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명의 아이를 출산한 ‘다산의 여왕’ 쉬모쳐
당시의 중세유럽에는 산부인과병원 같은 것이 당연히 따로 없었다, 아니 오늘날 같은 의료혜택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주로 조산원들의 도움으로 집에서 출산을 했는데, 이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산모와 신생아가 죽음으로 이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출산을 앞 둔 산모들은 그 불안감이 커짐은 당연했다. 산모들은 성당을 찾아 순산기원을 하면서 종교에 매 달렸다. 그러함에도 이런 두려움을 다 떨 칠 수가 없자, 이런 출산의 불행을 예방 할 수 있다는 부적까지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
이와 같은 출산의 위험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을 한 용감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독일 바덴뷔텐베르크 주의 뵈닉히하임 출신으로, 이름이 바르바라 스트라츠만(1448~1503)이다. 처녀적 이름이 ‘바르바라 쉬모쳐’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바르바라 스트라츠만’이 되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던 이 여인은 남편과 함께 신뢰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리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죽고 난 후 사람들은 그들을 기념하는 애칭으로 ‘에와 쉬모쳐 여인’ 또는 ‘아담 스트라츠만’라고 붙여 주었다. 성서에 나오는 이름 아담은 남자에게, 에와는 여자에게 붙인 것이다.
왜 이런 이름들이 덧붙여 졌을까? 쉬모쳐가 53명의 아이를 낳았기 때문인데, 이 사실은 문서기록에 남아있다. 물론 이 아이들 중에는 유산된 아이들, 세례 받기도 전에 죽은 아이들, 성장 하지 못하고 일찍 죽은 아이들까지 아무튼 다 포함된 숫자다. 근데 55년간 살았던 여자가 어떻게 이 많은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단 말인가? 29번 출산하는 동안 ‘53’명이라는 아이를 어떻게 낳았을까? 그 숫자가 어떻게 가능할까? 사 호른베르크의 성城도서관에 보관된 기록문서에 따르면, 이 여인은 열여덟 차례는 아이 한 명씩 출산하고 그 다음 다섯 번은 쌍둥이, 네 번은 세 쌍둥이, 또 한 번은 여섯 쌍둥이 그리고 한 번은 일곱 쌍둥이를 낳았다고 한다. 간단하게 숫자로 표현해보면, 18번 출산×1명=18명, 5번 출산×쌍둥이=10명, 4번 출산×3쌍둥이=12명, 1번 출산×6쌍둥이=6명, 1번 출산×7쌍둥이=7명 해서 총 53명이니 그 숫자가 딱 맞다.
하지만 이런 바르바라 쉬모쳐의 다산에 대해 현대 의학자들은 회의적인 견해를 밝혔다. 특히 헤르만 크리크 -교수와 라인하르트 박사는 1990년 5월 12일자 ‘하일보르네 스티메 라는 신문에서 현대 의학적 근거를 들이 대면서 그녀의 출산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언급하였다. ‘한 여인이 스물아홉 번 출산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거의 해마다 애를 낳고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라는 거다. 그리고 의학적으로도 쌍둥이를 낳을 확률을 예를 들어보면 ‘6쌍둥이는 32,768 밀리아르덴(Milliarden: 10억) 출생 중에 한 명, 7쌍둥이는 262,144 밀리아르덴(MiIliarden: 10 억)중에 한 명’ 이 나온다는 통계를 제시했다. 계산이 잘 안 되기에 필자는 10억라는 숫자만을 나열했다. 확률로 따져도 무지 어렵다는 뜻임이 틀림없다. 이들은 이 외에도 현대의학의 근거를 조목조목 대면서 불가능하다는 의학적인 의견 제시를 했다.
이런 통계와 견해들은 전문적인 의학 부분이니 일단 전문가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바르바라 쉬모쳐에 대한 보존된 문서들을 가지고 얘기를 펼치고자 한다. 1498년에 살았던 프리드리히 도임링이라는 법무관은 바르바라 쉬모쳐가 53명의 어린이를 낳은 것은 ‘확실한 사실史實’이라는 자필 등록을 한 문서를 남겨 두었고, 또 위에 이미 언급된 호른베르크의 성城도서관에도 이 기록문서가 보관 되어있다는 거다. 이 지방 향토 역사학자 쿠르트 사르토리우스도 오늘날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의문스러운 일이지만 역사 속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무수히 많이 전해져 온다면서 그녀의 출산사실을 강하게 지지했다.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 아이들은 그 당시 뵈닉히하임 부근에 있던 수도원에서 데려온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당시의 여자 수녀원 수녀들과 남자 수도원 수도승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의문을 던지자, 쿠르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이 부근에 수도원이 있긴 했지만 먼저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데다가 그곳에는 남자 수도원만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는 질문 자체를 일축해 버렸다. 그리고1600~1631년 사이에 게멩겐 출신의 마이드하르트라는 이가 이 여인에 대해서 자기의 가족사 연대기에 언급 했다는 것을 프롭스트가 밝혔다.
또 하나 첨부된 사료에는 막시밀리안 1세(1459~1519)가 이 여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는 기록이다. 왕이 이 도시 부근에 잠시 머물렀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들려준 것이 틀림없다고 역사가들은 강조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이렇게 전설과 실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얘기가 여성운동가로 잘 알려진 유명한 시몬느 베이유와, 중세의 저술가이자 여성 철학자인 크리스티네 데 피산(1364~1429)등과 함께 ‘특출한 여인들-여성주의와 가족’ 이라는 저서에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실렸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다.
그녀가 살았던 도시인 뵈닉히하임의 교회 안에는 1500~1525년 사이에 그려진 그녀의 가족의 그림이 걸려있다. 제목은 ‘독일에서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바르바라 쉬모쳐 여인, 그녀의 남편과 53명의 아이들’ 이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 지을 수 있는데 38명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왼쪽에, 오른쪽 엄마 곁에는 15명의 딸이 서 있다. 또한 1650년경에는 펠리페 얀센이라는 사람이 이 그림을 동판화로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뷔텐베르크 도서관에 견본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에른스트 프롭스트에 의하면 쉬모쳐 외에도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다산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다분한 여인들이 있는데, 하나는 러시아 출신의 한 농부의 아내(1707~1782)가 69명의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이다. 이 여인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많이 낳은 여인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1990년대에 칠레에 살았던 한 여인으로, 이 여인은 55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바르바라 쉬모쳐는 독일에서는 단연 ‘다산의 여왕’이지만 세계 순위로는 3등쯤 되는 것 같다. 러시아와 칠레의 여인들에 관해서는 프롭스트가 더 이상 밝힌 바가 없지만, 어쨌든 바르바라 쉬모쳐는 고문서실에 남아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보면 53명을 출산한 여인임이 분명 하다고 본다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