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귀찮아 혼자 살고 싶다는 시대에 왜 굳이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는가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책 제목을 대하는 순간 상당수는 구체제의 봉건주의나 가족주의, 공동체주의의 잔재를 훌훌 털고 홀로 마음껏 살아도 괜찮다는 책을 더 연상했을 수 있다. 혼삶이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에 마을공동체살이라니! ‘더구나 4차 혁명, 가상현실. 혼자서도 모든 걸 잘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이 시대에 다시 인간들끼리 꾸역꾸역 모여 살라고?’라고 반문하는게 당연하다. 더구나 명절을 전후에서는 여성들의 명절증후군 특집을 단골로 내보내며, 모이는건 재앙이라는듯이 쓰는 <한겨레>의 기자가 말이다.
그렇다. 지금은 바야흐로 혼삶의 시대다. 홀가분한 혼삶을 장려하고 부추기는 건 쌍끌이 정도가 아니다. 온갖 끌개란 끌개는 홀가분하게 홀로 살라고 촉구한다. 가부장적 독재와 남성우월주의, 자유주의, 낭만, 패미니스트-이 모든 것이 혼삶을 촉진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보다 더욱 강한 것은 자본이다. 자본이야말로 혼삶을 부추기는데 가장 앞장 선다. 둘 혹은 셋이 모이는 것을 차단하면, 홀로 상대하는 것은 오직 모바일과 자본의 광고여서 홀로야말로 자본이 노예로서 요구하는 최적의 조건이기에 그렇다.
자본이 이끄는 인터넷과 매스컴, 그리고 에스엔에스가 혼삶의 자유를 마음껏 자랑하며 매일 멋진 컷을 올린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방황하는 중이다. 모순 속에 갇혀 방황하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다. 정반대의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정신 상태가 그렇다. 인간은 고립을 견딜 수 없는 존재다. 심심하고 외로운 걸 무엇보다 못 참는다.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홀로 두거나, 심지어는 좁은 원룸에 두고 나가곤 하는데, 만약 인간을 그런 식으로 가둬두고, 아무런 자극도 없이 온종일 내버려둔다면 곧 미치고 말 것이다.
종일 SNS에 매달린 이들을 보자.그러고도 틈만 나면 동창회와 취미 동아리를 갖고, 교회와 성당, 절에 나가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관계가 그렇게 늘어나는데도, ‘나는 그대가 내 곁에 있어도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이해타산을 위해 모여 으스대고 뽐내고 힘자랑의 줄 세우는 곳들을 아무리 다녀도 관계의 목마름은 더해 갈 뿐이다. 배고픈 것도 참기 어렵지만 배 아픈 것은 더욱더 참지 못하는 게 한국인 아닌가.
그런데도 늘 누군가와 만남을 고대하며 만나고, 합치고, 뭉치려고 애쓴다. 그나마 삶에서 희열을 주는 게 합일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오르가슴에 이르는 섹스도 그렇지만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타인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 온전히 공감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줄 때도, 낙조와 같은 풍경을 같은 감동으로 바라볼 때도, 소리 내어 함께 기도할 때도, 월드컵 축구를 보며 응원할 때도, 게임이나 노래, 연주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때도 합일이 주는 환희가 있다.
인간은 원하던 걸 손에 쥐었다고 만족하는 법이 없다. 애타게 갈구하던 것을 일단 손에 쥐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토록 누군가를 그리워해놓고 상대방이 내 사람이 되면 지겨워 미치겠다고 돌변한다. 쟁취를 위해 투쟁하던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그 하늘의 별을 정작 따고 나면 이 직장이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할지 몰랐다며, 먹고사니즘에서 벗어날 날만을 꿈꾼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만두지도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로또나 한 방 맞아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살고 싶다는 공상 속을 유영한다. 가끔 직장 일에 바쁜 지인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며칠만이라도 쉬고 싶다’면서 종교전문기자인 내게 조용한 산사나 수도원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작 별 자극이 없는 상태를 한 나절도 견뎌내지 못하고 좌불안석한다는 것을. 세속에선 사람 때문에 괴롭고 산속엔 아무도 없어서 괴로워하는 변덕쟁이 인간을 누가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소속되고 합일되어 안정감을 주는 공동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라며 쫓다가, 그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압살하고 피곤하게 하는 주범이라며 반공동체적으로 돌변하는 모순 덩어리를 말이다. 몸은 하나인데 얼굴은 둘이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샴쌍둥이가 모순된 인간의 자화상이다.
이토록 방황하는 인간에게 자본은 홀가분한 삶이 주는 화려한 장미빛을 끊임없에 제시한다. 자본이 이토록 결정타를 먹이기 전에 인간은 이미 자본에 의해 망가질 때로 망가져 맞서 싸울 힘을 잃었다. 무슨 말인가하면 자본주의로 인해 어려서부터 ‘엄마와 가족과 대가족과 이웃’이라는 공동체를 빼앗긴 세대는 안전 기지를 상실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다. 안전기지(공동체)를 상실한 트라우마, 즉 오직 자신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디엔에이에 입력된 포유류의 각본을 자본주의가 바꿔버렸다. 아기보다 일, 아기보다 모바일, 아기보다 쇼핑, 아기보다 취미, 아기보다 홀가분한 자유를 추구하도록 말이다. 아기는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간을 쉽게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인간 귀차니즘’이 생기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됐다. 여기에서 다시 유럽의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를 지배할 때 쓰던 ‘흩어져라, 나뉘어져라’는 전략 그대로 자본이 각자 홀로 살도록 결정타를 먹이고 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가져온 공동체성 파괴로 안전기지를 상실하고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져,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낸 이들이 혼삶의 벽을 넘어 이웃들과 함께 마을살이를 하는 사람들이거나 마을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스위스 알프스에 놀러간 은혜공동체 사람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133쪽
혼삶의 시대에 왜 함께 살고, 마을공동체에서 어울리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과 함께 하는 삶을 떠나 행복을 찾다는 것은 모래로 밥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국정부는 체육·시민사회장관을 ‘외로움’ 담당 장관으로 겸직 임명했다. 영국 내 ‘조콕스 고독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위원회는 ‘고독이 개인적 불행에서 사회적 전염병으로 확산됐다’면서 고독을 질병으로 규정했다.
외로운 게 인간을 위협하는 것과 달리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게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하버드대학이 1938년부터 무려 79년간 724명의 삶을 추적 연구해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건강과 행복이 인간관계의 친밀함에 달려 있임을 밝혀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삶을 가장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이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최근 연구 책임자였던 윌딩거 박사는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다”고 밝혔다. 그는 “외로움은 흡연이나 알콜 중독만큼 강력하다”고 강조했다.
친밀한 관계나 결혼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영국 러프버러대학의 에프 호헤르보르스트 생물심리학교수팀의 연구도 있다. 이 연구에서 독신은 치매 발생율이 35~44퍼센트로 높았고,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은 사람은 치매 발생율이 60퍼센트 가량이나 낮았다.
평생 홀로 외딴 집이나 암자에서 수행해온 법정 스님도 이런 말을 했다. “홀로 사는 사람도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