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 법웅 스님이 키르기스스탄으로 간 뜻은
법웅 스님(60)은 동안거(겨울 3개월 집중참선)와 하안거(여름 3개월 집중 참선)에 빠진 적이 없다. 1년 내내 산문을 봉쇄하고 참선 정진만 하는 조계종 유일의 종립선원인 문경 봉암사에서 군기반장격인 ‘입승’을 수년간 맡을만큼 그는 선방 내에선 고참에 속한다.
그런데도 그는 집도 절도 없다. 1978년 송광사 천자암의 활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법랍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주지 한번 맡아본 적이 없다. 상좌(제자)도 없다. 가진 것도 없다. 근래 몇년 동안은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방장 설정 스님을 모시고 안거를 났지만, 그는 구름처럼 떠도는 운수납자다.
그는 동안거가 끝나면 매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난다.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키르기스스탄은 같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보다도 우리에겐 생소한 빈국이다. 면적은 한반도 정도지만 인구는 548만명(2010년 기준)에 불과하다. 그가 가는 수도 비슈케크도 60만명이 살아,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규모에 불과하다. 국민의 80% 이상이 무슬림이다.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간 당나라의 삼장법사가 지나갔다는 것 말고는 불교와 인연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나라다.
그런데도 그는 어김 없이 올해도 동안거가 끝나자마자 짐을 꾸리기 시작했고, 오는 26일 키리기스스탄행 비행기에 오른다. 어쩐 일일까. 3개월 동안 정신의 힘일까. 덕숭산 산정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봄의 훈풍을 함께 내뿜는 그를 만났다.
법웅 스님이 키르기스스탄에 처음 간 것은 20년도 넘은 1993년이었다. 도반으로 강화도에 국제연등선원을 열었던 원명 스님(1950~2003) 때문이었다. 성철 스님의 상좌였던 원명 스님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조계종 총무원 내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아 올림픽선수촌 불교관을 맡았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이 불교관에서 성철 스님의 저서인 <자기를 바로봅시다>를 읽고 불교를 접해 중앙아시아에 포교를 제안하자 원명 스님이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쉬켄트와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등에 조그만 선방을 열었다. 그러면서 선승들을 만날 때마다 “중앙아시아에서 참선을 지도해줄 스님이 필요하다”고 사정했다. 그 때 지나는 말로 “그러마”고 한마디 했던 것이 빌미가 됐다. 어느날 법웅 스님을 길거리에서 만난 원명 스님이 “대장부가 한번 약속을 했으면 한철이라도 지도해줘야하지 않느냐”는 말에 그는 영락 없이 코가 꿰어 듣도보도 못한 비슈케크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비슈케크는 아비규환이었다. 구소련이 해체되어 연금이 끊기자 노인들은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지며 쓰레기더미 속 음식을 서로 뺏으려 다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고픈 배를 안고 참선을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일요일이면 주머니를 털어 빵 3백개씩을 사서, 노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렇게 외로운 섬에 홀로 표류하는 신세가 된 그가 선방이 아닌 삶 속에서 도를 닦기 시작한 것이다.
88서울올림픽 계기 조계종 포교 나서
“그러마, 한마디에 코꿰어” 93년 첫발
옛소련 붕괴로 독립한 ‘중앙아’ 빈국
3년뒤 귀국해 무연고 주검 ‘염’ 봉사도
해마다 안거 마치고 두차례 행장 꾸려
“부처도 삶의 현장에서 자비행 실천”
키르기스스탄은 무려 80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그 가운데 0.4% 가량인 2만여명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된 조선인 후세인 ‘고려인’들이다. 한국교포들을 찾아볼 수 없던 미지의 땅에서 그나마 고려인들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함께 일을 하는 도반이 되어주었다. 꼬박 3년을 비슈케크에서 보내고 귀국한 그가 간 곳은 선방이 아니라 여수의 한 병원 영안실이었다.
“키르기스스탄의 빈한한 사람들 속에서 3년을 있다가오니, 대궐처럼 장엄한 절 집안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실천하지않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안실로 향한 것이다.”
그는 그 곳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주검들의 염을 해주었다. 죽어서도 버림 받은 주검들을 정성껏 씻고, 옷을 입히고, 염불을 해주었다. 그렇게 7개월간 7백구의 주검이 이승의 몸을 벗고 떠나는 것을 도와주면서, 젊은 시절 괴팍하기 그지없던 그의 성격에서 해탈되기 시작했다.
그는 그 뒤 다시 원래의 선승으로 돌아갔지만, 키르기스스탄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매년 동안거가 끝나면 여비조로 선방에서 주는 해제비를 가지고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했다. 그래서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노인들을 모아 경노잔치를 베풀고, 쌀과 밀가루를 나눠 주었다.
"뭘 도와줬다고 할만한 건 없다. 내가 가져가는 몇푼의 돈은 잘 사는 나라라면 도움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키르기스스탄에선 1만~2만달러만라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고, 많은 병을 고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그 돈을 허비하거나 여행으로 돈을 쓰기보다는 그곳에서 그냥 함께 쓰는 것 뿐이다.”
3년 전부터는 현지 교포인 케이아이시은행 최광영 대표가 도움을 줘 어린이백혈병치료병원에 의약품을 사주고, 병원시트를 갈아주는 일도 하고 있다.
안거가 끝나면 그가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져갈 식재료 등의 짐을 꾸리는 것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인연 있는 도반들도 십시일반 보탠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과 선본사 주지를 하던 정묵 스님과 덕문 스님, 호압사 주지 우송 스님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법웅 스님은 “도예가 신현철씨는 키르기스스탄에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백자를 가져왔고, 이번 안거에 선방에서 밥을 해주던 공양주보살도 2백만을 보내왔다”며 “선방 아래에서 건설업을 하는 무한종합건설 심상천 대표가 건네준 5백만원을 합쳐 이번엔 재활치료기조차 없는 재활병원에 재활 기기를 사줄 수 있게 됐다”고 감격해 했다.
그는 선방에서 한평생을 지내온 선객이다. 선방의 상징이 주장자다. 그러나 그는 “어찌 부처가 이땅에 온다면 주장자만 들고 있겠느냐”면서 “백가지 천가지 모습으로 자기 본성의 모습을 드러내며 삶의 현장에서 부처행을 실천하지않겠느냐”며 웃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