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정교회의 뿌리, 비잔티움
그리스는 신화나 철학의 나라가 아닌 기독교 국가가 된 지 2,000년이 다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화는 미신으로 치부되어 신전은 파괴되었고, 그 흔적은 박물관에, 폐허의 부서진 대리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앙을 저해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십상인 ‘철학’도 지워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2,000년가량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오토만)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1830년 지금의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그리스를 지배한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는 이스탄불(비잔티움)이었다.
현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인들에게 독립 투쟁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적대감이 크다. 정교회 신자인 자신들과는 다른 무슬림이어서 더욱 그렇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도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이었다. 비잔티움은 동방정교회 국가인데다 그리스어를 쓰고, 모든 대학과 도서관에서 그리스의 원전을 가르치고 보존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를 계승했기 때문에 현대의 그리스인들도‘자기 국가’로 여긴다. 그리스 어디를 가나 현대 그리스 국기와 함께 노란색 비잔티움 국기를 거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현대 그리스인들의 성소는 고대 그리스의 상징인 파르테논 신전보다 오히려 지금은 터키 땅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티움의 상징, 성소피아 성당이다.
기독교는 그리스 신화의 시대를 끝냈고, 그리스인들은 이미 비잔티움 시대에 완전히 기독교화 됐다. 인구의 98퍼센트가 동방정교회 신자인 현대 그리스인들이 신화를 박물관에 가두고, 어디서나 비잔티움의 종교성을 부각시키는 이유다.
비잔티움의 역사는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1,000여 년 역사의 서방 로마를 버리고 동방(아시아)으로 인식됐던 비잔티움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에서 이미 17년 전인 313년 그간 박해했던 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했다. 다신론적인 기존 종교보다는 유일신교가 방대한 영토와 민족들을 하나로 묶는데 용이하다고 여겼던 그는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는 수많은 논쟁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가 천도를 결행한 것도 새로운 종교와 함께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 공인과 천도를 선언함으로써 로마는 급속히 퇴락하고, 146년 뒤인 476년 멸망 후, 비잔티움의 황제에 대항하는 가톨릭교회 수호자 정도의 위상만 남는다.
비잔티움은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란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불린다. 콘스탄티누스 1세를 이어 2년 뒤에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재위 379∼395)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그리고 신전령을 몰수하고,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킨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5년 사망하면서 열여덟 살의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겐 동로마(비잔티움)를, 열한 살의 차남 호노리우스에겐 서로마를 통치하게 하자 동·서 로마로 본격 분열된다. 서로마 제국은 이때부터 71년 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비잔티움 제국은 그 후에도 1,000년을 이어간다. 그런데도 동로마는 동방정교회와 한통속이라 여겨졌기에 가톨릭 중심의 서구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면서 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리스 문화를 정착시킨 비잔티움(동방) 교회는 라틴어를 쓰며 라틴문화를 이은 로마의 교황청과 대비된다.
양쪽 교회가 공식적으로 분열된 것은 비잔티움 교회의 총대주교와 로마의 교황이 서로를 동시에 파문한 1054년이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20대 무슬림, 술탄 메흐메드 2세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돼 멸망함으로써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열린다.
<그리스인생학교>(조현 지음, 휴) '5장 하늘 위의 수도원, 메테오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