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신세 안 진 者 있나?
2013년 5월30일 <당당뉴스> 지성수 목사 sydneytax1@hanmail.net
내가 어렸을 적에 깡패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말은 “밥숟가락 놓고 싶어?”였다. 즉 요즘 버전으로 하면 “죽고 싶어?”인 셈인데 훨씬 은유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법을 초월(?)한 깡패 사회이기는 하지만 일단 밥숟가락을 놓기로 한다면 하나님 보다 더 무서웠던 두목에게 권총을 겨눌 수도 있고 어떤 위험한 일도 못할 일이 없다.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죽기로 작정하고 복수를 할 때 정상적인 조건 속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은 사건을 일으키는 스토리들이 나온다. 비록 순간적으로나마 죽음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큰 소리로 자신 있게 “넷!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도 예수도 아니고 돈 버는 일입니다.”라고 대답 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 예수는 나중에 만나도 되지만 오늘 돈을 벌지 않으면 당장 내일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인류의 99.99%가 나같이 당장의 먹고 사는 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40 년 전 신학생 시절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농촌의 미자립 교회부터 목회를 시작해서10 년간 목회자로서 밥을 벌어 먹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법을 먹을 만하게 되자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추구하다가 의도하지 않게 목사로서의 밥숟가락을 놓게 되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현상의 배후에는 단순히 한 가지 원인만 있는 법은 없다.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함수 작용을 하고 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미숙함이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미숙한 이해의 결과는 참담해서 꿈과 이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세상의 무서움을 배웠다.
*지성수 목사
당시만 해도 교단을 떠난다던지, 혹은 목회를 못하게 되면 죽을 줄만 알았기 때문에 목회자로서의 앞날에 대한 불안에 떨었었다. 나를 이해를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길이 없는 마치 망망대해의 외딴 섬에 갇혀서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떠 있는 난파선에 탄 기분이었다.
교단이라는 것이 그 교단에서 목사로서 밥 벌어 먹고 살기 위한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길거리 목사가 되고 보니 정말로 기독교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느꼈다.
물론 길거리 목사의 삶은 춥고 떨리고 배고픈 것은 기본이고 거칠고 험한 길이었다. 이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인 노동자, 도시 빈민, 장애인 등과 함께 하는 길거리 목사의 생활은 죽자고 애를 써서 해봐도 결과가 있는 일보다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그저 애만 써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삶에서 ‘도덕적 권위’ 라는 것을 배웠다. 이 세상의 모든 권위처럼 ‘도덕적 권위’도 나름대로 힘이 있는 법이다.
종교에서 밥숟가락을 물고 있는한 진리는 그만큼 거리가 멀다. 그런 의미에서 우찌무라 간조는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을 경멸했다. 그러나 전문화되고 규격화되고 세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의 존재는 불가피하다. 오히려 잘못된 허상을 쫓아서 들어온 학생들로 신학교마다 만원세례인 상황이다. 그러나 성경구절을 끌어들여서 아무리 합리화, 정당화해도 예수 당시부터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은 경계 대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에게 날마다 결투 신청을 했던 이들이 누구였던가? 당시 직업으로서의 종교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잘 먹던 못 먹던 현실적 여건상 밥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종교인들은 자기를 정당화하기 보다는 예수 덕분에 먹고 산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 태우가 대통령이었지만 아직 고르바쵸프를 만나지 못했을 때, 문선명이 먼저 고르바쵸프를 만나고 와서 강연을 한다고 하길래 무슨 소리를 하나 해서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서슬이 퍼런 그 시절에 조선호텔 그래드볼룸에 수 많은 정,관계 인사들을 모아 놓고 감히 대통령을 '노서방'이라고 칭하고 "대한민국에서 내 신세를 지지 않은 정치인 놈들이 어디 있어?"라고 큰 소리를 쳐서 듣는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었다.
솔직히 기독교에서 직업 종교인치고 예수 신세를 안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길거리 목사인 나만 해도 목사이기 때문에 남의 나라에 와서 영주권을 받을 수가 있어서 지금 편히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외국 TV를 보면 심야의 상업 방송에 종교방송이 나오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설교를 TV로 방송 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큰 영향력이 있을 것 같이 생각되고 그들이 힘이 매우 클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은 사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류의 방송은 돈을 주고 방송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교회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시간인 낮 시간은 살 수 있을 정도는 못되기 때문에 방송 시간을 사는 회사가 없는 밤 시간에나 방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복음을 ‘밤의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이나 마리아 테레사의 활동 같은 내용을 다룬 프로그램은 심야에 방송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송사에서 돈을 드려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을 한다. 한국의 '밤의 대통령'은 영향력이 크지만 '밤의 복음'은 영향력이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별로 대단치 못하다.
*이 글은 당당뉴스(www.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