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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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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가 되어도 지켜야할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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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1시 메이플릿지 shop에 벨이 울렸습니다. 평소 12시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요즘 우리가 만드는 어린이 가구 주문이 많아 분주한 가운데 있었는데 제가 담당하고 있는 아트센터 가구 조립을 미처 끝내지도 못한 채 미련 없이  스쿠르드라이버를 놓고는 공장문을 나왔습니다. 오늘은 메이폴릿지 학교 아이들 모두가 올 여름내내 준비한 “호보(Hobo) 캠프”가 있는 날입니다.

 

하루는 유빈이가 나의 손을 잡아 끌더니 “아빠 저랑 호보 캠프장에 가요,  친구랑 함께 브릭오븐을 만들었어요.“  “어떻게 만들었는데?” “돌맹이와 진흙으로요.” 어느 날은 유빈이가 병원 약속이 있어 잠시 학교에서 나와야 했는데 하필이면 “호보데이”인데 빠지게 되었다며 퉁퉁거렸습니다.  호보가 뭐길래 겨우 이삼십분이면 되는데 그 짧은 시간도 빠지기 싫은 모양입니다.

 

“호보(Hobo)”는 화물 열차에 무임승차하여 각지를 이동하는 방랑자를 말하는데 호보의 어원은 서로 인사할때 쓴 “Ho, Boy!” 또는 “homeward bound(집으로 향하는)”등에서 약자를 따왔다고 합니다호보의 역사는 1860년대 미국에서 남북전쟁후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화물열차에 뛰어 올라타면서 부터 시작해 이후 19세기 후반 서부 개척시대에 일을 찾던 노동자등을 포함해 1906년에는 미국 인구의 약 0.6% 50만의 호보가 있었다고 합니다호보들에게는 Big House(큰 집-감옥), Cover with moon(달을 담요삼아-벌판에서의 잠자리), Sky pilot(하늘의 비행사-목사), C.H.D.(cold, hungry, dry-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등등 자신들만의 은어가 있었고, 직접 고안해 낸 사인(: 십자가표시(angel food-설교후 호보에게 제공되는 음식) 으로 벽에 표시해 다른 호보들에게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1-1.jpg» 철로를 따라 걷는 호보들1-2.jpg» 호보 사인 1-3.jpg» 호보 사인 상징

                                                

또한 호보가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이나 다른 호보들을 존중하는 호보만의 윤리강령이 있었습니다.

- 네 삶은 스스로 결정해라.  다른 사람이 너를 운영하거나 다스리지 않도록 하라.

- 어려움에 처해 있는 연약한 마을주민이나 다른 호보들에게 이익을 취하지 말라.

- 마을에 들어갈때는 그 마을 법과 사무관들을 존중하고, 항상 신사처럼 행동하라.

- 늘 자연을 존중하고 네가  있었던 곳에서 쓰레기를 남기지 말라.

- 언제든지,어디서나 도움이 필요한 다른 호보들을 도우라. 언젠가 너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등등 

(https://en.wikipedia.org/wiki/Hobo)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서 아이들은 이번 여름에 어떤 프로젝트를 할까 고민했습니다. 보통은 같은 학년끼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번에는 5살 유치원 아이들부터 8학년(중학생)까지 모두 함께 호보캠프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유치원 작은 꼬마부터 중학생 큰 언니, 오빠들까지 모두 섞어 일곱 여덟명이 한 그룹이 되어 자신만의 개성을 들어내는 이름도 만들고 분장도 하고 노래도 지었습니다.

 

매주 월요일이면 자신들만의 캠프장을 만들기 위해 숲에 길도 내고 캠프장 터도 닦고 요리할 수 있도록 큰 돌맹이들을 날라 바베큐 장소도 만들었습니다아이들은 집에서 재료들을 가지고 가서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신나게 여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평소 유빈이에게 들어 궁금해하던 차라 공동체 전체를 초대해 호보캠프를 한다고 해서 흥분과 기대속에 설레는 맘으로 숲으로 향했습니다학교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교장 선생님 부부가 우스꽝스럽고 촌스러운 호보 차림을 하고는 사람들에게 “이리로 가세요. 저리로 가세요.”라고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복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가리킨 숲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빽빽하게 아름드리 자란 북미 큰 떡갈나무 사이에 덥수룩한 노랑색 가발을 쓰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들을 입은 여섯 일곱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밀가루 반죽을 덮은 소시지를 숯불에 굽고 있었습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호빗들 같았습니다그 소시지 굽는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점심 때가 가까워서인지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나를 본 아이들이 내게 달려와 인사를 하고는 대뜸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난 그 순간 뭔가 다른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나도 넌지시 내 이름은 “대한민국” 이라고 했습니다. 내 이름을 듣는 아이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그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도 그냥 재미로 내 이름의 뜻을 대답하지 않고는 그냥 큰 소리로 “대~~~국 쨔짠짜 짠짜”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질쌔라 그럼 “네 이름은 뭐니?”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들은 모든 이름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웃긴 이름들이었습니다. Dusty Daisy, Singing Sammy, Little Britches, Greasy Grimes, Sloppy Sim등 이었습니다

 

2-1.jpg» 호보 캠프장2-2.jpg» 호보들2-3.jpg 

  

 첫번째 만난 호보그룹의 넉넉한 인심으로 소시지를 새 개나 받아 먹은 후 나도 한번 호보스피릿을 느끼기 위해 너구리 모자를 빌려 쓴 후 호보들이 독특하게 만든 표지를 따라 새로운 탐험을 시작했습니다걷는 발걸음이 푹신푹신하게 우드칩을 듬뿍 깔아놓은 샛길과 물이 고여 있는 진흙을 밟지 않게 통나무로 만든 징검다리 등을 건너면서 형아들은 앞에서 끌고, 동생들은 뒤에서 미는 등 여름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열심히 일했을 호보아이들이 내심 자랑스러웠습니다

 

호보들이 만든 샛 길을 따라 다다른 곳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빼곡하게 자라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푸른 하늘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서늘한 그늘 아래서 호보들은 양념한 소고기를 신나게 숯불에 굽고, 그 구운 것을 빵과 치즈를 올려 절묘한 맛의 수제버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육즙이 줄줄 흐르면서 마치 한국의 떡갈비 같은 맛이 나 자꾸만 손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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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도착한 곳은 둘째 아들 유빈이가 속한 호보 캠프장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닭고기와 피망을 코챙이에 궤어서 숯불에 누릇누릇하게 아주 잘 구워내고 있었습니다. 밭에서 갓 따온 방울 토마토와 곁들어 맛 본 케밥의 맛은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이 호보들이 만든 케밥이 너무 맛있어서 그 어떤 음식보다 가장 먼저 떨어졌다고 합니다뒤 늦게 소문을 타고 이 맛을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냥 발 길을 돌려야만 했습니다.

 

한 호보그룹은 한국으로 치면 탁구공만한 크기의 수제비 같은 덤플링을 닭육수에 넣어 끓여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열치열이라고나 할까 후덥지근한 여름에 뜨거운 덤플링국을 먹으며 더위를 잠깐 식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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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보 표지판을 따라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음식도 먹어보고 또 형제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차에 마치 영화속 한 장면같이 깊은 저음의 뿔나팔소리가 울렸습니다. 넓은 숲에 있는 모두가 들릴 만큼 큰 소리였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 둘씩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뿔 나팔소리는 전체 모임을 시작한다는 신호였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아이들, 청년들, 우리 모두가 아이들이 만든 참나무 숲의 무대에 모였습니다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벤치에, 젊은 아빠들은 나무토막 위에, 청년들은 바닥에, 나는 널다란 이끼 낀 돌위에 앉았습니다. 이날 호보 아이들과 호보 선생님들이 입은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의 옷들로 무대가 온통 생기가 가득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인 사이몬이 얼마전에 약혼한 Dusty Daisy(호보이름) 선생님을 부르더니 그녀와 약혼한 다른 공동체에서 온 Slim Pickins(호보이름) 형제를 앞으로 불러 세웠습니다. 보통 약혼 기간중에는 학교에서 커플을 초대해 웨딩케이크를 서로 먹여주는 행사를 하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사이몬이 케이크대신 소시지 하나와 꼬챙이를 주면서 두 사람이 함께 소시지를 모닥불에 구워 동시에 입으로 물어 먹게 했습니다.   두사람의 입이 점점 가까워지자 옆에서 보고 있던 형제가 이 선을 넘으면 더이상 결혼을 물릴 수 없다며 놀려대자 모두들 한바탕 웃었습니다.

그 후 한 그룹씩 앞으로  나와 자신들이 개작한 호보들이 즐겨부른 포크송을 찬트와 함께 불렸고, 한 호보그룹 브라스밴드는 호보곡을 연주하여 흥겨운 분위기를 돋우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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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보 공연이 마치자 공연을 지켜본 우리 모두가 다함께 아이들에게 감사의 환호를 외쳤습니다.

 Thank you, Thank you!

 

이 날 우리는 아이들이 가져다 준 기쁨 때문에 잊지못할 한 여름 날의 꿈 같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그대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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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가치는 그대가 품고 있는 이상에 의해 결정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운명보다 강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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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보다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운명에 동의하지 않고 짊어지고 가는 용기이다.


                     -E. 가이벨

어떤일에 성과가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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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이 하는 일에 성과가 없다면

그것은 엉뚱한 문제를 푸는데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스텐버그

행복에 대한 기대가 행복을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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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대로 삽니다. 행복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가 오더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순간을 즐기지 못하면 미래의 어느 순간도 제대로 즐기지 못합니다. 사실은 이순간 밖에 없습니다.


기대로인하여 참된 행복이 있는
이순간을 즐기지 못합니다.
행복의 예술은 개념없이 이 순간을 즐기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순간에 늘 있는, 조건없는 행복을 막고 있습니다. 
행복의 예술은 이순간에 완전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다른 때나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지 마세요. 

참된 행복은 오직 여기 이순간에 있습니다. 
이 순간에 만족하면 무엇을 기다릴 필요 없죠. 기대가 없으면 저절로 행복합니다. 
행복을 찾는 마음이 행복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엉뚱한 곳에 엉뚱한 방법으로 행복을 찾습니다. 
우리 자체가 행복입니다. 
행복의 예술은 생각을 내려놓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 입니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조건없는 행복이 안으로부터 꽃 필 것입니다.


We live in anticipation. We can't wait for that moment of happiness. And when the moment comes, still we're not satisfied.
If we cannot enjoy this moment, we cannot truly enjoy any future moments. Actually there's only this moment. 
Anticipation keeps us from enjoying this moment, where true happiness lies.
The art of happiness is to enjoy this moment fully without concepts. Thinking blocks the unconditional happiness that is always within this moment. 
The art of happiness is to be fully content in this moment. Don't seek happiness at any other time in any other place. It only lies here in this moment. 
If we are content in the moment, we don't have to wait for anything. Without expectation, we're naturally happy. 
The mind searching for happiness is the biggest obstacle to true happiness.
We're always looking for happiness in all the wrong places in all the wrong ways.
The way to happiness is to let go of thinking and be fully present. That's all. Get used to this, and unconditional happiness will blossom from within.

내려오면서 현명해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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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도중 깜빡이도 켜지 않고 차선을 급변경해 들어오는 차를 만나면, 놀란 나머지 입에서 향기롭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 해도 자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도로 위에서 겪는 이런 무례한 상황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종종 겪는다. 며칠 전이다. 어느 모임에서 만난 사람은 느닷없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요즘 너무 일 많이 하시는 것 아니에요? 살살 하세요, 살살! 인생 뭐 있나요? 저는 다 내려놓았습니다. 다 비웠어요. 의미 있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질문인지 충고인지 자신의 결심인지, 아니면 상대방에 대한 질투를 담은 공격인지, 도무지 그 의도조차 짐작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화성이나 달나라 어법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심리적 옆구리 찌르기의 달인일까? 상대방의 사정은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무를 썰듯 손쉽게 상대방의 상황을 재단하려 들었다. 더욱이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내려놓는다’는 말은 ‘방하착 착득거’(放下着 着得去)라는 불가의 언어에서 나온 말이다. 마음속에 있는 욕심이나 집착, 원망 등을 벗어던지고 홀가분해져야 인생의 쇄신을 구할 수 있다는 깊은 메시지다. 비워야 새롭게 채울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오랜 진리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엇을 내려놓았을까? 일반적으로 내려놓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은 ‘무거운 것’을 의미한다. 자기 두 어깨에 짊어지기에 과도한 권력, 너무 큰 타이틀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거에 본인이 차지했던 갑의 위치와 위압적인 태도도 포함된다. 그는 평생 갑의 자리에서 살던 사람인데, 최근 그 자리에서 물러나니 스스로 위안 겸 ‘다 내려놓았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차선 급변경하는 그의 대화 태도로 미뤄볼 때 최소한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직 버리지 못한 듯했다.


‘내려놓았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사람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다. 직위를 내려놓았으면 돈을 잡으려 했고, 돈을 내려놓았으면 명예를 탐했다. 마음을 비웠다고 떠들고 다니던 사람이 어떤 자리나 기회가 생기면 그 누구보다 기를 쓰고 싸우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그것이 보통 인간의 모습이고 따라서 내려놓는다는 말을 함부로 남 앞에서 떠들 것은 아닌 듯싶다.

어찌되었든 귀가해서도 ‘살살하라’와 ‘내려놓고 비웠다’는 말은 귓전에 계속 남았다. 일단 내 작업실을 휘 둘러보았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매일 다른 주제의 글을 쓰고 강연 준비를 하느라 마치 책과 자료들이 레슬링 하는 것처럼 엉켜 있었고, 뭐가 어디에 있는지 그 방의 주인인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일단 버려야 해. 책상 위건 책장이건 모두 꽉꽉 차서 도무지 들어갈 빈틈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창의력이 생기겠어? 비우고 또 비우자!”

이렇게 해서 폭염의 날씨에도 주말을 이용해 하루 종일 버리고 또 버렸다. 그러다 어느 수첩 사이에서 메모지 한 장이 툭 튀어나왔다. 커피 자국이 배어 있는 것을 보니 정확히 5년 전,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을 앞두고 사무실에서 두서없이 쓴 메모였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길을 잃었다. 쳇 베이커의 재즈 트럼펫과 다크 초콜릿 같은 쓸쓸한 목소리가 섞인 그의 앨범 <레츠 겟 로스트>(Let's get lost)를 들으며 이제 어디론가 떠나가야 한다. 오르막 인생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가르쳐주지만 내려가는 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람은 오르면서 강해지고 내려가면서 현명해지는 법인가. 다시 원래의 배역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주연이 아닌 하찮은 배역이 맡겨진다 해도 절대로 투덜거릴 일은 아니다. 돌아보면 살아가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준비를 하였던 것은 아닐까. 이제 비우고 또 비울 일이다.”


미니-.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여기도 비운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명함, 법인카드, 출입증, 영원할 것 같았지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변의 것들이 낯선 타자로 돌아서 있었다. 소유가 아니라 잠시 점유하다 갈 뿐이다. ‘적게 소유하고 사는’ 연습이 필요했다. 성인 가족 네 명이 모두 사회활동을 하지만 산 지 16년 되는 국산 자동차 한 대를 공용으로 쓰며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없으면 불안할 것 같았던 것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이란 뭔가를 덧붙이는 작업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들을 덜어내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글도 마찬가지다. 군더더기와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야 좋은 글이 나온다. 비우고 덜어내야 할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불필요한 약속, 의미 없는 모임을 줄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만남과 모임도 과소비 양상을 보인다. 정작 만나서 서로 딴청을 피우기 일쑤 아니던가. 일정표를 비우니 스스로 선택한 일정과 상대방에 더 집중하게 됐다.

미니멀리즘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류의 많은 선조가 실천하며 살았다. 다만 지금 이 시기 나의 미니멀리즘은 조금 다르다. 무조건 소비를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혹은 의무적인 소비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가격이 아닌, 가치를 부여하는 삶이다.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 정신이다.


행복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appiness’(해피니스)는 ‘happening’(해프닝)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던가. 느닷없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행복이 온다는 것이다. ‘살살하라’라는 말이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그 해프닝 덕분에 미니멀리즘의 본질로 돌아가게 되었으니까, 다시 미니멀리즘이다.


돈에서 벗어나고싶다면 마을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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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2-.JPG» 은혜공동체 내 바에서 밤늦게 맥주를 마시는 모습


티베트 카일라스(수미산)에 다녀온지 10여일만에 후속모임을 가졌습니다. 무려 15일간 고산에서 저산소증에 시달려서 아직도 힘들어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카일라스 가셨던 분들이 대부분 제가 최근에 낸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를 구입해 읽고 있어서 자연스레 책 이야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여러 분이 마을공동체에 막연한 관심을 넘어서, 그런 삶을 살아보려고 작정을 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분들은 거의 제 페친이기도 한데요. 약사 출신으로 지금은 일을 하지 않고 자녀도 해외에서 살아 홀로 살고 있다는 임영희 선생님은 공유주택에서 살아보려는 모임에 참여해서 한 달에 두 번씩 모임을 갖고, 서울 성북동 등에 공유주택을 지어서 살아볼까하고 탐방도 다니고 있다네요. 또 고교 교사인 남편과 함께  카일라스 순례에 참여했던 조영애 선생님도 기노채 이사장님이 하는 하우징쿱 모임에 참여해 이미 공유주택을 지어 살고 있는 곳들을 탐방했다고 하네요. 두 분은 자신들도 공유주택에서 들어가 살거라고 했습니다. 1993년 에베레스트 여성원정대 부대장이었던 정명숙 선생님도 그런 공유주택에 살려고 모색하다가, 최근 방향을 바꿔 인왕산 기슭 달동네 개미마을로 들어가서 개미마을을 마을공동체로 만들어볼거라고 했습니다. 울산에서 온 최경희 선생님도 싱글인데도 홀로 살지 않고, 집에서 여러 명이 사실상 공동체처럼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여성 싱글들도 홀로 고립되어 살다가 고독사 당하는 일이 없도록,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는 인구의 4분의1이 공유주택에서 산다고 하니, 우리나라도 공유주택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아직까지는 이런 데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 어느 정도 학식과 의식을 가진 분들에 국한돼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을공동체는 이들보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러 면에서 더 취약한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현실적인 삶에 억눌려 좀더 다른 삶을 꿈도 꾸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야말로, 자신이 가진 게 부족하더라도, 상처가 많더라도, 외롭더라도 공동체가 주는 힘으로 약점과 단점들을 쉽게 메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고용율 최악에다가 서울 집값 폭등 소식에 이어 부익부빈익빈 소득격차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차로 벌어졌다고 하는데요.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고 한탄만 하지말고, 나라 경제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리지말고, 약자들일수록 자구책을 택해야한다고 봅니다. 저는 수많은 마을공동체를 보면서 마을공동체나 공유주택이야말로 최고의 자구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들은 당국 정책 혜택이 나한테까지 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기보다는 자구책을 강구해서 마을 내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공유주택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공동육아 품앗이 육아와 교육으로 아이들 키우는 문제까지도 해결해 북유럽 못지않은 자체 선진마을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도 좋아지고, 나라 복지도 좋아지고, 세상도 좋아지면 좋겠지만, 언제까지 감이 내 입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요.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경제가 좋아져 돈이 아무리 넘쳐나고, 서울시내에 건물과 집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도 ‘그림의 떡’인 분들이 너무나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부디 ‘다른 삶’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 ‘다른 삶’이라는게 희한한 소수들만이 추구하는게 아니라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했습니다.


밝은1-.JPG» 서울 강북구 수유동 밝은누리공동체에서 마을밥상에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

 

 먼저 도시에서 가장 쉽게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유주택을 살펴보지요. 공유주택은 외관상으로는 빌라와 별반 다르지 않지요. 다만 지을 때부터 적게는 서너명, 많게는 열명가량이 모여 설계부터 함께 하면서, 어떻게 이웃끼리 사이 좋고 행복하게 살까를 논의해서 입주해 산다는 게 다르지요. 제 책에서도 공유주택인 서울 마포구 성미산 소행주1호와 도봉동 은혜공동체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은혜공동체는 50명이 살고 있습니다. 서울시건축상을 받을 만큼 멋들어지게 지어진 5층 건물 내부로 들어가보면 각 가정의 주거공간뿐 아니라 도서관과 술을 마실 수 있는 바, 카페, 게스트룸까지 갖추고 있지요. 집안에서 이런 것들을 모두 누리고 살아가니, 고급호텔 거주자가 아니곤 누리기 어려운 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주택 입주비는 1인당 1억원이 채 들지 않았습니다.

 은혜공동체가 공유주택을 짓는 데 부지비와 건축비를 합쳐 든 돈은 45억원입니다. 이곳에 입주한 50명으로 나누면 1인당 1억 원이 안되는 액수입니다. 이 돈을 처음부터 다 마련한 것도 아닙니다. 이 공유주택을 지을 때 은혜공동체가 3억원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공유주택을 지원하는 혜택이 많지요. 이 주택도 서울시가 낮은 금리로 융자해주는 한국사회투자기금 10억 원을 대출 받아 부지를 사 건축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새마을금고에서 부지를 담보로 일부 대출을 받고, 공유주택에 입주키로 한 이들이 입주비를 내서 대출금을 상환했습니다. 주택 소유권은 은혜공동체가 갖고, 입주자는 전세금을 내고 입주하는 형식입니다. 공동체 주택은 지분을 가진 사람이 자기 지분을 팔아버린뒤 엉뚱한 사람이 지분을 사서 들어올 경우 공동체가 와해될 수도 있고 분쟁이 생길 여지가 있어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가구당 전세금은 1억500만원이고, 소득이 적은 가구는 7천만원만 내도록 깎아줬습니다. 모아놓은 돈이 없는 사람은 시중 금리 정도의 월세를 내고 산다고 합니다. 월세도 바깥의 절반 정도입니다. 이 정도 비용으로 온갖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데다 늘 다정하고 도움을 주는 친구와 언니, 오빠, 형, 동생들이 곁에 있고, 아이들에겐 이모, 삼촌이 덤으로 생긴 것입니다.


소행주-.jpg» 서울 마포구 성미산 소행주1호에서 떠난 아빠여행. 소행주1호 9가구는 전체여행 외에도 아빠들끼리만 가는 아빠여행, 엄마들끼리만 가는 엄마여행을 즐긴다.

 

 공유주택에 함께 살면, 여행을 갈 때도 여럿이 함께 계획성 있게 준비하기 때문에 비용이 절감됩니다. 가령 은혜공동체는 매년 한 차례는 모든 공동체 멤버가 해외여행을 가면, 1~2년 전부터 준비해 항공료도 가장 쌀 때 살 수 있습니다. 2017년 가을엔 공유주택 입주자를 비롯해 모임 참석자까지 포함해 79명이 스위스 알프스로 3박4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직장에 불가피한 일이 있던 단 1명만 빠졌다고 합니다. 참여율도 놀랍지만, 스위스 여행비가 1인당 200만 원밖에 들지 않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이들은 스위스에서 아주 괜찮은 게스트하우스를 통째로 빌려서 사용하고, 매일 저녁엔 호텔 식당을 통째로 빌려 파티도 럭셔리하게 했음에도 그 비용으로 거뜬했다고 합니다.

  

 삶의 여유, 특히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게 공동 밥상입니다. 은혜공동체에도 당연히 공동 밥상이 있어 부엌살림에서 해방됐습니다. 1인당 내는 저녁 식비가 한 달에 10만 원입니다. 믿어지지 않을만큼 싼 금액입니다. 서울 물가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수십 명의 식사를 함께 준비하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성도 저녁마다 부엌에 매여 살지 않고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공동체원 중 1명을 전담요리사로 지정해 월급을 주고, 당번제로 서너 명씩 돕습니다. 월급이 나가는 고용 인원은 1명뿐이고, 나머지 금액은 모두 부식비로 쓰고 추가로 드는 비용이 없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식사는 경제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가족 간 대화와 소통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주일에 한두 번도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없다면 가족이라도 지금 무슨 고민이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알기가 어려우니, 말뿐인 가족이 되기 십상입니다. 식사를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기에 공동체다워집니다.

 공동체원들은 공동 밥상이 비용도 줄여주지만 삶의 여유도 주고, 소통으로 행복도 늘려주니 여러 모로 좋다고 입을 모읍니다. 서울 강북구 인수동 밝은누리도 밥상공동체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을 해결하는데, 1인당 한 달 비용이 9만 원입니다. 월권을 사서 사용합니다. 인근엔 마주이야기라는 공동체 찻집이 있는데, 이곳 월권은 3만 원입니다. 월 12만 원으로 저녁과 찻집을 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소행주 1호의 9가구 중 5가구도 저녁 공동 밥상을 커뮤니티 룸에서 엽니다. 5가구가 식단을 짜서 장을 봐두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분이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3시간 동안 밥과 몇 가지 요리를 해놓고 갑니다. 밥을 차려 먹고,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식당 임대료도 들지 않고, 인건비도 주중 하루 3시간씩 쓰는 구조여서 한 달에 4인 가구당 20만 원이면 됩니다. 먹고 싶은 것 위주로 식단을 짜니, 만족도도 높습니다. 함께 살면 한두 번 쓰고 마는 물건마저 따로 살 필요도 없습니다. 시민단체 활동가인 윤상석 씨는 소행주에 살면서 지출이 정말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춘천에서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스무 살 때부터 혼자 살았어요. 혼자 살면 필요한 걸 돈을 주고 사거나 참아야만 하잖아요. 공동체로 살면 굳이 살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어요. 아이가 꼭 캠핑을 가고 싶어 하면 텐트나 버너, 코펠 등 한 번 쓰고 처박아 둘 수도 있는 걸 다 사야만 하지요. 여기선 빌리는 것이 너무 당연해요. 여행용 캐리어까지도 서로 빌려요. 그만큼 친해서죠. 빌려줘서 고맙다고 맥주 몇 병을 사서 함께 먹으면 더욱더 다정해지죠. 단지 경제적인 이익만이 아닌 거 같아요. 드릴 같은 것도 1년에 한두 번 쓸까 말까 한데 이곳에선 빌려 쓰면 되지요. 벽지도 조금만 있으면 되는데 한 롤을 사야 할 때도, 페인트도 구석에 한 번 발라야 하는데 한 통을 사야 할 때도 다른 집이 남긴 것을 사용하면 됩니다. 낭비나 환경오염도 줄이니 얼마나 좋아요.”


은혜3-.JPG» 은혜공동체원들이 공유주택 1층에 있는 카페에서 퇴근후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고 있다.


 소행주에선 쓸 만한 물건인데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게 있으면 밴드에 올립니다. 그러면 곧바로 필요한 사람이 손을 들어 가져갑니다. 괜찮은 걸 득템한 사람은 그걸 이유로 커뮤니티 룸에 피자나 치킨 같은 걸 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서 나눠 쓰는 것은 상식입니다. 밝은누리에서 최근 아이를 낳은 신원·김나경 씨 부부는 출산비를 거의 들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이를 낳은 공동체 친구들이 미역국까지 끓여주고 방에 불을 넣어두는 건 기본이고, 아기에게 필요한 옷가지와 장난감 등 쓰던 것들을 깨끗이 빨고 다려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을 주고 살 게 거의 없었습니다. 아기들은 무럭무럭 자라 옷도 장난감도 변동 주기가 워낙 짧아서 새 것을 살 필요가 별로 없다는 것을 아이를 길러본 이들은 알기 때문에 챙겨준 것입니다. 구입 비용이 적지 않은 유모차도 쓸 만한 것이 많아서 골라야 할 정도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요즘은 출산 때 정부에서 가족행복카드로 50만 원을 지원해줍니다. 친구들은 임신 때 불안해서 검사하느라 그 돈을 모두 검진비로 산부인과에 가져다주는데, 공동체에는 임신·출산을 경험한 선배와 친구들이 너무 많아 쓸데없는 검진비로 낭비하지 않고, 아이 낳을 때 조산원에서 그 비용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서로 나눠 쓰고 돌려 써서 돈도 절약되지만, 뭔가 내게 없어도 결핍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합니다. 내게 부족한 게 있어도 공동체원들에게 빌려 쓰고 함께 쓰고 나눠 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갈증이 안 생기고 마음이 늘 넉넉하고 편해진다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살면 평균적으로 하위 20~30% 정도의 씀씀이만으로, 상위 90% 이상이 누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러니 돈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나눠 씀으로써 더욱 풍족해지고 싶다면, 적은 돈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다면 마을공동체 살이를 생각해봄직 합니다.

 

더위도 당할 수 없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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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jpg


열즉보천열(熱卽普天熱) 덥다 하면 온 하늘이 덥고

한즉보천한(寒卽普天寒) 춥다 하면 온 하늘이 춥네 

 

늦더위가 여전하다. 두 발이 유일한 이동수단이던 시절, 부채 외에 더위가 없는 곳을 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독서삼매였다. 11세기 남송시대 야부도천(冶父道川) 선사도 더위 때문에 할 수 없이 좋아하는 금강경을 펼쳤다. 1년 내내 만년설로 덮여있는 수미산(須彌山)이 등장하는 문장을 만나자 더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더위는 잊혀졌고 책에 나오는 눈바람까지 상상으로 즐겼다. 그 느낌을 낙서처럼 두 줄의 시로 남겼다. 결국 더위를 이기는 방법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덕일 선생은 더위란 임금님도 피해갈 수 없는 것임을 자료로 고증했다. 일득록(日得錄)에 따르면 1783년 여름 무더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조(正祖)가 머물던 관물헌(觀物軒)은 협소하고 좌우에는 담장까지 바짝 붙어있는 소박한 거처인 까닭에 한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를 보다 못한 규장각 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서늘한 별전(別殿)으로 옮길 것을 완곡하게 아뢰었다. “지금 좁은 이곳을 버리고 서늘한 곳으로 옮긴다면 결국 거기서도 참고 견디지 못하고 다시 더 서늘한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떴다. “이를 참고 견디면 바로 이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

 

더위를 이겨낼 별다른 재간이 없던 시절에는 부채질을 하거나 독서로 견뎠다. 하긴 더위만 피할 목적이라면 심산유곡으로 가면 된다. 그것도 양에 안차면 시베리아 지방으로 몸을 옮기면 간단하다. 하지만 덥다고 얼음골에 마냥 머물 수는 없다. 생활공간을 완전히 떠난 피서란 불가능한 까닭이다. 결국 생업의 현장에서 땀나는 일상에 전념하면서 더위를 피하고자 하니 짜증나는 것이다. 정답은? 참을 수밖에 없다. 본래 사바세계란 참지 않고선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의미다. 이제 에어컨 선풍기 힘으로 조금만 더 버틴다면 곧 가을이 오리라.


내 행동과 남의 행동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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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jpg


인터넷에서 본 ‘교회에서 발견되는 나와 남이 다른 점’이다.

남이 손바닥 만한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 경건치 못한 것이고,
내가 작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활동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남이 새벽기도 못나오는 것은 의지가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고,
내가 새벽기도에 못나오는 이유는 워낙 피곤하고 바쁘기 때문이다.

남이 눈물로 기도하면 감정에 치우친 것이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남이 기도를 길게 하면 주책 없는 까닭이고,
내가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은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남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기복신앙이고,
내가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남이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인색하기 때문이고,
내가 헌금을 적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남이 예배에 참석치 않는 것은 신앙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예배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 는 성숙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남이 예배 시간에 늦으면 ‘5분만 일찍 출발하지’ 하면서도
내가 늦으면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이다.

남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으면 ‘아니 벌써?’ 이고
내가 직분을 받으면 ‘이제서야’ 이다.

남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 하다가도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내 지경을 넓혀 주셨다’ 고 한다.

남이 예배시간에 졸면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는 말씀이 생각나고,
내가 졸면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는 말씀이 떠오른다.

+

대개가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일수록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서는 매우 후한 점수를 줍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 선택적 청취능력이 뛰어납니다.

신앙인이 다른 신앙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가 신앙이지 교회의 신앙은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는 목사님이고 다른 교회의 목사는 직업인의 하나로 취급하는 데는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구지 그 책임의 소재를 따지면 목사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요. 가정에서 존경 받지 못하는 가장은 사회에서 아무리 유명하여도 그의 정서는 겨울 들판일 것입니다. 목사는 그 이름의 권위로 사는 것인데 존경 받지 못하는 목사는 겨울 들판을 헤매는 하이에나와 같습니다. 오늘도 먹이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겨울 들판을 헤매고 다닙니다.

환자를 부처로 대하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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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g» 매일 새벽6시 병원에 출근하자마자 2시간동안 좌선을 하고 원불교 교전을 읽으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김상수 원장


9월1일부터 공연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조성진 듀오 리사이틀 프로그램북엔 정경화와 한 의사와의 대담이 실린다. 바이올린을 켜는데 결정적인 약지의 손상으로 5년간 은퇴까지 했던 정경화의 손가락을 감쪽같이 고친 김상수 원장(72)이 그 주인공이다. 정경화는 이 대담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약지를 바로 맡길 수 없어, 먼저 발가락을 수술을 맡기고, 그 다음에 엄지손가락 수술을 맡겨보고 나서야 확신이 들어 약지 수술을 맡긴 사실을 공개한다. 그는 김원장을 미세수술의 장인으로 실력뿐 아니라 온화한 성품을 갖췄다며 그를 자신의 은인으로 펜들에게 소개한다.


 24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강남구청역 부근 마이크로의원으로 찾아 김원장을 만났다. 정경화의 소개 그대로 온화한 인상이다. 특히 이날 혼자서 4건의 수술을 했다는데도 전혀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은 것이 놀랍다. 더구나 그가 하는 수술은 시종일관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미세신경 수술이어서 가장 난이도가 높아 의사의 진을 빼기로 유명한데도 말이다.

 그 이유가 뭘까. 평소에 하는 운동이 있느냐고 물으니, 병원 지하에 차를 주차해놓고 3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걸어서 오르내리는고, 휴일날 집 주위 공원을 산책하는게 전부란다. 대신 그는 매일 좌선을 한다. 아침 6시까지 병원에 출근해 8시 회진을 돌기까지 진료실 옆 골방에서 좌선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좌선을 시작한지는 30년이 넘었다.


3-.JPG» 환자를 부처님처럼 대하는 것을 자신의 수행으로 삼고 있다는 김상수 원장


 오직 보이는 것과 만져지는 것 외엔 믿지않는 외과의사인 그를 수도의 세계로 안내한 이는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 김대거(1914~98) 종사였다. 대산종사는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과 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에 이어 무려 33년간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로 재임해 지금도 원불교교도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중 한분으로 손꼽는 인물이다. 김 원장은 그 대산종사의 말년을 지킨 주치의였다.

  김원장은 광주 전남대학 의과대 조교수를 하던 1984년 원불교가 전북 익산에 설립한 원광대학 의과대의 부교수로 옮긴지 얼마 되지않아 대산종사를 만났다. 

 “첫인상은 노인의 피부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수양을 많이 하면 피부가 저렇게 좋아지는가’보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더 좋은건 편안한 분위기였어요. 말씀을 해도, 아무 말씀을 안하고 계셔도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어요.”


 대산종사를 만난 감동이 채 사라지지않은 때였다. 김원장의 아내가 교무인 대산종사의 딸을 몇번 만나더니, 성격이 확 바뀌었다. 날카롭던 성격이 온데간데 없이 온화해진데 놀란 김원장은 원불교에 대해 알고싶은 마음에 <교전>을 달래서 읽으면서 병원내에 있던 교당을 나가게 됐다. 교당에서 좌선을 해보고는 전에 느끼지 못한 진정한 휴식을 맛보았다. 통상 수술이 잦은 외과의들은 수술 후 폭탄주 등의 폭음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김원장은 스트레스 해소법은 술이 아니라 좌선이었다. 당시 아이들 교육을 위해 아내는 대전에 살아서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그는 좌선을 더 집중적으로 하고싶어서 퇴직교무이 모여사는 원불교 원로원의 방을 하나 빌려 살며 좌선을 했다. 1년반 뒤 원로원의 방을 비워줘야하자 그는 다시 교무들의 집중 수도처인 중도훈련원의 방을 얻어 들어갔다. 낮엔 의사였지만, 나머지 시간은 사실상 수도자로 보내고싶을만큼 구도심이 치성했던 것이다. 대산종사의 주치의를 맡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대산종사는 원불교인들의 묘지인 영묘묘원에 숙소를 두고 있었다. 김원장은 중도훈련원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기도와 좌선을 한 뒤면 어김없이 5백미터 가량 떨어진 영묘묘원으로 가서 연로한 스승의 건강을 체크한뒤 손을 잡고 함께 산책했다. 대산종사는 종단의 최고 어른이었고, 사회 지도층들이 늘 찾아왔지만, 그가 사용하는 의자 등 비품들이 다 남이 쓰다 버린 것들이었고, 외빈을 만나는 곳도 비닐하우스였다. 말까지 어눌했다. 


 “그런데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울렸지요. 유머 감각도 있으면서, 거짓이나 위선이라는게 없었어요. 그 분 자체가 진리의 덩어리라고나 할까.”

 김원장은 “겨울엔 가로등도 없이 캄캄한 묘지산을 넘어야하는데도 그 분을 뵙는다는 기쁨 때문에 무섭다는 생각도 없이 새벽과 밤늦게도 그렇게 다녔다”고 했다. 그의 눈에 스승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고였다.


12-.jpg» 1984년 원광대학병원에 재직하며 처음 대산종사를 만나고있는 김상수 원장


11-.jpg» 스승 대산종사의 주치의로서 스승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는 김상수 원장


 원광대학병원장과 원광의료원 원장을 지낸 김원장은 2003년 원광대 총장에 후보로서 최고득표를 얻고도 학내 정치구도상 총장이 되지못하고 정든 병원과 학교를 떠나야했다. 그러나 그는 일이 뜻대로 되지않는 것도 ‘인연의 도리’라며 과거를 회고 했다. 

 “1979년 목신경 수술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밀렛 교수가 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대 의과대 연수장학생으로 선발돼 1년간 공부하고 광주 5·18 직후 돌아왔어요. 연수 가기 전에 전남도청 인근인 전남대학병원 1층 제방 캐비넷에 가운을 걸어놓고 갔는데, 문을 열어보니 총알 두 알이 박혀있더군요.”

 그가 연수를 가지않고 광주에 머물러있었다면 그 총알은 그의 가슴에 박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5.18때 총알이 목에 박힌 환자 5명이 전남대병원에 누워있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번 목신경을 다치면 수술 할 수 없다는게 불문율이었지만, 그는 수술을 해낼 수 있었다.  


 김원장은 원광대병원을 떠나서도 네팔 포카라에서 한글과 태권도를 가르치는 원불교네팔교당 후원회장을 맡아 돕는 일을 지속해오고 있다. 마음 근력이 허약해진 요즘 청년들을 돕기 위해 원불교안암교당 김제원 교무가 펼치는 마음학사의 건립도 남모르게 뒷바라지하고 있다.

 그는 1년 전 이 병원을 개원하기 전 네팔 포카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소장하고 있는 의서들까지 모두 처분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원광대학병원에 와 그에게 미세신경시술을 배우던 중국 상해의 의사가 뇌졸증을 개선할 수 있는 수술법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지금까지 뇌졸증으로 한쪽이 마비되면 치료가 사실상 어려웠던 환자들의 목신경을 연결시켜 마비를 개선시키는 수술을 하고 있다. 


 동료의사들이 모두 현직을 떠난 나이에 다시 수술칼을 잡은 것은 제생의세(濟生醫世), 즉 ‘세상을 고쳐 생명들을 구하라’는 스승의 말을 끝내 져버릴 수 없어서였다. 더구나 뇌졸증 수술은 자신처럼 미세신경수술의 경험자가 아니면 하기 어렵고, 지금까지 삶의 희망을 갖지 못한 뇌졸증 환자들을 살리는 것이어서 더욱 그랫다. 

 정경화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이런 그의 자세에 감동을 받았기에 병원발전기금까지 내면서 그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그는 “네팔을 언제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아쉬워하면서도, “고통 받는 환자들 곁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며 웃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즉 대하는 사람이 모두 부처이니, 하는 일마다 부처를 받들듯 한다는 원불교 스승들의 가르침이 그의 손끝에서 살아나고 있다. 

'하면 된다'의 긍정과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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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jpg» 일본 왕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가미가제의 마지막길을 환송하는 일본 여학생들의 모습


아마 초등학교 3 학년이었나 봅니다. 겨울 저녁, 어딘가 초대 받은 집으로 엄마와 손을 잡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엄마는 어릴 적 일본 선생님에게서 배웠다는 구절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세바 나로 나세바 나라노 나니고또모…” 노래하듯 엄마랑 반복한 그 구절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니, 아직 빈 도화지 같은 어린 아이들 마음에 뭔가를 심어준다는게 얼마나 책임 막중한 일인지 새삼스럽습니다. 그 구절의 뜻은 대충, “하면 된다, 안되는 것은 안하기 때문이다였는데, 어머니 자신이 그 말을 인생의 지표로 삼고 사시지 않았나 합니다. 늘 노력하는 강인한 사람으로 여겨진 어머니는 자신의 힘든 삶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게도 용기를 주고,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저는 그 말에 커다란 저항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도 안되는 일들이 생기고, 그런 경험은 늘어나기 마련이고, 또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니까요. 원컨 원치 않건 우리는 온 세상과 그물처럼 연결돼있는데, 어떻게 한다고 다 됩니까? 안되는 건 다 내가 안했기 때문이라고? 부족한 것은 늘 나라고? 나의 최선이 남의 밑 닦는 종이 정도로 여겨지는 일들도 허다한데? 이 말은 격려를 넘어서, 안되는 것은 되게 만들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무자비한  타협을 종용하기 까지 하며, 소위 성공이나 출세를 못한 자신과 남들에게 야박하고 은근한 경멸의 시선까지 던지게 합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거동을 못하고 누워계실 때, 만약 환생이 있다면 누굴 다시 만나고 싶냐고 여쭈었더니, 엄마는 그 선생님의 이름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다른 일본인 선생들과 달리 그 분은 엄마를 늘 격려하고 용기를 줬다고요. 엄마의 기분을 돋구기 위해, 아직도 그 선생님의나세바 나로…”를 외우고 있는데, 제대로 기억하는거냐고 묻자, 엄마는 눈을 감아버리고 못들은 척 하셨습니다. 의외였습니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왼쪽 전신의 마비를 극복하려고 일년간 부단한 노력을 하셨지만, 다시는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던 엄마에게, ‘하면 된다. 안되는 건 안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반가울 수가 없지요. 나중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알아주고 격려한 선생님의 마음이었지, 그 구절 자체가 아니었던 겁니다. 한편, 그 선생님만큼 자신을 인정해주고 다독여 준 사람이 다시 없었다는 말도 되니, 그 마음을 몰라드린 것이 참 아픕니다.

 

이제는 더이상 어머니께 여쭐 수 없으니, 자주 가는 카페 주인의 일본인 아내에게 음으로만 알고 있는나세바 나로...’를 좀 검색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구절은, 절대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국민통합을 위해 유포하던훌륭한 시중의 하나로 쓰였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던카미카제의 발상은,‘안되는 것은 안했기 때문이라는 그들 스스로의 도덕적 경멸을 면하기 위한 마지막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지난 70여년간, 이런 군국주의적 도덕관념은 아직도 우리 위에 긴 그림자를 던지면서, 무지막지하게되게 만드는뒤틀린 행동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이제나세바 나로…’는 겨울날의 어두운 골목길과 따스한 엄마의 손과 목소리만으로 남아있지만, 우리가 쓰는 일상의 언어 속에, 모든 조직 속에, 아이들의 놀이터에까지 일제와 군사독재의 잔재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 화학비료로 죽어버린 땅을 살아있는 유기농토로 바꾸려면 몇 해가 걸린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데는 더 오래 걸리지요. 그래도 살아 숨쉬려면 독을 계속 걸러내는 수 밖에요

더러움 속에서 더러움을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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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남지-.jpg» 부여 궁남지


 여름에 연꽃축제를 시작한 지자제는 전남 무안이다. 일제 때 조성된 10만평의 회산 저수지에 향기롭고 탐스런 백련이 수없이 피어나지만 아무도 관심 갖는 이가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법정 스님께서 강원도에서 천리 길을 마다 않고 백련 연못을 찾았다. 10만평의 거대한 연못에 푸른 잎이 출렁거리고 바람결에 느껴지는 백련의 향기를 접하였다. 그때의 감동을 신문에 기고했다.


 법정 스님의 글을 읽은 독자들이 전국에서 무안군 일로면 복룡리 회산 방죽으로 몰려들었다. 군청에도 끊임없이 문의전화가 이어졌다. 무안군에서는 회산 방죽을 정비해 다음해부터 연꽃축제를 열었다. 무안군에서는 법정 스님과 연꽃축제의 스토리텔링을 담아 백련지 산책길에 법정 스님을 기리는 무소유초당을 건립할 계획이다.


 무안군의 연꽃축제가 알려지면서 연꽃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곳이 늘었다. 연꽃단지는 양평의 세미원, 시흥의 관곡지, 함안의 연꽃 테마파크, 부여의 궁남지가 대표적이다. 김제 청운사, 아산 인취사, 강화 선원사, 남양주 봉선사 등에서 연꽃축제를 한다. 처음에 강화 선원사에서 세계 연꽃축제를 연다고 크게 홍보를 했는데 개화기간을 잘못 선택해서 연꽃이 세 개밖에 피지 않은 재미난 일도 있었다. 진짜로 ‘세 개 연꽃’축제가 된 것이다.


 연꽃을 좋아해서 전국의 연꽃 명소는 모두 가보았다. 그 중의 최고를 꼽는다면 단연 부여 궁남지다.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나 다녀온 궁남지는 백제 왕궁의 정원조경으로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백제식 정원이다. 궁남지 중심 정자에서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황금연과 대홍련이 자태를 뽐내며 향기를 뿌린다. 연방죽에는 ‘오가하스연’(대하연)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1951년 3월 일본 치바현에 있는 도쿄대학 운동장 한 켠에서 미라를 발굴하던 오가 이찌로 박사가 연꽃 씨앗 세 알을 발견했다. 연꽃 씨앗은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시카고대학 연구소에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2000년 전의 연씨로 밝혀졌다. 연씨 세 알을 발아시켰는데 그 중 한 알이 싹이 터 올라 왔다. 보통 식물의 씨앗은 3~4년 지나면 발아가 잘 안된다. 그런데 2000년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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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바현에서는 발굴자의 이름을 따서 오가하스연(대하연)이라 이름하고 오가하스 연꽃 테마파크를 조성했다. 1973년 이석호 전 부여원장이 이 연꽃 씨앗을 국내 최초로 들여와 재배에 성공해 2008년 이를 부여군에 기증했다. 오가하스는 그 옛날 백제 땅으로 다시 돌아와서 ‘사비백제연’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로 풀어가는 부여 궁남지 연꽃축제에는 오가하스·사비백제연이란 새로운 화제도 갖게 됐다. 일본 정원의 시조가 백제인이고 일본문화의 뿌리가 백제임을 생각하면 2000년 전의 일본 지층에서 발견된 연씨 세 알과 백제의 인연이 이어질 수도 있다. 이를 뮤지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에 뿌리를 내린다. 더러움을 떠나지 않고 더러움을 정화 시키는 작용이 연꽃의 특징이다. 연잎이 아집과 무지의 물을 뚫고 올라온다. 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삶의 지향점을 한여름에 피어나는 연꽃에서 배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엄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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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느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얻는 것


여인이여그대의 믿음이 참으로 장합니다그대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마태 15,28)


복음서의 기술 내용은 재미도 줍니다시쳇말로 예수님을 쪽팔리게 만든 사건도 숨기지 않고 기록했군요만민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나는 오직 이스라엘의 길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입니다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면서 민족 우월주의힛틀러식 발언을 하셨다는 것은 예수답지 못할 뿐 아니라아마 요즘 시대라면 포털 검색 1악플 엄청조선일보의 온갖 왜곡 음해 기사로 못 견딜 겁니다.


지상의 인간들은 쉼없이 사랑을 말하지만 가장 완벽한 사랑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뿐입니다어머니의 사랑에는 신도 국가도 민족도 사상도 이념도 없습니다그래서 사랑은 자식이건 진리에 대한 사랑이건 지독한 편견이기도 합니다.


한진항공 회장의 자식 사랑이나 보발리 엄마들의 자식 사랑이나 편차가 없습니다우리 어머니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생기고 똑똑하다고 하셨지요어머니의 지독한 일방적 자식 사랑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고통 중에 있는 자식 밖에 없습니다자식의 병에 송장뼈가 좋다는 말을 들으면 밤에 괭이를 들고 공동묘지를 찾아가는 어머니의 사랑 앞에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고 강아지가 어떻고 잡소리에 불과합니다.


자식이 치유되는 데는 오직 전능하신 절대존재께서 긍휼히 여겨 주심만으로 충분한 것이니 그 자비심을 청하는 어머니일 뿐입니다그래서 우리는 경신례의 꽃인 미사를 봉헌함스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로 시작합니다다른 거 소용없고 자신에게 긍휼함을 베풀어 주시는 신의 마음 한 조각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이방인 여인의 이런 믿음 앞에는 예수님도 하느님도 맥을 못추고 순종하십니다사람은 하느님의 존재와 창조질서 아래 순종하고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의 기도 앞에 순종하십니다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얻는 의지입니다살롬 알레! *


오늘 경진이 대입 검정고시 날. 생미사 봉헌했다. 만점 받으면 구두 하나 사주기로 약속했는데.... 하나 틀리면 구두끈 빼고 주려고 생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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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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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

                                                   김 형 태 (<공동선>발행인,변호사)


몇 년 전 일입니다. 한 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집 안 2층 나무계단을 오르다가 우당탕 퉁탕 1층 거실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집에 들어온 것도 계단을 구른 것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거실 바닥에 머리가 부딪히면서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때 더 세게 머리를 박았더라면 정말 나 죽는 줄도 모르고 아주 갔겠지요.


아주 간다니누가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요? 어느 새 이순(耳順)을 넘겨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고, 마음은 날로 소심해져 가는 데, 가 이 모습, 이 마음 그대로 지닌 채 다음 세상으로 가는 건가?

그럼 배가 난파되어 그리스 해안에 시신으로 떠밀려 온 다섯 살 난민 아이는 그 순진한 마음과 다섯 살 앳된 모습으로 천국엘 갔을까. 만일 그 아이가 노인이 되어 죽었다면 노인의 모습으로 다음 생을 누리는 걸까.


그럼 국회의원 노회찬은 수천만원 정치자금 받아 신고 안하고 쓴 걸 괴로워 하다가 죽었으니 지옥엘 갔을까. 아니, 옛날 노동자로 위장취업 했을 때 산재사고로 죽었더라면 청년 노회찬으로 천국에서 살고 있을 건가.

실제로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직후 아직 의식이 남아있을 동안 그가 듣고 생각이 정화되어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경전을 읽어주고 기도를 하고 여러 의식을 행합니다.


하지만 내가 계단 아래로 꽝 하던 순간을 돌이키면, 당시의 생각, 외모, 성격 등 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죽는 순간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 같은 다음 세상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이 개체는 죽는 순간 마치 촛불이 꺼지듯 아주 사라지지 싶습니다. 그 뒤는 없이.

기독교 표현으로 하자면 이 세상 모든 개체는 하느님의 피조물일 뿐이니 언감생심 피조물이 영원할 수가 없을 터이고,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이승이나 저승이란 생각도 다 공()하니 그렇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무렵을 모셨던 신부님의 회고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김수환-.JPG» 김수환 추기경추기경님께서는하느님이 나를 부르시니까 하느님 안에 편안한 삶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쉽게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항상 죽음에 대해서는, 쉽지 않아.’ 그러셨어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죽음 앞에서 고통 받으셨던 책자가 있어요. 그거 열심히 보시면서 , 요한 바오로 2세도 굉장히 힘들어하셨구나하셨어요...

이런 허무가 있나. 내가 이런 무지의 세계로 가야하나. 그것을 겪을 때는 정말로 하느님 없으신 것 같아. 배반하게 될 것 같아.’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고독해 하시고 힘들어 하시고 신앙적으로 좀 흔들리는 그런 말씀을 하시다가, 그 다음에는 그런 말씀을 안 하시는 거죠. 그냥 기도하시고...”


아마도 이 회고 글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누구보다도 당신 가까이 가신 분이라고 믿었던 추기경께서 죽음을 그렇게 힘들어 하셨다니, 하느님을 배반할 생각까지 하셨다니..

나이 먹어 죽음을 향해 가면서 몸과 마음이 쇠약해져 겪는 고통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걸 못견뎌하고 힘들어 하는 걸 두고 무어라 할 일은 전혀 아닙니다.


라칭거와 요한바오로2세-.jpg» 오른쪽에 생전의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다만 이가 사라진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추기경께서 김수환이라는 개체에 매여 그 개체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순간에는 자신의 죽음을 둘러싼 온갖 허무한 생각과 회의가 밀려왔을 겁니다. 그러다가도 흙에서 나온 자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전체이신 당신의 말씀을 떠올리면 피조물의 처지를 받아들여 신앙을 돌이키셨겠지요.


모든 종교는 누구나 쉽게 알아들으라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네가 착한 일 하면 죽어서도 천당, 극락에 가고 영생 복락이나 열반의 경지를 누리리라. 이 가르침의 핵심은 착한 일을 하라는 거고, 착한 일하라는 건 내 욕심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는 이 가르침을 내가 영생이나 열반의 지복을 누리는 수단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개체의 소멸을 인정하기 어려워 그러는 거라 여겨집니다.


이 개체가 부활한다거나 열반에 든다는 종교의 표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비유요, 은유, 역설입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개체에 불과한 내가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산다고 받아들이는 건 그 말의 뜻과 정반대 결과를 가져옵니다. 모든 종교의 알짬은 이 개체 로부터 해방되어 이웃과, 전체이신 당신과 하나 되라는 건데, 정반대로 이 를 향해 무한히 집착하고 영생까지 바라니 그렇습니다.

개체인 우리는 전체이신 당신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래서 모든 합성된 것은 공()합니다..


그러나 개체가 흔적도 없이 소멸한다 해서 이 세상에서 내가 행했던 착한 일, 못된 일, 내가 이 세상과 지었던 여러 관계들이 같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니고 이 전체의 관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그런 면에서 이 개체 는 전체의 품 안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체 노회찬은 불행하게 소멸했지만, 노동자와 약자들을 위해 울고 웃던 그의 노력은 이 세상 힘든 이들에게 도움과 위로와 법제도로 남을 거고, 그의 생각은 그를 기리는 이들의 마음에 남아 길이길이 이어질 겁니다.

너른 바다 저 물결은 잠시 바다위로 솟구쳐 일렁이며 제가 물결임을 뽐내다가, 다시 스러져서 제가 나왔던 바다로 돌아갑니다.


노회찬-.jpg» 모란공원 노회찬 의원 하관식. 사진 김경호 기자


나는 저 바다위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잠시 이 세상에 나와 이런 저런 생각과 말과 행위를 짓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사라지지만, 한 때의 물결이었던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결과는 바다인 이 세상에 남아 있을 겁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노회찬도 다 한 때 바다 위를 일렁이던 물결로 그렇게 일어났다 스러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아름다운 생각과 말과 행위들은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전체이신 당신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겁니다.


 이글은 <공동선 2018. 9, 10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고통이 가져다주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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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격는 정신적인 고통과 몸의 고통은 마음변화의 비결입니다. 
짜증, 불안, 분노, 두려움, 통증같은 원치 않는 고통이 독특하고 훌륭한 수행의 기회를 줍니다. 
고통이 없으면 수행을 찾지 않고 해탈도 못합니다. 


고통을 싫어하고 고통으로부터 도망가고 고통을 거부하는 습관이 진정한 행복의 가장 큰 장애입니다. 
고통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 힘든 것이 없어지고 불쾌하더라도 견딜만 합니다. 
고통이 우리에게 이롭기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고 기대할 수도 있고 반길수도 있습니다. 

고통과 불쾌함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고통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고통을 못견디게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과 기쁘게 받는 고통은 밤과 낮 차이입니다. 

고통을 기다리세요. 기대하세요. 반기세요. 친절한 깨어있음으로 환영 하세요. 
사랑으로 모든 불쾌함을 껴안아 주세요. 
하늘처럼 허용하고 
바다처럼 품어주세요. 
조건없이, 개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요점입니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키우지 않고 생생하게 느끼게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사랑을 알게 됩니다. 
고통은 선물입니다. 
허용한다면요.


쓸모없음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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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레이가 지은 <우화로 읽는 인간경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그마한 고깃배 한 척이 돛을 활짝 펴고 드넓은 강의 수면을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솔솔 부는 강 바람에 팽팽해진 흰 돛이 배를 빠른 속도로 나아가게 했다. “마치 흰 나비의 날개와 같군!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멋진가!“ 흰 돛은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데 그때 아무 말도 없이 뱃전에 기대어 있는 삿대가 눈에 들어 왔다. “이봐, 삿대야! 넌 왜 그렇게 게으르고 무능하니. 지금 이 배가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내 덕이란다. 그런데 넌 게으르게 잠만 자는 거 말고 하는 게 뭐가 있니?“ 삿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위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잠을 자는 듯 했다. 그때 지금까지 불던 바람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러자 어부가 밧줄을 풀러 흰 돛을 돛대 위에서 내려 버리고 곧이어 어부는 삿대를 힘껏 저어갔다. “왜 절 이렇게 팽개치고, 왜 쓸모 없는 삿대를 사용하나요?“ 다급해진 흰 돛이 소리를 외쳤지만 어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대신 삿대가 이렇게 대답했다. “하하하. 이제야 알겠지? 넌 순풍이 불어야 비로소 바람의 힘을 빌려 거저 배를 움직이게 할 수 있지. 그런데 나는 재주는 없지만 역풍을 맞으면서도 배를 앞으로 나아 가게 할 수 있단다.“

+

흰 돛은 바람의 힘을 빌려 배를 움직이지만 삿대는 맞바람을 맞으면서도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둘 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력이 없고 쓸모없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분명히 그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배가 순조롭게 계속 나아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소질을 갖춘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입니다. 내가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존의 법칙인 것입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이 앞서 조바심치지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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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보다 앞서서 조바심치지 마세요

우울함과 불안 앓는 대학생 딸 둔 엄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사진20--.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 큰딸아이(23세, 대학생)가 2학기 휴학을 하겠다는 말과 지난 6월부터 정신과에서 약을 타다 먹는다는 말을 하네요. 어제저녁에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혼자서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니 아이가 너무 가엾고 엄마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아이가 자취를 하고 있기에 오늘 만나러 갔다 왔습니다. 작년에 학교 상담실에서 자신이 힘들어하는 부분을 상담받았는데, 현재 드러난 현상을 과거에서 찾으려고만 하는 것 같고, 현재에 대한 대안이 없어 상담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데이비드 번스의 <필링 굿>을 정독하고 정리를 해가며 읽었지만 별 위안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겪고 있는 우울함과 불안을 한낱 그 시기에 겪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치부해 말하기에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 같아 섣불리 말하기가 두려웠습니다. 오늘 4시간가량 아이의 말을 듣고, 소소한 일상의 얘기도 나누다 돌아왔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를 돕는 것일까요? 김지은


A 따님이 우울함과 불안으로 고생하고 있나 보네요.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딸아이가 혼자 겪었을 마음고생이 가여워서라고 하시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 부모님들은 대부분 왜 하필 우리 딸이 그런 일을 겪나,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라며 속상해하기 쉬운데, 그보다는 아이의 마음고생을 염려하시다니 김지은 님은 참 좋은 어머니입니다.


불안이나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을 경험하는 젊은이들이 요즘 참 많습니다. 연령도 많이 낮아져서 초등학교 때부터 증상을 경험하는 아이들이 있지요.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게다가 이런 신경증이 어린 시절의 특별한 상처 없이도, 또 이렇다 할 트라우마 없이도 발병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심리적 문제의 원인을 어린 시절 겪은 가족 관계에서 찾으려는 치료법이 요즘은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아마도 따님 역시 그런 치료법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필링 굿>이란 책은 인지행동치료의 대중적인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지행동치료는 신경증이 급증하는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치료법입니다. 세상에 대한 왜곡된 생각 습관이 부정적이고 왜곡된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 그 치료법의 이론적 전제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늘 잘못하고 있다(언제나 그런 것이 아닌데도)’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낮은 자존감과 우울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자신에 대해 비현실적으로 높은 기대를 하는 사람은 불안과 좌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생각 습관을 알아차리고 수정하도록 돕는 것이 이 분야의 치료법입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당신이 경험하는 불안과 우울과 분노가 당신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길 주저하게 됩니다. 이토록 많은 젊은이가 불안한 건, 그리고 그들이 우울한 건 우리 어른들 탓, 기성 사회 탓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그들을 얼마나 몰아세우고 쥐어짜는지 모릅니다. 부모는 덩달아서 아이들을 채근합니다. 가만히 두는 것이 혹시 부모의 역할을 방기하고,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 될까 봐 말이지요.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 사회의 속도가 인간이 따라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과 속도에 자신을 맞추느라 젊은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아챌 새도 없게 되었습니다. 잠재되어 있던 가능성은 꽃피지 못하고, 취약한 부분은 심화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우울과 불안은 너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 없이, 진정한 자신은 소외시킨 채 앞으로 한없이 내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공황 상태인 것이지요.


그러니 부모님만이라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세요. 아이보다 더 걱정하지 마시고, 아이보다 더 슬퍼하지 마세요. 그 아이의 속도에 맞춰 주세요. 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조바심치지 마세요. 그러면 아이의 마음이 급해져 자꾸 흔들리고 미끄러지게 되니까요.


따님의 장점도 인정해 주세요. 한 개인의 강점은 보통 어려운 상황에서 발휘되지요. 사연을 읽어 보니, 따님은 상당히 성숙한 청년입니다. 요즘은 자신의 심리적 어려움을 부모에게 전가하려는 자식들이 많은데,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려고 했는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혼자 이런저런 노력을 많이 했네요. 그 아이의 해결 방식을 믿어 주세요.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너무 그럴 필요 없어, 혹은 넌 이런 게 문제야라는 충고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님과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권하고 싶네요. 다 자라 어색할 수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손을 잡고, 그리고 안아 주는 겁니다. 스킨십은 연결감을 느끼게 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지요. 인간이 고통을 경험할 때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정말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세상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고통도 행복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보다 중요한 치료법이 있을까 싶습니다.


아이가 그렇게 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든든한 부모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너를 도울까? 네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도울게 하는 말과 태도입니다.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 너를 믿어 줄게, 우리와 함께하자 하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따님은 아마도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려 잠시 휘청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지은 님처럼 아이를 안쓰러워하고 돕고 싶어하신다면 결국 아이는 균형을 찾을 거예요. 인간의 내면에는 스스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엄청난 힘도 잠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을 지난후 장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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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7월14일 서울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무위당 서화전을 연 무위당사람들 구법모 이사가 무위당 장일순과 관련된 어르신이나 무위당에 대해 더 알고싶은 관객들을 초청해 연 대화모임을 월간 <퀘스천>이 녹취해 실은 것입니다.)


무위당 사람들


장일순1-.JPG» 무위당 장일순(1928~1994)


길담서원 <한뼘 갤러리> 서울 옥인동에 있는 길담서원에 '무위당 사람들'이 모였다.  모처럼 서울에서 <무위당 서화전>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무위당 장일순(1924~1994)은 가톨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했고, 이후 '한살림'을 설립하며 생명평화운동을 개척했던 선구자였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원주에서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구법모  이사는  자신의 소장하고 있던 10여 점을 선보였다. 지난 7월  14일, 길담서원에서 있었던 '소장자와의 만남'을 지상중계한다. 


구법모 : 존경하는, 장(張) 일(壹)자, 순(淳) 자 선생님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린다는 게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81년에 처음 찾아 뵙고,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한 찰나도 피곤한 기색 없이 그렇게 해맑게 대해 주셔서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저 고등학교 때, 함석헌 선생님이 “일제 순사가 될 것이냐? 독립투사가 될 것이냐?”라고 물었을 때, 그 앞에서 눈을 부라리면서 “독립투사가 돼야지요.” 했던 말이 시발점이 돼서 오늘 이런 자리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선, 이 자리의 큰 어르신으로, 장일순 선생님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해오신 김영주 회장님이 원주에서 오셨습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모두 : (박수)

구법모 : 한 말씀해 주셔야지요. 회장님!

김영주 : 원주서 제법 일찍 떠났습니다. 12시 전에 떠났는데 오다 보니까 토요일이고 해서 길이 막히고, 서울 시내 저 청계천 와서는 길을 잘못 들어서 거기서 한 시간 이상 헤맨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늦게 와서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가 일할 때,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뵈니까, 그분이 엄청 마음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에요. 

다른 사람 만날 땐 그런 티도 안 내시는데,

예를 들면 당신 댁에서 시내에 나올 때면 이렇게 논둑길을 한참 걸어 나오셔야 해요. 그분 말씀이,  아침에 논둑길 걸을 때 풀을 밟으면 풀이 쓰러질 거 아녜요. 그런데 저녁에 들어갈 때 보면 그게 다시 다 서 있더라는 겁니다. “아, 내가 풀만 못 하구나."그분도 박정희 때, 전두환 때 어지간히 짓밟혔던 분 아닙니까! "나도 밟히며 살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일어서질 못했는데, 너는 아침에 짓밟혀 쓰러졌다가도 저녁이면 다시 딱 일어서니 내가 너를 따라갈 수가 없구나.”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또, 저녁에 봉산동 댁에 들어가면 뒤에 나무가 우거져 있거든요. 그 나무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요. 다른 사람들이 “벌레 운다.”고 그러면,  “저 벌레가 내 스승이다.” 그러셨어요. 왜냐? “저 벌레는 저렇게 자기 마음껏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데, 나는 내 소리를 못 내고 있으니 저 눔이 내 선생이 아니냐!"고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절 보고 웃으셔요. 그렇게 마음을 달래셨던 분이지요. 그런 분 밑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저도 어떻게 그분을 좀 닮아갈까,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영 그게 안 되더라고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


만남-.jpg» 서울 종로구 옥인동 길담서원에서 열린 무위당사람들 구법모 이사와의 대화 모임


김영주 : 그분이니까 그렇게 사셨던 거지요. 오늘 모처럼 여, 서울서도 그동안 두어 차례 무위당 선생님 작품 전시회를 했어요. 오늘 세 번째 무위당 선생님 모시고 여러분과 한 자리에 같이 하게 됐습니다. 정말 반갑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여러분과 무위당 작품을 놓고 같이 얘기하고 얼굴을 맞 대는 게 마음이 참 흐뭇합니다. 그런 마음 계속 오래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오랫동안 사귀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자리를 준비해 주신 길담서원의 우리 박성준 선생님, 고생 많이 하시고, 그동안에 애 많이 쓰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저는 뵙기는 오늘 처음 봬요. 말씀만 많이 들었지 정말 이렇게 뵙게 되어 존경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 오늘 여러분들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저희 원주에서 제가 이사장님을 모시고 왔어요. 뒤에서 무위당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사장님이 여러분한테 좋은 말씀을 해주실 테지요.

모두 : (박수).

성낙철 : 부끄럽습니다. 저는 〈무위당 사람들〉 이사장을 맡고 있는 성낙철입니다. 이런 기회에 여러분들을 만나 반갑고요. 선생님 생전에 서화전을 다섯 번인가 여섯 번 하셨는데, 한번도 당신 작품을 자랑하거나 특별하게 얘기하신 적도 없으셨지요. 

후학들이, 또는 주변에 어려운 분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선생님이 작품을 써주셨지요. 선생님도 가지신 게 없으니까 돈 가진 분들 끌어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생각으로 대여섯 번 전시회를 하셨던 거지요.

돌아가신 후에 유작전도 이번까지 하면, 서울, 대전, 광주 다해서 아마 이번이 스무 번째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지역 주변 분들이 우리한테 요청이 와서 그렇게 했고요. 지금 제주도까지는 아직 못 갔습니다. 올해 아마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고요. 

작품을 통해서 선생님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좀 더 공유할 수 있을까. 김영주 회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언감생심 무위당 선생님처럼 살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나마 따라갈 수 있도록, 생각이나마 그렇게 하고 있는데, 오늘 <길담서원>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고맙고, 구법모 우리 이사님이 많이 애쓰신 거 같은데, 작품 보시면서 무위당 선생님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혹여 그 향을 좀 맡고 가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인사를 드리고요. 오늘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 (박수)


월입송성-.jpg


구법모 : 이부영 의원님, 한 말씀 해주시죠.

이부영 : 하하하. 이 자리에서 전혀 얘기할 이런… 당황스럽게 저 사람은 상의도 안 하고.

모두 : 하하하.

이부영 : 뭐, 영주 형님 우선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돼서 좋고요. 저는 그저 장일순 선생님 살아계실 때 70년대부터 가끔 찾아 뵐 일이 있으면 가서 뵙고 그랬지요. 그런데 별 말씀도 안 하세요. 늘 숭늉 마시는 거 같은 그런 얼굴이시고, 막걸리나 한 잔씩……그런데 뭘 똑 부러지게 얘기를 안 하세요. 그 절이 어디죠?

누군가 : 구룡사!

이부영 : 구룡사 계곡에 가서 이제 1970년대 초에 꽉 막혀서 힘들 때입니다. 우린 그냥 속이 막 타들어가고 그럴 땐데, “뭘 걱정해. 곧 열릴 텐데.” 그렇게 위로하시더라고요. 또, 최열이 하고 우리 감옥 나와서 얼마 안 됐을 때에도, “걱정 마. 이게 다 전두환 같은 사람이 세상 잘 되게 하려고, 그런 일을 저지른 거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속이 막 이상해지는데, 막걸리  따라 주시면서 막 먹이시더라고요. 하하하. 그 물이 참 좋았잖아요. 거기 발 담그고 앉아서 저희들이 더워하니까 물도 끼얹어 주시고 참! 민주화 성지 원주 같은 데 와서 저런 큰 어른한테 술도 받고, 수건 이렇게 뒤집어쓰고 물도 같이 맞고, 하하하, 그런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 나이가, 추모 사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싶고요. 

제가 경복궁역에서부터 더운데 이렇게 걸어올라오면서 곰곰이 이 양반 생각을 했어요. 며칠 전에도 경남 통영에 가서 윤이상 선생님, 박경리 선생님, 제정구 선생님 생각하면서 비가 막 쏟아지는데 걷는 일을 하면서, 원주에는 이 어른이 계시단 말예요. 부산에 가면 요산 김정한 선생님 계시고, 하나같이 그 일제 강점기, 또 한국동란 때 다 곡절을 겪으신 분들이에요. 

윤이상 선생은 얼마 전에 화장해 모셔가지고 와서 그 음악당 통영 바다 보이는 데 모시려고 했는데, 그렇게도 그악스럽게 반대를 하는 거예요. 돌아간 분들 어렵게 고향에 모셔 와서 묘 쓰려고 하는데, 박경리 선생도 생전에 통영 고향 통영에 한 번도 안 가셨지요. 그쪽에서 애초에 그 남편분이 서대문 감옥에서 실종된 거 아시잖아요. 6·25 나던 그때 그런 곡절 다 묻어두고 사셨던 분들이란 말예요. 요산 선생이 어떻게 곤경을 치른 건 아시죠? 김정한 선생은 수장당할 뻔 했어요. 수장할 때,  마침 어떻게 그 현장에 있던 제자가 꺼내준 거란 말예요. 그 바다 주변에 수장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그때. 

요즘 그런 분들 생각하면서 지역에 가서 이렇게 순례 여행을 하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 우리 좋은 후배들이 있고, 그들이 생각하고 따르는 그런 분들은 그런 곡절이 있는 모양이에요. 일제 때 감옥 갔거나 물론 그런 어른들을 마음에 두고, 모시고 하는 그런 젊은이들은 뭐 이념 관계없이, 종교 관계없이 모여있는 걸 보면 참 마음이 쏠립니다. 요새 그런 분들 찾아 다니면서 살고 있는데, 진해에 이효재 선생한테도 갔었죠. 올해 아흔 다섯이신데, 가서 절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니면서 그러고 나면 마음이 참 좋아요. 

오늘도 여러분들이랑 장 선생님 글 그림 이렇게 보면서 이런 향기를 함께 좀 맡아보려고 합니다. 저도 집에 보면 요만한 거 하나 받아 놓은 게 있더라고요. 그거 가지고 부족할 거 같아서 오늘 여기 나와서……하하하.

모두 : 하하하.


종타방-.jpg


구법모 : 저보다도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셔왔던 어르신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선생님에 대해 논할 수는 없지만, 81년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저한테 해주셨던 이야기들도 함께 나누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이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울에서 자란 구 이사는 고교 1학년 때부터 흥사단에서 함석헌 등의 강의를 들었다. 재수를 거쳐 1981년 연세대 원주캠퍼스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원주지역 민주인사들의 단골식당이던 ‘천하태평’에서 장일순,·이창복,·김지하,·김민기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 모태신앙인 그는 가톨릭원주교구대학생연합회를 조직했고, 1984년 첫 직선제 총학생회장으로 뽑혀 학내 시위를 주동했다. 물론 감옥행을 각오한 투신이었지만 그때마다 지 주교와 장 선생이 방패막이가 돼 주었다. " 

- 한겨레 신문기사 중에서


저는 원래 사고뭉치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께서 빨갱이 활동한다고 아버지를 불러다가 야단하시고, 학교 가면 또 왕따를 당합니다. 교무실에 가면 학교 친구들하고 이야기도 못하게 하고, 혹여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 한 내용을 그 학생들 통해서 다 듣습니다. 그렇게 저를 감시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교 갈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일찌감치 그랬는데, 여기 앉아계신 정준원 선생님, 우리 <흥사단> 지도를 해주셨던 선생님이 계십니다. 오늘 오셨습니다. 정준원 선생님 때문에 제가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어요. 하하하, 아마 한 말씀해 주실 겁니다. 저를 보다듬어 주신 선생님이십니다. 

모두 : (박수)

구법모 : 하하하. 서울 문리대 지리학과 나오셨고, 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셨습니다.

정진원 : 벌써 40여 년 전 일이네요. 성남고등학교에 선생으로 있었던, 선생이라고 그러죠. 구법모 이사의 선생님입니다. 지금 와선 그냥 생물학적으로 선생이죠. 먼저 태어난 거뿐이지, 지금은 뭐 생각하는 거나 멘탈이 그야말로 ‘구법모 이사가 내 선생’이다, 그런 얘기합니다. 

그때 고등학교 때 ‘흥사단 아카데미’라고 클럽 활동하는 게 있었는데, 그 지도 교사로 있으면서 구 이사를 처음 만나게 됐어요. 어느 날인가 그 수업에 들어가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춘원 이광수 얘기를 제가 했던 거 같아요. 그 ‘민족 개조론’ ,  그분이 쓰신 걸 얘기했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 얘기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손을 들고 얘기하더라고요. ‘아, 그래? 좀 남다른 구법모다’ 하하하. 하여튼 어릴 때서부터 조금 가치 지향적이고, 이념 지향적인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구법모가 아니었나 지금 와서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하여튼 제자를 통해서 이렇게 좋은 자리에 제가 올 수 있게 됐고, 또 훌륭한 분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아주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모두 : (박수)

구법모 : 그리고 이제 81년도에 제가 또 귀중한 한 분을 뵙니다. 학교는 가되 학교 강의실은 못 들어갔습니다. 매일이 바빴습니다. 시위 주도 하느라고. 그럴 때 저한테 이렇게 말씀해 주신 분입니다. “데모를 할 때는 운동화 끈을 잘 매라.”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평소에도 늘 드러나지 않게 저를 보살펴 주시고 학교도 졸업시켜주신 장본인이십니다. 제 4년간 성적에 A 학점 받은 것도 그 과목이 처음입니다. 우리 안삼환 교수님, 말씀 좀 해주세요. 교수님.

안삼환 : 예. 선생님들. 제가 잘못 온 거 같습니다. 이런 데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전 독일어 선생이올시다. 제가 연대에 있을 때 원주 분교에 출강한 적이 있는데 저 학생이 학점을 달라고 찾아왔어요. 

모두 : 하하하.

안삼환 : 제가 그때는 너무나 깐깐한 사람이고, 공부를 정상적으로 해도 학점을 잘 안 주는 선생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운동권에서 무슨 학생회장 같은 걸 하는 거 같았고, 데모한다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면서 ‘학점을 내놔라’ 그랬어요. 하하하. 그래서 내가 정말 이런 이야기하기 죄송한데, 저 자신도 사실 학교 다닐 때 데모를 하다 죽을 뻔 한 일이 있거든요.

그런 적도 있고, 또 그 당시 독일 갔다가 아주 발달된 민주적인 사회를 보고 한국에 돌아온 때인데, 보니까 참 엉망이에요. 그래서 제가 “학점을 주마. 그런데 그냥 줄 수는 없고, 뭐 좀 써 오너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여튼 사전을 찾든 해석을 해갖고 한 페이지만 해오너라.” 그렇게 해서 제가 이 학생이 앞으로 뭣이 될지 모르지만, 기왕이면 A학점을 줘야 되겠다. 뭔가 깨달았으면 좋겠다, 해서 그런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런 말씀을……하하하,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 하하하. 

구법모 : 안삼환 교수님은 우리 연대에 계시다가 서울대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 중에 독문과 친구가 있는데 졸업을 못 해요. 그래서 제가 “아니 너 왜 졸업을 못하니?” 물으니까 “아! 독문과 필수과목을 F 받아서 졸업은 못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바로 그냥 교수님한테 끌고 가서 “얘가 제 친굽니다. 졸업 좀 시켜 주십시오.” 하하하. “아, 그래? 그런데 말이야……” 안 교수님은 그런 분이셨지요. 

모두 : (박수)


민주화의 성지 원주에서 만난 무위당

민주화 묻자 ‘전두환 사랑하라’ 선문답


구법모 : 저는 스승님 복이 많았던 거 같습니다. 장 선생님은 말씀해 주실 때 큰 말씀을 해 주세요. 항상 “저 뜻이 뭘까? 뭘까?” 

제가 81년도부터 항상 제 마음에 가지고 있는 화두가 있어요.  “전두환을 사랑하라” 제가 민주화에 대해 묻자 해주신 말씀이에요. “아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을 합니까?”, “네가 전두환이었다면 어떻게 하겠니?” 그 말씀에 제가 무너졌습니다. 

아, 그리고 어느 날은 『선가귀감』을 저한테 주시면서 꼭 읽어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읽고 갔더니 "그럼, 이야기를 해봐라"선생님은 굉장히 겉으로는 이렇게 하신 거 같아도 되게 철저하십니다. 책을 주시면 정확하게 독후감을 말씀을 드려야 돼요. 

우리가 뭐든 언어화시키려고 하죠. 그럼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근본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거죠. 우리가 장 선생님에 대해서도 뭐 동학이다 뭐다 선생님을 절단합니다. 우리 스타일대로, 그건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떤 용어를 가지고 어떤 컨셉을 가지고 선생님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선생님일 수 없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원주엘 갔거든요. 얼마나 개구쟁이였겠어요. 얼마나 제가 못 됐냐 하면 아무 때나 찾아가요. 저녁에도 가요. 그때 어떤 분이 왜 그렇게 선생님 댁에 드나드느냐고 저를 혼내는 분도 계셨어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 들으면 신이 나니까 저녁에도 가고 아침에도 가고 그냥 항상 가는 겁니다. 봉산동 댁에.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불편해 하신 게 없어요. 아니 그게 느껴졌으면 저도 한참 민감할 때니까 자제를 했겠죠.

그런데 단 한 순간도 “왔니”, “앉아라” 늘, 제가 한겨레신문 인터뷰한 내용도 그거지만, “거울 앞에서 죽도록 뛰어 봐라.”,“니 얼굴이 제대로 보이니?”, “아니요”, “세상이 그렇다. 뛰면, 뛰는 상태에선 아무것도 안 보여.” 화두죠 화두!

그리고 한참 지났어요. “밑으로 기어라, 평생 기어야 한다.” 우리 선생님 그 말씀 많이 들었잖아요. 우리 저 남철이 형도, 우리 항상 하하하… 

그 긴다는 게 단순하게 기는 게 아니에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절절해져요. 저는. 지난번 한겨레 인터뷰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선생님을 감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풍우기능롱청향(風雨豈能籠淸香)'이란 것은 선생님께서 저한테 써주신 결혼식 할 때 써주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항상 생각을 합니다. 

'풍우와 향'… 비바람이 어찌 향을 막을 수 있나. 결론은 비바람에 우리 운동권은 너무 익숙해있지 않습니까. 즉 향이 없는 비바람… 그런데 『신심명』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우리가 ‘시비선악유무’에서 시에, 비에, 선에, 악에, 유에, 생에, 무에 취해있는 것도 편견입니다. 동시에 부정을 해야 되는 거지요. 시는 시야니라, 비는 비야니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선생님의 말씀이… 바라보는 관점이 틀리지요. 관조를 하지요. 거 관조할 수 있는 거는 뭐냐. 

선생님도 그런 말씀 많이 하셨어요.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어야 되는데” “그 있잖어” 그런 말씀 하세요. 그건 뭐냐? 한 찰나에도 선생님이 머뭄이 없으신 거 같다. 끊임없이 들여다보시고. 그게 생명이 갖고 있는 힘이라는 겁니다. 선생님은 평생을 그걸 하신 거예요. 

제가 유일하게 어디 가서나 우리 저 〈몽양 사업회〉 거기 가서도 우리 이부영님께서 저를 이사로다가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읊은 시가 바로 그겁니다. 서산대사의 시인데 ,


만고의 도성은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은 하루살이다 

밝은 달 베개 삼아 고요히 누었으니 

부는 솔바람 갖은 곡조 아뢰네


여기에 풍미는 부는 솔바람 이 역사를 보면 얼마나 시비극이 많습니까. 시비극이 아니라 사실은 극만 있는 거죠.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역사가 현대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충 선생님에 대한 개괄적인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또한 제가 갖고 있는 제 편견일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럼 이제 같이 이야기하면서 진행을 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굉장히 아름다운 자립니다. 여기 돈 있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돈이 있으면 선생님 말씀이 절대 안 들어옵니다. 권력이 있으면 절대 선생님 말씀이 안 들어옵니다. ‘왜?’ 그렇게 세상은 철저하게 엮여있습니다. 제 주변에 천억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가서 밥을 사고 커피를 삽니다. ‘왜?’ 생각하는 게 항상 1조래요. 1조, 1조만 생각한대요. 인생이 그런 거 같아요. 강박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 돈이라는 것도 선생님께서 그 말씀 해주셨어요. 저한테, “법모야 내가 6·25 때, 아무 것도 소용이 없더라. 물질이라는 건, 전쟁이 일어나니까 아무 의미 없더라.”  

제 얘기는 조금 미루고,  혹시 궁금하신 점 먼저 질문을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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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비판, 사회안전법에 걸려

평생 원주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어떤 분 : 자제분이……장 선생님 자제분이 있잖아요.

구법모 : 삼형제십니다.

어떤 분 : 근황이 어떠신지.

구법모 : 다들 잘 살고 계십니다.

모두 : 하하하.

구법모 : 아들이 셋입니다. 큰 아들이 사업하시고요. 둘째 아들도 직장 잘 다니시고, 셋째 아들은 학교 교수님이시고.

어떤 분 : 한 분과 좀 인연이 있는데.

구법모 : 네네.

어떤 분 : 그리고 또 하나 질문은 장 선생님이 ‘대북관’이나 ‘통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으셔요?

구법모 : 있으시죠.

어떤 분 : 요즘 상황에 비춰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구법모 : 원래 선생님께서는 ‘평화주의자’이십니다.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시기 때문에 뭐든지 다 인정을 해주시죠. 그게 맞지 않습니까? 각자 살아온 삶의 형태들이 다 다른데……

어떤 분 : 그 부분은 조금 제가 설명을 드릴까요. 선생님이 1962년도인가 3년도에 ‘중립국 강화론’을 말씀을 하셨죠. 이를테면 미국과 소련, 자유나 공산 진영이 아닌 대한민국도 중립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마 그때 아인슈타인하고도 그 서신을 교환하시면서 대한민국은 중립국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셨죠. 그때부터 이제 박정희 씨한테 미움을 받기 시작했고, ‘사회 안전법’에 걸렸었죠. 그래서 당신이 세상 밖을 다니시는데 편안하지 못했고요. ‘사회 안전법’ 다 아시죠? 어디 다니려면 원주에 기거하시는데 서울 가시려면 “서울 어디 구법모를 만나러 간다.” 이런 거까지 경찰서 정보과에다 신고를 하고 다녀야 했었죠.

요즘 문 대통령이 ‘중립국’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는 거 같은데, 선생님은 62년도인가 3년도에 그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대한민국이 살 수 있는 길은 중립국으로 가야 한다.” 그 얘기를 하셔서 선생님이 그때부터 핍박을 받기 시작한 걸로 제가 들었습니다.

구법모 : 저도 잘 모르지만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신학’으로 유명한 철학자인데, 현상을 보고 현상에 고집을 하는 순간 그건 제대로 못 본다는 거죠. 그 현상 또한 큰 프로세스라는 거죠.  우리 동양 사상하고 굉장히 잘 맞습니다.

……전 근본적으로 낙천주의자입니다. 선생님도 낙천주의자셨는데, 눈물을 많이 흘리셨죠. 그렇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우르면서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었어요. 

여기 많은 분들이 아시지만, 선생님을 가장 괴롭게 하셨던 분들… 병상에 오셨을 때 도리어 위로해 주셨잖습니까. 선생님을 좌익으로 몰았던 그런 사람이죠. 친구인데. 그래도 뭐 학교도 같이 가고 그런 분이 오셨는데, 선생님께서 “자네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지?” 평생 누구한테나 그랬던 분입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느냐” 이거는 바라보는 견지가 틀립니다. 우리 불교에 유식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 보면 프로이트 같은 경우 칠식(七識)을 봤다면, 노자는 팔식(八識)을 봤다고 그래요. 선생님께서 하신 그 말씀은 팔식 단계죠. 선생님은 암이 왔을 때도 “암도 한 생명체인데, 암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이 경지는 다르죠.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어떤 분 : 저……

구법모 : 예, 말씀 하세요.

어떤 분 : 무위당 선생님 책이, 성인들처럼 당대에는 책을 안 쓰시고, 후대에 책이 몇 권 나왔잖습니까?

구법모 : 네네.

어떤 분 : 그런데 얼마 전에 탄허선사의 시종 되시는 분이 『탄허 전집』에서 무위당 선생님을 거론하셨어요. 탄허대사는 <화엄경>을 번역하신 당대의 선지식 아닙니까? 무위당 선생님 역시 관련 책들을 보면 불교뿐만이 아니라 천도교, 그리고 성경에 대한 해석도 탁월하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리영희 선생님 책에도 언급된 걸 봤는데, 무위당 선생님은 어느 한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심지어는 서양 철학까지 사상적인 부분에 있어서 타고난 분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단지 드문드문 발견되는, 물론 남다른 인식에 있어서 굉장히 공감을 하게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지만, 어떻게 후대에 책 한 권이 없으니까. 당신의 사상 전체를 집대성한 이런 책이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전혀 그게 없고, 그래서 좀 아쉬움이 있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도 좀 알고 싶고요. 또 그걸 계승하신 분도 별로 없는 거 같더라고요. 사상적으로.

구법모 : 제가 아는 대로 부연 설명을 드리면요. 아까 얘기 나온 ‘중립국 강화론’ 을 주장하시면서 ‘사회 안전법’에 걸려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으셨잖아요. 그래서 어딜 가시기보다 찾아오는 후학들이 많고 그랬는데 그때 말씀해 주셨던 것들이죠. 당신이 무슨 글을 하나 쓰면 그 당시는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박정희 시대 때는 온 문장을 전체 안 보고 문구 하나로 걸어서 사람을 징역 보내고 죽이고 그랬었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주장을 글로 남길 수가 없었고요. 저희들이 지금 가장 어려운 부분이 뭐냐 하면 지금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어디서 무슨 책을 보니까 무위당 선생님 말씀이 나오고, 참 귀한 생각인데 싶어서 막 찾아 보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참고할 부분이… 리영희 선생님 글 봐도 나오고, 여기저기 글에서 다 튀어 나오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거를 찾아보려면. 당신이 두 가지 걱정을 하신 거예요. 자기 안위는 차치하고, 내가 글을 남기면 젊은 후학들이 이 글을 보고 또 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거 때문에 고의적으로 글을 안 남기시고, 그러시고 후학들이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뭐 장자에 나오는 한 구절, 노자에 나오는 한 구절, 선생님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셨던 거죠. 그래서 지금 선생님 그 책에도 당신의 작품으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전국에서 1년에 한 4천 명 가량이 개인 또는 단체로 원주 <무위당 기념관>에 찾아오시는데, 저희들이 제일 어려운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선생님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는 책 한 권이 별로 없고, 이를테면 이현주 목사님이 쓴 『노자 이야기』라든가 뭐 『좁쌀 한알』 이라든가 요런 짜깁기 형식으로 밖에 지금 나온 게 없습니다. 

지금 여기 보시면, 선생님한테 작품 받은 작품들입니다. 선생님 작품 소장하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지금 책으로, 서화집으로도 만들어졌는데요, 일본에도 있고 약 1,200점이 모아졌습니다. 아직도 ‘나한테도 있다’ 이렇게 해서 내오시는 분들이 지금도 1년에 한 70~80점, 100점씩 들어오거든요. 

그런 분 중에는 당시 선생님을 감시했던 정보과 경찰, 자기가 늘 지켜보기에도 너무나 훌륭한 분이니까 “저도 작품 하나만 써주세요.” 이렇게 해서 갖고 계신 분도 있고, 그때는 그걸 어디다 내놓지도 못했죠. 자기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이젠 세월이 지나고, 그때그때 작품 받은 분들을 통해서 선생님이 어떤 생각이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최정연 작가라고 선생님 평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 연말쯤이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아마 평전이 나오면 여러분들이 궁금해 했던 사항들을 조금 더 아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나라는 것은 찌꺼기일세,

맑은 물같이 그렇게


다들 아시겠지만, 선생님 작품은 깊으면서도 쉽습니다.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든지, ‘나라는 것은 찌꺼기일세, 맑은 물같이 그렇게’라든지, ‘한 사람이 한 입씩, 그것이 곧 삶이다’라든지 ‘어머니는 끝이 없네’라든지 뜻은 깊지만,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주선사에게 어떤 학승이 물었습니다. 깊을 현(玄)자 현중현(玄中玄), “깊은 가운데 또 깊음이 뭡니까?”라고 질문하죠. 그러니까 조주가 아무 소리 안 해요. 여러분 보세요. 깊을 현 하나면 됐지 거기다가 가운데 중, 또 깊을 현 자를 써요. 조주선사가 한참 있다가 뭐라고 하냐면 “하나, 둘, 셋, 넷” 그럽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바로 그러신 분이세요.

뭐, 노자 같은 경우도 원래는 아무것도 안 쓰고 조용히 산으로 변방을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변방을 지키는 병사한테 걸려서 쓴 글이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으로 시작하는 그거지 않습니까.

또, 달마대사도 38대죠. 그 당시 수양제가 얼마나 많은 불사를 했습니까. 수양제가 많은 스님들을 불러놓고 자기 자랑을 열심히 하면서 달마에게 진리를 좀 얘기해 달라고 청해요. 

그러니까 ‘무성(無聖)’이라고, 없을 무 자에 성스러울 성 자를 썼어요. 성스러운 게 없다. 수양제가 화가 나서 “도대체 말하는 너는 누구냐?”고 묻자 “나도 모르겠다.” 하하하. 저는 선생님께서 그거 다 보셨을 거라고 봐요. 그렇지 않고서는 선생님 작품에 그런 말씀들이 나올 수가 없어요. 다 보셨을 거예요. 

탄허스님 말씀하셨는데, 제가 88년도 12월 달에 변각성 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습니다. 주역하고 화엄경, 능엄경 너무 좋아서 능엄경 한 질을 선생님께 갖다 드렸더니 “이 귀한 걸 어떻게” 하시면서 즐거워하시더라고요. 그런 것을 보면 이미 다 그쪽에 회통을 하셨다고 봐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그래서 그렇게 큰 그런 것이고요. 그리고 선생님 말씀의 위대함이랄지 소중함은 어떤 사상, 어떤 학문 이것이 아니라 “각자가 살아서 한살림을 각자 해라”라고 하는 지금 우리 〈한살림〉이 있지 않습니까?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한살림〉 구조가 아니라, ‘에브리바디’가 다 한살림이다.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살지 말고 일원론적 세계관, 불교식으로 말하면 정등각(正等覺)해서 하나로서 삶을 살아라. 

선생님께서 저한테는 어떤 말씀을 해 주셨냐면, “이제 독재는 간다” 그때가 81년도인데, “니가 밥을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그러셨어요. 저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러다 84년도에 학생회장에 나서게 됐습니다. 그때는 학생회장 다 ‘국가보안법’입니다. 나가지 말아야 하는데, 안 나가면 제가 배신자 낙인이 찍힙니다. 배신자가 될 수는 없잖습니까. 한참 있다가 저를 부르시더니, “주교님과 다 얘기해 놨다. 제적으로만 얘기해 놨다. 감옥은 안 간다. 그렇게 알아라.” 그리고는 어느 날 또 부르시더니, 빨라 사북으로 가라고, 차가 들이닥칠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 하숙집에 있는 이상한 책들을 다 옮기고, 곧바로 사북 성당으로 갔어요. 아마 그때 치안본부로 끌려갔다면 제 승질에 아마 저도 지레 갈 수도 있었지요. 이렇게 선생님 보살핌을 제가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절절합니다. 

여기 저 조카도 있지만, 세 분의 아드님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저보고 ‘니가 진정한 아들이다’ 그럽니다. 자기들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깊은 얘기를 못 나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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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해 주시죠. 우리 저기 박성준 교수님,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한 말씀 좀 해주시죠.

박성준 : 아닙니다. 그냥 잘 듣고 있습니다.

구법모 : 네, 하하하. 선생님께서는 항상 자애로우십니다. 제가 말투가 이렇게 못 됐습니다. 도전적입니다.  이렇게 도발적으로 질문을 해도 항상 웃으시면서 ‘그래, 그래’ 그러셨지요. 아이고 회장님 오셨네요. 우리 저 한기호 회장님, 제가 전화를 여러 번 드렸는데.

누군가 : 제가 한 마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았고, 요즘 아시다시피 이제 장수시대니까 열심히 경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거는 이렇습니다. 제가 본래 와이프 덕택에 무위당 선생님 책을 한 세 권 정도 독파했습니다. 그때까지 무위당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고요. 그렇지만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제가 다른 방면에서 살았기 때문에 몰랐다, 물론 이렇게 자기 방어적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자연과학, 공학을 했습니다. 공학을 해서인지 바른 건 바르고 틀린 건 틀리다 하는 주관적인 잣대가 아주 강합니다. 옛날에 저 EBS ‘정의란 무엇인가’ 이런 것도 싫어합니다. 두루뭉술하니까요. 저는 이게 맞느냐 틀리냐는 게 제 주관입니다. 그러니까 X+Y가 5면 3+2다 이겁니다. 4+1도 좋다. 딱 나와 있는 거를 이야기해야지 다른 쓰잘데기 없는 거는 사기꾼이다. 와이프한테 물어 보십시오 제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두 : 하하하.

누군가 : 그런데 제가 볼 때 무위당 선생님은 정말 좋은 말씀 많이 하셨지만 조금 ‘희미하다’ 이겁니다. 제가 듣기에는 희미해요. 

구법모 : 선생님 말씀이 희미하다?

누군가 : 노자 말씀도 하시고, 장자 말씀도 하시고, 공자 말씀도 하시고, 맹자 말씀도 하시고, 성경 말씀도 하시고… 저도 원불교를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열심히 다녀서 불교 쪽은 좀 압니다만, 제가 봤을 때 요즘 젊은이들이 무위당 선생님을 알겠느냐, 잘 모를 거라고 봅니다. 우리 저 SK 이사까지 하셨다고 들었는데.

구법모 : 죄송합니다.

누군가 : 요즘 젊은이들은 무위당 선생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여기 모임에 계신 분들이 생각을 해보셔야 될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구법모 : 제가 맑스 공부를 했었는데 맑시스트 클라스의 개념이 뭡니까? 계급 이건 완전히 그냥 콘크리트 같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동양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누군가 : 제가 드리는 말씀은 이런 겁니다. 저 우리나라에 80% 이상은 좌니 우니 그런 거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자기 생활에 충실한 사람이 많아야 더 사회가 건전하다. 이렇게 보는 사람이거든요. 좌파니 우파니 관계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이 튼튼하게 움직인다. 이렇게 생각하고 저도 그렇게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무위당 선생님 책을 보면 아주 좋은데,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따라 갈 것인가. 특히 젊은 사람들 위해서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고민해 보시라는 거지요.

구법모 : 감사합니다.

모두 : (박수)

용을 : 저는 좀 잠깐 쉬어갈 겸, 저기 우리 따님들 계시나요? 우리 구 회장님 따님들?

구법모 : 네.

용을 : 저는 구 이사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후밴데요. 

저 형님께서는 늘상 저런 당당함과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기 연세 굉장히 많으신 선생님들도 있고, 아주 권력이 세셨던 분도 계신데, 항상 어디가도 당당하세요. 아주 거칠 게 없이 저러다가 다치는 게 아닌가… 하하하. 저 개인적으로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고요. 그다음에 우리 따님들 계시면 한번 앞으로 나오세요. 기왕에 왔으니까 우리 어른들한테 인사도 좀 드리고. 난 큰 딸 누구입니다. 둘째 딸 누구입니다. 정말 큰 스승님들이십니다. 그러니까 인사나 좀…

구법모 : 우리 저 큰 애구요. 둘째…

딸들 : 감사합니다.

모두 : (박수)

용을 : 바깥에서는 정말 당당하신데. 지금 댁에서는 우리 따님들한테 어떻게 하시나, 하하하.

딸들 : 하하하.

용을 : 저희 후배들한테는 굉장히 엄하거든요. 어떨 땐 막 때리기도 합니다. 하하하

모두 : 하하하

용을 : 우리 큰 따님 작은 따님 짧게… 

큰딸 : 아, 저는 큰딸 구현경입니다. 저희 아빠는 집에서도 동일하게 하하하, 동일하게 당당하시고, 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저희 어렸을 때는 되게 엄격하게 하셨어요.

용을 :그런 아빠가 괜찮으세요?

모두 : 하하하.

큰딸 : 부모님을 골라서 나오는 건 아니니까…

모두 : (폭소)

용을 : 작은 따님!

작은딸 : 안녕하세요? 저는 스물여섯 살 구화영입니다. 둘째딸이고요, 아빠는 음 … 아, 준비를 해올 걸… 하하하. 늘 같이 살아서 잘 모르겠어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

작은딸 : 저도 그냥 언니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고요. 저희가 좀 크고 그러니까 오픈마인드가 되셨어요. 대화도 많이 하려고 하시고, 음, 좋은 아빠세요.

모두 : 하하하.

용을 : 아빠가 <무위당 사람들> 또, 도산 안창호 선생님 <흥사단>, 또 몽양 여운형 선생님 이런 데 다 관계하고 계신 건 알고 계셨나요? 큰딸

큰딸 : 아니요.

용을 : 그럼 장일순 선생님이나 이런 이야기를 따님들한테 안 해 주세요?

큰딸 :그냥 저희 집에 걸려있던 작품들 몇 개가 여기 지금 걸려 있는데요. 가끔 말씀해 주셨는데, 저희가 아마 듣고 잊어버렸던 거 같아요. 솔직히 저희가 그렇게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서, 하하하.

모두 :하하하.

용을 : 아까 선생님께서 걱정하신 게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도 무위당 선생님의 뜻이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 말씀하신 건데, 그래서 구 이사님한테 청합니다. 이제 앞으로는 자제분들에게 좋은 얘기 많이 해주시고 계속 지속적으로 힘써 주시기를, 감사합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모두 : (박수)

구법모 : 저기 한기호 회장님 늦게 오셨는데 선생님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죠. 우리 다 같이 한 선생님에게……

한기호 : 아, 저는 시간 좀 맞춰서 오느라고 그랬는데 여기(청와대 옆 서촌)데모대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날 딱 붙들더라고. 보니까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가방부터 끌고 들어가는 거요. 그래 거기 가서 시간 좀 보내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모두 : 하하하.

한기호 :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 시간에라도 맞춰서 오느라고 노력한 거는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 하하하.

구법모 : 제가 이렇게 장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 여쭙는다는 거 자체가 사실 결례라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 비쳐진 상,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르신께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다른 또 질문 없으시면…

이부영 : 우리 김영주 선배도 아직 한 말씀 안 하셔서… 여러분들 그 장 선생님이요. 여러분들 장일순 선생 그러면 뭐 이렇게 난치고 글 쓰고 그런 모습 생각하시잖아요. 

참 편안해 보이시죠. 그런데 그 어른 청년 시절에 해방이 됐어요. 청년이라면 가장 시대적인 감각이 예민할 때 아닙니까. 그때 서울대 입학을 하고 나니까 국대안 파동(國大案波動, 군정기인 1946년 미 군정청 학무국이 일제시대의 여러 단과대학들을 통폐합하여 단일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안을 발표하자 1948년까지 2년간 통폐합 대상 학교들의 교수, 학생들이 격렬히 반대한 사건) 찬성, 반대 이런 게 막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깐 미군정에서 국립 서울대학으로 만들려던 것은 일제 때 경성대학 그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그런 거예요. 서울대를 남한 사회의 지배 엘리트를 양성해 내는 그런 기관으로, 이제 식민지를 벗어났으면 자유로운 지식인이 돼야 하는데, 또 거기에 국가 이데올로기를 집어넣으려 했던 거죠. 그래서 이것 때문에 좌우로 갈라져 찬반이 일었는데 사실은 좌우로 갈라서 생각할 일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얘기를 김 선배 얘기 안하세요? 

저는 상상해요. 몽양 여운형 같은 분들의 생각. 그리고 장 선생님은 제가 70년대, 80년대 원주 드나들면서 만나 뵈었을 때 그 어른은 극단적인 거를 추구하는 분이 아니거든요. 그 분은 어떠셨을까, 아직 신탁통치를 받고 있지만, 하나의 독립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던 몽양 여운형이나 김규식 선생 같은 분들도 그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셨을 거라고 봐요.

여러분들 몇 년 전에 정연주 씨가 KBS 사장 했을 때 ‘1945년 서울’ 그런 KBS 드라마가 나온 적 있었죠. 그때 그 지식인들 방황하던 모습 그게 어느 정도 좀 그려졌었죠.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어떤 방향으로 세울 것이냐. 그러나 결국 6·25 전쟁이 터지면서 우리 동족끼리 그렇게 싸우고 죽이고 이러면서 우리가 이 짓 하자고 독립 운동한 거냐, 이러면서 그 중간에서 고민하던 사람들이 좌우 양쪽에서 다 당하고 사라집니다. 저는 그때 낙향하셨다고 봐요. 그리고 정말 용하게 살아 남으셨어요. 

예? 그런 고민을 왜 몽양이나 장일순 선생이 화끈하게 얘기를 안 하느냐. 그분한테 누가 그런 얘길 해요. 그때는 이쪽으로 쓰러지고 저쪽으로 쓰러지고 다 죽게 돼 있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중간에서 고민하던 시기예요. 

제가 아까 윤이상 선생이나 박경리 선생이나 부산의 요산 김정한 선생이나 이런 분들 얘기드렸죠. 그분들이 꼭 우리 장일순 선생하고 비슷한 사고 체계예요. 

제가 이런 얘길 했어요.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열사나 유관순 열사 이런 분들이 자기 목숨 바쳐서 독립운동을 했잖아요. 이건 좀 만약입니다만, 만약에 해방이 됐는데 민족이 서로 갈라져서 서로 죽이고 이런다면 그 독립운동 했겠어요? 아니잖아요. 

결국 그 윤이상 선생님이나 박경리 선생님 뭐 요산 김정한 선생님 이런 분들 머릿속에는 3·8선이 없었던 거예요. 휴전선이 없었던 거예요. 이게 허깨비 같은 일이지. 왜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죽여야 되느냐. 

아마 장일순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 말을 직접 선생님께 물어보진 못했어요. 70년대부터 장준하 선생님, 저 천관우 선생님이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성명서 발표할 때 서명 받아오라고 해서 저는 그런 심부름하고 다녔어요. 신문기자는 제대로 안하고 그런 심부름이나 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 들어보면 그분들이 좌익이냐, 아니거든요. 38선이나 휴전선을 인정 안 하고 있는 거예요. 머릿속으로.

장일순 선생님 말씀도 그런 얘기죠. 우리 역사가 분명히 하나로 간다. 참고 가자, 인내해라. 그때 광주학살 난 다음에 펄펄 뛰고 못 견디고 할 때 다독거리시면서 참고 가라고, 맞아 죽지는 말라고, 뭐 이렇게 가르치신 거예요. 이제 저 같은 사람, 이렇게 증언하는 사람도 몇 명 남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말씀들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로도 남겨야 되겠고, 오늘 구법모 후배가 이런 좋은 자리를 만들어서 또 한 번 장일순 선생님을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고, 

한기호 선배도 잘 아시는데 말씀 안 하시려고 하는데, 하하하.

모두 :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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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 요새 굉장한 더위에 여기까지 오신 데는 그 발심해 주신 것만 해도 대단하십니다.  한 선배 얘기 좀 해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

한기호 : 없습니다. 많이 하셨으니까 이제 됐습니다. 여기 김영주 선생님도 계시고 그러니까.

이부영 : 그럼, 영주 형이…

모두 : (박수)

김영주 : 얘기 자꾸 하라니까 일어서긴 했는데.

모두 : 하하하.

김영주 : 우리에게 무위당은 어떤 사람이냐! 예를 들면 그림으로 따져 봐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보기에는… 또, 어떤 사람이 무위당 선생을 그렸다, 해도 그게 완전한 것이냐. 그게 절대 아녜요. 그거는 자기 의사를 표시해 놓은 거뿐이지, 완전하게 무위당 자체를 그린 것이다. 그건 나타날 수가 없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이런 자리에서 꼭 말씀드리고 싶은 실화가 있어요. 

무위당이 문리대 3학년 재학 중에 6·25가 나가지고 피난을 갔습니다. 서울에 살 수가 없으니까 고향 원주로 왔어요. 왔는데 피난들 가고 다 흐트러졌어요. 원래 살던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다른 데 옮겨가서 살아야 돼. 

무위당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주 덕이 높으셨어요. 옛날에 중농이라고 그럴까. 그러니 소작인들이 많았어. 그 소작인들이 전부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그때는 좌다 우다 사람들이 약 오르면 막 고발하고 이런 땝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기네 집에 모시려고 이렇게 얘기를 했어. 그게 그 집안 선조들이 굉장히 덕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요. 그 재밌는 게 그 집에는 거지가 밥을 먹으러 가면 밥상에다 상을 차려요. 여름에는 마루에, 겨울에는 사랑방에 차려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거기 사회에서 그 집엔 너무 많이 가면 안 된다고, 자기네들끼리 얘기해서 숫자를 줄이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런 집안에서 자랐어요. 그러니깐 원래 그 심성 자체가 보통사람하고 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여. 

그런데 그 양반 인생이 참! 저한테도 자주 그런 얘기를 하셨는데 6·25 때 여름, 요새지, 요새. 그러니까 덥잖아요. 그때는 지금하고 달라서 머리에 서캐도 있고, 뭐 가렵기도 하고 이럴 때요. 그래서 머리를 깎았단 말이오. 헌데 국군이 수복을 하게 돼서 들어온 거예요. 이북 군인 애들이 도망갈 거 아녜요. 딱 포로로 잡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고 숨어 다니니까 누가 인민군인지 잘 분간하기 어렵죠. 그래 “너 인민군 아니냐.” 누가 “나 인민군입니다.”하고  얘기할 리가 없잖아요. 그럼 잡아다 놓고 뭘 보느냐. 머리부터 봐요. 머리, 머리를 깎은 거는 인민군이야. 무위당이 머리를 깎고 있었단 말예요. 길거리에서 잡혔어요. 그때는 잡히면 즉결 처분한 시대요. 잡아다가 순서대로 세워놓고 딱딱 쏴서 죽이는 거여. 뭐, 조서 꾸미고 이런 시대가 아니여. 전쟁 시대니까. 머리 깎은 죄 때문에 붙들려갔어. 그리고 차례가 와서 저 논둑에 선 거요. 신호만 나면 ‘땅’ 쏘는 거지. 그런데 이거 지휘하는 군인이 죽는 마당이니까 한 마디씩을 시켜. 무위당은 그냥 성호만 그었대요. 그걸 보고 그 지휘관이 천주교 신자였는지, 스덥! 총 쏘는 사람덜 스톱시키고, “너 천주교 신자냐?” “예, 그렇습니다.” “증말이야?” “네.” “너, 이리 나와.” 거기서 제외가 됐어요. 그 양반이 죽고 사는 게 뭐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거여.

거기서 국군한테 넘겨져서 그냥 풀려난 게 아니라 저 보국대라고 그래요. 군인들 보급물자를 이렇게 짊어지고 전방에 날라주는 거 그걸 한 달 동안하고 살아서 나왔어요. 나와서 며칠을 잤다는 거 아녜요. 정신이 나가 가지고. 그 긴장을 하다가 풀어지니까 그냥 쓰러진 거야.

“내가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왔다 갔다 한 사람이다.죽고 사는 게 어떤 것이다.” 그게 몸에 뱄다고.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군고구마 파는 사람이 널판지 위에 쓴 

'군고구마 팝니다'라는 글씨를 

우리 시대 최고의 글씨로 여긴 사람


그분의 일화가 재미있는 게 많이 있어요. 영어를 잘했어요. 학생 때부터도 영어를 잘했어요. 그 영어를 아주 개인적으로 교수 받다시피 한 제자가 한기호 사장인데, 그 영어를 잘했단 말예요. 잘해서 아인슈타인한테 편지를 썼어. “완 월드 무브먼트…(one world movement…)” 아이슈타인이 ‘하나의 세계 운동’이라는 걸 할 땐데, 그것을 효시로 해서 우리 한국에서도 그것을 하겠다고, 그때는 영어로 편지하는 사람이 강원도 원주에서는 그 사람 한 분 밖에 없었어요. 하하하, 서울엔 많았겠지만, 그런 생각이, 속이 터있는 사람이여. 

또 원주에는 피난민들이 많아요. 원주라는 데가 지리적으로 그런 데니까. 부모들이 피난민 돼서 고생하는 건 둘째고, 제일 더 고생 많이 하는 게 애들 아닙니까? 학교 다녀야 할 아이들이 학교를 못 다니잖아요. 그 애들을 그냥 놔 둘 수가 없으니까 고등 공민학교라는 걸 만들어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어요. 인가 없는 중학교죠. 애들이 너무 불쌍하니까 거기서 학교 선생을 하는 거여. 

그걸 보고 아버지가 “학교 복학을 해서 졸업을 한 뒤에 뭘 하던지 해야 할 게 아니냐. 서울로 가서 복학해라.” 그랬대요. 그러니깐 무위당이 무릎을 딱 꿇었어요. “아부지! 저를 좀 봐 주세요” “뭘?” “지가 서울 가서 공부할 돈이면 여기 원주에서 저 가난한 집 애들 70명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걔들을 위해서래도 내가 선생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이놈의 자식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럴 분이 아니라고. “그래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래야지.” 그렇게 해서 거기서 애들을 길러 냈는데, 또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 해요. 고등학교 진학하는 서류를 냈더니 고등공민학교는 중학교 졸업할 자격이 없다 이거여. 안 되는 거여. 안 되니까 못 가잖아요. 이 무위당이 약이 오르니까 강원도에서 제일 좋은 학교가 춘천고등학교입니다. 춘고에다 학생을 보냈어. 보내 놓고는 학교에서 안 된다고 그러니까 그 학생들한테 영어 시험을 한 번 쳐 보라고, 너희 학교 졸업생보다도 훨씬 영어를 잘할 테니까. 시험을 쳐 봤어. 그 학생이 학생 영어 웅변대회 가서 1등한 사람이야. 그 장본인이 저 한기호씨! 하하하.

모두 : 하하하하하.

김영주 : 내가 본인이 없으면 이런 얘기 잘 안하는데… 그러니깐 춘고에서 깜짝 놀란 거요. 그래서 춘고에 입학했단 말여.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유지들한테 돈도 걷고 그래가지고 ‘대성 고등학교’라는 걸 인가를 냈어. 그 인가를 내러 갔는데, 스물여섯 살 때거든. 법인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의결되기를 장일순이 이사장을 하는 게 좋겠다고, 그래서 스물여섯 살 먹은 사람이 이사장이 돼서 학교 인가 신청을 했어. 그때 공무원이 아, 스물여섯 살짜리가 오니까, 그러니까 이게 이 아녀. 애가 왔다. 학교를 만든다고, 그러니까 얼마나 괄세가 심했겠어요. 두 번째 갈 때는 도포를 입고 고무신 신고 그러고 들어갔대요. 내가 어린 사람이 아니고 어른이라고, 하하하. 무위당이 그 얘기를 해요. 그렇게 인가를 내서 스물여덟 살부터 정식으로 학교를, 아직도 그 학교가 있어요. 졸업생이 한 4만 명 돼요.  

그런데 박정희가 정권을 쥔 다음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아요. ‘평화통일 주창자’ 죄목이 그거예요. ‘평화통일 주창자’. 군법회의에 넘어가서 8년 선고 받았어. 강원도에서 딱 한 사람, 그 무위당이 재판 받으러 가기 전에는 한 사람도 재판 받은 사람이 강원도에는 없었어요. 

그때 박정희 정권 때 수사 담당했던 사람이 거기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다고, 그담부터 호통을 치니까 현미경을 놓고 강원도 사람을 조사를 했더니, 청년인데 평화통일을 주창한 사람이 있어. 이 눔이 보통 눔이 아니여. 그 당시에는 생각이 좌다 우다 그런 걸 떠나서 정말 그 민족적인 그런 기준에서 생각한 거야. 젊은 사람이죠. 그 양반이 그런 사람이 하나 발견이 됐어. 그 사람 하나가 대표로 뽑혀가지고 강원도에서 군법회를 한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어. 그것도 한 번에 못 가고 현미경으로 찾는 바람에 갔어. 가서 8년을 언도를 받았어. 무위당은 항고를 안 했어요. 나 다시 재판 해달라고 하질 않았어요. 왜 안 했느냐. 다른 사람들이 “ 아, 이 사람이 항고를 해야지 5년이 되든 6년이 되든 할 거 아니냐” 무위당은 “이게 재판이냐고, 애들 장난하는 거지. 맘대로 하라고 차라리 그게 낫지, 어디 가서 또 재판 받고 있냐고, 난 안 한다고.” 

고스란히 8년이 확정돼 가지고 춘천 형무소에 갔어요. 그 형무소에 가서도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그때 부인이 옥바라지 하느라고 여기 평화시장에서 시다라는 게 있어요. 일본 말 시다, 조수란 말여. 미싱으로 이렇게 해주면, 단추 달고 실밥 뜯고, 시다해서 돈을 받아가지고 남편 춘천 감옥살이 하는데 가서 뒷바라지 한 거여. 이 남편이라는 사람이 보통 사람입니까! 거기 가만있으니깐 안 되잖아. 뭘 공부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영어로 돼 있는 책을 좀 사서 나한테 좀 넣어달라고. 그 영어로 된 책이라는 게 그때는 한국에서는 구하기도 어려운 거예요. 진보적인 학문의 책이여. 한국에서 바로 없어. 그러면 서점에서 외국에다가 수입 신청해서 들어오면 그것이 이제 본인한테 들어가는 거죠. 우리나라 옥살이한 분들 되게 많으시겠지만, 감옥에 있는 사람 책 그냥 들어갑니까? 그거 조사 엄중하게 하잖습니까. 성경이나 불경 아니면 다 조사에 들어가는데. 춘천 형무소에서 영어로 된 책을 놓고 좋다 나쁘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사람이 없거든요. 하하하. 

모두 : 하하하하하.

김영주 : 자기네들끼리 간부회의를 열어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 설마하니 미국에서 발행된 영문으로 된 책인데 빨갱이야 야 그런 책이겠느냐. 그게 결정이여. 패스가 됐다고. 그러니까 장일순 선생한테 들어가는 영문 책은 다 패스야. 

이거는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3년 동안 마누라가 보내주는 자기가 이렇게 부탁한 책을 집어 넣어가지고 공부했어. 나중에 원주에 지학순 주교 되는 분이 주교가 돼서 우리 인제 어디서 만났어. 그 얘기를 하는데, 네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서로 탐색해 봤을 거 아녜요. 지 주교는 로마에 가서 3년 동안 공부해 왔어. 그때는 이제 가장 진보적인 그런 책을 많이 읽고 온 사람이야. 공부를 했으니까, 박사학위를 따고 왔으니까. 

그런데 이 양반이 얘기를 해보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진취적인 지식에 대해서 무위당이 아무 막힘이 없이 대답을 하는 거여. “어떻게 된 거냐?” 그러니까 무위당이 웃기는 사람이죠. 껄껄껄 웃으면서 “주교님, 내가 춘천 국립대학에 가서 3년 동안 공부하고 왔잖습니까!” 하하하.

모두 : (폭소)

김영주 : 지 주교라는 사람은 신부니까 그걸 못 알아들었어. 무슨 소린지. 그게 아니고 형무소에 가서 3년 있는 동안에 그 책 읽었다고 그러니깐 지 주교가 자기 책장에서 자기가 공부한 영어 원서의 진취적인 그 책을 꺼내들면서 “이거 봤냐?” “예” “그래? 그럼 이건?” “예.” 자기가 본 거를 다 봤던 거여. 거기서 지 주교가 손 든 거여. 너는 나하고 같이 일할 만하다. 그래 둘이 거기서 합작이 돼서 악수가 돼 가지고, 그럼 넌 이제 정치하고는 떠나라. 모든 일을 나와 같이 종교라는 우산 속에서 일을 하자. 그 사회 개발을 위해서 그런 방향으로 우리가 일을 하면 좋겠다. 거기서 서로 약속을 했어요. 그래 지 주교가 법적으로 보장해 주고 자금도 필요하면 다 대주고, 일은 무위당이 열심히 가르치는 걸 다 했죠. 그래 역사라는 게 다 그렇게 돼서 이뤄져 가는 거 같아요.

그런데 무위당이 항상 얘기하는 게 있어요. 

죽음과 삶을 왔다 갔다 한 그런 경험 때문인지 항상, “그렇게 좁게 생각하면 안 된다. 더 넓게 세상을 크게 보고 봐야 된다.” 저한테 맨날 주문을 했어요. 제가 아주 귀에 다대기가 앉도록 들었어요. 항상 가끔 그런 생각이 나요. 아이고, 또 이거 무위당이 봤으면 이게 잔소리 할 건데, 하하하, 죄송합니다.

모두 :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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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모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 김영주 회장님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하고 경기고등학교 동기십니다. 장 선생님하고 지 주교님하고 인연이 돼 가지고 평생…… 오늘 모시게 돼서 감사드립니다. 

아까 학교 말씀하셨는데 저희 때는 학생운동 할 때 학교를 졸업한다는 게 수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제적당하면 그걸로 끝나는 걸로 알았죠. 그런데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학교 졸업장은 꼭 있어야 된다. 저는 왜 그렇게 간절하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 그랬더니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는 거예요. “내가 졸업장이 없다. 졸업장이… 무조건 이건 내 말을 들어라. 무조건 들어라. 들어라…” 그때 저는 객기로, 졸업장에 신경을 안 쓰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 덕택에 제가 대기업에 가서도 일을 할 수 있고, 미국도 갔다 올 수 있었고, 하여튼 제가 막힐 때마다 족족 선생님께서 전부 다 이렇게 들어 주셨습니다. 

김영주 : 한마디만 더, 사모님 얘기를 해드릴게요. 

모두 : 와!

김영주 : 무위당이 장가를 드셨는데 색시가 서울 색시에요. 경기여고 나오고 서울사범대학 나왔습니다. 그런데 잘 아는 사람이 무위당 선생을 소개했어요. 뭐라고 소개를 했느냐. 원주에 아주 훌륭한 총각이 있는데 사립학교 이사장이다. 너는 사범학교 나왔으니까 그 학교 선생하고 남편은 이사장 하면 이게 짝으로 좋지 않겠느냐. 그래서 선을 봤어요. 둘이 만나서 얘기를 하다가 나와서 덕수궁 돌담 있죠. 이렇게 둘이 걸으면서 얘기를 했다는 거요. 그런데 아, 색시 되는 사람이 항상 무위당 오른쪽에만 서서 가는 거여. 무위당은 오른 쪽 귀가 좀 먹었다고 그러니까 잘 안 들린 거여. 조그맣게 들려, 왼쪽만. 그래서 “당신 내 왼쪽에 서서가면 안 되겠느냐?” 그랬다고 “왜, 그러시냐”고 그러니까 “내가 오른쪽 귀가 조금 안 들려서 그런다”고, 첫날 처음 만났는데 신랑감한테 내 오른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 애기를 듣고 색시가 뿅 간 거여. 그건 “진실한 사람이다. 내가 평생 의지해도 될 사람이다.” 이거지. 그래 시집을 왔어요. 원주로 왔는데 그 댁이 봉산동이라고 약간 농촌 지대 있습니다. 원주 시내에서 떨어진 촌에 있어요. 그 동네 여자들이 서울서 대학 나온 색시가 왔다는데, 밥은 어떻게 해먹는지 봐야 되겠다고 저녁 밥 할 시간이 되면 동네 아줌마들이 부엌 바깥에서 장사진을 치고 보는 거여. 이렇게, 하하하.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거기까지는 좋은데 남편이 말이지 학교 이사장이면 뭐부터 해야 되겠어요. 애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누라 취직을 시켜야 될 거 아녜요. 그런데 하다하다 못 시키고 감옥소에 갔어. 감옥살이 3년 동안 뒷바라지만 했단 말예요. 그리고 나왔어. 그랬더니 다시 학교에서 이사장을 시켰어. 그래 이사장으로 복직한 거여. 그리고 인자 복직했다고. 복직해서 며칠 지나는 동안에 무슨 사건이 났냐. 6·3 사태가 벌어졌어요. 서울에는 문리과 대학을 비롯해서 학생들이 대학에서 전부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데모를 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원주만 고등학교 학생들이 데모를 했어. 그러니까 박정희가 뭐라고 했냐. 서울에서 대학생 나온 것만 해도 골이 아프고 감당하기가 힘든데 원주에서 고등학생들이 나오면 그 불꽃이 서울로 번질 거 아니냐. 서울서 고등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면 정권유지 못한다. 이번에 아주 박살을 내자. 그래서 학생들을 몽땅 잡어다가 육십 몇 명을 유치장에 쳐 넣어 버렸잖아요. 그리고 그 배후자를 조사를 했어요. 암만 배후자를 조사를 해도 하룻밤 동안에 조사가 안 돼. 없다. 그랬더니 배후자 없는 일이 어딨냐. 서울서 정보기관에서 그래서 서류를 다 가져오라고, 그래 급송을 해가지고 서울서 조사를 했어요. 뚜껑 첫 페이지 열자마자 이게 배후자가 아니냐 말여. 반공법 위반으로 8년 언도 받은 놈이 여기 있는데 이게 배후가 아니고 어떤 놈이 배후자냐고 말이야. 즉시 조치하라고. 그래가지고 의자에도 별로 며칠 앉아 보지도 못하고… 하하하. 자진해서 내가 사표 내겠다고, 애들 다 내 달라고, 풀어 달라고 그 교섭을 해서 당신이 이사장 그만두고 애들은 주동자 세 사람만 빼놓고 다 석방하고 이렇게 수습을 했어요. 

그렇게 이사장하다 쫒겨 났으니까 이제 다음 사람이 마누라 취직을 좀 시켜줘야 될 거 아녜요. 이게 안 되는 거여. 취직을 시키려면 경찰서 신원 조회를 하는데, 신원 조회 딱 했더니 경찰서에서 남편이 반공법 위반으로 8년 선고 받았는데 무슨 눔의 취직이냐 이거에요. 연좌제에 걸려가지고 안 되는 거여. 그 사정을 알고 그때 강원도 교육감 하던 사람이 있어요. 내가 취직 시켜준다. 자기 교육감이니까 강원도 교육 책임 아녜요. 큰소리 빵빵 쳤어. 그 소리에 부인이 하도 좋아서 시집 올 때 입고온 옷하고 구두, 서울서 유명한 구둣방에서 맞춘 구둔데 그걸 신고 인제 교육감한테 인사를 갔어. 그러니깐 교육감이 걱정 말라고, 춘천여고에다가 배치할 테니까. 그렇게 춘천여고에 선생으로 취직을 하게 됐어요. 그러고 나왔는데 세 시간도 안 돼서 연락이 왔어. 안 된다고. 그 교육감 큰소리 빵빵 쳤는데 세 시간도 못 갔어. 왜 안 되냐고 그러니까 안 되는 이유는 정식으로 말할 수 없고, 하여튼 안 된다고. 그래서 평생을 선생 노릇 못 했어요. 원주에 얘기가 있습니다. “서울사대 나오면 뭘 해? 선생도 못 하는 걸.” 하하하

모두 : 하하하.

김영주 : 그래 서울사대 나와도 원주서는 선생은 못 해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모두 : 하하하. (박수)

구법모 : 사모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선생님에 대해서. “참 인생을 바보처럼 사신 분이라고. 바보처럼 사셨어요. 바보.” 항상 그 말씀을 하셨어요. 그럼, 또 질문이 없으시면 이쯤에서 파할까요? 어떻게……

누군가 : 그 교육감이 누구예요?

김영주 : 아, 그거는 그분의 명예를 위해서 안 되겠습니다. 하하하.

구법모 : 오늘 더운 날인데 많이 와주셔서 고맙고요. 특히 선생님께서 쓰신 ‘無’자가 있습니다. 오늘의 화두는 ‘무’자로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위당 선생은 내가 아닌 "눈물겨운 아픔을 선생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런 어른이 살다간 이 세상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기사 제목인 "목에 힘빼 그래야 살아"는 그가 어느 을축년 초가을에 남긴 글씨이다. 


구법모 이사는? 

연세대 영문과 졸업. 에스케이와 케이티 상무 등을 지냈으며, 이한열기념사업회, 장준하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등의 이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월간 <퀘스천>에 실린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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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나 자신을 믿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페이밍(중국의 현대문학가)

역사의 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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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길을 잘 닦인 길이 아니라 거친 논밭과 같다.

어떤 때는 먼지 가득한 길을 걸어야 하고, 어떤 때는 진흙탕 길을 걸어야 하며, 또 어떤 때는 숲이 우거진 길을 걸어야 한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러시아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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