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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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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거울 속의 또 다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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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아기-.jpg» 거울 속의 또 다른 나

언제부턴가 왼쪽 어깨가 뻐근하고 움직임이 영 신통치 않다. ‘육십견’이란 말도 쓰일까? 암튼,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자라처럼 목을 늘어 빼고 앉아 있다가 생긴 거여서 간단한 운동으로 부드러워질 수 있다는데, 본디 게으르고 몸 추스르는 일에는 더욱 무심한 편이어서 그냥 투덜거리며 견디고 있다. 그러는 중, 오늘 아침 세수를 하다가 묵직한 왼팔을 들어 올렸는데, 어럽쇼, 거울 속 꺼벙한 꼰대는 오른팔을 들고 있었다.

 “어라, 요것 보소!”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듭 팔을 바꿔 들어봤다. “이게 그냥 당연한 건가? 아니, 세상에 이 나이 들 때까지 이걸 모르고 살았단 말인가! 거울이라! 이거 참 묘한 물건이로고!” 요담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셈이다. 거울 앞에 서서 오른쪽 눈을 꿈쩍이면 그림자는 왼쪽 눈을 꿈쩍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어릴 적 내 살던 마을 한 청년이 장가드는 날이었다. 온 동네에 부침개 냄새가 진동하고, 새각시 집에서 소달구지에 실려 온 장롱이 시끌벅적한 잔치 마당 한쪽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 발길에 이리저리 쫓기던 장닭 한 마리가 장롱 거울 속에 담긴 제 모습에 한껏 깃을 세우고 대들기 시작했다. 발톱으로 할퀴고, 부리로 찍고 한참 난장을 치다가 누군가 집어던진 고무신짝에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해댔다. “저놈에 닭대가리 허고는!”


거울 사진-.jpg» 왼눈 오른눈이 뒤빠낀 거울 속의 나거울개구리-.jpg» 넌 누구냐?



 옆방 도반에게 물었다. “근데 말야,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어떨까?” 답 왈 “웅덩이 물에라도 비춰보겠지 뭐. 암튼 좀 조신하고 겸손해지지 않을까?” 내 생각엔 오히려 그 반대로 가지 않을까 싶지만, “다른 이의 뺨에 묻은 검댕을 보고 자기 얼굴을 다시 씻을 수도 있고, 이웃의 밉살스런 행동거지를 스승 삼아 제 몸을 챙기겠지”라는 말에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내 입속에서는 “에헤이, 그럼 그게 천국인데 극락정토는 왜 찾아? 그게 곧 제대로 작동하는 마음속 거울인데”라는 말이 꼬물거렸다.


 거울 속 그림자를 보고 좌우에 헛갈린 늙은 중이나, 잔뜩 목털을 세우고 장롱 거울을 향해 내닫던 장닭도,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젤로 이쁜 게 누구지?”라고 묻는 마녀도 실은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고 억지를 부리는 수십억 닭대가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정녕 거울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은 그토록 아끼고 챙기는 제 낯처럼 다른 이들의 얼굴과 삶 또한 무겁고, 중하다는 사실이다.


 ‘온 우주를 다 뒤져도 나보다 더 중한 것은 없더라. 다른 나들 또한 그렇거늘 네 싫은 것을 남들에게 주지 말라.’(말리카경)


 재연스님(고창 선운사 불학승가대학 학장)

 



백척간두 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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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내딛어라.

지금 그 자리에서

지금 그 지위에서

손에 든 것을 모두 내려놓고 내딛어라.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걸음을 떼어라.


무문혜개의 <무문관>에서

보잘 것 없는자들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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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실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안다.

반면 사람으로서 보잘것없는 자는

언제나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이익에만 눈이 돌아간다.


 <논어> 이인편에서

인간행위는 어디서 유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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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위는 어디에서 유래하나

 인간의 행위는 세 가지 기본적인 토대 위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아기심, 둘째로 남의 손실을 바라는 배타심, 셋째는 남의 행복과 이익을 바라는 동정심에서이다. 이것이 발전하면 고귀하고 너그러운 덕성이 길러진다.


 쇼펜하우어 

한사람만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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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jpg



논어의 이인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안중근 의사가 자주 쓰셨다고 기억합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잘살기’를 추구하는 시대에 애써 ‘거친 잠자리’와 ‘식은 밥’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를 보더라도 가장 먼저 우리의 욕구는 ‘부드러운 잠자리’와 ‘따뜻한 밥’에 머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끔 ‘거친 잠자리’와 ‘식은 밥’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만나는 이들 중에 가장 거친 잠자리와 식은 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는 것이 가톨릭 수도자의 삶이라면 우리는 항상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따뜻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하루하루를 삽니다. 아무도 홀로 외로이 죽어가는 이들이 없도록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 곁을 지키고자 하는 초심이 우리들의 정체성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 일을 하든지 매 순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감이나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도 맞바꾸어서는 안 되는 마음입니다. 현실에 충실하고 내 앞에 있는 죽어가는 이 한 사람, 우리들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명예를 얻거나 재화를 쌓거나 이름을 날리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몽당연필이라 하신 마더 테레사 수녀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난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려 했다면 난 4만명을 돌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하는 선우경식 의사 선생님도 다른 의사들의 20분의 1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자선병원에서 일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환자야말로 의사가 해줄 것이 가장 많은 환자다.’ 실제로 그분은 환자의 처방전에 약보다는 밥, 용돈, 목욕, 옷, 잠자리 등을 쓰시고는 했습니다.


 저 또한 올해는 제 앞에 나타나는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 현장이 거친 잠자리와 식은 밥이 놓여 있는 자리라 할지라도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손까리따스 수녀(가톨릭 마리아의작은자매회)



당신은 유정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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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란-.jpg

정란과 무정란

달걀에는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습니다. 똑같은 달걀인데도 어떤 달걀은 병아리를 낳지만, 어떤 달걀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인생을 사는데 매일 불평불만이나 늘어놓으며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고 감사해서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정란과 무정란은 구별이 어렵지만 제게는 한눈에 알아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웃느냐 웃지 않느냐’를 보면 됩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함께 즐겁게 웃고 수다 떠는 가운데서도 언제나 딱 한 사람만 인상을 쓰고 있다면, 이 사람은 무정란의 인생을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이런 사람은 밥을 먹어도, 누구와 대화를 나눠도, 도대체 즐겁지가 않습니다. 상대방을 무시해서 웃지 않는 게 아닙니다.

머릿속이 온통 근심, 걱정으로 가득해서 웃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근심이 쌓이면 웃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 중에 96%는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자기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랍니다.

저는 성당뿐 아니라 개신교회, 사찰, 관공서, 대학, 심지어 이역만리 아프리카, 유럽, 브라질, 아르헨티나에까지 가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강의를 합니다. 다양한 부류의 새로운 청중에게 강의를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디를 가든, 누구에게 하든 3분 정도만 지나면 청중이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제 강의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비법이 뭐냐고 묻는데,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누구라도 경계심을 풀고 경청합니다. 웃음은 유정란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잘 웃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태오복음 6장에 이르시기를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은 웃음도 가리고 희망도 가리니, 우선 걱정을 내려놓고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십시오.

유정란과 무정란을 구별하는 두 번째 방법은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않느냐’를 보면 됩니다. 아내가 끓여준 김치찌개를 먹은 남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나밖에 없을 거야. 당신은 어쩜 그렇게 김치찌개를 맛있게 끓여? 이건 김치찌개가 아니라 예술이야. 혹시 당신 여기다 마약 탔어?”
이렇게 환하게 웃으며 칭찬을 줄줄이 늘어놓으면, 아내는 남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예술작품 만들 듯이 요리를 하게 됩니다. 세상은 감사해야 할 일이 천지지만 제일 먼저 자기 삶을 사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가까운 곳에 진짜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

유정란과 무정란을 구별하는 세 번째 방법은 ‘감동하느냐 감동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미국 서부지방에 있는 유타 주를 일주일 동안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델리컷 아치 같은 수많은 협곡과 고원지대가 있는 곳으로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관광지입니다.

이 여행을 주도한 사람은 74세 된 마틸다라는 분인데,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돈만 생기면 여행을 가는, 인생 자체를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분이 저와 함께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간 적이 있는데, 제가 거기서 너무 행복해하니까 유타 지역 일대를 돌아보는 여행을 다시 준비했던 것입니다.

마틸다는 저에게 좀 더 멋진 곳을 보여주는 완벽한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3,0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오가며 세 차례나 사전답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일곱 번이나 왔다 갔다 한 거리이니 그분의 정성이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마틸다는 멋진 경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가도 경치는 안 보고 저만 쳐다봤습니다. 본인은 이미 많이 봐서 더 감동할 게 없으니 저의 감동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위암수술을 받은 뒤로 매일매일 감사와 감동 속에 살아갑니다. 가을에 단풍을 보면 ‘올해도 예쁜 단풍을 한 번 더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 ‘저 아름다운 별을 다시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합니다. 제가 이렇게 감동이 기본인 사람인데, 세계 최고의 협곡이라는 그랜드캐니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섰으니 어땠을까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04066700_P_0.JPG» 그랜드캐니언. 사진 이병학 기자. 한겨레 자료 사진.
“오 마이 갓! 여기 죽인다! 너무 멋있다! 정말 좋다!”

제가 이렇게 엄청나게 감동했기에, 나중에 함께했던 일행 모두가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랑 같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면 그의 메마른 감정에 오염될 우려가 있으니 가급적 멀리해야 합니다.

유정란이냐 무정란이냐 구별하는 네 번째 방법은 ‘나누느냐, 나누지 않느냐’입니다. 저는 2013년부터 아프리카 잠비아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말이 봉사활동이지, 그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례 준 치과의사 선생님께 잠비아에는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많은데, 치과병원이 없으니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난감한 표정으로 며칠 걸리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데 이틀, 오는 데 이틀 걸리니 적어도 보름 정도는 계획을 잡아야 한다고 했더니 병원 문을 그렇게 오래 닫아두는 건 부담이 된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은 좀 미안했던지 대신 2,000만 원을 봉헌할 테니 잠비아 사람들을 도와주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치과의사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돈도 봉헌하고, 나랑 같이 잠비아도 가야 돼!”

결국 호주 멜버른 강의에서 만난 치과의사와 인천에서 일하는 또 다른 선생님까지 세 분이 봉사단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잠비아에서, 의사 선생님들이 뽑아낸 썩은 치아를 보니 한국인들 치아보다 한 배 반이 길었습니다. 잠비아 사람들의 치아가 그렇게 크다 보니 썩어도 뿌리가 깊어 빼지를 못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 치과의사가 썩은 치아를 빼주고 치료도 그냥 해준다는 소문이 나자 10시간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트럭을 타고 밤새 달려와 진료소 앞에 줄을 지어 기다렸습니다.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너무 많이 찾아왔습니다. 함께 간 세 분의 의사 선생님들은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며 식사시간에도 밀려오는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저녁에 파김치가 된 선생님들이 대화를 나누는데, 돈만 봉헌하겠다던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의사로 20년을 살았지만, 지금처럼 기뻤던 적이 별로 없었어요. 돈은 많이 벌었는지 모르지만, 항상 환자하고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일에 너무 지쳐서 사는 재미도 없었는데 여기 와서 아픈 사람을 도와주니 힘들게 공부해서 치과의사 된 보람을 느끼네요.”

사람은 자기 재능을 나눌 때 빛이 납니다. 잠비아에 있는 농장으로 봉사활동을 간 대학생들도 그랬습니다. 한 달 동안 10만 평이나 되는 농토를 가꿔주고, 닭장을 지어주는 일을 하면서 난생처음 진짜 보람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 따라간 60대 아주머니들은 한 달 동안 봉사하고 돌아와서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했습니다. 이분들 역시 유정란이 분명합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눌 때 진짜 행복을 맛보는 유정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유정란입니까, 무정란입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무정란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살아가는 방법을 당장 바꿔볼 생각을 하십시오. 엄청난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웃음, 감사, 감동, 나눔’이라는 유정란의 4대 조건만을 찾아내면 됩니다. 일상 속에서 이미 웃고, 감사하고, 감동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당신은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박근혜와 소크라테스,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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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2회 변론에서 박대통령쪽 서석구 변호사가 “예수도 군중재판으로 십자가를 졌다”라고 탄핵 사유를 부정했다.
 서 변호사는 “국회가 (탄핵안이) 다수결로 통과됐음을 강조하는데,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군중재판으로 십자가를 졌다. 다수결이 언론 기사에 의해 부정확하고 부실한 자료로 증폭될 때 다수결이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수결이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옳다. 다수결이라고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민주정에서 그렇게 독배를 마시고 죽자 제자 플라톤은 민주정치에 환멸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예수를 죽인데 일조한 이들이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의 역적이 되어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소크라테스나 예수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같은 날 총을 맞아 죽은 안중근 의사와 박정희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과 같다. 다 알다시피 안중근은 일본의 심장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해 사형장에서 일제의 총에 맞아 숨졌지만, 박정희는  딸보다 어린 여자들을 농락하며 날마다 환락에 빠져지내다 심복의 총에 맞아 죽었다.

 아직 독배를 마시지도, 십자가를 지지도 않았는데 굳이 둘과 비교되고 싶다면 비교해줄 수 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나 예수와  박근혜가 가장 다른 점은 앞 선 두 성자가 신화를 벗어던진 이들었던데 반해, 박근혜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수가 아닌 소수의 권력자들에 의해 죽었다.
 박근혜의 신화는 물론 아버지 박정희다. 그는 박정희 신화를 붙들고 살아왔고, 그 신화 덕에 대통령이 됐고, 그 신화 덕에 관저에서 연예프로나 보고, 혼밥을 먹고 혼삶을 누리고 국정을 농단해도 신화를 우상화하는 이들에 의해 늘 보호받을 수 있었다.

 박근혜는 1997년 한나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다. 그 때 그는 “국민과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으켜세우신 나라인데, 어떻게 하다 이런 지경까지 왔는가, 참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 이루 금할 수가 없습니다. 뭔가 저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라도 이 나라에 될 수 있다면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저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입니다.”고 했다. 그가 이듬해인 1998년 4월 치러진 대구 달성 국회의원 선겅세 펼침막으로 내건 구호도 “박정희가 세운 경제, 박근혜가 꽃 피운다”였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정치인으로서 그의 첫 선거연설을 듣기 위해 대구 달성의 한 학교 유세장에 갔다. 그때 상대는 국민회의 부총재인 엄삼탁이었다. 박근혜는 유세에서 시종일관 아버지 박정희의 얘기만 했다. 아마 자기 얘기나 자기 공약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설의 시작도 박정희, 중간도 박정희, 끝도 박정희였다.

 신화는 신화일 뿐 현실이 아니다. 어둠은 빛이 나타나면 사라지듯이 신화는 실체가 드러나면 사라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2013년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박근혜의 가장 큰 공적은 ‘박정희 신화를 깨는 것’이 될거라고 말해왔다.

 소크라테스야말로 그리스신화 시대를 전복한 인물이다. 당시 그리스는 신화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전쟁을 하거나 국가의 중대사 모든 것을 무당이 결정했다. 그 신화 시대를 끝내고 이성의 시대를 열었던 이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등에(gadfly)’라고 했다. ‘등에’는 쇠파리처럼 시끄럽고 톡 쏘는 곤충이다. 자장가를 불러주기는커녕 잠들거나 취해 있지 못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경고음을 내며 성찰하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최면속에서, 신화 속에서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박근혜는 싫은 소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블랙리스트로 정리해 아예 어떤 꼴도 보려하지않았다. 아버지 박정희가 경고음을 내는 이들을 간첩과 빨갱이로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하거나 감옥에 넣은 것처럼 그 또한 경고음을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않았다.
  예수도 구약의 신화시대에 기대 예배당을 농단했던 사제들을 보고 예배당을 뒤엎은 인물이다. 그렇게 감히 신화에 도전했기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또 그들과 박근혜가 또 다른 결정적인 점이 있다. 그들은 정말 억울하게 죽었음에도, 변명조차 안했다. 소크라테스 당시 아테네의 감옥문은 거의 잠겨있지않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외국으로 방명할 수도 있었다. 또한 보석금을 내고 나올 수도 있었고, 도와주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예수는 그토록 억울하게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국정을 농단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나라를 이 지경을 만들어놓고 반성할줄 모르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오히려 상대를 다시 음해하는 그에게 뭐라 할까.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
 “그는 자기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예수)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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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침에 한 사람에게 기쁨을 주겠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한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겠습니다.     

     단순하게 그리고 분별하며 살겠습니다.

     작은 소유에도 만족하겠습니다.

     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겠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떨쳐버리겠습니다.

     그래서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도록.


*프랑스에 있는 불교공동체 플럼 빌리지의 노래책에 나오는 구절


<바닥난 영혼-잃어버린 평화를 찾아가는 열여섯 가지 이야기>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원충연 옮김/달팽이) 중에서

 



파도 파도 끝이 없는 감정 ‘롤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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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수녀의 에니어그램 <16> 

q6.jpg4유형: 특별(창조)을 추구하는 사람-두 번째 
      핵심동기 : 특별(창조)
      자신의 시각 : 독특함, 의미추구, 개인주의
      타인의 시각 : 질투, 인위적승화, 자유스러움
 

 4유형은 스스로 드러내며 자신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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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유형은 자기 삶에 대해 솔직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감추려 하지 않아 남들보다 튀어 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사, 가족, 과거에 영향을 미친 사건과 같은 일반적인 경험 속에서도 자기만의 특별한 기억과 추억을 가지지요.
 다른 유형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스런 경험도 이들은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독창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고통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어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소설가, 극작가, 시인, 음악가 등 각 예술 분야에 4유형이 많습니다.

 사례 1>패션 디자이너 코코샤넬 :
          고아, 오바진 수녀원에서 자랐다. 훗날 그녀를 상징하는 된 금욕주의와 블랙 앤 화이트 컬러는 
           수녀원의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 주름치마에서 힌트를, 스테인드글라스의 무늬를 보고 
           샤넬 로고의 영감을 얻었다.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노력하는 4유형은 개인적이며 부끄러울 수 있는 것도 기꺼이 드러냅니다. 이들은 자기의 개성과 결함을 잘 알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4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지속, 강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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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중시합니다. 감정적으로 정직하며 자기 감정을 중시한 만큼 타인의 느낌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려했던 자신의 순수한 감정이 어긋나면 상처로 남습니다. 감정이 상하면 이들은 일상을 접고 그 안에 머물려 있으려 하지요. ‘아, 난 지금 어쩔 수가 없어. 감정이 상했으니까’, ‘내 행동은 지극히 정상인거야’ 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합니다.
 
 사례 2>감정이 상한 G 가수 : 당일 콘서트 갑자기 취소
      3>간절히 원했던 일이었음에도 : 스스로 자포자기

 q3.jpg자신의 선행이 무시 되었다고 생각하는 4유형은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굳이 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라며 더 이상 가치와 의미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섬세한 내면을 가진 4유형에게는 크고 작던 상처를 받은 게 중요하지요!
 이것이 지나칠 때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타인이 볼 때는 “뭐 저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과도하게 받아들인다고 판단합니다.
 4유형은 미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유지하려 합니다. 은은한 조명, 향 등을 켜고 분위기에 취하기도 하며 영화, TV보기,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깊은 갈망을 원하는 4유형은 감정을 강렬히 의식할 때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 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몸짓, 언어 등을 통해 자기의 감정을 표출합니다. 그 감정을 지속시키고 강화시키려 ‘상상속의 시나리오’를 만들지요. 
 예로 4유형이 첫 사랑에 실패했다면 아름다운 아픔으로 승화시켜 평생 그리워 할 가능성이 큽니다.
 
 사례 4> 1년 전 연인과 헤어진 G대리 : 
           일 년 내내 프렌치 코트를 늘 입고 다닌다. ‘아직도 내 마음에 비가 내려요.’ 
            눈은 늘 우수에 차 있다.
       5>비극의 주인공, 슬픔의 주인공 되기 : 
           떠나간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음악을 골라 계속 반복하여 들으며 자신의 옛 감정을 되새긴다.
 
 q4.jpg 4유형은 ‘이렇게 했더라면 그(그녀)는 떠나지 않았을 거야’ 라고 과거의 상처를 곱씹으며 후회합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련의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4유형의 감정은 한 길 사람 속을 모르는 것처럼 파도 파도 끝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슬픔, 고독, 외로움 등을 더욱 진하게 느끼지요.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의 굴곡이 심하며 자기연민에 잘 빠지기 쉽습니다.
 이것이 지나칠 때 관계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언제까지 저러고 다닐거야?” 남들이 보기에는 자기 기분에 따라 살며, 조울증으로 비쳐줄 수 있습니다.
 불같이 흥분해 보이나 이들은 감정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조울증이 아닌데 남들에게 그와 같이 보이기 쉽습니다. 타인의 미묘한 감정까지 잘 알아차리는 4유형은 이러한 자기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코너: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을 지나치게 많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요. 감정적 폭발은 나와 타인을 힘들게 하고 소중한 것을 떠나보낼 수도 있어요.

아속 창시자 포티락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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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배너.jpg
  

  1.왜 공동체인가

 

 타이 아속

 2.가장 ‘핫한 남자’ 포티락을 만나다

 3.이윤을 포기하고 부자가 된 사람들

 4.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다

 

 인도의 오로빌

 5.자기로 살면 누구나 천재가 된다

 

 미국 브루더호프

 6.돈 없이 최고급리조트에서 살아보기

  7.공부보다 청소와 요리에 더 열심인 아이

 8.뒷담화 말고 앞에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일본 애즈원

 9.인간과 사회 탐구, 제로에서 시작한다

 10. 아무도 명령 하지않는 일터에서 일하다

 

 일본 야마기시

 11.못난이도 잘난이도 함께 살아가는 곳


2보디락-.jpg» 유토피아 같은 아속을 만든 포티락

텔레비전 스타로 인기절정을 누리다

머리깎고 출가해 완전채식에 맨발

2년명상 뒤 진리실천하려 공동체마을

종단에서는 미친중이라며 파문시켜


20만평 마을엔 공장 논밭 공동식당

승려들은 마당쓸고 돌나르며 궂은일

오두막서 자고 하루 한끼 무욕의 삶

공밥,공돈으로 살찐 일반승려와 딴판


“일 않고 명상만 하는 건 베이비들

풍진 세상 더불어사는 게 붓다의 뜻

돈,물질로 행복하다면 그대로 있되

그렇지 않다면 마음의 힘 길러야”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중 하나인 타이 방콕엔 황금빛으로 치장한 불교 사원들이 즐비하다. 그 사원들에서 돈다발을 세고 있는 승려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나같이 포동포동한 승려들이 마치 면죄부나 극락행 차표라도 된다는 듯이 지폐들을 빨래집게로 집어 전시해놓고 보시를 독려한다. 그러고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 누구보다 당당하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고타마 붓다는 계급을 타파하고 인간 평등과 해방을 선언했는데, 왜 그를 따르는 승려들은 브라만이 되어 민중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일까. 그것이 타이만의 모습일까. 한국이라면 하나의 질문을 더 해야 한다.

 선승들은 미혹되지 않고 여실지견(如實之見·있는 그대로 봄) 하기 위해 눈도 감지 않은 채 뜬눈으로 참선을 하면서, 왜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에게는 눈을 감은 채 일신의 안일로 ‘닫힌 생’을 보내고 마는 것일까.


 방콕을 출발해 시사껫공항에 내린 비행기엔 그 의문도 함께했다. 한밤중에 도착한 시사아속에서는 우거진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이 아침을 깨웠다. 20여만평의 드넓은 마을은 공동홀과 공동식당, 학교 등이 모여 있는 센터를 중심으로 마을사람들의 집과 공장, 학교, 숲, 논밭이 바둑판처럼 정돈돼 있었다. 


 시사아속의 아침은 새벽 4시에 시작됐다. 그 아침,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빗자루로 길을 쓸며 청소하는 이들의 발랄한 모습에서 내 의문도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노동의 현장엔 승려들도, 누구나 다름없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출가자들은 직접 마당을 쓸고, 돌을 나르고, 건물을 고치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방불교권인 타이에서 통념상 출가자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저 신자들이 주는 보시와 공양이나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출가자들의 일상이다. 그런데 아속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아속 내 일반인들의 집들은 멋들어졌지만, 승려들은 판자 몇 개 얽어놓은 오두막 쿠티에서 자고, 철저히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았다.


공양올리기-.jpg» 함께 사는 탁발승들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시사아속 공동체사람들



2.포딜락의 설법-.jpg» 포티락의 설법을 듣고있는 시시아속공동체 사람들

2.비구의 청소-.jpg» 아속에서 청소하는 스님


2.스님행렬-.jpg» 공동체 안을 걷는 스님들


 아속은 승려와 일반인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다. 승려가 주인이고, 재가자는 하수인이거나 객일 뿐인 한국의 사찰 공동체와도 다르다. 6개의 마을을 비롯한 아속 공동체엔 갈색 승복을 입은 출가 비구와 비구니 100여명이 있다. 또 승복을 입지는 않지만 무소유적 삶을 실천하며 헌신하는 독신 여성들로 ‘수녀’ 격인 30여명의 시카맛, 가족들과 함께 아속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속의 공장에서 일만 하는 노동자들, 밖에서 살지만 아속에 교사로 참여하는 사람들, 아속에서 살지만 직장은 밖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어우러져 살아간다.


 시사아속에서 일하며 지낸 지 얼마 안 돼 그토록 다양한 부류가 한 울타리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솔선수범하는 승가의 지도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의 지도력이란 카리스마적 권위를 얘기한다. 물론 40여년 전 아속 깃발을 든 포티락(83)은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사이비 교주들에게도 있다. 진정한 권위란 도덕으로부터 나온다.

 평상시 치앙마이의 숲속 수도원이나 방콕의 산띠아속에 머무르는 포티락이 시사아속에 들른 것은 내가 시사아속을 나오기 이틀 전이었다. 깡마르고 뼈 위에 살갗만이 씌워진 듯했다. 그 속에서 눈빛만이 형형했다. 그 포티락이 맨발로 공동체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설법을 하기 위해 마루로 올라서기 직전이었다. 수돗가에서 흙 묻은 맨발을 씻기 위해 가사를 들어 올렸다. 언뜻 보이는 그의 종아리는 쭈글쭈글한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힘줄이 불끈 솟아 있었다. 인간세상의 이기적 욕망에 홀로 맞서 싸우는 작은 거인의 결기가 보였다.


 그는 타이의 주류 교단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인물이다. 한국에선 승단의 타락을 비판하는 자가 더욱 탐욕스럽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고,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해 분노를 표출하기에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포티락은 철저한 계율과 무욕, 무소유로 출발한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니라, 무욕으로 탐욕과 맞서는 것이다.


2.쿠티-.jpg» 포티락 등 아속의 스님들이 거처하는 쿠티


 포티락은 세상의 혁명을 외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혁명했다. 그는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부친은 가족을 버리고 가출했다. 어머니는 10살 때 세상을 떴다. 그 아래로 6명의 동생이 있었다. 소년가장인 그에겐 험한 세파를 홀로 뚫고 나가야 하는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하지만 그는 온갖 일을 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또한 예술가가 되려는 자신의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대학을 마치고 애초 그림을 그렸던 그는 작곡가와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로 데뷔했는데, 단기간에 타이 최고가 됐다. 눈부신 성과였다. 그는 방콕에서 호화로운 주택에서 살며 최고급 차를 굴렸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온 6명의 동생들도 그의 돌봄으로 부유한 삶을 누렸다.


 그런데 타이의 안방에서 텔레비전 스타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어느 날 그는 머리를 밀어버렸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되어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부와 명성과 안락이 왕자 고타마 붓다를 정복할 수 없었듯이 나 또한 정복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 방송일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선언했을 때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다.

 그는 욕망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그러나 불교국가인 타이에서 승려도 아닌 젊은 전직 방송엔터테이너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승복은 중요치 않지만, 사람들에겐 승복이 중요하다며 출가를 단행했다. 출가 전 어떤 결심을 했건 출가 후엔 승복으로 얻는 대접에 빠져 한생을 보내고 마는 게 출가자의 일생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는 당연한 행보에서 또 벗어났다. 그는 2년이 되자 명상을 마쳤다고 했다. 공부를 마쳤다는 것이다. 드디어 명상과 진리를 삶에서 증명해 보일 때가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승가로부터도 미친 중 취급을 받았고, 파문당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른바 고승들은 쓸모가 없다. 그들은 영적 구원도 얻지 못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푸미폰 국왕조차 거스를 수 없다는 불교 주류 승단에 그는 정면으로 맞섰다. 그가 가장 질타한 것은 종교를 빙자해 탐욕을 채우는 타락이었다. “당근은 이미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내가 사용할 것은 회초리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아기들이 잠들게 요람을 흔들어주는 보모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자신이 먼저 깨어 있기 위해 철저히 하루 1식만 하며 계율에 철저했다. 아속의 다른 승려들도 모두 그렇게 했다. 그는 “너무도 강한 악의 흐름에 맞서야 하기 때문에 내가 엄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방콕 포스트>의 한 기자는 “타이에서 구호품을 업자에게 팔아넘기고, 미신을 이용해 돈을 벌고, 화려한 집에서 살면서 비싼 차를 타고, 보시금을 빼돌리는 승려들에겐 포티락은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다. 그는 성상을 숭배하지도 않고 어떤 미신적인 예식도 배제하고 자신에게 철저하며 이웃에게 헌신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티락이 어떤 삶을 살든, 주류 교단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2.젊은시절 보디락-.jpg» 텔레비전 프로그래머와 작곡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젊은날의 포티락



 불교에서 그나마 고요히 마음을 챙기며 명상하는 승려들은 존중받을 만하다. 그러나 포티락은 한발 더 나아갔다. 어느 정도 명상을 하면 삶 속에서 명상하며 붓다가 말한 무욕의 평화 세상을 실현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노혁명가 포티락과 만났다. 왜 출가자들이 이곳에서는 명상을 하지 않고 노동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밖의 승려와 아속 승려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이 명상이다. 일이야말로 명상이다. 일거수일투족에서 명상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생 전체를 명상만 하는 것은 베이비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한 베이비란 명상 초보자를 뜻했다. 처음엔 젖을 먹지만, 좀 더 자라면 세상의 거친 음식을 먹으며 소화해내듯이 거친 세상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면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공동체를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타마 붓다가 말한, 삶을 사는 곳이 있어야 한다. 말만이 아닌. 가르침만이 아닌 곳.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살아가는 그런 곳 말이다”라고 했다.


 아속을 이처럼 성공적으로 만들었는데 왜 타이 밖에까지 널리 알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아속답게 사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우리 스스로가 잘 살면, 저절로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된다.”

 이제 공동체 밖 세상 얘기로 나아갔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됐는데,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가 물었다. 그는 “그 상태로 행복하다면 그대로 둬라. 그렇지 않다면 물질의 힘이 아닌,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아속의 소녀들-.jpg» 시사아속 내에 있는 학교에 다니며 함께 살아가는 소녀들



보디락 조현-.jpg» 포티락과 조현 기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느냐고 물었다. 그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현재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짓궂게도 이번엔 내 욕구를 드러내 보이며 그를 실험했다. 설사 누군가 무소유를 얘기한다 해도 내면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있을 수 있다. 포티락이나 아속에 대한 책자를 저희 신문사에서 번역 출판할 수 있게 출판권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직 타이어로만 말하고 통역을 통해서만 소통했던 포티락이 이번만은 영어로 답했다. “아웃 오브 차지.”(돈 안 받는다) ‘뭘 그런 걸’, ‘얼마든지 갖다 쓰라’는 표정이었다. 허락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불교에선 현세를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 즉 욕계라고 한다. 그런데 욕계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는 오래전 예술가의 일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예술을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념이나 허구가 아닌 예술, 실상 세계에서 이상을 하나씩 실현해가는 그런 ‘삶의 예술’ 말이다. 현실에 굴복해 구태를 답습하고 모사에 바쁜 욕계의 슬픈 ‘삶의 예술가들’에게 포티락의 삶이 묻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그림을 창조하고 있는가.’

 타이/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스님의 단골 국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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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조계사 뒷켠 골목에서 수십년 동안 운영되던 한정식 집이였다. 인근 관가(官街)혹은 은행가ㆍ회사에서 알만한 이는 모두 아는 그래서‘김영란 법(공직자는 3만원 이상 가격의 식사대접 할 수 없다는 법)’으로 문을 닫는 것이 뉴스가 될 정도로 유명한 식당이다. 한동안 내부공사를 하더니 얼마 후 월남국수집이 들어섰다. 들리는 말로는 핏줄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한식당을 운영하던 솜씨였기에 가마솥에서 우려내던 그집만의 노하우로 만든 국물에 국수를 말아주었다. 어떤 음식이건 국물은 거의 먹지않는 식성 임에도 불구하고 남기지 않을만큼 그 맛이 깊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한다면 월남국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모양이나 그릇 등은 비슷했지만 국물소스는 완전히‘조선화’된 우리국수였기 때문이다. 월남국수 특유의 향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전통 장터국수도 아니다. 월남국수가 이 땅에 들어와서 몇십년만에 완전히 토착화된 퓨전국수라고나 할까.

국수는 본래 귀한 음식이다. 밀농사를 직접 짓고 수확 후 맷돌로 갈아야 하는 시절에는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가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잔치날 혹은 집안의 명절에나 내놓을 수 있는 알고보면‘외부용’이었다. 그리고 생일날 국수는 장수를 상징하는 등 많은 스토리텔링도 뒤따랐다. 그래서“국수 언제 먹여주나?”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육이오 이후 구호물품인 밀가루가 대량으로 시중에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수는 언제나 누구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대중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누구에게나 언제나 그냥“국수나 한 그릇 하지!”로 그 말이 바뀌었다.    

오래 다니던 단골음식점이 갑자기 없어지는 황당함을 서너달 전에 또 겪었다. 이건 대략난감을 넘어 거의 스트레스 수준이다. 가깝기 때문에 늘 편안한 마음으로 다니던 월남국수집인 까닭이다. 산중에서 스님들이 오면 대접하기도 그만이다. 그리고 때를 놓쳐 부담없이 혼자 한 끼를 해결하기에도 더없이 편안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결국 사람이다. 주인장의 화사한 미소와 친절도 빼놓을 수 없는 고명처럼 국수 위에 올려졌다. 종로를 떠나 속리산과 가야산에 머물 때도 이 집 국수가 가끔 생각날 정도였다. 이 집을  통하여 비로소 월남국수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없어졌다. 

할 수 없이 다시 주변을 뒤졌다.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찾아간 곳이 인사동 5번길에 있었다. 하지만 그 집은 이미 길들여진 그 맛은 아니다. 큰틀은 비슷하지만 집집마다 미세한 맛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만족도가 그런대로 괜찮은지라 기회가 되면 가끔 들른다. 신호등을 한번 받아야 하는 큰길을 지나 십여분 이상 걸어야 한다. 지척이 천리라고 했던가. 결국 가까운 곳 만큼 자주 갈 수는 없었다. 덤으로 근처‘붕어빵’집도 참새방안간처럼 들린다. 내가 알고있는 한 가장 비싼 붕어빵이다. 직접 농사지은 밀을 맷돌로 갈았나?       
이래저래 월남국수와의 인연도 십여년을 훌쩍 넘겼다. 원문을 확인하는 습관 아닌 습관은 국수세계에도 그대로 전이된다. 언제부턴가 오리지널 월남국수를 반드시 확인하고야 말겠다고 벼르게 되었다. 드디어 지난 해(2016년) 12월 초순에 기회가 왔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월남국수를 먹었다. 베트남에 도착하여 처음 간 곳이 월남국수집이였다. 종로에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느억맘 국수’라고 한다. 오이냉국 같은 시큼달콤한 뜨거운 국물에 말아 먹을 수 있도록 면을 따로 내주었다. 본토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았는지 맛은 별로였다. 한국에서 가장 즐겨 먹는“덜 맵게 해주세요”라고 따로 주문을 넣는 똠얌국수집은 일정이 끝날때까지 결국 들리지 못했다. 여행사는 짜여진 일정대로 정해진 식당만 갔기 때문이다. 

2017년 새해에는‘누들로드’ 따라가듯 월남국수를 찾아가는 여행자리가 있다면 꼭 끼여야겠다. 그리하여 지역민이 아끼고 추천하는 ‘미쉐린 별’이 전혀 부럽지 않는 동네 월남국수집을 찾아갈 수 있는 인연을 기대한다. 꼭 해야할 버킷 리스트에 한 항목 더 추가하며.   

그대도 부활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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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오늘날 독일의 라인라이트 인근 네안데 계곡에서 고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약30만 년 전에 출현하여 약3만 년 전에 멸종된 인류의 한 종으로서, 고인류학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라 명명되고 있다. 이들의 화석이 발견된 곳이 주로 무덤이었는데, 무덤 속에서 꽃다발로 장식한 흔적이나 짐승 뼈로 만든 장신구가 발견되곤 했다. 이런 유적은 멀리 독일의 네안데르탈인이 아니어도 우리나라 청주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1976년 충북대학교 이융조 고고학 교수가 청주 가덕면 두루봉 석회석 광산에서 발견한 어린이 유골 주변에서, 꽃가루나 뼈로 만든 예술품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훗날 이 유적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한흥문의광산’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로 명명했는데, ’흥수아이‘가 살던 시대가 적어도 5만 년 내지 10만 년 전이라 보고 있다. 


이들 네안데르탈인이나 '흥수아이'의 당시 매장풍습에서 꽃다발로 장식하고, 죽은 이들이 평소에 사용하거나 소중하게 간직했던 물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고구려 적석총에 비해 그 규모가 다를 뿐 죽은 이들의 영생을 기원하는 매장풍습은 큰 차이가 없었다. 네안데르탈인과 흥수아이가 거의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인류의 종이 다르고 독일과 한반도라는 지리적 거리가 아주 멀음에도 비슷한 매장풍습을 한 것을 보면, 아주 먼 옛날부터 인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영생을 인식했으리라 보인다. 

 

 '영생'이라는 말은 결국 '인간 삶의 연속성'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현세와 완전단절'을 의미하는 죽음이 어떻게 '삶의 연속성'으로 이어진다고 믿었을까? 고대 인류에게 죽음이란 무엇이었을까? 고대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현세와 완전히 단절'이라는 죽음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자신의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에 겨워 삶이 밝다가도 절망의 심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라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당황을 넘어 비통에 빠져 무기력을 실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단절이라는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영생은 죽음의 단절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희망사항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눈에는 내세는 실재의 세상이다. 약138억 년 전 '빅뱅'이후, 적어도 지구상에서는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는데 약100억 년이나 걸렸다. 다시 이 생명에서 정신(인간)이 출현하는데 약40억 년이 걸렸다. 따라서 생명은 물질세계의 내세였으며, 정신(인간)은 생명의 내세였다. 또 다시 40억 년 후, 정신(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한번 해보라. 바로 우리 인류의 내세를 말이다. 고대인들로부터 인식해온 내세(영생)가 상상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 실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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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학이 없던(모르는) 시대에 죽음은 '현세의 완전단절'로서 '죽은 시체의 연속성'으로 인식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내세(영생)를 인식해온, 고대인들은 단절(죽음)과 연속성(영생)을 어떻게 하나로 인식했을까? 고대인들이 인식한 죽음은 '완전한 현세의 단절'이외에 어떤 현상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생이란 '죽은 시체의 다른 존재'로 인식한 영혼이 머무는 저승이 그들의 내세였다. 사실 죽음이란 생물학 영역이지 철학이나 신앙의 영역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이 없었던(모르던) 시대에서 죽음과 영생에 관한 정의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일 수밖에 없었다. 


코스모스는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없어 자신의 정보를 씨앗으로 남기고 개체는 소멸되고 만다. 이듬해 따뜻한 봄 날, 씨앗은 싹이 터서 한 여름 태양빛에 무럭무럭 자라 파란 가을 하늘아래 다시 울긋불긋 코스모스 꽃을 피운다. 생물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무생물에서는 예를 들면, 우라늄은 우라늄을 낳을 수 없어 토륨이나 플루토늄으로 붕괴되어 결국 납으로 변화되어 사라진다. 무기질은 개체로 존속되는 '불멸성'이 불가능하다. 생물은 자신의 정보를 DNA에 담아 삶의 연속성을 이어간다. 이 DNA 정보를 우리는 '생명'이라고 하는데 '생명'은 물질이 획득한 '불멸성'이다. 결국 생물은 무생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식을 자신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은 생물이 아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인격은 자식에게 생물유전이 되지 않고 사회성으로만 유전된다. 따라서 나와 자식은 독립된 개체이다. 약40억 년 전 생명은 무기질에서 독립된 개체가 되어 '생명은 생명을 통해 연속성'을 이어왔다. 다시 약40억 년 후, 생명이 아닌 정신으로 연속성을 이어가는 인류가 출현했다. 생명이 생물의 정보라면, 정신은 인간의 정보로서 물질도 생명도 아닌 제3의 물질정보이다. 옛날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이 '정신정보'를 영혼이라 인식하고 있다.


 고대 이후, 오리엔트시대 최초로 부활사상이 출현했는데 이집트의 '미라를 통한 부활사상'과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의 프라쇼케레티(Frashokereti)라는 2단계 종말론에 부활사상이 있었다. 히브리인들의 내세관은 '구세주 메시아'를 통해 '완성된 하느님 나라'로 구원되는 현세로 연속되는 구원관으로서, 저승에서 삶을 영위하는 영혼이나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약1천 년 후 예수의 부활사건이 있었다. 이집트, 조로아스터교, 예수의 부활사상의 공통점은 저승에서의 부활이 아니라 현세에서 부활이다. 고대인들이 인식한 영생이 '저승에서 영혼의 영원한 삶'인 반면, 부활사상은 영생의 종착점이 저승이 아니라 보다 완성된 현세라는데 있다. 이집트나 조로아스터교의 부활은 죽음이 되살아나 인간의 삶이 현세로 연속된다는 죽음과 영생에 관한 신앙언어였다. 


아예 부활사상이 없던 히브리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사건은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한 획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3일 만에 부활'이란 '온전히 생물의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부활은 '인간은 생명이 아니라 정신의 연속성'으로서, 인간의 '정신정보'가 '새로운 인류를 출현 시킨다'는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이집트나 조로아스터교, 히브리인들은 '인간은 생물이다'라는 의식 수준이었지만, 예수의 부활사건은 '인간은 생물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6-50) 말씀과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었다.


당시 과학을 모르던 고대인들과 오리엔트시대 사람들이 '생명과 정신의 불멸성'이나 '생명과 정신의 연속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신앙언어(영혼, 저승, 천당과 지옥, 부활, 내세)를 통해 영생을 이해하고 표현했었다. 고대인들이나, 오리엔트시대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나, 영생관이 다르다고 내세의 실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영생관이냐에 따라 죽음과 부활과 내세관이 인간의 의식수준에 따라 개체성에서 공유성으로 갈라진다. 따라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 문명의 수준이 달라진다. '공유성'이란   '정적인 세계관'에서는 어느 하나를 여럿이 이용한다는 의미이지만, '동적인 세계관'에서는 여럿이 하나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예수의 부활사건은 '동적인 세계관'에서 인류의 '공유성'을 강조한 가르침이었으며, 부활은 당시 제자들이 장소개념으로 인식해온 저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영생은 '저승에서 영원한 삶'이라는 신앙을 선포하고 있다. "저 멀리, 죽어서도 있다고 믿어야 위로받을 수 있는데  내세는 연속된 현세라고 하니..... 앞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살아가겠습니다."어느 신자의 독백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의 실상을 보는 듯, 영생이 자신들만의 독점물인 냥 허무한 신기루만을 설교하고 있다. 인류가 인식해온 영생에 관해서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답을 주는 종교가 없는 이유가, 과학이라는 실증학문이 없었던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물학을 통해 '생명의 불멸성'과 '생명의 연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죽음과 연관된 신앙언어가 보다 명확하게 인식되리라 믿는다. '생물학에서 철학을 인식하라'는 샤르댕의 말씀 속에 보다 명확한 죽음과 내세에 관한 정의가 내려지리라 믿는다. 영혼이란 '죽은 시체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자의 '정신정보'이다. 오늘날 물질, 생명, 정신이 형성되는 하나의 연속된 정보(말씀)로 인식한 사람들은 예수. 복음사가 요한, 유물론자들 그리고 '떼이야르 드 샤르댕'뿐이다. 만약 누구든지 생명은 물질이 획득한 '불멸성'임을 안다면, 정신은 생명이 획득한 '불멸성'임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곳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마태 22:32-33)


내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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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배우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금년 배우지 않아도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세월은 자꾸 흘러간다.

세월은 나를 위하야 연장해 주지 않는다.

아아, 나도 늙었구나.

이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나의 책임이다.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서.




주자(1130~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본명은 주희다. 동아시아 사상을 집대성한 주자학의 초조다. 19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관계에 입문했다.  유학 말고도 불교, 도교도 공부하였다. 24세에 이연평을 만나 그의 영향 하에서 정씨학에 몰두하고 다음에 주염계, 장횡거, 이정자의 설을 종합 정리해 주자학으로 집대성하였다.

 주자의 학문은 이기설(理氣說 : 존재론), 성즉리(性卽理)의 설(윤리학), 격물규리(格物窺理)와 거경(居敬)의 설(방법론), 경전의 주석이나 역사서의 저술, 구체적인 정책론으로 되어 있고, 그 모두에 중세 봉건사회의 근간인 신분혈연적 계급질서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그는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도’(三綱)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 오상五常)을 영원불변의 ‘인리천리(人理天理)의 지’(至)로 보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초월적 또는 내재적으로 이론화했다. 주자의 학문과 그 실제 정책은 모두 봉건 사회의 질서원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철학적으로 강고하게 체계화시킨 것으로, 주자학은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오랫동안 군림했다.

 그는 70세로 숨을 거두며 “여러분 모두 힘을 모아 열심히 공부하라. 발을 땅에 굳게 붙여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첨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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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의 애제자인 자공(子貢)은 무첨무교(無諂無驕)의 철학, 

즉 '아첨하지 말고 교만하지도 말라'는 철학을 역설했습니다. 

아첨이 약한 자가 빠지기 쉬운 병이라면, 교만은 강한 자가 걸리기 쉬운 병입니다.

아첨은 보기 싫고 교만은 비위에 거슬립니다.

나는 결코 아첨의 무리는 되고 싶지않습니다. 

교만의 무리는 못난 족속 중에서 가장 아랫길입니다.


안병욱의 <인생사전>(안병욱 지음,예원북 펴냄)에서



안병욱(1920~2013)

=철학자이자 수필가. 평남 용강 태싱.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강의했으며 <사상계> 주간과 숭전대 교수를 지냈다. 도산아카데미연구원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 '철학의 대중적 전파'에 기여한 공로로 강원 양구군에 한국 철학인으로는 처음 '안병욱 철학의 집'이 세워졌다.



적당히 그칠줄 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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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할 줄 알면 

욕된 변을 당하는 일이 없고, 

적당히 그칠 줄 알면 

위험한 꼴을 당하지 않아,

오래도록 편안히 있을 수 있다.


 노자


우리들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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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해이건 다사다난하지 않은 때가 없지만 지난해에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는 일이 전국을 강타했다.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 대선에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미국인들 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남북한 관계는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고 통일의 꿈은 점점 더 멀어 만 간다. 경제와 사회의 양극화는 심해지고 젊은이들은 ‘헬 조선’을 외치면서 나라를 아예 떠나고 싶다고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시작된 비극은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고, 세계는 언제 어디서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런가하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호하고 있는 신고립주의와 극우 민족주의 세력 역시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면서 세계 일등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만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신고립주의가 문제의 해결은 못된다. 더군다나 지금껏 세계화를 주도하면서 온갖 혜택을 누렸던 미국과 영국 같은 나라가 이제 와서 태도를 돌변해서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로 돌아선다니 정말 어의가 없다. 이래저래 강대국에 의해 휘둘리는 약소국들만 당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인류역사의 필연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국내외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절망감마저 느끼게 된다. 미국 대선 패배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했다는 말, “내일도 태양은 뜰 것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겸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 세계 최강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그의 실망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상상해 본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잊고 살기 쉬운 깊은 뜻이 담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우리는 전국적인 촛불 시위를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값진 수확도 있어서, 분노 가운데서도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 때문에 구겨진 나라의 체면과 한 사람으로 인해 받은 온 국민의 마음의 상처가 수백만이 들어 올린 촛불 때문에 그나마 보상을 받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나라가 안개 정국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판결이 앞으로 어떻게 내려지든, 우리는 나라의 장래에 대해 ‘희망’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안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이 최 아무개 덕택이라는 말하겠는가? 문자 그대로 여야, 진보 보수, 남녀노소, 신분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민심이 천심이라는 오랜 진리를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양심의 소리가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촛불 집회가 일종의 ‘종교적 행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참여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종교적 경험’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근대사회로 오면서 나라의 국교(state religion)라는 것이 사라지고 종교가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고 다원화되면서, 사회가 개별종교들을 초월해서 구성원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른바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것이 자연히 대안으로 형성되게 되었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나 현대 종교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의 차이를 넘어 미국인들로 하여금 어떤 공통의 미국적 가치를 공유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시각을 우리사회에 적용하면, 한국은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이점을 바탕으로 유교라는 종교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비록 ‘시민종교’라고 불릴만한 것이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항상 존재해오다가, 이번 촛불시위를 계기로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를 계기로 해서 그동안 시민종교, 그리고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주창하는 이른바 이성종교(Vernuftreligion) -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적 신관과 계시 신앙을 대신해서 인간 이성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진리와 도덕성을 모든 종교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 에 대한 종래의 이해가 달라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성종교나 시민종교가 개별종교들(실정종교, ‘자연법’과 구별되는 ‘실정법’이라는 개념아 있듯이)이 지니고 있는 뜨거운 종교적 열정이나 감동이 없는 미지근한 종교, 지나치게 합리화된 싱거운 종교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촛불집회를 보면서 시민종교도 기독교 같은 특정종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도 더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수백만이 외치는 함성에는 종교 특유의 성스러움이 느껴졌고, 사람을 매료시키는 강한 마력과 흡인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뿐 아니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무수한 차이들을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에는 분명히 어떤 초월적인 종교적 요소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십만 명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구호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개인이 지니고 있는 이런저런 관심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고 개인들이 겪는 천차만별의 운명 또한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다는 것, 심지어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을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강화에 사는 나의 가까운 친구는 먼 길을 마다 않고 5번이나 집회에 참여했다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특히 요즘 학생들과 청년들은 사회의식이나 정치의식 같은 것이 없고 연예인들을 둘러싼 루머나 잡담에나 관심이 있고 취직과 스펙 쌓는 일에만 열심이라는 비판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일등 국민’에 ‘삼등 정치’가 문제라는 지적이 있지만, 이번 미국 대선을 보면서 그런 생각도 근거 없는 자기비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미국 국민의 정치수준이 우리만도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 대해 너무 자조적이거나 비판적일 필요가 없다. 정치가 ‘더럽다’ 해도 관심을 접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정치란 좋게 말해.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것이 단지 우리 정치계만이 문제가 아님을 곧 알 수 있다. 우선 최태민 같은 사람이 사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풍토를 조성한 우리나라 종교계 일반의 문제가 있고, 오래전부터 이런 엄청난 비리를 알고 있었을 것 같은 데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서 부와 권력을 탐해 온 우리나라 권력층, 언론계, 폴리페서들, 그리고 정보력에서는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우리나라 재벌들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교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역시 우리나라 종교계와 신앙풍토에 무게를 두고 싶다.


   우리나라 종교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상식과 이성이 통하지 않고 도덕적 비판정신이 마비된 풍토에 있다. 특히 종교적 신앙과 윤리적 관심이 따로 놀면서 도덕적 비판을 감당할 수 없는 한심한 종교집단들이 독버섯처럼 마구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종교에 놀아나고 종살이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새삼 종교란 것이 정말 무서운 것, 위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버니 샌더스.jpg» 버니 샌더스


   하기야 유독 우리종교계만 그렇겠냐는 생각도 든다. 지난번 미국 대선 때 트럼프 같은 사람이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우기던 구역질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런데 더 한심한 사실은, 당시 공화당 후보 12명 가운데 카터 전 대통령 같이 누가보아도 복음주의자라 불릴만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는데 서로 복음주의자라고 우기는 꼴이 가관이었다. 내가 무슨 진실한 신자라고 착각해서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뻔뻔한 짓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여하튼 그런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실이고 미국 기독교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인들의 낮은 정치의식에 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와 매우 대조적인 장면도 지난 번 미국 대선에 있었다. 민주당 후보 지명을 얻기 위해 힐러리 클린턴과 치열한 경합을 벌리다가 고배를 마신 샌더스 상원의원의 경우다. 아마도 선거운동 기간이 한 2주 정도만 더 있었더라면 역전 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패배는 아쉬운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CNN 방송이 타운 홀 미팅 형식으로 주최한 후보 토론회를 보게 되었는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샌더스에게 당신의 종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을 했다. 마음속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던 나는 순간 약간 놀랐다. 그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이 질문이 결코 샌더스에게 유리하거나 우호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나를 감동시키에 충분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한 순간의 망서림도 없이 그는 말하기를 “나는 정말 깊이 종교적인 사람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랐고 한 층 더 긴장해서 그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나의 종교, 나의 영성은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어떤 소녀가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다거나, 어느 할머니가 돈이 없어서 약을 못 사먹는다면 나의 종교, 나의 영성은 바로 그런 데 있다”고 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유대교 영성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비록 대권후보자로 선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의 미국사회 일반인들의 의식을 바꿀만한 돌풍을 일으켰기 때문에 앞으로 미국사회의 정치판도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유대교 영성의 특징과 장점은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윤리적 유일신신앙‘(ethical monotheism)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다. 나는 샌더스 상원의원의 모습에서 이런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예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유대교는 신학이나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는 종교이고, 우리가 얼마나 율법에 나타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가에 있다. 경건한 유태인이었던 예수자신도 신학이나 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의 관심은 오로지 율법의 참 정신에 따라 사는 삶에 있었다. “누구든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다”라는 그의 말 그대로다. 정의의 예언자라 불리는 아모스는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법정에서 올바르게 재판하여라.”고 외쳤다. 구약 예언자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정의를 사랑하는 것이고, 정의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다. 정의론의 저자로 유명한 철학자 존 롤스에게 큰 영향을 준 칸트는 말하기를, “만약 정의라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정의는 인생의 궁극적 가치, 즉 지고선이라는 말이다. 정의는 도덕, 정치, 종교 모두가 추구해야만 하는 궁극적 가치이다. 정의를 외면하는 정치와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더 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런 정치, 그런 종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길희성(심도학사 원장)



환갑 맞이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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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환갑을 보냈습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 덕에 나는 아직도 나이 값을 못하고 있지만, 아니, 하지 않고 있지만 젊은 친구들 눈에는 영락없는 구닥다리일 겁니다.  ‘언제 이렇게, 그 긴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린 걸까.’ 구태의연하다 여겼던 이 말도 요즈음 너무나 실감이 납니다.  젊은 시절, 제자들로부터 회갑기념논문집을 헌정 받던 선생님들을 보면 ‘이제 세상이치를 두루 꿰어 달관하셨겠지’ 하고 부러워했건만, 그 나이에 이른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마당 한켠에 수북이 쌓여 말라가는 낙엽들을 놓고 노모와 한바탕합니다. “거 보기 좋은데 그냥 두지 왜 자꾸 쓸어버리시는 거에요?” 노모는 아들 잔소리에 아무도 안 볼 때 구석에 있는 것들만 슬쩍 쓸어서 보이지 않게 시꺼먼 비닐봉투에 담아 대문 밖에 내어 놓습니다. 내 눈에는 정취 있는 낙엽이지만 당신에게는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  누구보다 가까운 모자지간이래도 서로 물러서기 힘든 한판승부입니다.


 이 세상 삶이 이렇습니다.  모든 개체들 사이에 놓여있는 넘어설 수 없는 이 아마득한 ‘차이’. 그래도 낙엽을 두고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한걸음씩 양보를 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저 길거리를 덮고 있는 ‘탄핵반대’ 태극기 물결을 보며 노모와 나는 저들에 대해 아득한 거리감을, 그리고 도무지 그 거리를 좁힐 수 없는 이 현실에 절망감을 느낍니다. 


 이 세상 모든 개체들 사이의 ‘차이’는 좀처럼 넘어설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 태극기 흔드는 노인들처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자신들과 생각이나 이익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 종북 빨갱이로 몰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늘 이리도 고통의 바다입니다.


 매일 성당 미사에 나가는 노모는 하느님을 탓합니다. 

 “아니, 하느님, 세상을 왜 이리 놓아두십니까?”

 “저 답답하고 무지한 노인들을 어찌 저리 놓아두십니까? ”

 “제발 저 사람들을 좀 깨우쳐 주세요.”


 하지만 사실 노모가 매일 미사 때마다 기도를 바치는 상대인 예수님도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이 세상에 의해’ 붙잡혀 매 맞고 꼼짝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의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서 무소불위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이 세상을 평정하고 다스리는, 절대군주 같은 ‘분’이 아니신 건 분명합니다.


 <주역>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도(道)는 “백성들이 일상에서 늘 쓰고 있음에도 제가 그러고 있는 걸 알지 못하고 (百姓日用而不知; 백성일용이부지), 도(道)는 ‘어짊, 자비,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세상의 작용 안에 숨어 있다(懸諸仁 藏諸用; 현제인 장제용).”


  이 구절에 나오는 ‘도’(道)를 불교의 ‘공’ (空)이나 부처, 기독교의 ‘하느님’으로 바꾸어도 뜻은 그대로 통합니다. 부처님, 하느님은 어디 먼 서방정토나 하늘나라에서 우리와 다른 어떤 ‘존재’, ‘실체’로 계시는 게 아니고, 늘 우리 곁에 우리 안에 ‘힘’이 아니라 자비, 사랑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시고, 

세상의 모든 작용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어린 백성’인 우리는 이걸 모르니 그저 딱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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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에서도 ‘만일 여래(如來) 부처님을 색(色), 즉 어떤 ‘모습’으로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들으려 한다면 그건 잘못된 길이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고 가르칩니다. 구 상(具  常) 시인은 이 가르침을 깨닫고 <말씀의 실상>이란 시에서 이리 노래했습니다.

 “영혼의 눈에 끼었던/ 無明(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萬有一切(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異蹟(이적)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 꽃도/ 復活(부활)의 示範(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蒼蒼(창창)한 宇宙(우주), 虛漠(허막)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象徵(상징)도 아닌/ 實相(실상)으로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당의 낙엽을 두고도 노모와 나는 차이를 절감합니다. 이 세상 모든 개체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보듬어 안는 게 어짊이요 자비요 사랑이라. 이는 바로 도(道), 부처님, 하느님의 모습 드러내심이니 ‘懸諸仁(현제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기적이요, 이 창창한 우주, 허막의 바다에서 모래알 보다 작은 내가 오물거리고 있슴도 도(道), 그 분의 은혜요 작용이니 ‘藏諸用(장제용)’입니다.    


<공동선> 발행인 김형태 변호사

 이글은 <공동선 2017. 1,2 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별들의 큰형님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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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선원 주지 육허 스님


그는 ‘별’들의 형님이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무엇이든 들어주는 ‘예스 스님’이다

그들이 출가 전 자기 모습 같단다

 

10대 때 권투선수 하다 뼈 다쳐 방황

20대는 반은 건달인 ‘반달’

 

30대 중반에 산속 움막 짓고 주역 공부

우여곡절 끝에 출가해 포교당 맡아

 

조폭까지 협박하는 빚더미에 파산

스트레스로 대장암 4기

 

권투 하던 배짱으로 병마 물리쳐

시신도 장기도 기증

 

가해자-피해자 가르면 범죄 더 악랄

남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깨닫게



육허14-.jpg» 경기도 남양주 오남읍 팔현리 천마산 기슭 동국선원에서 셀티종인 애견과 함께 한 육허 스님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팔현리. 천마산 기슭 마을 주택가에 있는 ‘동국선원’ 주지 육허(54) 스님은 ‘별’들의 형님이다. 그는 교도소와 구치소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올겨울 최고 한파가 몰아친 지난 13일 그를 찾았다. 현관문을 열자 온기라곤 없는 냉골이다. 객이 거실에 앉은 이후에야 난방기를 끌어다 튼다. 내핍이 몸에 밴 그지만 교도소에 갈 때만은 큰손이다. 소형차엔 막 쪄낸 떡이나 빵이 한가득 실린다. 형편이 어려운 재소자에겐 영치금도 넣어준다. 재소자들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해서 그는 ‘예스 스님’으로 통한다. 그는 ‘20년 동안 재소자들을 돌보고, 내 공부를 하겠다’고 원력을 세운 지 17년이 됐다.

 그는 “재소자들을 보면 내 전생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스님들은 출가 전의 삶을 전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1970년대 인기 있던 권투를 했다. 중3 때는 소년체전에서 입상도 했다. 그런데 18살 때 빗장뼈가 나가 권투를 그만뒀다. 꿈이 좌절되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그는 20대를 ‘반달로 보냈다’고 했다. ‘(폭력)조직’ 같은 데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반은 건달로 살았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시절이었다.


사법시험 준비생 둘과 의기투합

 제 뜻대로 되는 게 없자 그는 미래를 꿰뚫어보는 도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30대 중반이던 1997년 고향 부근인 대구 팔공산 오도암 터로 숨어들어갔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폐사 터에 움막 하나 짓고 주역을 공부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채 3년이 되자 명망 있는 역술인들과 일합을 겨뤄볼 만한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러 입산한 두 도반을 만났다. 출세와 출가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 도반들과 스승이 될 만한 ‘큰스님’을 찾아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로 간 어느 날 셋은 밤새 술을 마시고는 바람결에 들었던 한 은둔승을 찾아갔다. 비가 흩날려 질척거리던 산길을 겨우 오르자 간판도 법당도 없는 초라한 토굴이 나왔다. 스님은 라면을 끓여 왔다. 객들이 신발에 묻혀온 진흙들로 멍석도 질척거렸다. 멍석 위에 놓인 스님 앞의 라면 그릇이 엎어져버렸다. 그런데도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라면을 두 손바닥으로 쓸어 모아 다시 그릇에 담았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라면을 먹었다. 불경에서 본 ‘불구부정’(不垢不淨·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본래 없음)이었다. 쇼핑하듯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시비하고, 세상사나 탓하던 젊은 객들의 악취마저 은둔승은 흔쾌히 마시고는 향내를 피워냈다. 토굴을 나온 그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셋 모두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아래 삼거리에서 셋은 헤어져 모두 출가했다.

 육허 스님이 찾아간 곳은 충남 금산 대둔산의 도인이라는 태고사의 노승 도천 스님이었다. 금강산에 출가해 평생 노동 속에서 수도해온 도천 스님을 시봉하며 2년을 지냈다. 그러다 인연 따라 광주 무등산 보현사를 거쳐 경기도 광명 도심 포교당에서 고용 스님으로 부전을 살았다. 무리하게 빚을 내 포교당을 연 주지가 구속되면서 그가 뜻하지 않게 절을 떠안게 됐다. 그는 그곳에서 영등포교도소와 5공수부대에 나가 사회 포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연 걸리듯 걸린 빚이 그를 조여왔다. 조직폭력배들까지 협박해왔다. 그는 포교당이고 뭐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러나 이미 법당에 조성된 천불(1천 불상)을 두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불상들을 고물상에 팔아버리라고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광명의 포교당에서 빚잔치를 하고 서울 금천구의 허름한 포교당으로 천불을 옮겼다. 이사업체를 부를 돈도 없어서 1층부터 4층까지 천불을 손수 져 날랐다. 그날 밤 얼마나 힘들고 서럽던지 밤새 울었다.


도천기도-.jpg» 육허스님이 출가해 처음 2년간 시봉했던 충남 금산 대둔산 태고사의 노승 도천스님(왼쪽)과 태고사에서 30년간 기도만 했던 기도스님



 대장과 직장 대부분과 간 30% 절제

 그때 받은 스트레스로 결국 몸에 사달이 났다. 그는 2007년 대장암 4기 선고를 받았다. 1차 수술에서 의사는 아기 머리통만한 암이 골반에 떡처럼 박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다며 그냥 덮었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만이라도 출가자답게 마치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발심했던 오도암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기도하며 몸을 벗을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시보다 생생한 꿈을 꿨다. 자기가 죽어 병풍 뒤에서 향내를 맡고 있는데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중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쉰도 못 돼 저런 몰골로 죽는다는 말이야”라는 비아냥이었다.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선 후생조차 기약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암전문병원으로 가 떼를 썼다. 의사는 암 절제에 성공한다 해도 휠체어를 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재검진에서 암은 이미 직장과 간과 림프까지 번졌다고 했다. 천행으로 골반에 박힌 암 제거에 성공했다. 그러나 4번의 수술로 대부분의 대장과 직장, 간 30%와 림프까지 절제하고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퇴원해서는 양쪽 옆구리에 장루(인공항문)와 항암제를 찼다. 허약해진 그는 겨우 일어나도 한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미음을 먹어도 모두 토했다. 그런데도 교도소와 군부대 법회엔 가겠다고 우겼다. 법회를 가기 위해 한술이나마 미음을 넘겼고, 기다시피 교도소로 향했다. 학교 운동장에 나가 운동도 시작했다. 처음엔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권투를 하던 배짱으로 병마와 싸웠다. 결국 몇 달 뒤엔 관악산 정상까지 48분 만에 뛰어오를 수 있었다. 평생 달고 다녀야 한다는 장루까지 떼어냈다. 



육허108배2-.jpg육허대담2-.jpg

하루도 거르지않고 아침마다 108배를 올리는 육허 스님(왼쪽), 육허 스님이 제자 현공(왼쪽)과

학비를 대주는 승가대 비구니 스님 등과 함께 차담을 나누고 있다.



 최상도 최하도, 상하좌우도 없는…

 그가 죽음에서 기어나와 예닐곱명의 지인들과 함께 시작한 게 <금강경> 법회였다. 매달 한 번씩 열린 법회에서 승가대도 강원도 다닌 적 없던 ‘반달 스님’은 독특한 해석을 내놓곤 했다. 가령 ‘아뇩다라삼보리’(무상정등정각)는 통상 ‘최고의 깨달음’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최상이라는 게 본래 없다. 최상이라고 하면 벌써 상(相)에 걸린 것이다. 최상도 없고, 최하도 없다. 상하가 없고, 좌우가 없고, 너와 내가 없으니 이름하여 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재소자 교화에도 ‘불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법이 절실하다고 한다. 범죄자를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인간말종시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려고만 들면, 범죄는 진화하고 더욱 악랄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둑이 외아들 대학 등록금을 훔쳤는데, 아들이 그 돈을 소매치기 당하면 그 도둑 심정이 어떠겠는가”라고 물으며, ‘타인의 고통이 내 고통임’을 깨닫게 했다.

 전국의 교도소에서 별들과 절친이 되다보니, 지난번 법회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 집에 들어온 강도가 돈을 챙긴 뒤 딸을 겁탈하려다 벽에 길린 동국선원의 달력에 적힌 ‘육허 스님’이란 글씨를 보고, “육허 스님을 아느냐”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육허 스님이 교도소 가신다면 떡을 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했더니, 훔친 돈까지 놓고 인사를 하고 도망가더라는 것이다.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결실이 있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인연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금강경> 한 품씩 매달 1회씩 32품을 끝내고, 그가 맨 먼저 한 것은 시신 기증과 장기 기증이었다. 함께 공부한 사람들도 따라 했다. 법회에 빠지지 않았던 조각가 현공은 오는 3월 출가하기로 했다. 불교계에선 화가로 이름이 알려진 부친 무공스님이 열반한 뒤 절까지 빼앗기고 쫓겨나 한 때 원한에 사무치기도 했던 현공은 “스님과 함께 금강경을 공부한 뒤 원한이 쉬어지고, 내가 그 절에서 나올 때가 되어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공부를 시켜준 그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 요즘은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육허 스님은 최근 남양주시 화도읍 달매산 정상의 기증받은 땅에 약사여래불을 다음달까지 모신다. 모든 중생들의 병 치료를 기도하기 위해서다. 아픈 이들이 스님 눈치볼 필요도 없이 자기 기도만 하고 가는 기도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생엔 가난한 집에 태어나 의사가 된 뒤 출가해 출가자로서 몸과 마음의 병을 동시에 치료해주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다. “왜 하필 가난한 집이냐”고 묻자 “부잣집에 태어나면 나태해져서 출가 같은 건 생각지 않을 것 같아서”란다. 몸과 마음을 비워 더욱 가벼워진 그가 날다람쥐처럼 산을 오른다. 병조차 애초 없었던 것인가.

 남양주/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노동의 영적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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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 후 배달 일을 했다. 생활이 흐트러질 때마다 지국에 들어갔다. 지국은 배달하는 이들이 함께 먹고 함께 자는 공동체였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새벽일 하고 함께 밥 먹는 그곳은 내게 지치고 가난한 마음으로 찾아가던 수도원이었다. 민주화와 언론개혁에 함께한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배달 뒤에도 <한겨레>를 몇 부 더 가져가 마주치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낮에도 도서관, 식당 같은 데 두곤 했다. 


 <한겨레> 독자는 까칠한 사람들이 많았다. 배달이 늦거나 분실되면 바로 전화가 왔다.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한겨레>를 기다리는지 알기에 밥 먹다가도 뛰쳐나가야 했다. <한겨레>는 목마른 이들의 샘물이었다. 몇 년 동안 배달하는 사이 배달하는 사람의 어려움을 헤아리고 격려해주는 독자들이 점차 늘었다. 배달 노동이 주목받고 존중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당시 <한겨레> 독자들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집, 엘리베이터 없는 다세대나 연립주택, 그것도 높은 층에 많이 살았다. 주로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는 내겐 배달이 녹록지 않은 집들이었다. 좀 높아도 여러 집이 있으면 좋으련만, 열심히 4, 5층 뛰어올라 겨우 한 집. 이렇게 몇 번 배달하고 나면 다리는 후들거리고 마음마저 출렁거렸다. 그나마 오토바이를 타면 가파른 길에는 꽤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자전거가 좋았다. 오토바이는 일을 좀 편하게 해주고 시간도 줄여주지만, 운동이 주는 상쾌함이나 기도하는 마음이 잘 생기지 않았다. 속도감에 마음이 쉽게 홀리고, 긴장된 집중을 일으켜, 더 지치게 만들었다. 


 배달 끝나고도 잠이 덜 깨 몽롱한 적도 많았다. 속도감에 홀린 마음과 긴장된 집중은 노동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위협했다.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배달하는 게 노동과 기도에 늘 훨씬 도움 되었다. 청소기 돌리지 않고, 몸 굽혀 비질, 걸레질하는 게 마음을 더 밝게 만드는 것처럼. 약간 불편하고 늦어도 몸이 지닌 힘으로 하는 노동이 소중하다는 게 느껴졌다. 모든 큰 가르침과 수행 전통은 한결같이 노동으로 하는 기도와 단순 소박한 삶을 소중히 여긴다. 


 ‘밝은누리’로 함께 살면서 같은 걸 깨닫는다. 공동체는 먹고 입고 자고 일하는 일상이 곧 기도와 수행이 되도록 힘쓴다. 가능한 기계에 의지하지 않고, 함께 힘 모아 밭 생명 돌보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든다. 마을밥상에서 함께 밥 먹고, 아이들 돌보고 가르치며 더불어 산다. 서울 강북구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에서 농촌과 도시가 서로 살리는 마을공동체를 일구었다. 

 

밥상 부산물은 뒷간 똥오줌과 함께 밭으로 돌려보내고, 씨앗과 만난 그것들이 먹을거리가 되어 다시 밥상으로 돌아온다. 더불어 사는 삶은 노동을 상품으로 전락시키지 않게 돕는다. 그런 노동과 기도는 마음을 깨우치게 하고, 꿈을 오늘로 살게 하는 힘이 있다. 

 최철호 밝은누리 대표

자기부터 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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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부터 먼저 ‘안아줘’


재독 이승연 심리치유사

“발 밑의 지반이 흔들리고

인생이 무너질 것 같을 때

자신을 위로하는 법 알아야”



제가 살고 있는 북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는 북해로 나가는 엘베강 하구에 있습니다. 바람이 쉬는 날이 거의 없어 변덕스러운 날씨와 길고 어둡고 추운 겨울 때문에 이곳 사람들에게 철저한 준비성이 생긴 듯합니다.

 새해의 첫주, 심한 폭풍이 방파제를 넘어 해안지방의 주택이나 시설물들은 많이 무너지고, 차량들은 서로 부딪히며 물살에 떠내려갔습니다. 이런 재난은 대부분 겨울에 생겨 더욱 참담한 심정인데, 그곳 주민들은 떠나지 않고 복구하고 더 잘 준비해서 계속 살아갑니다. 도대체 그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예기치 못한 폭퐁우가 몰아치곤 합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등 뒤에 비수가 꽂히는 듯, 목구멍에 무엇이 꽉 처박혀서 질식할 것만 같고, 온몸의 힘이 사지로 빠져나가는 듯한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재난 대책 같은 건 없을까요? 마음의 방파제는 얼마나 높이 쌓아야 해일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발밑의 지반이 흔들려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을 때,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딸아이가 세살 정도 되었을 때 제가 그린 작은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는 뭔가 잘못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세살짜리가 한 잘못이라는 게 엄마에게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 스스로는 무척 속상했던 모양입니다. 엄마마저 자기에게 상냥하지 않고 멀어진 것 같다는 불안이 엄습했나 봐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안아줘!”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내 마음이 아프니 그렇게 멀리 있지 말고 좀 위로해달라는 호소였어요. 자신의 아픔을 알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이 아이에게 저는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그렇게 표현해주는 게 너무나 고마웠어요.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크기변환_안아줘.jpg» 이승연 화백이 딸이 어렸을 때 그린 그림


 다음날 작업실로 달려가 아이의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제 성년이 된 딸아이는 그 그림을 보며 자기의 아픔을 안아주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게 되었습니다.

 작건 크건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깨닫는 자체가 ‘재난 대책’의 최우선입니다. 우리 내면의 기상청이라 할까요. 그다음엔 ‘안아줘’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안아달라는 사람은, 자신부터, 내치지 말고 안아주세요. 재난이 왔다고 고향을 떠나지 않듯, 폭풍과 해일에 생채기 난 자신이라면 안아주고 격려해주세요. 우선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성찰은 그다음입니다. 

 이승연(재독 심리치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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