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깸]
지난 2002년 얼음폭풍으로 도시 전체가 마비된 미국 더램시
개구리처럼 깨어나자
처음엔 얼음폭풍인지 몰랐다. 2002년 겨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더램에 큰 눈이 내렸다. 도서관에서 기말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유학 초년생이었던 나는, 처음엔 고딕 건물을 배경으로 홀연히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마냥 겨울 정취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낭만은 곧 재앙으로 바뀌었다.
눈은 지면에 닿자마자 얼음으로 변했고, 세상을 금세 겨울왕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아름드리나무는 무게를 못 이기고 결국 자빠져 전신주를 넘어뜨리고 전선줄을 끊어버리고 도로를 가로막았다. 한 겨울 온 도시가 정전이 되었다. 긴급 재해경보가 발효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서야, 난방 끊긴 집에서 덜덜 떨고 있을 아내와 아기가 생각났다. 급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학교는 난장판이었다. 대학병원 덕에 학교에는 자체 발전소가 있어서 전기가 끊이지 않자,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살림살이를 짊어지고 온 가족을 이끌고 학교로 모여들어 난민촌을 이루었다. 강의실 곳곳에는 침구가 깔렸고, 아이들은 복도를 내달렸고, 그 와중에도 학생들은 과제와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다행히 난리 통에서도 나는, 아기를 데리고 용케 학교로 대피한 아내와 상봉할 수 있었다. 그 해 겨울은 끔찍했다.
그래도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옆집 유학생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아내와 아기는 꼼짝없이 집에 갇혔을 것이다. 기숙사에 사는 친구는 급하게 빠져 나오느라 이부자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우리 가족을 위해 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은 불쌍한 우리 가족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저녁 무렵, 둥그렇게 모여 앉아 ‘어쩌면 시험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실없는 희망을 늘어놓으며 교수 학생 모두 희희덕 거리며 긴 밤을 보냈다. 그렇게 나는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돌봄과 나눔의 공동체를 경험했다. 그 해 겨울은 따스했다.
필자의 부인 최윤희씨의 캘리그라피
신약성경에 오병이어 기적은 헤롯 왕 이야기 다음에 나온다. 로마 제국의 괴뢰정부로서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한 헤롯 정권은 자신의 비리를 지적하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벤다. 그 다음에 바로 이어 오병이어 스토리가 등장한다. 타락한 살인 정권 치하에서 백성들은 굶주렸고, 제자들은 이들에게 마을로 돌아가서 각자의 경제력으로 먹을 것을 구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백성을 불쌍히 여긴 예수는 광야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다. 결국 그들 모두는 자발적 나눔을 통해 제공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먹고 함께 배부르게 된다.
지금 우리 사는 세상도 비슷해 보인다. 흉측한 정권의 비리와 오만한 재벌의 난동으로 올해도 분명 고통스러운 한 해가 될 것이다. 무능한 야당의 헛발질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서슬 퍼런 일제 말기, <성서조선>의 김교신 선생은 죽지 않고 동면에서 깨어나 전멸은 면한 개구리 떼를 바라보며 해방의 소망을 노래했다. 우리도 얼음폭풍 속에서도 돌봄과 나눔의 오병이어 공동체를 이뤄가며, 전멸은 면해보자.
남오성 목사(일산은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