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다
-도형석을 만나다
일을 저질렀다. 나이 먹으면 점잖이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철들지 않은 모양이다. 페이스북에 덕유산 설경이 떴다. 가보고 싶었다. 복병이 있었으니, 겨울산은 혼자 가면 안 된다. 여러모로 위험하다. 더욱이 덕유산은 초행길이다.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곤욕을 치르게 되어 있다. 후배에게 연락했다. 가보자고. 모객이 되었다. 대학시절 함께 교지를 만들었던 후배들하고 가기로 했다. 양재시민의 숲 역에서 모이기로 했다. 서울에서, 부천에서, 시흥에서, 일산에서 살던 동문이 한 곳에 모이기로 했다. 아, 대구에 있는 후배는 무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아직 젊어서인지 아예 밤늦게 내려가 새벽산행을 하자고 성화였다. 이런, 경로정신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오십 줄 넘은 선배랑 산에 가는데 예의가 없다. 일찍 만나 천천히 내려가 잠자고 아침에 산에 오르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직은 영이 섰으니, 일정이 조정됐다. 아쉬운 것은 일월에 가야 상고대를 볼 수 있는데, 이월에 오르기로 한지라 눈이 호강하는 기회는 놓쳤다.
이번 산행준비에 가장 열을 올린 녀석은 도형석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지난번에 북한산 올라갈 때 후끈 달아올랐더랬다. 아버님이 주워 오신 등산화라는데, 아쿠였다. 한국인 족형에 가장 잘 맞는, 이탈리아 장인이 한 겹 한 겹 본드 칠해 만든 명품이다. 그럴 리 없다고 우기더니, 나중에 알아보니 주운 게 아니라 아버님이 오래전에 사놓은 등산화였단다. 등산복도 제대로 입지 못했고 배낭이나 스틱은 다 교체할 것들이었다. 왕초보가 북한산 타겠다고 달려온 셈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들으니, 산 타려는 이유를 알만했다. 다른 삶을 고민하는 사람한테 산이 얼마나 큰 벗이 되던가.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걷다 무엇을 고민했는지조차 까맣게 잊게 해주는 게 등산이니 말이다.
형석이는 대학 교지편집실 8년 후배다. 졸업하고도 후배들이랑 어울려 술 마시던 시절이 있던 지라 얼굴은 익었다. 하지만 무얼 하고 살았는지는 몰랐다. 후배들이 좋았던 것은, 학생시절 진보적 운동권으로 살았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 가치를 놓치지 않고 살려는 이들이 많아서였다. 그리고 의외로 사회생활 잘하는 거보면서 대견했다. 나는 늘 사회와 불화하며 사는데, 후배들은 제 갈 길을 잘 찾아갔다. 형석이도 그려니 했다. 무얼 하고 살았던지 잘살았겠지 하며 산을 탔다. 건강을 잃은 적이 있다는 것, 아내와 갈등이 심한 적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직장을 옮겼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한 결정이었단다. 산에 내려와 두부를 안주 삼아 막걸리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라, 이 녀석 재미있게 살았네, 라고 속으로만 되뇌었다.
한밤에 다섯 남자가 모여 덕유산 등반길을 놓고 옥신각신했다. 이랬다저랬다 코스가 자꾸 바뀌었다. 문제는 한 녀석이 분명히 중간에 퍼질 거라는 예상이었다. 수컷들이 모이면 이런 판단에 강하게 반론을 펴게 마련인데, 이 녀석은 반발하지 않았다. 지난번 북한산 산행에도 같이 했는데 중도에 포기하고 하산한 이유가 이 녀석 때문이었다. 그러다 코스를 확정했다. 덕유산 야영장에서 백련사로 가고, 백련사에서 향적봉으로 오르기로 했다. 향적봉에 대피소가 있는지라 여기서 점심을 해먹기로 했다. 라면, 막걸리, 소주, 삼겹살을 준비해 올라가기로 했다. 나는 가지고 올라갈 물품을 늘리자고 억지 부렸다. 선배 좋은 게 뭔가, 무거운 건 후배들이 다 이고 갈 텐데, 라는 못된 심보였다. 향적봉에서 능선을 타고 중봉으로 가고, 거기서 오수자굴을 거쳐 다시 백련사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후배들과 지도를 잘 살펴보니, 못내 아쉬운 코스가 있었다. 중봉에서 백암동을 거쳐 횡경재를 가면 그 자체가 백두대간이었다.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라, 다시 오마!
내가 다닌 학교는 서울과 수원에 캠퍼스가 있다. 당시에는 중복학과가 여럿 있어 분교 취급을 받았는데, 지금은 잘 정리되어 또 하나의 캠퍼스 기능을 하고 있다. 형석이는 90학번이다. 학생운동 퇴조기에 대학을 다녔고, 그것도 평등파적 관점을 강하게 드러낸 교지 편집실에서 활동했다. 수원캠퍼스는 자주파가 득세한지라 교지 후배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예산 삭감 위협을 받거나, 총학생회에 합치려는 움직임이 자주 있었다. 술자리에서 형석이는 총학생회 쪽에 불려가 20대 1로 맞짱 떴던 무용담을 자주 말했다. 주먹다짐을 했다는 말은 아니고, 이론투쟁을 했다는 말인데, 나는 그냥 한 귀로 흘려들었다. 추억은 늘 과장법을 특유의 수사학으로 무장하고 나타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형석이가 교지를 만들 적에 편집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운동체였다. 자기들끼리 하는 말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이루고 평등파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떵떵거린다. 또 한 귀로 흘려듣기는 하나, 운동성이나 진보성이 강한 후배들인 것은 분명했다. 문제는 소련 몰락 이후 겪은 대혼란이다. 명망 있는 운동가들도 궤도수정을 하는 마당이니 학생운동권이 받을 타격을 짐작할 만하다. 운동하다 도망가거나 군대 가거나 휴학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형석이가 겪은 고통도 비슷했다. 믿었던 선배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에서 사라졌다. 혁명의 불쏘시개가 되겠노라 설레발 쳤던 선배들이 사라지니 공황상태에 몰릴 도리밖에 없었다. 실망과 좌절이 겹쳤을 테다. 흔히 하는 방법을 따랐다. 군대에 갔고, 제대한 다음에는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갔더랬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밑밥을 충실히 준비했더란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했더라면 형석이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 테다. 그런데 학생운동 같이 했던 선배들과 사업한답시고 어울리다 다시 마음도 상하고 돈도 버리는 일을 겪었다. 한번은 LPG개조사업을 했다. 잘 나갔는데, 정비공장에 불이 나 망했다. 다른 일은 IT쪽이었다. 일은 많았는데 수금이 되질 않았다. 이러고저러고 버티다 결국엔 파산하고 말았다. 이때 진 빚 갚느라 고생 많이 했단다. 영어도 되고, 전공인 산업공학 살려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도 될 텐에 왜 굳이 선배들이랑 사업하느라 고생만 했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운동논리가 더 득세했던 모양이다. 잘 되는 사업체를 성장시켜 운동했던 후배들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때는 그랬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후배 챙기겠다고 설레발치는 일은 흔했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인데다,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이때 겪은 일은 형석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먼저 LPG 사업을 하면서 학생 때부터 영향을 끼친 선배한테서 삶의 자세를 배웠다고 한다. 학생시절에는 전위적이었고, 사회생활에서는 치열했다. 학생 때도 멋있었는데 사회생활도 본받을만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열정적으로, 정열적으로 살아가고 싶었다는 말이다 형석이가 좋아했다는 녀석은 당연히 나도 잘 안다. 뭘 하든지 잘 할 놈이다. 학생운동한 전력 때문에 경찰수배를 피해 다니던 시절에 영어공부를 해 다른 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더랬다. 그 녀석도 공대생이었다. 조직을 구성하고 장악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최근에는 고철 관련 사업체를 잘 꾸려가고 있다. 선배가 보면 노파심에 염려하는 바가 많지만 후배가 보면 배울 게 많은 건 분명한 녀석이다. IT 일하면서 빚도 많이 졌지만, 그 덕에 예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일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학원 쪽 작업을 했는데,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쪽에서 발탁해 갔다. 형석이에게는 삶의 도약대를 맞이한 셈이었다.
자세히 말하면 어느 학원인지 누구나 아는 데라 부담되는 모양이다(얼마 전 그 학원에서 다시 일해보지 않겠냐고 넌지시 제안이 들어왔다니 입을 다물어야겠다). 영어학원이었다. 이사장이 충분히 준비된 아이템을 들고 학원계에 투신한데다 일벌레라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IT라는 날개를 달아 성장속도에 가속도를 높이고 싶어했다. 의기투합했다. 성과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약속했다(물론 다 지키지는 않았단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기왕 하는 일이라면, 본보기로 삼고 싶어한 선배처럼, 열정적이고 정열적으로 덤벼들고 싶었다. 영어 돼, IT 돼, 적임자였다. 학원에서 원하는 바를 가장 정확히 알고 가장 효율성 높은 작업을 했다. 하는 사업마다 대박을 터트렸다. 학원의 성장세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본인도 이사로 승진했다. 더 신났다. 상승세가 눈에 띄니 더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출근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살았다. 프랜차이즈 사업체로 성장하다보니 성공한 젊은 학원장들도 여럿 나왔다. 모이면 룸살롱을 전전했다. 세속의 잣대로 보면 전성기를 맞이했다. 돈과 직위가 주는 힘에 매료당했다. 정말, 집에는 옷이나 갈아입으려 들렸다. 그런데 발목을 잡는 데가 있었다. 바로 가족이었다. 아내와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다. 대학 때부터 사귀어온 사이인지라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여겼는데, 아내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말과 행동을 자주 했다. 그러다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일요일에 출근하려 나가는데 아이가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인사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다. 하도 아버지를 제대로 못 보니 한 말이었다. 순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었다. 마음의 중압감을 몸이 눈치 챈 모양이다. 새벽에 검도하며 몸을 관리해왔지만,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형석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두 개의 열쇳말이 떠올랐다. 영구기관과 번 아웃. 바깥에서 에너지 공급을 받지 않고도 영구히 작동하는 동력기관을 영구기관이라 한다. 학생운동 시절, 사회변혁을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는 열정에 휩싸였던 이들의 장점은, 그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그 열정이 자신의 삶이라는 동력기관의 에너지가 되었다. 문제는 방향성이다. 사회변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공적 삶이라는 열망이 들어왔다. 우리사회가 의외로 운동권 출신을 수용한 데에는 이 열정에 대한 착취가 있었다고 본다. 열과 성을 다해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야만 비로소 존재에 대해 긍정하게 되는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서구와 다른 점이다. 서구는 열정보다는 변혁이라는 방향성을 더 높게 평가했다. 주어진 것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힘을 사회의 에너지로 흡수했다. 서구에서 혁신의 상징으로 이야기 되는 기업들은 대체로 68혁명세대가 창업자였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정치적 전위성이 삶의 경쟁력으로 전위된 사례는 결국 한병철이 말한 피로사회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결과를 산출해야 하는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이제 금지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진취성, 동기부여가 대신한다."라고 한병철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구기관의 악령에 사로잡혀 피로사회적 삶을 산 결과는 번 아웃일 수밖에 없다. 몸과 가정이 병들고 말았다. 형석이는 바로 이 늪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이 성찰의 힘이 그를 피로사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했다. 몸과 가정을 되살리기로 했다. 억대 연봉과 무제한 사용가능한 법인카드를 포기했다. 내가 형석이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다. 그런 늪에 빠졌으니 잘못 살았다고 지탄할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잘 살았니 못 살았니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우리는 청년시절에 품었던 진보성이 희석된 지 오래다. 겨 묻었거나 똥 묻었거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형석이는 쉽게 사로잡힐 수 있는 악령에서 스스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 삶은 칭찬할만하다. 아니, 선배랍시고 폼 잡을 일이 아니다. 그에게 배워야 할 삶의 자세다. 형석이는 이제 함께 할 대안의 삶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겨울 덕유산은 명불허전이었다. 구천동 계곡길도 좋았고 백년사도 인상 깊었다. 향적봉 대피소에서 삼겹살 안주에 마신 막걸리 맛은 쉽게 잊을 수 없다. 향적봉에서 중봉을 거쳐 오수자굴로 가는 능선은, 상고대를 대신해, 눈을 호강하게 해주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지리산과 눈에 덮인 백두대간은 환상이었다. 천천히 산행한지라 5시간 반 정도 걸렸다. 덕유산 갔다온 지 얼마 안 돼 형석이가 페이스북에 비오는 날 북한산 타고 힘들었다는 내용의 글과 사진을 올렸다. 또, 열심이군, 하는 생각이 퍼뜩 났다. 그래도 산에 열심인 것은 괜찮다. 걷다보면 성찰하고, 더 걷다보면 모든 근심을 잊게 되니까. 자주 타다보면 어느 봉에 오르는 것보다 긴 능선을 타는 게 더 좋다는 걸 알 테니까. 그게 목표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잠언을 뜻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겠지. 잠시 바짝 용을 써 오르는 것보다 속도 조절하고 몸 상태에 맞게 걷는 게 등산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그게 급진보다 중용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거라는 오래된 지혜를 뜻한다는 걸 깨닫게 될 터이니까. 제대로 살지 못한 선배가 후배에게 인생훈화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 되는대로 형석이와 산에 가는 일뿐이다. 잘 사는 법은 산이 말해줄 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