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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사람들은 모를 공자와 노자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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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공자, 노자를 만나다(하)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

 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 이중성공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치는 덕으로써 함이니,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는데도 뭇별들이 그를 향하여 둘러서 있는 것과 같다.

-‘위정’편 1장

  

 


 

1. 거인(巨人)의 대화

46세의 공자와 60여세의 노담(老聃)이 나누었다는 대화에는 여러 이전(異傳)이 있다. 사마천이 ‘사실’로 채택해 역사의 일부가 된 짧은 언술이 있고, <장자> ‘외편’에 두 사람의 철학적인 ‘대화’가 7편 실려 있다.  좀 더 후대에 성립된 <예기>(禮記)에는 노담이 공자에게 상례(喪禮)를 지도한 일화가 등장한다. 그밖에도 공자와 노담(혹은 노자)의 관계에 대한 글들이 여기저기 산재①하나, 그 어느 것도 대화의 완결성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장자> 속의 대화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비유와 은유로 가득 찬 우화의 숲속을 헤매게 만든다. 마치 일부러 핵심을 감춰놓고 읽는 이들에게 찾아보라고 다그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아무튼 조각 조각의 파편을 모아 퍼즐을 완성하듯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낯선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의 ‘관계 설정’을 생각할 때, 한 사람은 40대의 연부역강한 장년이고, 한 사람은 60대 중반에 이르는 노인이라는 ‘나이 차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귀족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는 공자가 제후국에서 온 벼슬없는 무명의 사(士)이고, 노담은 주나라 태사(太史)를 지낸 대석학이라는 ‘지위 차이’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道), 덕(德), 예(禮), 인의(仁義)와 같은 철학적 주제를 대화할 수 있고, 정치적 식견과 열정을 우아하게 토로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수사학을 갖추고 있는 지 여부도 빼놓을 수 없다.


대화의 실질적인 주제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할 때는 공자의 공식 임무가 주례(周禮)의 습득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주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禮)를 집행하는 실무적인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큰 범주의 예란 사회 규범과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공자 일행은 주례 즉 주나라의 규범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밑받침하는 전범(典範)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노담이 고도의 지식인일 뿐 아니라, 혼란했던 주왕실 정치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정치적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대화의 내용’을 상상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런 그가 공자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면, 주례에 관한 학문적 대화 뿐만 아니라, 주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어떤 식으로라도 피력했을 수 있다. 아마도 서로의 지적 수준을 확인한 뒤에는, 두 사람이 심중의 정치철학까지도 서로 꺼내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자로가 훗날 회고했다.

“그때 우리가 보기에 노담이라고 하는 노사(老師)는 선생님이 유랑하던 시절에 만났던 피세(避世)의 은일자(隱逸者)들과는 분명 격이 달랐다. 비록 정치적 염세에 빠진 듯 했지만, 그의 근본 정치 철학은 성인(聖人), 즉 성왕(聖王)을 중심으로 한 덕치(德治)체제의 구축을 요체로 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적극적인 사회철학이자 강력한 군주론이었다.”

염백우가 보충했다.

“노담은 역사가이기도 한 사람, 그의 역사관은 정치의 흥망성쇠를 관찰한 경험의 축적에서 이루어진듯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역사철학은 ‘세상을 구원하라’는 일종의 정언명령에 가까와 보였다.”(이상, 김용옥의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인용·각색)


안연이 조심스레 말했다.

“스승님과 노담 태사는 모두 같은 고도(古道)의 전통 아래 있는 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일찌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탕이 외관을 앞서면 거칠고, 외관이 바탕을 앞서면 겉만 화사하니, 외관과 바탕이 알맞은 배합을 이뤄야 군자의 면모를 이룰 수 있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옹야’편 16장②) 스승님께서 ‘문질빈빈’을 말씀하실 때의 ‘질’(質)과 ‘문’(文)은 또한 ‘유’(儒)와 ‘사’(史)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두 분은 각자 유(儒)와 사(史)로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지적 전통을 함께 하는 동시에 고도의 지식인으로서 상대의 ‘문질빈빈’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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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2. 대화록 1- ‘도’(道)와 ‘덕’(德)

이와같은 증언들을 토대로 나, 이생은 선생님과 노담이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본다. 훗날 눈 밝은 이가 나타나 두 사람의 ‘대화록’을 완성할 때 하나의 ‘예시(例示)’로서 참고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공자 “일찌기 우리 조선(祖先)들께서는 도를 듣고 도를 전함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이인’편 8장)는 결사(決死)의 자세로 임하였습니다.”

 노담 “좋구려! 선비의 그 패기가! 그러나 만물의 심연이요 근원인 도를 어쩌 다 알 수 있으리오? 깊고 맑아서 마치 있는 듯이 여겨지지만, 나는 그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조차 모른다오.(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노자> 4장)”

   공자 “군자가 근본에 힘쓴다면 어찌 도가 생(生)하지 않겠습니까!”(君子務本 本立而道生-‘학이’편 2장)

 노담 “좋구려 선비의 그 밝음이! 보통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마음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낮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하긴 웃지라도 않으면 도라고 할 것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대와 이야기해 보니 ‘뛰어난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한다’(上士聞道 勤而行之-<노자>41장)고 하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니구려. 내 그대와 더불어 도를 논하는 것이 즐거울 것 같소이다.”

 공자 “사람(人)은 하늘의 도(天道), 땅의 이치(地理)와 더불어 삼재(三才)의 조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덕은 하늘과 땅과 짝하여 그것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며, 해와 달과 더불어 함께 빛나니 온세상을 밝게 비추면서 또한 아주 작은 존재라도  버리는 것이 없습니다.(天子(人)者 與天地參 故德配天地 兼利萬物 與日月 竝明 明照四海 而不遣微小)-<예기> ‘경해’편.

노담이 금을 끌어당겨 튕기며 노래로 화답한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른다.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으니   

 내가 이로써 중생을 살핀다. 

                                        

 내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니                                         

 글자를 붙여 도(道)라 이르고                                             

 굳이 말하라면 크다고 하리라.                                      

 도가 크니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 또한 크리라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느니라.                                            

 (孔德之容 惟道是從/自古及今 其名不去/以閱衆甫//吾不知其名/字之曰道/强爲之名曰大/故道大/天大/地大/王(人)亦大/人法地/地法天/天法道/道法

自然 -<노자> 21, 25장)

 

 공자 “선비는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는 자(志於道 據於德-‘술이’편 6장)이니, 모름지기 자기의 덕을 닦는데서 치도(治道)를 시작합니다. 자기를 수양하고(修身) 그것으로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나면 비로소 문밖을 나섭니다(齊家). 자기를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할 수 있는 품성과 능력이 있으면 비로소 안인(安人)의 도에 참여합니다(治國). 한 나라의 치도를 이룬 후에는 천하가 안정되는 일에 나아갑니다(平天下). 수신제가치국평천하!③ 이것이 선비된 자의 길입니다.”

   노담이 공자의 말을 듣고 읍하며 답한다.

 “그대의 생각이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구려.

 

 잘 세운 사람은 뽑아버릴 수 없고                               

 잘 끌어안는 사람은 벗어날 수 없다                           

 자손은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끊어지지 않게 한다.       

 자기 몸을 닦으면 그 덕이 곧 참되고                           

 자기 집안을 닦으면 그 덕이 곧 넘치고                       

 자기 고을을 닦으면 그 덕이 곧 오래가고                     

 자기 나라를 닦으면 그 덕이 곧 풍요하고                     

 천하를 닦으면 그 덕이 널리 퍼지리라.                      

 그러므로 자기로써 자기를 살피고                             

 집으로써 집을 살피고                                               

 고을로써 고을을 살피고                                          

 나라로써 나라를 살피며                                            

 천하로 천하를 살피느니라.                                             

 (善建者不拔/善抱者不脫/子孫以祭祀不輟/修之於身 其德乃眞/修之於家 其德乃餘/修之於鄕 其德乃長/修之於國 其德  乃豊/修之於天下 其德乃普/故以身觀身/以家觀家/以鄕觀鄕/以國觀國/以天下觀天下)

 

 외람되게도 내가 천하의 치도에 대해 왕공(王公)들에게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이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이상, <노자> 54장)”

   공자 “위정이덕(爲政以德)이라 하니, 치도의 요체는 덕치(德治)입니다”

 노담 “또한 무위지치(無爲而治)이니, 억지로 하지 않는 다스림을 일컫습니다.”

  

 천하를 취한 자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마지못해서였을 때 얻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어서                                        

 억지로는 취해지지 않는 법.                                        

 인위적으로 다투는 자는 실패하고                             

 인위적으로 잡으려 드는 자는 잃는다네.                       

 

 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네!                                                

 만약 왕자(王者)가 이와같을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돌아갈 것이다!                                   

 저절로 되는데도 무엇인가 억지로 지으려 든다면        

 내가 장차 이름없는 몽둥이가 되어 막으리라!            

 이름없는 몽둥이는                                                   

 무릇 또한 욕심이 없으니                                          

 욕심을 부리지 않아 고요하게 되면                             

 천하는 저절로 안정되리라!                                      

   (將欲取天下而爲之/吾見其不得已/天下神器/不可爲也/爲者敗之/執者失之//道常無爲而/無不爲/侯王若能守之/萬物將自化/化而欲作/吾將鎭之以無名之樸/無名之樸/夫亦將無欲/不欲以靜/天下將自定 -<노자> 29,37장)

 

3. 대화록 2-대동과 소강

다음의 대화는 정치의 요체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은 공자나 노담 어느 일방의 주장만이 전개된 것이 아니다. 요순 이래의 고도(古道)에서부터 당대의 정치현실에 이르기까지 두사람이 공히 알고 공감한 토론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몇년 후 공자가 노나라 사구(司寇·법무부장관)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고 있을 때, 제자 자유(子游·이름은 언언(言偃)이다. 오나라 출신으로 공문십철의 한사람이다)가 예의 운용(運用), 즉 ‘정치’에 대해 묻자, 선생님이 자세히 대답하신 내용이 후대에 전해진다. 나, 이생은 선생님께서 그때 하신 말씀이 어쩌면 이 ‘낙양의 대화’에서 연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여 여기에 간추려 옮겨 적는다.


대동사회론(大同論) 

(대동론(大同論)과 소강론(小康論)은 각각 유가가 설정한 이상적인 공동체상을 표현한 설이다. 특히 대동에 관하여 혹자는 유가가 묵가를 통합하여 만든 설이라고 하고, 혹자는 유가가 노자의 사상을 수용한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그 어느쪽이든 사상의 근본 뼈대는 유·묵·도가 공통으로 계승한 전통에서 발원하고 있다고 나, 이생은 보고 있다. 공자와 노담이 살던 시대의 뜻있는 사(士)들은 대체로 이와같은 이상을 품었을 것이다. 다만 본래는 추상적인 계시의 주문(呪文)이었을 것이나, 공자에게 이르러 비로소 구체적인 상(像)을 얻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대도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세상을 자기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고 공공의 것으로 여겼다(大道之行也 天下爲公).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아 쓰고 서로의 신의화목을 두텁게 하였다(選賢與能 講信脩睦). 자신의 어버이만을 친애하지 않았고 자신의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았다(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늙은 사람은 안락하게 그 수명을 다하게 하고(使老有所終), 장년의 사람은 충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고(壯有所用), 어린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하고(幼有所長),홀아비, 과부, 고아와 자식없는 사람 및 장애인도 모두 고생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남자에게는 각자에 맞는 직분을 주고(男有分), 여자는 각각 자기의 집안을 가지게 했다(女有歸). 재물이 함부로 낭비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자기의 소유로만 독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貨惡其棄于地也 不必藏于己). 힘은 자기 몸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力惡其不出于身也 不必爲己). 이런고로 모략이 사라지고 도둑들도 생겨나지 않으니(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모든 사람이 대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故外戶而不閉). 이를 대동의 세상이라 한다(是謂大同).”

 

소강사회론(小康論)

“오늘날에는 대도가 숨어서 행해지지 않고, 세상을 자신의 소유물로만 여긴다(今 大道旣隱 天下爲家). 각자 자기 부모만 부모로 여기고, 자기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고, 재물과 힘을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쓴다. 대인(大人)의 지위는 세습하게 되었고, 성곽을 쌓고 도랑을 파서 자기의 경계를 지었다. 예의를 만들어서 나라의 기강으로 삼으니, 임금과 신하의 분수를 바로 하고, 어버이와 자식 사이를 돈독하게 하고, 형제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남편과 아내 사이를 화합하게 한다. 제도를 설정하고, 농토와 마을의 구획을 지었다. 지혜와 용맹을 높이 치고, 공(功)을 얻으면 자기를 위하는 일에 이용한다. 그러므로 모략이 꾸며지고, 그로 말미암아 전쟁이 일어난다. 우(禹)임금, 탕(湯)임금, 문(文)임금, 무(武)임금, 성(成)임금, 주공(周公)이 이 예도(禮道)로 세상을 잘 다스렸다. 이 여섯 군자는 예를 삼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 의를 밝히고, 그 믿음을 이루고, 허물을 밝히고, 인애와 겸양을 가르쳐서 사람들에게 변하지 않는 도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以著其義 以考其信 著有過 刑仁講讓 示民有常) 만약 이 도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권세를 지녔다 해도 백성들의 배척을 받아 끝내는 멸망에 이를 것이다.(如有不由此者 在勢者去 衆以爲殃) 이를 소강의 세상이라 한다(是謂小康).”

 

군주론(君主論)

(군주의 도에 관한 토론은 노담이 설파하고, 공자가 그 대강(大綱)을 공감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치는 원래가 성인의 사업이다. 성인이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여러 신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류의 교도에 힘쓰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성인이 천지 귀신의 도를 터득하여 그것을 기초로 예의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며, 성인이 만 백성의 기쁨과 즐거움을 충분히 고찰한 다음에 행하는 것이 정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사계절을 낳고 땅은 물질을 낳았으며, 사람은 그 어버이가 낳고 스승이 가르친다. 하늘과 땅과 어버이와 스승 등 이 네가지에 대한 도리를 임금이 바르게 써야 한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임금은 허물이 없는 곳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남의 모범이 되는 자이지, 남을 본받는 자가 아니다. 임금은 남에게 길러지는 자이고, 남을 기르는 자가 아니다. 또한 임금은 남에게 섬겨지는 자이고, 남을 섬기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남을 본받으면 과실이 있게 되고, 남을 기르면 한 사람의 몸으로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기르기에는 부족할 것이고, 임금이 남을 섬기면 지위를 잃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임금을 본받아 스스로 다스리고, 임금을 봉양하므로써 자신이 편안하며, 임금을 섬김으로써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가 통달하게 되면 분수가 정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임금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불의하게 사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리하여 군주된 자는 사람의 지혜를 이용하지만 사략(詐略)은 쓰지 않는다. 사람의 용기를 높이 사들이지만 감정에 빠지는 자는 취하지 않는다. 사람의 어진 마음을 존중하지만 편애에 빠지는 자는 피한다. 나라에 재해가 있어 군주가 사직을 지키다 죽는 것을 의(義)라 말하고, 대부가 재해를 당하여 종묘를 지키다 죽는 것을 바르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를 잘 다스려서 한 집안처럼 하고, 세상 전체를 합쳐 한 몸처럼 하지만 이는 성인이 사리(私利)를 도모하여 특별한 수단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만백성의 마음을 알고 정의를 보였으며, 이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만백성의 근심거리가 되는 곳을 알아내어 이를 제거한 결과 비로소 천하가 한 집안 처럼, 온 세상이 한몸처럼 평화로운 세계가 출현하는 것이다.”

 

예치론(禮治論)

(예치에 관한 논의는 공자가 설파하고 노담이 그 대강을 공감하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공자 “예라는 것은 군주에게 있어서 치국(治國)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예는 정(正)과 부정(不正)이 서로 혼돈되지 않도록 구별하고, 예에 의해 모든 일의 미묘한 차이를 분명히 하며 인간을 신에게 접근시키고, 혹은 제도나 규칙이 우러나게 하며 인의도덕을 세우는 것이고 이들은 모두 나라를 잘 다스리며 군주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쉽게 하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치가 바르지 않으면 임금의 지위가 위태롭고, 임금의 지위가 위태로우면 대신(大臣)은 배반하고 소신(小臣)은 도둑질합니다. 형벌은 엄준하고 풍속이 퇴폐하면 떳떳한 법이 될 수 없습니다. 바르고 떳떳한 법이 없으면 예에 존비귀천의 차례가 없을 것이며, 예에 차례가 없으면 선비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벌이 엄준하고 풍속이 퇴폐하면 백성들의 마음은 이반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병든 나라라 하지 않겠습니까?”


노담 “정치라는 것은 임금이 몸을 편안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지요. 정치는 반드시 하늘의 법칙에 근본을 두고 그것을 본받아서 아래에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후토(後土)의 제사로 인하여 명령을 내린 것을 땅을 본받은 정치라 하고, 조묘에 제사할 때에 내린 정령을 인의(仁義)의 정치라고 하며, 산천의 신을 제사할 때에 내린 정령을 흥작(興作)의 정치라고 하고, 오사(五祀)의 제사 때에 내린 정령을 제도의 정사(政事)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인(聖人)이 몸을 편안히 간직할 수 있는 견고한 까닭입니다.”


공자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예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밭을 가는데 쟁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행하려 해도 먼저 의(義)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밭을 갈았어도 아무것도 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예의를 알고 있어도 학문을 널리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밭에 무엇을 심고도 제초를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학문을 배워도 인애가 따르지 않으면 제초는 해도 익은 곡식을 베지 않고 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인애는 뒤따라도 음악을 사용해서 민심을 화락하게 하지 않는다면 베어들인 곡식이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음악을 사용해 민심을 화락하게 했어도 아직 순화(順和)한 지경에 달하지 않았으면 그것은 곡식을 먹었어도 몸을 살찌우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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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4. 위대한 교감

노담과의 만남은 공자의 정치 사상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공자는 군자의 인애(仁愛)를 바탕으로 한 덕치를 근본 도로 여겼고, 노자는 성왕의 덕치를 중심으로 한 무위지치(無爲之治)를 근본 철학으로 삼았다. 모두 덕치를 최고의 통치행위로 삼는다는 점에서 같은 정치철학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공자와 노담의 시대는 유(儒)와 도(道)가 아직 분화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후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아무리 부정하고 감추려 애써도 ‘유노동근’(儒老同根)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사상의 이면(裏面)에 스며 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일찌기 순임금은 억지로 하지 않은 채 몸을 공손히 하고 남면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그 어떤 시대보다 세상이 잘 다스려졌다.(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위령공’편 4장⑤

 

‘무위이치(無爲而治)’는 고도(古道)의 이상적인 정치사상이며 ‘남면지술’(南面之術)은 고례(고禮)에서 비롯한 은유이다. ‘남면’한다는 것은 왕이 북쪽을 등지고 앉아 남쪽에 도열한 신하를 바라본다는 말이지만, 단순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부과된 군주의 덕목을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다. 왕이 필요한 덕목을 진실로 성실하게 다하고 있으면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지는 법이니, 이것이 ‘무위의 정치’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치는 덕으로써 함이니,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음에도 뭇별들이 그를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향할 공)之.-‘위정’편 1장⑥

 

이 또한 무위사상을 공자의 정치학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정’(爲政)이란 곧 ‘정권을 가진 자’이며, ‘이덕’(以德)은 정권보지자가 자신이 부리는 수단 중에 덕있는 자 즉 ‘능력있는 신하를 부린다’는 뜻이다. 이를 비유해서 말하면 북극성이 중앙에 정좌하고 뭇별들이 그 주변을 돌며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무릇 좋은 정치란 정권을 확고히 견지한 연후에 (덕을 가지고서) 능력있는 자를 부리면 힘들이지 않고 좋은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오규 소라이, <논어징>⑦)  이 또한 ‘무위의 정치’이다. 그 발상과 표현이 모두 노자류의 정치사상과 흡사하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정령(政令)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려 들면, 백성들은 형벌을 면하려고 할 뿐, 부끄러워 하지는 않는다. 백성을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운 마음도  가지게 되고 스스로 바로잡는데까지 이를 것이다.(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위정’편 3장⑧

 

이 말씀은 공자의 무위지술이란 곧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에도 통치의 효율성을 좇아 법제와 형벌을 강화하는 흐름이 있었는데, 공자는 이런 ‘유혹’을 배격하고 군자가 덕으로 백성을 인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훗날 노자사상이 말하는 무위의 정치도 표면에 나타나는 모습은 덕치주의였다. 이는 공자 사상과 노자 사상이 성립의 선후(先後) 여부를 떠나 공히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정치사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의 근본은 정(正)’이라고 하는 ‘정자정야’(政者正也-‘안연’편 17장)와 ‘이정치국’(以正治國-<노자>57장)의 대명제는 유로(儒老) 공통의 정치철학이었던 것이다. 

 

5. 전통의 성립

공자의 사상은 노자로부터 얼마만큼 영향을 받았을까? 나, 이생이 보고 들은 바로 말하면, 그것은 그리 심대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닮은 꼴이란 발견하는 즐거움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선생님은 특별한 스승이 없었다는 증언처럼 본래 무류무제(無類無際)의 사상가였다. 선생님은 유사(儒士)로서 주공(周公)으로 대표되는 이상적인 고도(古道)를 “술이부작(述而不作)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그 중핵(中核)들을 ‘집대성(集大成)’한 사람이다. 아마도 노담이 공자에게 미친 영향이 있었다면 닮은 꼴을 발견하는데서 얻어지는 확신의 자양분으로서였거나, 넘치거나 모자란 것을 직관하게 해준 반면(反面)의 성찰(省察)로서였을 것이다.

다음은 후세의 어떤 이가 남긴 공자 사상의 성립에 관한 총평이다. 공자라는 사람이 동양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헤아려 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인용하여 남긴다.⑨

 

“유(儒)는 본래 무축(巫祝;사제자, 제사장)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주술 의례나 상장(喪葬) 따위의 일에 종사하는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공자는 아마도 그런 계층에서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류(無類)의 호학자였던 공자는 의례의 본래적인 의미를 탐구하면서 고전(古典)을 배웠다. 시(詩·시경)와 서(書·서경)를 배우고 이것을 전승하는 사(史)나, 사(史)에서 더 나아가 널리 식견을 구했다.(나, 이생은 공문(孔門) 사람들의 낙양 여행도 그런 도정(道程)의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무릇 선왕(先王)의 예악으로 전해지는 것을 거의 빠짐없이 익힐 수 있었다. 유학이 지닌 지식적인 측면은 이로써 이미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이를 현실사회에 어떻게 적용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다음 문제였다. 이 시대에는 이미 상당히 일반화되었지만, 공자도 제자를 거느렸다. 정치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입장이었고,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력도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종류의 교단이 (공자말고) 더 없었다고 할 수 없거니와,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군자다운 유라고  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러한 지식이나 덕목이나 교과는 각각의 직능자들의 전승으로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의식 형태들을 어떻게 통일해서 전체적인 연관성을 부여하고, 어떻게 구체화시켜서 유기적으로 기능케 하느냐, 요컨대 어떻게 전통으로 수립하느냐 하는 점에 있었다. 여기에 공자의 과제가 있었다.


공자는 맹자의 말처럼 자신의 시대를 중심으로 그 이전 시대의 모든 사상을 집대성(集大成-<맹자> ‘만장 하’)한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유교는 중국에서 고대적 의식 형태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는 바로 그 위에서 성립했다. 전통은 과거의 모든 것을 감싸안고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낳는 장이므로, 그것은 말하자면 수많은 통일 위에 성립된 것이다. 유의 원류로 추정되는 고대의 전승은 실로 잡다하다. 정신적 계보는 아마도 과거의 모든 민족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여러 전승이 지닌 의미를 극한까지 추구하려 했다. (…)과거의 모든 정신적 유산은 이 지점에서 규범적인 것까지 승화된다. 그런데도 공자는 모든 것을 전통의 창시자인 주공(周公)에게 되돌린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조술할 뿐이지 창작하지 않는(述而不作)” 사람으로 규정한다. 공자는 전통의 가치체계인 문(文)의 조술자로서 만족해 한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무주체(無主體)적인 주체의 자각 속에서야말로 창조의 비밀이 존재하는 것이다. 전통은 운동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운동은 원점으로 회귀함으로써 역사적인 가능성을 확인한다. 회귀와 창조의 끝없는 운동 위에 전통은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유교는 이후 2천몇백년 이상에 걸쳐 전통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몇 차례인가 새로운 자기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러한 운동 방식은 이미 공자에게서 설정되었던 것이다. 공자가 불멸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전통의 수립자였기 때문이다.”  

 

6. 짧은 재회

공자와 노담은 이후에도 다시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이 ‘재회’에 관한 기사는 <장자>에 등장하는데, 공자께서 중국 남쪽 패(沛) 땅에 와서 노담을 만났다는 것이다.⑩ 이 기록은 아마도 사실인 것 같다. 나, 이생이 과거로 돌아가 중국에 떨어져 열국을 주유하시던 공자 일행의 짐꾼이 되어 일행과 함께 초나라 패 땅을 지나간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거기서 한 늙은 현자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기록을 보니 그 늙은 현자가 노담임이 분명한 듯하다. 그때가 공자 나이 59살이었으니, 노담은 팔순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다.

패땅은 노담의 고향인 초나라 고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아마도 노담은 나이가 많아지자 객지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천수를 다하고자 한 것 같다. 노담은 공자와의 대화를 통해 공자가 노나라에서 벼슬길에 올랐다가 좌절한 끝에 새 정치를 찾아 유랑 중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초월의 경지에 이른 팔순의 노담은 여전히 이상을 향한 열정을 거두지 못하고 그것을 실현할 땅을 찾아 유랑하는 공자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을까? 


“그대가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성현들은 이미 뼈가 다 썩어 없어지고 오직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벼슬아치가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다북쑥처럼 떠돌이 신세가 되기도 하오.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고 들었소. 이제 그만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과 소인배들에겐 위선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그 뜨거운 마음도 버리시오. 그런 것들은 더이상 그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이 늙은이, 그대에게 해줄 말이 이뿐이란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오.”-<사기> ‘노자·한비열전’

 

문자 기록이란 피와 온기가 사라진 채 오로지 그 지시와 형태로만 전해지는 것이므로, 문자만으로는 말한 자의 마음을 온전히 다 전하지 못한다. 노담이 공자에게 한 위의 말 조차 “뼈가 다 썩어 없어진 채” 오직 차가운 언어로만 종이 위에 남아 있다. 그러나 나, 이생은 그 문면(文面) 속에서 오래 전에 증발해 버린 노담의 사랑과 연민을 읽고 싶다. 초월과 달관의 경지에서 삶의 허무, 인간세의 비정(非情)을 꿰뚫어본 사람의 말은 이러하지 않았을까?

“성현들이 전하고자 한 진정한 뜻은 이제 문자 속에 가려지고 오직 시체의 거죽처럼 남아 있을 뿐이오. 군자가 뜻을 펴고자 해도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그만이니, 애써 돌아다닌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대는 조롱박처럼 매달려 있기를 거부하고, 팔리지 않는 옥이 되기를 마다하지만, 진정으로 훌륭한 상인은 좋은 물건일수록 깊숙히 감춰놓는다오. 부디 재주를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 말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길 바라오. 그것이야말로 이 혼란한 시대에 자신을 보전하는 길이오. 군자는 뜻이 높을수록 더욱 시기의 대상이 된다오. 사람들은 당신의 참뜻을 교만과 욕망, 위선으로 왜곡할 뿐이오.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열망이 클수록 세상은 그만큼 당신을 더 외면하고, 그대의 열정과 능력은 당신 자신을 찌르는 칼과 창이 되어 돌아올 뿐이오.”

 

두 사람의 재회는 그리 길지 않았을 것이다. 십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행보는 많이 멀어져 있었다. 공자는 노담의 고향마을을 뒤로하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가 잘 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친다는 것을 나는 알며, 짐승은 잘 달린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맞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오늘 나는 용 같은 존재를 본 것 같구나.”-<사기> ‘노자·한비열전’


공자는 십수년 전의 노담과 지금의 노담을 마음 속에 나란히 세워 보았다.

그는 왜 홀연히 주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자취를 감췄으며, 또한 왜 지금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마치 깊은 물속의 용처럼 자신을 침잠시키고 있는 것일까?  나, 구(丘)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박학(博學)의 구도자(求道者). 새라면 새를 알고, 물고기라면 물고기를 알고, 짐승이라면 짐승을 안다. 잡을 수 있고, 낚을 수 있고, 쏘아 맞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용을  본 적이 없다. 용이 어떻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용을 알 수 없으니, 그 용을 타고 날 수 없지 않은가? 오늘 내가 만난 저 노사(老師)는 언제부터 내가 알 수 없는 용이었던 것일까? 다시는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는, 만나더라도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7. 돈오(頓悟)의 미소

공자가 패땅을 떠나 위나라로 돌아오는 들판에서 은자(隱者)들이 밭을 갈며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⑪

 

 즐거워라 골짜기에 사니

 숨어사는 자의 마음도 너그러워지네

 홀로 잠자고 홀로 말해도

 이 즐거움 잊지말자 다짐하네.

 

 즐거워라 언덕 아래에 사니

 숨어사는 자의 마음 더욱 너그럽네

 홀로 잠자고 홀로 노래해도

 이 즐거움 간직하자 다짐하네.

 

 즐거워라 언덕 위에 사니

 숨어사는 은자의 마음 유유자적하네

 홀로 자다 깨고 또 잠드니

 이 즐거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려네.

 

공자는 그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도 공자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수레가 멀어지자 모두들 자기의 일을 계속하면서 더이상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공자가 수레를 모는 자공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 이러다가 들판 한 가운데서 일몰(日沒)을 맞겠구나.

   

공자는 일흔 셋에 죽었고, 노담은 그 몰년(沒年)을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한동안 상대방의 존재가 기억 속에 희미해졌다가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가면서 점차 서로의 존재를 다시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죽음이 임박했을 때는 옛날의 대화 속에서 주고 받았던 무언(無言)의 공감(共感)을 떠올리면서, 비로소 돈오(頓悟)의 미소를 지었으리라. 나, 이생은 이런 상상을 해본다. 두 사람이 만약 훗날 자신들이 각자 자기 사상의 종주로서 치열하게 대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역시 빙그레, 웃게 되지는 않았을까? <하편 끝>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공자와 노자의 만남은 <사기>의 기록이 대표적이다. 그밖에 진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대로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다룬 기록은 유가쪽에서는 <공자가어>, <예기>, <순자> 등이 있다. <여씨춘추>와 <한비자>도 노자와 노자사상의 ‘존재’를 알리고 있으며, <장자>에는 내편에 노자의 존재가, 외편에는 7편의 대화가 천도(天道), 천운(天運), 천지(天地), 전자방(田子方), 지북유(知北遊) 편 등에 산재해 있다.

 

 ② 옹야편 16장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자왈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질박한 것이 문화(文華)한 것보다 지나치면 예절에 숙달하지 못하게 되고, 문화한 것이 질박한 것보다 지나치면 문서 처리에만 능숙할 뿐이니, 문화와 질박함이 함께 갖추어져야 (재능과 덕행이 갖추어진) 군자가 되는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바탕이 무늬보다 승하면 거칠고, 무늬가 바탕보다 승하면 밴드랍다. 무늬와 바탕이 어우러진 다음에야 군자일 터.

 L-The Master said, “Where the solid qualities are in excess of accomplishments, we have rusticity; where the accomplishments are in

excess of the solid qualities, we have the manners of a clerk. When the accomplishments and solid qualities are equally blended, we

then have the man of virtue.”

 

 ③修身齊家 治國平天下

 <대학>에 나오는 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유가의 8가지 핵심 가르침이자 목표이다. 

 

 ④이상은 <예기> ‘예운(禮運)’편(이상옥 역저)에 있는 공자의 말을 요약· 각색한 것이다. 대동론, 소강론, 군주론, 예치론 등 소제목은 지은이가 임의로 붙인 것임을 밝힌다.

 

 ⑤ ‘위령공’편 4장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덕행으로 백성들을 감화시켜 세상을 잘 다스린 분은 옛날 순제(舜帝)일 것이다. 대체 무엇을 하려 애쓰셨겠는가? 자기 몸을 공경하고 근신하여 천자의 자리에 바르게 앉아 통치했을 뿐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억지로 하지 않고도 잘 다스린 이는 아마 순임금일 터다! 도대체 어떻게 하셨던 것일까? 몸을 삼가 남면하셨을 따름인 것을. 

 L-The Master said, "May not Shun be instanced as having governed efficiently without exertion? What did he do? He did nothing but

gravely and reverently occupy his royal seat."

 

  ⑥ ‘위정’편 1장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향할 공)之(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 이중성공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정사(政事)를 하면서 도덕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해서 말한다면, 마치 북성이 제자리에 있는데도 여러 별들이 북두성을 향하여 둘러서 있는 것과 같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덕으로써 정치를 함은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음에도 뭇 별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

    L-The Master said, "He who exercises government by means of his virtue may be compared to the north polar star, which keeps its

place and all the stars turn towards it."

 

 ⑦오규 소라이(1666~1728)

 일본 에도 중기의 유학자. 

 

 ⑧ ‘위정’편 3장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자왈 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백성을 정령으로써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형벌은 면하여도 부끄러운 마음은 없어지게 된다. 백성을 도덕으로써 인도하고 예의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운 마음도 있게 되고 또한 선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정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가지런히 하려 들면, 백성들은 면하려고만 하지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반면)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할 뿐 아니라 또 (스스로) 바로잡는다.

 L-The Master said, “If the people be led by laws,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punishments, they will try to avoid the punishment, but have no sense of shame. “If they be led by virtue, and uniformity sought to be given them by the rules of propriety, they will have the sense of shame, and moreover will become good.”

 

 ⑨ 시라카와 시즈카, <공자전> ‘유교의 성립’ (장원철 옮김).

 

 ⑩ 사마천의 <사기> 등은 공자가 낙양에서 노담을 만났다고 하는데, <장자> ‘천운’편에는 공자가 51세 때 남쪽 패(沛) 땅에서 노담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만 학자 엄령봉(嚴靈峰)은 공자가 낙양에 갔을 때는 노담을 직접 만나지 못했으며,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것은 공자가 59세(장자의 51세는 착오라고 본다)때 남쪽 패땅에서였다고 본다(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 지은이는 이 두가지 설을 종합한 설을  지지한다. 즉, 공자는 낙양에서 노담을 만난 뒤, 13년 후 열국을 주유할 때 다시 노담을 만난 듯 하다.

 

 ⑪ <시경>‘위풍(衛風)’ 편, ‘고반’(考槃;즐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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