이란 작은 모임에서 주최한 북토크다. 이 책 첫장을 장식하는 파주 문발동 사람들도 북토크에 참석했다.
이 북토크에서 마을공동체가 왜 행복한지에 대해 두시간 가량 이야기를 하고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이었다. 문발동에 사는 한 주민이 ‘인간과 마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우리나라 도시계획에 대해 애기했다. 파주 교하 처럼 신도시로 새로 구획정리를 하는 곳엔 몇백가구정도 마을마다 마을 커뮤니티 구실을 할 수 있는 100평 정도의 공간이나 작은 텃만만 제공해도, 마을 사람들이 지금보다 몇배나 행복해질텐데, 전부 팔아치워 땅장사 밖에 하지않는다는 것이다.
» 문발동 28통 공방골목 마당 앞
문발동 28통 공방골목의 경우 신도시임에도 주차장 부지마저 마련돼있지않아 도시가 형성단계인 벌써부터 주차난으로 골목마다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런 신도시에서 아무런 도시계획상 배려도 없는 곳에서 주민들 스스로 자기 집 1층이나 공간을 마을사람들을 위해 내놓아 보기 드문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기적으로 보일 정도다.
21일 정부는 서울 향후 서울 인접지역에 330만㎡ 이상 신도시급 대규모 택지를 조성해 20만호 이상 신규주택을 공급한다는 발표를 했다. 집값 상승에 대한 수도권 시민들의 분노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이지만, 여기엔 인간이 빠져있다. 남처럼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 분노를 달래기 위한 공급책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슬로건인 ‘인간이 먼저다’가 빠져있다.
그곳에 인간들끼리 정을 나누는 공동체성을 키워줄 커뮤니티 공간이 배치돼 지금까지처럼 삭막한 도시와 다른 문재인표 도시가 필요하다. 상징성을 내세우려 지나치게 큰 호수까지 갖춘 수십만평의 대형공원보다 자기 집, 자기 마을에 수천평의 공원, 마을 사람들끼리 언제든지 어울려 포트럭 파티를 즐기고, 서로 고립과 고독사를 당하지않은지 지켜봐줄 수 있는, 수많은 정부 예산으로 커버되지않는 사각을 주민들 스스로 돌볼 수 있는 그런 마을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 교하도서관에서 열린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북토크 뒤 참석자들과
얼마전 시울시 3분기 조례에서 강연하면서 필자는 3가지를 박원순 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그 자리에서 제안했다. 첫째 앞으로 서울시에서 짓는 아파트엔 최소한 한층 정도는 공동체층으로 지을 것을 제안했다. 대가족이 세대당 프라이버시를 지키면서도 함께 할 수 있게 식당 정도만 공유할 수 있는 2~3인가구, 3~4인가구, 4~5인가구, 혹은 좀 더 큰 공동체인이 대여섯가구나, 10가구가 일정한 부분만 함께 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 공유면적은 1인가구보다 더 혜택을 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가구가 어우려지면, 육아와 노인 복지 등 복지 사각지대를 스스로 메울 수 있어서 시와 국가로서도 부담을 크게 덜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혜택을 주어도 시나 국가로서는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둘째, 서울시에서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않은 100곳을 지정해 그곳을 내가 가서 살고 싶게, 마을공동체적 정이 넘치고 아름다운 마을로 자발성을 끌어내서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100개마을 상전벽해 프로젝트를 하라는 것이었다.
세째, 그린벨트를 해제해 아파트를 짓는 그런 짓은 하지 말고, 대신 정이 있는 마을공동체로 삭막한 서울을 에워싸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무와 숲만이 그린벨트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다운 향기가 있는 마을공동체야 말로 그린벨트 이상의 행복벨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민속촌 같은 가짜 말고 진짜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문발동이나 성남 논골마을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재미나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마을로 서울을 에워싸라는 것이다.
거기다 교하도서관에서 문발동 주민이 제안한 것이 반드시 포함되어야한다. 앞으로 어떤 도시계획에도 공동주택단지만이 아니라 단독주택 구획에도 커뮤니티 공간을 적어도 100~200가구당 한 곳을 두어서 사람들이 서로 돕고 돌보면서 즐기고 행복을 만들어가도록 해줘야한다는 것이다.
이혼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부부관계 단단해질 수도
이혼 요구하며 가출한 남편 둔 주부, “남편 외도 정황 드러나는데 저는 가정 지키고 싶어요”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결혼 8년 차 주부입니다. 남편과는 6월 초부터 다투기 시작했고 남편은 제가 의심을 한다며 6월 중순에 집을 나가 따로 방을 얻어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 잘못으로 일이 이 지경에 왔다 생각해서 빌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외도의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어요. 벌써 한 달 반째 가출 중이면서 남편은 제가 싫다며 이혼을 요구합니다. 문제는 저예요. 남편의 외도를 확인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혼하고 싶지 않고 가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외도란 검색어만 치고 있는 저…. 남편은 저와 전혀 대화를 하려 하지 않구요. 평소에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기에 하루아침에 당한 이 현실에 막막하기만 해요. 기다림만이 답은 아닌 걸까요? 닥터와이
A 남편의 외도를 확인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닥터와이 님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직면하시기 싫은가 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감정은, 배우자의 외도를 인정하게 될 경우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심리적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배신감, 분노, 질투, 수치심, 버림받았다는 느낌 등이 그것입니다.
이혼은 더더욱 피하고 싶은 문제였을 겁니다. 결혼 제도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던 여성이 남편의 외도로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될 때, 그 불안감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이혼녀로 손가락질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나 이혼 뒤의 경제적 자립이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일 것이고, 그 밖에 육아와 교육, 가정사를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문제를 외면하고 싶은 당신의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닥터와이 님, 결국은 받아들이셔야 할 겁니다. 외도나 이혼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랍니다. 외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혼율 역시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한국이 아시아 1위, 통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부부 열 쌍 중 한 쌍, 또는 다섯 쌍 중 한두 쌍이 이혼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나 이혼을 요구할 수 있고 또 이혼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달라, 우리 부부에게 이혼이란 절대 일어날 수 없어, 하고 자신했다가 갑작스런 배우자의 배신을 경험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법 안락한 가정을 꾸렸다 싶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무렵 배우자의 외도가, 이혼 요구가 갑자기 당신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릅니다. 닥터와이 님도 그런 경우일 겁니다. 평소 사이가 좋은 편이었는데 하루아침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혼하면서 백년해로를 약속할 것이 아니라 이혼을 각오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부간의 믿음을 강조할 게 아니라 배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지도 모르고요. 결혼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부부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사는 ‘졸혼’ 같은 것이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으니,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함께 사는 것이 더 이상 부럽거나 칭찬받을 미덕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닥터와이 님, 변화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키세요. 이제 세상은 부부관계보다 개인의 선택이나 독립성을 더 강조합니다. 사실 부부 중에서 어느 한쪽이 결혼생활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면 그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부부관계를 유지해 봤자 미움과 원망, 무관심과 수치심 같은 감정이 서로를 괴롭히며 부부관계를 왜곡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이혼을 요구하는데도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하지 못하는 경우 느끼게 되는 모멸감은 또 얼마나 큰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시고 이혼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하세요. 불가항력의 이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이혼을 막기 위해서도 그것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부부간 갈등, 외도, 결별의 조짐을 빨리 알아차리고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답니다. 남편의 외도를 확인하고 싶지 않다거나 이혼은 원하지 않고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닥터와이 님의 말씀이 저에게는 이혼에 대해 무방비 상태라는 말로 들리네요.
이혼을 공부하세요.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왜 외도가 발생하는지, 배우자의 외도에 대해 어떤 가치관과 태도를 가질 것인지, 상대가 이혼을 요구할 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상대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혼 과정에서 주장해야 하는 권리는 무엇이 있는지, 만약 아이들이 있다면 이혼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셔야 합니다. 이혼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혼생활을 유지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도요.
남편은 당분간 그냥 내버려두세요. 아마도 그는 방귀를 뀌고서는 당황한 나머지 성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혼의 탓을 아내에게 돌려 위자료를 줄이려고 하는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 법률가에게 자문하시고, 주위 친구들의 조언을 들으시고, 이혼과 관련해서 전문기관의 상담도 받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만 생각해도 부족한데, 이혼을 공부하라니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으시겠지만, 무엇보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혼을 이해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 죽음을 공부하고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게 이혼의 가능성을 하나의 패로 가지세요. 배우자가 내 손을 놓는 순간 내가 자유롭게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부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때, 결혼생활이 타성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혼을 염두에 둘 때 부부는 진정한 ‘따로 또 같이’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굼벙이는 몹시 더럽건만 변하여 매미가 되어 가을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은 빛이 없건만 변하여 반딧불이 되어 여름 달밤에 광채를 낸다.
진실로 알리로다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으로부터 나오고 밝음은 매양 어두움으로부터 생겨남을
-채근담
사람이 애써 그 자리에서 쉬면 곧 그 자리에서 깨달을 수 있으나, 만일 따로이 쉴 곳을 찾는다면 아들 장가들이고 딸 시집보낸 뒤에도 일은 많은 법이니, 중과 도사가 좋다 하나 마음은 역시 깨닫지 못하리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당장 쉬면 쉴 수 있으나, 만일 끝날 때를 찾는다면 끝날 때가 없으리라>했거니와, 진실로 탁견이로다.
-채근담
정신이 왕성하면 베이불 작은 방 속에서도 천지의 화평한 기운을 깨닫고, 입맛이 넉넉하면 명아주국에 밥먹은 뒤에도 인생의 담밤한 참맛을 아느니라.
채근담
하버드대 제임스 라이언 교육대학원장은 졸업식 축사에서 '내 삶을 바꾸기 위한 다섯 가지의 질문'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펴냈다.
첫째는 Wait, What? (잠깐, 뭐라고?"무엇인가를 명확히 이해하고자 할 때 하는 질문이다. 어떤 결론을 내거나, 의사 결정을 내리기전에 반드시 "잠깐, 뭐라고?"라며 물어야 한다. 내가 진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둘째는 I wonder why?(왜 그런지 궁금한데.) 이유를 묻는 질문이다. 원인도 모르고 과정도 생략한 채 결론만 가지고 말하면 그 원인을 놓치고 만다.
셋째, Couldn't we at least? (적어도 이렇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상대와 극심한 의견 충돌 때문에 합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 하는 유용한 질문이다.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취지는 공감한다는 것이다. 상대와 의견을 좁혀 일부 합의에 이르도록 유도한다.
넷째, How can I help?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돕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르면 선의가 전달되기 쉽지 않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삶에서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가장 전문가이다. 어떻게 돕느냐가 돕는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다섯째, What truly matters?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 본질이 무엇인지, 핵심이 무엇인지 묻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라이언 교수는 마지막으로 보너스 질문 하나를 더 권한다.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out of life, even so? (그럼에도 당신은 이 삶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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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섯 가지 질문을 잘 한다면 가고 있는 인생길에 의미를 찾는 것이 쉬워질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만약 곧 죽게 될 상황에 처했고 목숨을 구할 방법을 단 1시간 안에 찾아야 한다면 1시간 중 55분을 올바른 질문을 찾는 데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질문을 찾고 나면 정답을 찾는 데는 5분도 안 걸린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질문에 바른 선택이 있습니다. 바른 질문을 할 때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