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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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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에겐 처마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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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jpg» 종교적 이유로 난민 인정을 신청한 이란 국적 학생의 학교 친구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서울 양천구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공정한 심사를 통한 난민 지위 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오늘같이 갑자기 비가 쏟아져 비를 피할 곳을 찾을 때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 외할머니는 애 넷을 데리고 6.25동란 전 남으로 피난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는 안가르치고 공산주의 노래와 행진만 시키니 미래가 안보여 결국 고향을 등지고 남하를 결심했다 합니다. 분단선을 넘기까지 지고 오던 것을 다 빼앗겼지만, 밥줄이었던 재봉틀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켰다지요. 산 넘고 물 건너 서울에 당도해서 다섯 식구 몸 뉘일 방 한 칸은 구했는데, 일감을 구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 집주인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애 넷을 내쫓았답니다. 방세를 안냈다고. 엄마는 일감 구하러 나가고 없는데 어디로 가야하나...주인집 처마 밑에 네 명이 주루니 서서 서러워 울며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를 기다리는데, 이웃 집 아주머니가 애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따끈한 수제비를 끓여 먹였답니다.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 처마밑과 수제비를 잊지 못하셨지요.

 

독일의 건물들에는 대부분 처마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붕이 벽 너머로 내려오지 않으니까요. 벽을 따라 빙 둘러가며 지붕이 내려와 있어 길 가던 사람에게도 처마를 제공하는 한옥과는 아주 다릅니다. 갑작스레 비를 피해야 할 땐, 에누리도 없고 덤도 없는 독일놈들은 집도 처마 없이 짓는다고 공연히 투덜대곤 하지요.

새로 지은 쇼핑 몰의 입구에는 돌출된 지붕이 있어서 오늘은 거기서 비가 잦아들길 기다릴 수 있어서 건물주가 고맙습니다. 그리고 처마밑에서 울고 서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또 떠오릅니다.


처마-.jpg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예멘의 난민가족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제주민이 이웃의 반대로 결국 그들을 내보낼 수 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수제비를 먹인 이웃집에 집주인이 와서 방세도 못내는 이 따라지들을 왜 끌어들이냐고 훼방놓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낯선 만큼 예멘인들에게도 지구의 동쪽 끝 나라는 낯설디 낯선 나라겠지요. 아무도 소풍나가듯 고향을 등지지는 않습니다. 몰이해와 왜곡과 배척은 보통 두려움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가 이루어 놓은 그 무엇이 뺏길까봐 불안했던 마음은 게 낯설고, ‘보다 약하다고 보여지는 사람들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기 안에 있는 측은심이나 연민을 무시하고 거슬러야하기 때문에 더 잔인하고 거칩니다. 두려움은 결국, 크고 열려있고 부드러운 우리 자신을 작게 만들어 차갑고 딱딱한 성으로 가두어버리기에 그런 마음을 보는 것은 참 아픕니다. 두려움은 결국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을 자초하지요. 유럽의 난민 문제는 바로 그 두려움을 방관했거나 혹은 이용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처마가 있고, 열린 마당이 있으면 더할 나위없는 넉넉한 마음의 집을 지으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집들이 있는 사회에 산다면, 세상은 덜 서럽고 조금은 더 푸근하지 않을까요.


누구에나 장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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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jpg


소에게는 뿔을 주고 이빨은 뺏고

호랑이에게는 이빨 주고 뿔을 뺐고


날개 달린 새는 두 개의 다리만 주고

날 수 없는 짐승들은 네 개의 다리를 주고


예쁘고 아름다운 꽃은 열매가 변변찮고,

열매가 귀한 것은 꽃이 별로입니다.

 

세상은 공평합니다.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이 있고,


때론 단점이 장점이 되고,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자신만 손해 볼뿐,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감사라는 삶의 태도에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외적인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행복을 맛보시려면

먼저 감사의 조건을 찾으십시오.

 

인생에 누구를 만났느냐는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파리의 뒤를 쫓으면

변소 주위만 돌아다닐 것이고,


꿀벌의 뒤를 쫓으면

꽃밭을 함께 노닐게 될 것입니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지만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귀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내 주변에 어떤 인연이 될 사람이 있으신가요.

망상적 게임, 망상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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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티브이의 전쟁 드라마에 심취하면

전쟁을 놀이처럼 생각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의 몸뚱이가 갈가리 찢기고

피 냄새, 사람 썩는 냄새가 가득한 전쟁터는 모른 채

단추 하나로 학살극을 벌이는 게임을 즐기는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심리학자 펄스는 사람이 현장을 체험하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발생해서 망상 속에서 살게 된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 체험에 기반을 두지 않은

마치 신앙극과 같은 신앙생활은 망상적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실에 걸맞지 않는 역할극,

자신이 진정한 신앙인인 듯한 자기착각 속에 빠진 망상적 신앙인이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세상을 몸으로 겪으시기 위해서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망상적 신앙인들은 구름 위에서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나 하고 다닙니다.

내가 내 안의 빛 모르고 믿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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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골고루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본성이 많이 가려져 있습니다.

못 한다, 모자르다, 못됐다 등 부정적인 개념으로 가려져 있어요.

우리는 이미 훌륭한 사람인데 모를 뿐입니다. 

그 훌륭한 존재가 나오게끔 격려해야 합니다.

본성을 믿고 본성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제한을 만드는 모든 개념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도 남들도 좋게 보고 훌륭한 존재라고 믿어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남들의 안 좋은 면을 보고 따집니다.

못 한다고 생각하면 못 하는 것이고, 못됐다고 생각하면 못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존재라고 믿기만 해도 내재의 좋은 성품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지혜롭고 자비롭고 유능한 존재입니다. 

절대 잊지 마세요.

늘상 스스로에게 알려주세요.

그리고 모든 존재가 똑같이 훌륭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세요. 

다른 사람의 본성을 존중하고 일시적인 허물은 봐주세요.

거짓에 더 이상 속지 마세요. 

그릇된 신념을 내려놓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세요. 

한순간도 마음에 자리잡게 두지 마세요.

'할 수 있다, 훌륭한 존재다, 나도 모든 사람도.'

우리는 물질이 아닌 영성의 존재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빛나게 하세요. 

남들도 그리하게 도와주시고요.

“일등하면 뭐하냐” 화두로 새 세상 여는 길 따라 꼿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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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jpg»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에 내걸린 대형 함석헌 사진 앞에 선 문대골 목사.


   ‘함석헌의 영적 아들’ 문대골 목사


하루도 허투루 공치는 날 없던 스승

함석헌 일생 <그 32,105일> 책 내

 

‘무정부주의자 함석헌의 구속’

말년 휴가 때 신문 기사에 가슴 쿵쾅

제대하고 곧바로 자택 찾아가 인연 

 

6·25 때 부모 잃고 고아 떠돌다 군 입대

길거리 장사하며 야간대 청강

연좌제로 취직길 막혀 ‘함석헌농장’으로

 

<씨알의소리> 김수환 추기경 글 게재

중정 끌려가 밤새 구타 당하고 기절

 

가까운 사람들 떠나자 ‘나라도…’

“부자 될 수도, 높아질 수도 없는” 삶 묵묵히



육신의 부모만이 부모가 아니다. 육신의 부모를 잃고 영적인 부모를 얻은 이들도 있다. 문대골(77) 목사에게 함석헌이 그렇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문 목사가 ‘나의 바푸bapu 함석헌의 일대기’란 부제를 달아 <그 32,105일>(들소리 펴냄)이란 책을 냈다. 바푸란 인도인들이 영적 아버지인 간디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32,105’일은 함석헌이 살다 간 날의 수다. 함석헌은 하루 하루 어느 날도 허투루 산 날이 없다고 여겼기에 그렇게 제목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 선생님은 공치는 날이 없었다’고 했다.


함석헌은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는데, 문 목사야 말로 고난의 삶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전남 진도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6·25 때 부모가 사망해 이미 상경했던 큰형을 제외하고 그를 비롯한 5남매는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 두 여동생도 세상을 떴다. 소년 문대골은 고향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아로 중앙감화원과 목포와 강진, 군산의 고아원을 떠돌다가 17살에 나이를 속이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군대는 훈련은 고되어도 모처럼 안정된 삶을 제공했다. 그는 군대에서 전국육해공군합동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처음으로 존재감을 선보였다.


q2.jpg» 함석헌, 한승헌 변호사(가운데)와 함께한 문대골 목사(맨왼쪽). 문대골 목사 제공


1일1식 하며 기도하듯 노동


그는 제대를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와 서울역에서 모든 신문들 1면에 한 노인의 사진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함석헌의 구속’이라는 기사를 보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까지 10여 개를 사서 군으로 돌아간 그는 함석헌에 대한 기사를 제대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제대하는 길로 서울 용산 원효로에 있는 함석헌의 자택을 찾았다. 그는 함석헌이 범접치 못할 위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촌 영감’같다고 느꼈다.


그 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엿 장사, 사과 장사, 얼음과자 장사 하면서 단국대 야간 청강생으로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정규학생이 아니었지만 청강생 2학년 때 전국대학웅변대회에서 1등을 해 학내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고, 당시 학교에서 초청강사로 인기 최고였던 함석헌을 초청해 더 성가를 올렸다. 그는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정부의 국유재산 관리요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런데 합격자 발령장을 받으러 가자 서울국세청장이 고향면장이 보내온 신원증명서를 보여줬다. ‘상기자는 6·25 때 행방불명된 자로, 아버지는 좌익으로 경찰에 의해 사망하고, 큰형은 연희전문대학 재학 중 월북했다’고 적혀 있었다.


연좌제에 걸려 취직길도 막히자 그는 고성군 간성면 산골에 만든 안반덕농장에 들어갔다. 안반덕은 농업과 공동체, 신앙이 함께하는 삶을 꿈꾼 함석헌이 의지가지 없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살려고 만든 농장이었다. 그곳엔 농사도 짓고 소와 닭을 기르며 많을 때는 열 명도 살았으나 그가 머물 때는 3명이 살았다. 함석헌은 한 달에 한 번 와 1주일쯤 머물다 갔다. 함석헌은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고 밭에 나가 오후 한두 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1일1식을 했기에 아침을 먹지않고 기도하듯 노동을 하던 함석헌과는 편히 앉아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함석헌은 가끔씩 한마디를 던졌다. ‘일등하면 뭐 하냐’, ‘밥은 내(가 한) 밥 먹고 살아야 한다’, ‘밥은 같이 먹어야 한다’, 그런 말들은 늘 곰곰이 씹는 화두가 되었다.


q3.jpg» 문대골 목사(왼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결혼식 주례를 서준 함석헌 선생과 함께 했다. 문대골 목사 제공.


장준하 사망에 “의문사는 무슨…”


그는 1960년 3월 고향 처녀와 전남 진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함석헌이 그곳까지 내려와 주례를 했다. 함석헌은 진도로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사상계>의 장준하가 보고 싶다며 장준하를 만나고 왔다. 그달 함석헌은 <사상계>에 ’레지스탕스’란 글에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썼다. 한 청년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바람에 나부낀 휘장이 날아와 못박는 사람과 청년 사이를 가로막더라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장준하일 것이라고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비서로서 모신 김구처럼 비명에 갈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러다 장준하가 진짜 사망하자 함석헌은 “의문사는 무슨 의문사냐”며 “내가 장준하와 김대중을 만나게 하니 박정희가 죽인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장준하가 죽은 뒤 혼이 나간 듯 지내다가 문익환이 국민혁명을 꾀하기 위해 서명을 받으러 오자 그때에야 깨어났다. 문익환이 꾀한 혁명에 함석헌이 첫번째, 홍남순 변호사, 법정 스님이 뒤를 이어 서명했다고 한다.


결혼 뒤 고향 진도에 머물고 있던 문대골은 갑자기 몸이 아파 두 달 입원할 동안 성경을 읽으며 처음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란 생각을 했다. 함석헌이 여자문제로 비난을 받고, 가까운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때였다. 그는 “나라도 선생님을 모시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상경했다. 그는 그때부터 함석헌을 가까이서 모시며 함석헌의 소개로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70년대 후반엔 다시 함석헌의 소개로 민주화의 선봉이었던 기독교장로회 교단 목사가 되었다.


q4.jpg»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산길을 내려오는 문대골 목사(오른쪽). 문대골 목사 제공


 “어지간히 맞아서는 안 죽는다”


문 목사는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해 박선균 목사가 편집장으로 있던 <씨알의소리>에 업무부장으로 함께했다. 저항의식을 불러온 글들이 주류였던 <씨알의소리> 원고를 인쇄소에 맡기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1972년 1월엔 김수환 추기경의 글을 실었다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밤새 구타를 당하고 기절을 하자 중정 요원들이 함석헌의 집 앞에 짐처럼 버리고 갔다. 그런 고초를 이미 수없이 당했던 함석헌은 “사람이 어지간히 맞아서는 안 죽는다”고 했다. 문 목사는 그 순간은 너무 서운했지만, ‘너는 어지간히 맞아서는 죽을 놈이 아니다’란 말로 새겨 들었다고 했다.


문 목사는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늘 한복 차림으로 꼿꼿한 자세를 지니면서도 부드럽고 겸손하다. 그는 함석헌이 살 때도, 세상을 떠난 뒤에도 늘 함석헌과 함께 했다. 그는 사람들이 함석헌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울 때조차도 함석헌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린 사람이란 믿음을 버린 적이 없다. 문 목사는 “함석헌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도, 일등이 될 수도, 높아질 수도 없었다”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놓은 함석헌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그 많은 고무신을 누가 빛나게 닦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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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68969_P_0.JPG» 고무신. 한겨레 강재훈 기자. 세간의 지인들이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사연인즉 종업원들 눈치 보느라 속이 상해 장사를 못 해먹겠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조금 좋은 조건이 있으면 말미도 주지 않고 떠난다고 한다. 기분이 상하다 싶으면 하루종일 까칠한 분위기를 만들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나름의 배려와 그간에 쌓았다고 생각한 정이 무너지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괴롭다고 한다. 

고용관계로 보면 갑과 을의 관계인 것 같지만 종업원의 심기를 살피느라 자신들이 오히려 을이라고 한다. 달리 할 말이 없어 옛 사람의 말씀 한 구절을 건넨다. 그러나 그 좋은 말은 당사자에게 잠시의 위로는 되겠으나 해결은 되지 못한다. 갈등은 한쪽이 아닌 양쪽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듣다 보면 이와는 다른 사례가 절로 생각난다. 작년 겨울 이웃 마을 지인의 집에서 두 달여 동안 절임배추 작업을 도울 때의 일이다. 일손이 부족하여 몽골에서 온 부부가 함께 했다. 농촌 일이 그렇듯이 하루 출퇴근 시간 정해놓고 하루 8시간 할 수 없다. 어떤 때는 14시간도 일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참 건실하게 일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괜찮다고 하며 오히려 주인 아줌마가 힘든 일을 하면 떠맡았다. 부부는 내일처럼 일했고 무엇보다도 늘 웃는 얼굴이었다. 

몽골에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어 영상통화를 하며 울 때는 곁에 있는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일이 마무리 될 때 부부의 마음씀이 고마워 계약보다 많은 배려를 했다. 그들이 떠날 때 우리 서로는 가슴에서 솟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해 겨울은 독한 추위 속에서도 서로가 따뜻했다. 근로조건의 계약을 넘어서 서로를 고마운 존재로 마주했기 때문에 법과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얻은 셈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간은 늘 견해가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그 갈등과 충돌이 다수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가 되면 법과 제도로 조정한다. 최저임금법과 임대차보호법 등이 그런 처방이다. 이른바 법과 제도라는 구조적 모순으로 발생한 불이익은 법의 보호로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 과연 법 하나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사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비록 법이 미비하더라도 늘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 사람들끼리 환하게 웃고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설령 법이 완전하더라도 위로와 기쁨을 주는 가슴이 저절로 열릴까.

지금도 수십 명의 대중이 사는 산중의 수행처에는 주인이 닦지 않았는데도 그 많은 흰 고무신이 깨끗한 모습으로 햇볕에 반짝거린다. 대중은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누가 그 고무신들을 닦았는지 안다. 그런데 그가 많은 고무신을 닦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절집에서는 이런 스님을 밀행보살이라고 한다. 법과 돈이 아니어도 스스로 하는, 부드러운 서로의 손길이 사람 사이를 훈훈하게 한다. 여지가 있는 삶이 필요한 시절이다.

인생의 첫 남자 아빠에게, 하늘로 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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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s-day-2135265_960_720.jpg» 사진 픽사베이.

여학생이라면 대부분 사춘기 때 좋아하는 남자 선생님 한 분쯤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요즘은 그 대상이 선생님이 아니고 아이돌 스타로 변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고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때는 멀리서 그 선생님이 걸어오면 가슴이 뛰고는 했다. 유독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만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는 그 선생님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무척 슬퍼했던 것 같다. 그때는 한없이 멀리만 느껴졌던 먼 지방으로 전근을 가셨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강의를 하기 위해 그 도시를 일 년에 서너 번을 다녀오지만 열댓 살 소녀에게는 갈 수도 없는 먼 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후, 물론 지금도 가끔 ‘얼굴’이라는 노래를 어디선가 들으면 그때와 그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 물론 옛날처럼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적셔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people-2557503_960_720.jpg» 아빠와 딸. 사진 픽사베이.
어린 여자 아이에게는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고 이상적인 남자는 ‘아빠’다. 커서 아빠랑 결혼하겠다는 여자 아이들을 유치원에서 종종 보게 된다. 딸을 결혼시킬 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장하는, 사위에게 몇 초라도 딸의 손을 늦게 내어주려는 아빠들의 모습을 가끔 결혼식장에서 본다. 그럴 때마다 자녀들에게, 특히 딸에게 아빠는 큰 산이요, 보디 가드며 끝없는 내 편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아빠를 얼굴도 기억나지 못할 만큼의 나이에 잃어야 하는 아이들도 참 많다. 두 살, 네 살, 1학년, 3학년….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옹달샘’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엄마가 울까봐, 속상해 할까봐, ‘아빠 보고 싶다’라고 투정도 못 부리는 아이들은 가끔 그 속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수녀님, 오늘 아빠가 생각이 나요. 언제나 환하게 웃던 아빠 얼굴 말이에요. 항상 밝게 웃으셨는데…. 그런데 오늘 우연히 아빠 사진을 보니 더 생각이 나요. 왜 그럴까요? 그래서 그런지 눈물이 나요. 아빠는 그래도 고통이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아빠는 착하니까요.

우리 아빠는 내가 제일 좋다고 했는데…. 지금 제 기분을 아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근데 지금 아빠가 편할까요? 지난 기억이 아닌 지금 아빠가 사는 나라 말이에요. 저는 지금 나라가 더 좋은데…. 아빠 혼자 계시면 외롭겠다. 우리 얼굴도 못 보니까. 나도 아빠가 살아계실 때가 제일 좋았는데…. 아빠가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요.

우리 아빠, 우리한테 말도 잘 못하셨는데…. 아빠 생각이 많이 나요. 사진 붙잡고 울면 아빠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나와요.

애들이 자꾸 ‘너 진짜 불쌍하다. 너희 아빠 돌아가셨냐?’하면 정말 속이 상해요. 아빠가 부디 좋은 나라에 가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고통 없이 말이에요.”



초등학생인 이 아이는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나고 그리울 때면 꿈에서라도 아빠 얼굴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하늘에 계신 아빠에게 편지를 쓰듯이 우리 수녀원으로 편지를 보내고는 한다.



딸의 원망,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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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73216484_20161007.JPG»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오래전 이혼한 엄마 대학 1년 딸이 이웃집 아줌마 대하듯 해 속상해요

 

Q. 오래전에 이혼하고 자녀와 단절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딸아이가 고3이던 지난해부터 연락했습니다. 딸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어떤 표현도 하지 않습니다. 옆집 아줌마 대하듯 합니다. 올해 대학생이 됐구요. 절대 연락을 먼저 안 하구요. 제가 문자를 보내면 ’ ‘아니로만 답합니다. 전화하면 잘 안 받구요. 통화되면 정말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아 화가 나게 합니다. 먼저 연락할 때는 돈 달라고 할 때입니다. 걱정과 관심을 표현하면 애가 귀찮아합니다. 저도 같이 모른 척해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이는 제가 무슨 자격이 있느냐고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맘이 있는 것 같구요. 관계 개선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은 같은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구요. 답답한 마음에 두서없이 상담 부탁드립니다. 마리


A. 시대가 달라져서 요즘 부부들은 이혼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이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이혼에도 치러야 할 대가가 많으니까요.

 

그중에서도 가장 쓰디쓴 대가라면 아이들 문제일 것입니다. 아이들을 혼자서 맡자니 경제적인 어려움과 양육이 막막하고, 떠나보내자니 안타깝고 그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부모 관점의 고통일 뿐입니다. 이혼 당사자인 부모보다 아이들이 훨씬 더 큰 충격과 고통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부모님들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혼을 그린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부모가 슬픔과 분노로 쩔쩔매는 동안 아이들은 제 아픔을 끌어안고 숨죽인 채 이 과정을 겪어냅니다. 부모가 저렇게 힘든데 내 아픔까지 말할 수 없어, 그들이 헤어지는 건 내 잘못인지도 몰라, 와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을 그 나이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고 또 상처 입습니다. 침묵한다고 해서 고통이 적은 것도 아닙니다.

 

 

복잡한 감정 정리까지는 시간이 필요

 

마리 님, 딸아이가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하셨나요? 아마 따님은 엄마가 낯설고 어색할 겁니다. 어색해서 긴장되고, 그러다보니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지요. 그건 엄마를 아직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마리 님은, 아이가 자신에 대해 엄마로서 무슨 자격이 있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이혼의 사유가 무엇이었든 아이는 떠나간 부모를 원망한다고 하지요. 아마 지금도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엄마에 대한 불신이 사라질 때까지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하겠지요. 그런 심정일 때는 엄마가 친밀한 관계를 요구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입을 다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래전 이혼하셨다고 했는데, 그동안 아이가 엄마를 그리며 했던 생각과 감정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원망과 죄의식, 그리움과 미움 등 온갖 상반되는 감정이 얽혀 아직 정리가 안 되는 상태일 겁니다.

 

그럴 나이입니다. 지금 따님은 사춘기와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기에 들어섰습니다. 그때는 생각과 감정이 아주 다양해지고 복잡해지지요. 자신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모두 고려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상반된 생각들을 조화롭게 통합시키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그 복잡한 감정들이 정리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감정을 이해하고, 엄마도 이해하게 될 때 말이지요. 이를테면 이혼 여성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다든지, 결혼하거나 아이 엄마가 되어 새로운 시선으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볼 날이 올 겁니다. 어느 날 문득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문제를 만나 갑자기 외로움을 느끼게 되면서요.

 

그때까지 기다려주셔야 합니다. 마리 님도 엄마로서 준비하시면서요. 이혼 가정의 아이들이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과 그 대처 방안을 다루는 책들이 시중에 꽤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꼭 읽어보세요.

 

이혼 후 몇 년간 따님과 관계가 단절됐던 만큼 당신이 엄마로서 미숙한 상태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셔야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함께 성장합니다. 아이 때문에 웃고, 아이 때문에 속을 끓이면서 그 시기 아이에 대해, 그리고 한 인간에 대해 이해해가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 아이의 변화에 맞춰 소통 방법을 지속해서 발달시켜야 했는데, 마리 님의 경우는 그 시기를 놓치신 겁니다.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어야

 

미안한 마음에 아이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도 문제지만 원격으로 잔소리를 하시면 아이와 소통할 가능성은 빠르게 사라집니다. 걱정과 관심을 보인다고 하셨는데, 걱정은 잔소리처럼 들릴 겁니다. 그보다는 그냥 허용적인 태도로, 이해하기 위해 지켜봐주세요.

 

어쩌면 딸과 관계에서 가장 먼저 하셔야 할 것은, 부모로서 뼈아픈 사과의 편지를 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시간 아이를 만나지 못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겠지만, 어찌 됐든 아이들이 겪는 부모 단절의 고통은 온전히 부모들의 책임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네가 정말 힘들 때, 고민이 있을 때 엄마에게 와라. 언제고 기다릴게. 너를 만날 생각을 하며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앞으로는 못 기다리겠니, 라고요. 아이가 응답하기를 기대하지 마시고, 아이의 무반응에 지치지 마시고 가끔 안부 인사를 전해주세요. 한번 시작하시면 아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아이에게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지금은 따님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복잡한 심경을, 공격 대상을 잃어버린 분노를 해소할 시간을 딸에게 허용해주세요. 그리고 마리 님은 지근거리에 서서, 말없이 그리고 흔들림 없는 태도로 딸아이의 그 시간을 지켜봐주세요.

 



입산 삼일만에 천하를 깨우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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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북창(鄭北窓)선생이 20살 시절에 산에 들어가 공부하는데,
입산삼일(入山三日)에 지천하사(知天下事)라.
산에(즉 절에) 들어간 지 사흘만에 천하 일을 알았다.
그 분이 마흔 네 살에 죽었는데 만장(挽章)을 스스로 뭐라 썼는고 하니

일일(一日)에 음진천종주(飮盡千鐘酒)하고,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셔 버리고,

일생(一生)에 독파만권서(讀罷萬卷書)라.
일평생에 만 권 서책 다 읽었어라.

고담복희이상사(高談伏羲以上事)하고,
고상하게 복희(伏羲)씨 이상의 일만 이야기하고,

속설(俗說)은 종래(從來)로 불괘구(不掛口)로다.
세속의 얘기는 종래로 입에 걸지 않았도다.

안회(顔回)는 삼십(三十)에 칭아성(稱亞聖)인데,
안연(顔淵; 공자의 으뜸 제자)은 삼십에 아성(亞聖; 공자의 다음 가는 성현)이라 불렀는데

선생지수(先生之壽)는 하기구(何其久)아.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 긴가.

● ● ● ● ●

이상이 북창자만(北窓自挽)의 시(詩)인데, 
안연(顔淵)은 서른 두 살에 일찍 돌아가셨지만 자기는 마흔 네 살까지나 살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만장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좌탈(座脫)해 버렸습니다. 앉아서 몸을 벗어 버렸다 이거예요. 

그는 불교에도 조예가 이만저만 깊은 양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유교에서는 술객(術客)이라고 합니다. 
왜? 원체 아는 것만 보았지, 아는 게 끊어진 자리는 못 보았기에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아는 것만 가지고는 인정을 해주지 않는 겁니다. 
불교에서만 안 쳐주는 게 아니라 유교에서도 안 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객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에서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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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절 선생이 마지막에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를 보았기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그는 그 끊어진 자리를 어떻게 보았느냐? 그가 끊어진 자리를 보고서야 지은 시입니다.

 

신생천지후(身生天地後)하고,

이 몸뚱이는 하늘과 땅이 생긴 뒤에 나오고,

 

심재천지선(心在天地先)이라.

우리 마음자리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느니라.

 

천지(天地)도 자아출(自我出)이어니,

하늘도 땅도 다 나로부터 나왔거니,

 

기여(其餘)야 하족언(何足言)이랴.

그 나머지 만물(萬物)이야 말할 게 뭐 있느냐.

 

일물(一物)이 유래(由來)로 유일신(有一身)이니,

한 물건이 말미암아 한 몸뚱이가 생겼으니,

 

일신(一身)에 환유일건곤(還有一乾坤)이라,

한 몸뚱이에는 또한 한 건곤[하늘과 땅]이 있음이라.

 

약지만물(若知萬物)이 비어아(備於我)라면

만일 우주만물이 나에게 갖춰진 것을 안다면

 

긍파삼재별입근(肯把三才別立根).

어찌 삼재[하늘과 땅과 사람]를 잡아서 따로 뿌리를 세우랴. (즉 하늘이니, 땅이니, 사람이니, 모두 다를 게 없다 )

 

천향일중분조화(天向一中分造化)하고,

하늘은 하나[眞理]를 향하는 가운데 조화를 나누고,

 

인어심상(人於心上)에 기경륜(起經綸)이라.

사람은 마음 위에 경륜을 일으킨다.

 

천인(天人)이 언유양반의(焉有兩般意)?

하늘과 사람에 어찌 두 가지 뜻이 있겠느냐?

 

도불허행지재인(道不虛行只在人)이다.

도는 헛되이 행하지 않는지라, 다만 사람한테 있다.

 

그렇게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를 봤기 때문에 소강절 선생을 인정하는 겁니다. ‘의 차이가 그렇게 구별되어지는 겁니다..

백제 성왕이 일본에서 환생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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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1.jpg» 백제 성왕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구세관음상이다.성덕태자의 얼굴과 비교해 보라.

정유년 215(위덕왕24년 서기 577) 백제왕 부여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사리 2과를 모셨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사리기 외함에 적힌 내용이다이 내용은 신라 사리봉안 기록보다 66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사리봉안 기록이다사리 2과가 분신하여 3과로 변하는 이적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백제왕 창은 성왕의 아들이다일찍 죽은 왕자를 위하여 왕흥사를 짓고 사리탑을 추선공양하였다.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성왕은 신라와 관산성 전투에서 포로가 된다그는 서라벌에 끌려가 갖은 모욕을 당하고 노비의 칼에 목이 잘린다성왕의 목은 신라관청 북청의 계단 아래 묻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하였다그리고 목이 잘린 주검을 백제로 보냈다.

 성왕의 아들 창은 울부짖으며 외쳤다. “나는 출가하여 선왕의 명복을 빌겠다.” 백그러자 신하들이 말렸다. “백제의 왕업을 잇고 선왕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출가하는것은 불가합니다. 창은 신하들의 만류로 성왕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위덕왕이다위덕명왕은 문수보살의 분노존을 이르는 말이다그는 목이 잘린 선왕의 육신을 다시 온전하게 받들기 위하여 생전 부왕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관음상을 조성하였다일본 호류지 몽전에 모셔진 구세관음상이 백제성왕을 모델로 위덕왕이 조성한 그 불상이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 대향로는 바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구세관음 백제 성왕전에 바친 대향로 이다지금은 일본과 한국에 따로 떨어져 있지만 다시 한자리에서 향공양을 올릴수 있는 기회를 한-일의 불교도들이 만들어야 한다.

 백제 위덕왕은 백제계 소가씨가 세력을 잡고 있는 일본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낸다요즘 같으면 종합건설회사를 보낸 것이다사원 건축을 할 수 있는 도편수기와 기술자불상과 불화를을 조성하는 불모불탑을 세울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인력을 파견하였다그렇게 해서 완성된 최초의 사원이 법흥사이다법흥사는 원흥사로 이름이 한번 바뀌고 이제는 비조사로 불린다.

 현장2.jpg» 백제 아좌태자가 그린 성덕태자와 2왕자상이다. 백제인이 그린 유일한 회화문화재이다. 대원사 아실암에 일본인 화가 가와세 요코가 복원한 복제품이 있다.

 위덕왕은 법흥사 낙성식에 축하사절단의 대표로 왕자이며 화가인 아좌태자를 보낸다백제왕의 사신으로 일본왕궁에서 성덕태자의 영접을 받는다아좌태자는 성덕태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성덕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손바닥을 만져보고 두 발바닥도 살펴보고는 다시 일어나 무릎을 끓고 두번 큰절을 올리고 말했다. “크게 자비로우신 구세관음께서는 동쪽 해 뜨는 나라에 오셔서 으뜸가는 가르침을 앞으로 49세까지 펴시면서 불법을 밝히고 연설하시게 됩니다.”

 이때 성덕태자가 지긋이 눈을 감으니 미간에서 번쩍하면서 밝은 빛이 30자에 이를 만큼 길게 뻗쳤다아좌태자는 무릎을 꿇고 다시 재배하였다성덕태자는 좌우를 돌아보고 나서 말했다. “이곳의 나로 말하자면 옛날 사람인데 내 제자를 위하는 까닭에 이곳에 왔거늘 이제 와서야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되는구나하고 말씀하시니 함께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이 내용은 일본의 고문헌인 부상략기와 성예초에 기록되어 있다일본의 역사인물 중에서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성덕태자다일본의 17조 헌법을 제정하여 삼보를 존중하고 불법을 받들어 화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마경 승만경 법화경을 설법하고 주석서를 남겼다마굿간 태자로 불린 그는 손바닥에 부처님 사리를 쥐고 태어났다.

 현장3.jpg» 일본의 만원권 지폐이다.초상화에 나오는 성덕태자 얼굴을 담았다.


 과거 일본의 만엔권 지폐에는 성덕태자의 존안이 있었다바로 백제 왕자 아좌태자가 그린 초상화 그림에서 따온 것이다성덕태자와 두 왕자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다본래 법륭사에 있었지만 현재는 황실박물관에서 모시고 있다.

 현장4.jpg» 백제 금동 대향로에서 향이 피어 오르는 모습이다.

 백제 위덕왕은 서거한 부왕인 성왕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을 만들었다즉 그것이 구세관음상으로서 백제에 있었던 것이다성왕이 죽은 뒤에 다시 환생한 분이 성덕태자다법륭사의 고대 문서 성예초의 기록이다. 

내가 나를 무시하면 앓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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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

심리 치료의 기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을 견디려면

자신부터 자신을 무시하는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심리적 무시하는 자해행위를 해서 생긴 상처는 

다른 사람들을 민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극도로 무시하면 생기는 현상인 피해망상입니다.

무시 당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 당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부정적 합리화 때문입니다.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분열증 환자들은

현실성이 결여된 망상을 호소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무시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자기 무시일 가능성이 높으니

자기 점검을 하시고 심리치료를 받아야합니다.

나그네와 돌 그리고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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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en-figures-1007134_960_720.jpg» 사진 픽사베이.

숲속 동물 마을에 오솔길이 있었다. 그 오솔길은 아주 평평하고 편안한 길이었다. 그런데 길 한가운데에 뾰족한 돌이 하나 솟아올라 있었다. 동물들은 편안하게 길을 가다가 그 돌에 걸려서 넘어지곤 했다. 성질 급한 멧돼지도 깡충깡충 뛰는 토끼도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곰도 길을 가다가 그 돌에 걸려 넘어졌다. 이러한 일은 계속되었다. 동물 마을 어른들은 아기 동물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주의를 주었다. “길에 있는 그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을 조심하라”..

 

그 마을에 착한 사슴이 있었다. 사슴은 동물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져서 다치는 것이 너무 너무 마음 아팠다. 사슴은 매일매일 그 돌이 있는 곳에 와 앉아서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돌을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동물들은 고맙다고 인사하면서 지나갔다. 온 동물 마을에 착한 사슴 소문이 쫙 퍼졌다. 그래서 동물 마을 이장은 착한 사슴에게 표창장을 주었다. 그리고 착한 사슴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돌 옆에 앉아서 지나가는 동물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그 착한 사슴도 할아버지가 되었다. 어쩌다 사슴 할아버지가 동물 마을에 내려오면 동물들은 모두 절을 하며 사슴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먼 나라에서 한 나그네가 동물 마을에 나타났다. 나그네는 남루한 옷차림에 매우 지친 표정이었다. 나그네도 그 숲 속 길을 걷게 되었다.한참을 걷다가 돌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러자 사슴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돌을 조심하세요, 너무나 많은 동물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다쳤답니다.” 깜짝 놀란 나그네는 사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여기에 앉아있지요?” 사슴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야 동물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지요, 아주 옛날부터 수많은 동물들이 이 돌에 걸려 넘어져 다쳤답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요. 그런데 내가 이곳에 앉아 주의를 준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넘어져 다치지 않았답니다

 

나그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냥 지나쳐 갔다. 얼마 후 나그네는 다시 그 자리에 나타났다. 손에는 쇠 망치가 들려 있었다. 나그네는 쇠망치로 돌을 쪼기 시작했다.. “, , , 그 소리를 듣고 숲 속 나라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후 뾰족한 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주 오랫동안 동물들을 괴롭혀온 그 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가는 길을 막아서게 했던 돌이 사라진 것르 보고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동물들이 그 나그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특히 사슴 할아버지는 매우 분해하면서 소리쳤다. “저놈을 잡아라, 저놈이 우리의 신성한 돌을 깨뜨렸다 !”.그 소리와 함께 동물들은 다같이 우르르 나그네에게 달려들어 마구 때렸다. 나그네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동물들은 나그네를 마을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그네는 큰 슬픔에 잠겨서 그 마을을 떠났다.

 

나그네가 떠나고 난 후 사슴 할아버지는 동물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어서 빨리 전에 것보다 더 크고 뾰족한 돌을 구해다가 그곳에 다시 두어야 합니다.” 동물들은 사슴 할아버지의 말대로 더 크고 더 뾰족한 돌을 가져다가 그곳에 두었다. 사슴 할아버지는 다시 그곳에 자리 잡고 앉아서 지나가는 동물들에게 말했다.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오

 

그 후 그 할아버지의 손자, 그 손자의 또 손자, 그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오늘날에도 그 길에 앉아있다. 그리고 지나는 동물들에게 말한다.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오”.지나가는 동물들은 소리를 지르는 사슴 앞에 놓인 통에 동전을 던졌다.


돈 연애 명성에 대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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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안 좋은 것으로 변합니다. 참 안타깝지만 사실 입니다. 
큰돈이 생기면 처음에는 너무 좋지만 돈이 주는 온갖 고통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돈이 많을 수록 더 만족 할 줄 알지만 돈 욕심이 더 커지고 집착때문에 잘 살지도 잘 죽지도 못합니다. 돈이 없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연애를 하면 처음에는 그렇게 좋을 수 없지만 그렇게 좋을 수 없는 사람이 그렇게 싫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연애가 주는 달콤함은 갈망의 괴로움과 질투의 괴로움과 이별의 괴로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연인이 없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아이를 키우면 처음에는 그렇게 좋을 수 없지만 결국 부모님을 속상하게 하고 등을 돌립니다. 자식들이 없으면 정말 다행입니다. 
유명해지면 생전 경험하지 못한 관심과 사랑으로 날라갈 것 처럼 좋지만 그렇게 좋을 수 없는 주목이 그렇게 싫을 수 없는 주목으로 변합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유가 없고 원치 않는 시선을 받게 됩니다. 익명이 주는 자유가 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이와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를 속이고 결국 배신합니다. 돈과 연애와 명성의 무상함을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무상함을 알고 집착이 없으면 돈도 연애도 명성도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있어도 없어도, 인정을 받아도 안 받아도, 연인이 있어도 없어도 되는 조건 없는 내면의 행복을 이루면 삶이 주는 무상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 것과 내게 속하지않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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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옮길만한 믿음의 비결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산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마태 17,20).


기도하는 사람은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습니다그 비결은 기도를 잘 하는 것입니다아무 것도 남지 않을만큼 철저하게 실패하고 부셔지고 파멸된 사람도중환자실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이도 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가진 것이 있으니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아는 것입니다내게 속한 것과 타자에게 속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이고 산을 옮기는 것은 하느님께서 할 수 있는 일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하느님께서 산이 옮겨져야 할 이유가 분명하면 그렇게 하십니다내 기도와 하느님의 뜻이 맞아야겠지요그러니까 기도는 善意의 기도라야 합니다내 믿음과 기도가 선의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생각과 내 믿음이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는 알 수 없지요살려달라는 기도가 아버지께는 죽여 달라는 기도로 들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선의의 기도란 내 뜻이 아버지의 뜻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실한 믿음이 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하느님은 물으십니다. “산은 옮겨서 뭐하려고?”


나는 기도하고 내 기도를 결과지으실 분은 신의 의지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그것도 불완전한 선의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진실한 기도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자 함을 고백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나의 의무이지 내 뜻을 따르는 것이 하느님의 의무는 아니다.(톨스토이)” (2018.8.11.) *

동편 하늘에 무지개 봐라너무 이쁘다야.


성산 카일라스에서 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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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넘나들며 고행,  안의 산도 오르며 수행


최후의 성지’ 티베트 카일라스 순례


1포탈라전체--.JPG» 티베트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 앞에 선 순례단 일행들

 

<한겨레테마여행단 1415 여정, 굳이 가지 않아도    나섰나 화두

대초원 너머 빛나는 설산이 눈앞에,  사이 검은 바위는 ‘천국의 계단


카일라스 23 한바퀴 도는 꼬라, 첫날은 장관 보며 걷는 평지 ‘꽃길

둘쨋날은 추위와 저산소로  설친 , 20km 하루에 가야하는 ‘마의 코스

고산증세에 다치고 조난 위기까지, “ 신들은  높은 곳에 계셔서


셋쨋날 오체투지 현지인에 마음 여며, “죽을 고생 하면서 생각 가다듬어

마음껏 울어볼  있는 시간, 나의 고뇌보다 오히려 감사 깨우쳐” 


1카일라스--.jpg» 지구 최후의 성지로 불리는 카일라스(수미산)

 

<한겨레테마여행단 18명이 티베트 순례에 나섰다. 728일부터 11일까지 1415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순례단이 중국 시안을 거쳐 항공편으로 도착한 곳은 티베트 수도 라싸 조캉사원  호텔이었다조캉사원은 7세기 통일대왕 송첸캄포가 지은티베트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다최종 목적지에 직항으로 갔다고 해서 치러야할 고난들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균 해발 410미터인 시안에서 해발 3600미터로 급작스럽게 상승하자 산소부족으로 숨이 막혔다.

 

 그러나 아직 설렘까지 가라앉힐 수준은 아니었다조캉사원에 이어 세계 7 불가사의라는 달라이라마의 겨울궁전 포탈라궁과 여름별장 노블링카의 풍경은 고산에서 숨길을 열어줄 만큼 화려했다그러나 그곳에서 살다 1959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불교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흔적은 찾아볼  없었다대신 불상들만이 위용을 자랑했다 화려한 불상들은 티베트의 수난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의문이 외부의 부처가 아니라 내면의 부처를 향하지 않을  없게 했다.


1걷기명상--.JPG» 카일라스로 향하던중 해발 5200미터 고개에서 내려 법인 스님을 따라 걷기 명상을 하는 순례객들

 

 숨은 가빠왔지만 내적 경험 나눠

 일행  3명은 라싸에서부터 숙소에 의사를 불러 산소를 주입 받고포도당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도에 적응하기 위해 라싸에서 이틀을 체류했다. 3일째 해발 5560미터 캄발라 고개를 넘어 암드록쵸 호수에 들르는 코스도 뒤로 미루고 해발 3900미터인 티베트  번째 도시 시가체로 향했다고도를 조금씩 높인 것이다누구나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한다그러나 오를수록 숨이 가빴다순례단은 버스에서 내적 경험을 나누었다이혁(55) 변호사는 초임검사 시절 사형이 집행된  명의 사형수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했다차창 가엔 주검을 토막  독수리밥으로 던져 하늘로 오르게 하는 조장터가 스쳐 지나갔다우리가 향하는 곳은 삶일까죽음일까법인 스님(일지암 암주참여연대 공동대표) “ 우리는 굳이 가지 않아도  고행길을 나선 것일까라는 화두룰 던졌다.


1순례길-.jpg1암촉-.jpg돌탑-.JPG안마-.jpg양치기소년-.JPG

 

 시가체와 사가에서  박씩을 하고 카일라스를 향하는 주위엔 대초원이 펼쳐졌다마치 수천 개의 골프장들이 이어진  했다 초원 위에서 양몰이를 하는 소년의 티없는 미소가 부족한 산소를 대신해주었다초원 위에선 야크떼들이 풀을 뜯고 너머로 설산이 빛나고 있었다저산소로 인한 두통과 절경의 부조화를 싣고 버스가 다르첸으로 다가가자 꿈에 그리던 카일라스가 나타났다지구 최후의 성지신비의 영산이었다카일라스 한가운데 설산 사이로 비치는 검은 바위가 마치 누군가 딛고 올라올 이를 기다리는 계단인  보였다누군가 ’천국의 계단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흥분으로 서둘러 발길을 옮기기에 이곳은 너무도 산소가 부족했다다르첸은 백두산보다 2천여미터가  높은 해발 4800미터였다일행 모두가 애초 카일라스를 23일간 한바퀴 도는 ‘꼬라 목적으로 이곳까지 왔다. 6명이 고산증세로 꼬라를 포기했다꼬라 첫날은 카일라스의 장관을 보면서 걷는 평짓길이었다하지만 순례가 그런 꽃길로만 깔려 있을  만무했다


1오체투지2--.jpg» 온몸을 엎드려 절하는 오체투지로 카일라스산을 돌고있는 티베트인 순례자



1카일라스3-.jpg1오체투지3-.jpg1오체투지4-.jpg

 

 고통으로 마음 성숙시키는 수행

 롯지에서 추위와 저산소로 잠을 설친 일행들이 새벽 어둠을 뚫고 이틀째 꼬라에 나섰다. 5630미터 돌마라를 넘어 무려 20킬로미터를 하루에 가야하는 ‘마의 코스였다 명이 말을 타고 오르기로 했다말의 도착이 늦어 말을 타는  명과 현지가이드를 제외한 일행들은 서둘러 돌마라로 향했다그런데 임영희(59)씨가 말에서 떨어져 팔목이 골절됐다 손으로  이상 말에 오를 수도 없었다그가 그런 몸으로 돌마라를 넘는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몸이 성한 사람들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되기 십상인 돌마라였다롯지에서 일행들을 위해 주먹밥을 싸줄 만큼 상태가 좋았던 오화숙(63)씨도 “(고산을  모른 무지와 가벼움이 후회가 됐다  정도였다돌마라를 넘으면서 조난를 당할 위기에 처할 만큼 지쳤던 최윤석(50)씨는 “ 신들은  높은 곳에 계셔서 인간들을 애먹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했다이날 막바지엔 천둥이 치고 우박마저 내려 설상가상이었다


1수행자-.jpg1돌마라너머-.jpg

 

 3일째의 짧은 꼬라길에선 오체투지로  일정을  현지인들이 거칠어진 마음을 여미게 했다티베트불교에서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  하나가 ‘생각 전환법이다고통 자체를 없애려는  아니라 고통을 통해 마음을 성숙시키는 것이다비롯 첫번째 화살을 맞았다 하더라도 혐오와 분노갈등을 더해 2, 3 화살을 스스로에게 쏘지 않기 위함이다 오체투지의 고행 속에서도 평화롭게 빛나는 수행자들의 얼굴이 이런 기운을 전해주었다서울 홍대 부근에서 초밥집을 하는 유동식(47)씨는 “일찌기 겪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죽을 고생 하면서 평소에도 어지간한 일들을  편하게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했다.


1돌마라--.JPG» 야크들을 몰고 5630미터 돌마라 고개를 넘어 카일라스 꼬라를 돌고 있는 순례자들

 

구게왕국 거쳐 다시 라싸 대장정

 카일라스 꼬라 순례  일행은 구게왕국으로 향했다. 9세기부터 17세기까지 지속된 전설 속의 왕국은 황량한 사막 위의 신기루인 것만 같았다순례중 6킬로그램 이상 체중이 빠질 만큼 고행을 감당했던 임재택(69) 부산대 명예교수도 흙산 촘촘히 박힌 동굴에서 1천년전의 수행자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1구게왕국--.jpg» 티베트 라싸에서 1500킬로미터 떨어진 인도 라닥 접경에 있는 구게 왕국을 배경으로 선 순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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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라닥과 접경지역인 구게왕국에서 다시 라싸로 돌아오는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티베트에서만 고원 3000킬로미터를 누비는 대장정이었다위기에 대한 여행사의 미흡한 대처 등으로 마음이 요동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런 고행 중에서 내면 여행도 이어졌다정명숙(58)씨는 “26   사건의  지점에 멈춰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마음껏 울어볼  있는 시간이었다 했다아들의 갑작스런 희귀병 소식으로 가슴이 미어졌다는 조영애(56)씨는 “티베트인들의 웃음을 보며  자신의 고뇌보다 오히려 감사를 깨우쳤다 고백했다호흡곤란으로 순례 내내 고통을 겪었던 영화 <변호인> <강철비> 양우석(48) 감독은 “생사가 호흡지간에 있다는 말을 글이 아니라 실제로 느낀 시간이었다 말했다.

생명보다 위에선 체면과 허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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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1-.jpg» 영화 <신과 함께1>의 한 장면


군대에서 군종장교(군목)로 일했다. 휴전선을 지키는 부대 소속이었다. 밤새 경계근무를 하고, 새벽녘에 철수해서 쉬었다가 해질녘 다시 투입되는 걸 반복해야했다. 실탄을 장착하고 있어 사고 위험이 크고 늘 긴장하지않을 수 없었다. 산 속에서 소대 별로 생활하다 보니 심리적인 고립감도 컸다. 


 내가 소속된 연대본부는 고개 넘어 후방에 있지만, 철책 경계 맡은 대대에 자주 갔다. 밤에는 철책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문하고, 낮에는 인성교육과 상담을 했다. 처음에는 간부나 선임 병들이 내가 방문하는 걸 경계하고 불편해 했다. 후임 병들도 “잘 지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라며 학습된 말만 반복했다. 자기 부대 문제가 상급부대로 알려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내가 방문하기 전, 사전 교육으로 입단속 시켰던 거다. 


 나중에 듣기로 내 전임자는 철책방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자주 가는 게 더 낯설고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다. 자꾸 보면 정이 든다고 나중에는 간부들도 경계심을 풀고 편하게 대해 주었다. 나도 간부들이 난처해지지 않게 주의했다. 신병들이 자대 배치 받지 전, 며칠 동안 연대본부에 대기하는 데, 이때 신병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신병이 선임 병이 되고, 마음을 여는 병사들도 많아졌다. 병사들이 나와 상담하는 걸 경계하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철책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데, 낯익은 병사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으로 나를 자꾸 쳐다봤다. 근데 눈을 맞추려고 하면, 눈을 피했다. 뭔가를 의식해 머뭇거리는 거였다. 이제는 부대 분위기가 상담하는 걸 경계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그것도 병장이었다.


 표 나지 않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나에게 할 얘기 있는 것 같은데?”라고 말을 걸었다. 예감이 적중했다. 여자 친구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 억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며칠 동안 잠도 못 잤다고 한다. 그 날 밤 탈영해 직접 얘기를 들으려고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철책에서 내려왔다는 거다. 군대에서 간혹 겪는 일이다. 그래도 위험한 상황 직전에 불안한 마음을 털어 놓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모든 게 잘 마무리 되었다.

 

 나중에 물어 보았다. 그 때, 그렇게 중요하고 위험한 순간에, 도움을 요청할 마음이 있으면서, 왜 머뭇거렸냐고. 병장이기도 한데, 무슨 눈치를 본 거냐고. 의외의 대답을 했다. 후임 병들이 볼 까봐 머뭇거렸다는 거였다. 후임 병들에게 체면이 안 선다는 거였다. 그게 도대체 뭐 길래! 체면과 허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 가를 느꼈다. 그렇게 간절한 위기 상황에서도 별 것 아닌 허위의식이 작동한다는 게 놀라웠다.


 나중에 간부들에게 이 얘기를 하니, 사실 자기들도 그럴 때가 많단다. 힘든 마음을 나누고 도움 받고 싶은데, 부하들이 있으면 괜히 체면 때문에 꺼리게 된다고. 그러고 보니 우리 삶 곳곳에는 체면과 허위의식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일을 그르치는 게 많아 보였다. 

칼보다 무서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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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말은 쏘아 놓은 화살이다’라는 말도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고 그 말로 인해 상처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오래 전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있다. 처음 수녀원에 들어와 첫 서원을 하고 성당에서 소임을 하고 있을 때이다. 당시 성당은 화재로 전소되었고 신부님과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성당을 갖게 되었다. 이를 기념해서 성당 축성 기념으로 서울에서도 무지 유명하다는 수녀님 강사 한분이 오셔서 강의를 하시게 되었다.

  그 수녀님은 강의 첫 머리에 이렇게 좋은 성당 축성식 기념 강사로 자신을 불러 주신데 대해 감사하다며 “길을 잘 닦아 놓으면 문둥이가 먼저 지나 간다더니 제가 그 격이 된 것 같습니다. 송구스럽고 죄송합니다.”라고 하셨다. 순간 나는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그 분의 겸손한 마음의 표시로 그렇게 말씀하신 줄은 알았지만 그 성당은 나환우 마을 공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 날 그 강의를 듣기 위해 공소에서도 나환우분들이 20 여명 힘들게 오셔서 그 자리에 앉아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께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어떻해요? 괜찮아요?’라는 눈 인사를 건넸고 그 분들도 내 마음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씨익 웃어 보이셨지만 두 시간 내내 나는 그 나환우분들의 우울해 하는 모습, 중간 중간 자리를 뜨고 나가시는 모습, 강의가 끝나자 마자 인사도 없이 봉고차를 타고 훌쩍 떠나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그 날 강의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력 많고 유명한 강사분이라 말씀 드리기는 조심스러웠지만 혹시 앞으로도 또 실수를 하게 되실까봐 강의가 끝난 후 수녀님에게 살짝 말씀드렸다. “저희 성당은 나환우 공소가 있고 지금 그 환우 20 여명이 수녀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수녀님이 너무나 당황해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죄송해서 어떻하면 좋겠느냐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지만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겐 인사도 없이 총총히 되돌아간 그들의 뒷모습만이 그 날 저녁 강하게 내 마음에 파고 들었다.

  한 부인이 남편을 잃고 동창회를 가게 되었다. 혼자 된 동창을 위로하고자 여행을 함께 가기로 했고 계획을 세우다가 비용이 많이 들것 같아 걱정하는 동창들에게 회장이 ‘걱정마, 내가 과부 땡빚을 내서라도 돈 마련할테니 가자’ 라고 하였다. 그 순간 남편을 사별한 그 부인은 ‘어떻게 혼자 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라고 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그 동창회에 가지 않았다.

  누구도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마치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 한 마리를 죽게 할 수도 있듯이 생각 없이 일상안에서 쓰는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화살촉처럼 박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내가 던진 돌멩이와 쏘아 놓은 화살들은 누구의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가 다시 한번 반성해 본다.


어찌 미물인들 신령함이 없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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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서우담 소장이 묻고 스승인 탄허 스님이 답한 내용입니다.


옥자-.jpg» 영화 <옥자>의 한장면


○夫巢知風하고 穴知雨하며 蜘蛛는 有布網之巧하고 蜣蜋은 有轉圜之能하니 物皆如是同稟靈明하야 至於好生惡死之情하야도 亦何嘗異於人哉리오 方其砉然奏刀하며 愬然就死之時하야 盻盻然視하며 唶唶然鳴하나니 豈非含怨結恨之情狀也리오 而人이 自昧耳니라


○ 대개 둥지 틀고 사는 짐승은 바람 불 줄을 미리 알고, 구멍 속에 사는 짐승은 비 올 줄을 미리 알며, 거미는 그물을 치는 재주가 있고, 쇠똥구리는 쇠똥을 동그랗게 굴리는 능력이 있다. 만물이 모두 이와 같이 신령스러운 밝음[靈明]을 받았으니,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심정에 있어서 또한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그 획획 놀리는 백정의 칼에 벌벌 떨면서 죽음으로 나아갈 때를 당하면 힐끗힐끗(원망하듯이) 바라보며 구슬프게 울부짖으니, 어찌 원망을 품고 원한을 새기는 정상(情狀)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스스로 모를 뿐이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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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귀찮아 혼자 살고 싶다는 시대에 왜 굳이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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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책 제목을 대하는 순간 상당수는 구체제의 봉건주의나 가족주의, 공동체주의의 잔재를 훌훌 털고 홀로 마음껏 살아도 괜찮다는 책을  더 연상했을 수 있다.  혼삶이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에 마을공동체살이라니! ‘더구나 4차 혁명, 가상현실. 혼자서도 모든 걸 잘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이 시대에 다시 인간들끼리 꾸역꾸역 모여 살라고?’라고 반문하는게 당연하다. 더구나 명절을 전후에서는 여성들의 명절증후군 특집을 단골로 내보내며, 모이는건 재앙이라는듯이 쓰는 <한겨레>의 기자가 말이다.


 그렇다. 지금은 바야흐로 혼삶의 시대다. 홀가분한 혼삶을 장려하고 부추기는 건 쌍끌이 정도가 아니다. 온갖 끌개란 끌개는 홀가분하게 홀로 살라고 촉구한다. 가부장적 독재와 남성우월주의, 자유주의, 낭만, 패미니스트-이 모든 것이 혼삶을 촉진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보다 더욱 강한 것은 자본이다. 자본이야말로 혼삶을 부추기는데 가장 앞장 선다. 둘 혹은 셋이 모이는 것을 차단하면, 홀로 상대하는 것은 오직 모바일과 자본의 광고여서 홀로야말로 자본이 노예로서 요구하는 최적의 조건이기에 그렇다.


  자본이 이끄는 인터넷과 매스컴, 그리고 에스엔에스가 혼삶의 자유를 마음껏 자랑하며 매일 멋진 컷을 올린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방황하는 중이다. 모순 속에 갇혀 방황하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다. 정반대의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정신 상태가 그렇다. 인간은 고립을 견딜 수 없는 존재다. 심심하고 외로운 걸 무엇보다 못 참는다. 사람들은  반려동물을 홀로 두거나, 심지어는 좁은 원룸에 두고 나가곤 하는데, 만약 인간을 그런 식으로 가둬두고, 아무런 자극도 없이 온종일 내버려둔다면 곧 미치고 말 것이다.


 책표지 입체-.jpg종일 SNS에 매달린 이들을 보자.그러고도 틈만 나면 동창회와 취미 동아리를 갖고, 교회와 성당, 절에 나가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관계가 그렇게 늘어나는데도, ‘나는 그대가 내 곁에 있어도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이해타산을 위해 모여 으스대고 뽐내고 힘자랑의 줄 세우는 곳들을 아무리 다녀도 관계의 목마름은 더해 갈 뿐이다. 배고픈 것도 참기 어렵지만 배 아픈 것은 더욱더 참지 못하는 게 한국인 아닌가.


 그런데도 늘 누군가와 만남을 고대하며 만나고, 합치고, 뭉치려고 애쓴다. 그나마 삶에서 희열을 주는 게 합일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어 오르가슴에 이르는 섹스도 그렇지만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타인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 온전히 공감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줄 때도, 낙조와 같은 풍경을 같은 감동으로 바라볼 때도, 소리 내어 함께 기도할 때도, 월드컵 축구를 보며 응원할 때도, 게임이나 노래, 연주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때도 합일이 주는 환희가 있다.


 인간은 원하던 걸 손에 쥐었다고 만족하는 법이 없다. 애타게 갈구하던 것을 일단 손에 쥐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토록 누군가를 그리워해놓고 상대방이 내 사람이 되면 지겨워 미치겠다고 돌변한다. 쟁취를 위해 투쟁하던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취직이 하늘의 별따기라는데, 그 하늘의 별을 정작 따고 나면 이 직장이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할지 몰랐다며, 먹고사니즘에서 벗어날 날만을 꿈꾼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만두지도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로또나 한 방 맞아 해외여행이나 다니며 살고 싶다는 공상 속을 유영한다. 가끔 직장 일에 바쁜 지인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며칠만이라도 쉬고 싶다’면서 종교전문기자인 내게 조용한 산사나 수도원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작 별 자극이 없는 상태를 한 나절도 견뎌내지 못하고 좌불안석한다는 것을. 세속에선 사람 때문에 괴롭고 산속엔 아무도 없어서 괴로워하는 변덕쟁이 인간을 누가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소속되고 합일되어 안정감을 주는 공동체야말로 행복의 원천이라며 쫓다가, 그것이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압살하고 피곤하게 하는 주범이라며 반공동체적으로 돌변하는 모순 덩어리를 말이다. 몸은 하나인데 얼굴은 둘이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고 몸부림치는 샴쌍둥이가 모순된 인간의 자화상이다.


  이토록 방황하는 인간에게 자본은 홀가분한 삶이 주는 화려한 장미빛을 끊임없에 제시한다. 자본이 이토록 결정타를 먹이기 전에 인간은 이미 자본에 의해 망가질 때로 망가져 맞서 싸울 힘을 잃었다. 무슨 말인가하면 자본주의로 인해 어려서부터 ‘엄마와 가족과 대가족과 이웃’이라는 공동체를 빼앗긴 세대는 안전 기지를 상실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다. 안전기지(공동체)를 상실한 트라우마, 즉 오직 자신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디엔에이에 입력된 포유류의 각본을 자본주의가 바꿔버렸다. 아기보다 일, 아기보다 모바일, 아기보다 쇼핑, 아기보다 취미, 아기보다 홀가분한 자유를 추구하도록 말이다. 아기는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인간을 쉽게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인간 귀차니즘’이 생기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됐다. 여기에서 다시 유럽의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지를 지배할 때 쓰던 ‘흩어져라, 나뉘어져라’는 전략 그대로 자본이 각자 홀로 살도록 결정타를 먹이고 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가져온 공동체성 파괴로 안전기지를 상실하고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져, 인간과 더불어 함께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낸 이들이 혼삶의 벽을 넘어 이웃들과 함께 마을살이를 하는 사람들이거나 마을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은혜-.JPG» 스위스 알프스에 놀러간 은혜공동체 사람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133쪽


  혼삶의 시대에 왜 함께 살고, 마을공동체에서 어울리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과 함께 하는 삶을 떠나 행복을 찾다는 것은 모래로 밥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영국정부는 체육·시민사회장관을 ‘외로움’ 담당 장관으로 겸직 임명했다. 영국 내 ‘조콕스 고독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위원회는 ‘고독이 개인적 불행에서 사회적 전염병으로 확산됐다’면서 고독을 질병으로 규정했다.


 외로운 게 인간을 위협하는 것과 달리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게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하다.하버드대학이 1938년부터 무려 79년간 724명의 삶을 추적 연구해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건강과 행복이 인간관계의 친밀함에 달려 있임을 밝혀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삶을 가장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이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최근 연구 책임자였던 윌딩거 박사는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다”고 밝혔다. 그는 “외로움은 흡연이나 알콜 중독만큼 강력하다”고 강조했다.


 친밀한 관계나 결혼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영국 러프버러대학의 에프 호헤르보르스트 생물심리학교수팀의 연구도 있다. 이 연구에서 독신은 치매 발생율이 35~44퍼센트로 높았고,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은 사람은 치매 발생율이 60퍼센트 가량이나 낮았다.

 평생 홀로 외딴 집이나 암자에서 수행해온 법정 스님도 이런 말을 했다. “홀로 사는 사람도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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