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청년에게는 애석한 '사회교리'
2013년 5월31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 isu@catholicnews.co.kr
최근 한국교회에서 ‘사회교리’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한편에선 더 선명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하고, 한편에선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신앙의 해’를 선포한 이후, 주교회의를 비롯해 각 교구에서는 <가톨릭교회교리서>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신자들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여기에 <간추린 사회교리>가 덧붙여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난 5월 11일 새천년복음화연구소에서 주최한 사회사목 관련 심포지엄에서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는 발제를 마무리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사회의 누룩으로서 마치 그 혼처럼 존재한다”는 <사목헌장> 40항을 인용했다. 여기서 ‘혼’은 당연히 ‘몸’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혼이라면, 그 혼이 깃든 몸은 세상이다. 그 세상은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타종교인, 무신론자까지 포함하는 전 인류가족이다.
그 인류 가족 가운데 지금 아파 신음하는 부위가 있다면 혼은 가장 먼저 그리로 달려가, 그 사람들을 위무할 것이다. 이는 교회의 존립 목적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며,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생애처럼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사회교리가 ‘급기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원리를 자신의 논의 안에 포함시킨 것은 마땅하다.
▲ 예언자의 교회는 우리시대에도 거리에서 비를 맞고 있다. ⓒ한상봉 기자
‘갑’의 아픈 부위를 자극하는 사회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교리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는 것은 결국 “사회적 관심이 과연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아예 <사회적 관심>(1987)이라는 회칙을 내놓기까지 하였지만, 여전히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는 교회전통이 명백히 밝힌 내용마저도 논란거리로 삼고 있는 셈이다. 이는 사람마다 제 이해관계에 따라서 사회교리를 편의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 때문이다.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고 내 뒤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돌아갔지만, ‘가난한’ 베드로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나온 이야기가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리니”라는 말이다. 이때 참된 제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처지가 가난한 게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 당국자나 고위성직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교회라는 안온한 환경과 고위성직자라는 기득권을 지니게 된다면, 그래서 비슷한 부류의 정치적, 종교적 상류층 인사들만 접촉한다면, 그들의 사고는 ‘부자청년’의 입장에 빠지기 쉽다. 강론을 하면서는 ‘부자청년’을 안타까운 사람이라고 애석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지만, 본인이 사실상 ‘부자청년’의 취향을 지니고 있음은 돌아보지 못한다. 이때 사실상 복음은 그 자리에서 실종된다.
어찌보면, 복음이란 ‘갑’의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오히려 ‘을’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서는 ‘행복하다’ 부르기 때문이다. 사회교리는 ‘갑’에 속한 부자들과 세력가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명령하는 처지에 있는 주교와 사제들에게 할 말이 많다. 이처럼 사회교리에는 그들의 어설프지만 ‘아픈’ 부위를 건드리는 언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편한 내용은 신자들에게 적극 권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있을 부자청년의 심기를 사납게 만드는 일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까닭이다.
사회사목이 ‘사목의 본령이다
▲ 광주가톨릭대학 성당 현관에 걸려 있는 권현아 씨 작품, '괜찮다'ⓒ한상봉 기자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나고 꼭 10년 만에 바오로 6세 교황이 반포한 <현대세계의 복음선교>는 <사목헌장>을 직접 계승하고 있다. <사목헌장>은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 성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단체는 사실 인류와 인류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1항)고 전하는데, <현대세계의 복음선교> 역시 같은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나누고 있다.
바오로 6세는 <현대세계의 복음선교>에서 “만일 복음선교가 복음과 인간의 구체적 생활과의 관계, 즉 복음과 개인적 사회생활 사이에 지속적으로 있는 상호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복음선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29항) 이어 “복음화 되어야 할 인간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 사회적 경제적 문제와 관련된 존재”라면서 “만일 정의와 평화로써 참된 인간 발전을 증진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랑의 새 계명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물었다.
이 연장선에서 교황은 “복음선교에 있어서는 현대세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의, 해방, 개발과 평화의 여러 문제들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본인으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만일 그래야만 한다면, 고통과 궁핍 중에 있는 이웃에 대한 복음적 사랑의 교리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31항)라고 선언했다.
가톨릭교회에서 행하는 사목이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면, 사목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복음선교’을 지속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사회사목’의 영역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 가운데 사회교리의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의 이름이 ‘사회사목헌장’이 아니라 ‘사목헌장’이라는 점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사목은 오늘날 교회현실 속에서 실행되고 있는 ‘특수사목’이 아니라, 사목의 본령에 해당하는 중대한 그리스도인의 과업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구체적 현실에 적용한 <메데인 문헌>(1968)은 ‘사목’을 다루면서 민중사목-엘리트사목-교리교육의 순서로 다루었으며, ‘교회구조’를 다루면서 평신자운동-사제-수도자-성직자양성-교회의 가난-연대사목-사회홍보수단 순으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교구-본당사목이나 성직자 중심의 사목에 획기적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었다. 교회 하위 세포인 본당이나 교회공직자들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데 필요한 단위일 뿐이다.
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총회 결과인 <푸에블라 문헌>(1979)은 라틴아메리카 지역교회의 <사목헌장>이며, 모든 논의의 정점에서 ‘사목적 선택’을 다루면서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의 민중 안에 창조해야 하는 것은 건전한 윤리적 양심, 현실에 대응하는 비판적이고 복음적인 감각, 공동체 정신, 사회적 투신이다. 이 모든 것은 형제적 친교와 대화의 정신 속에서, 진실로 인간답고 복음적 가치들로 충만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자유롭고 책임 있는 참여를 가능케 한다. 그 사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동체를 원형으로 하여 조형되어야 하며, 꺾일 수 없는 희망으로 충만한 우리 민중들의 고통과 염원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어야 한다.”(1308항)고 선언했다.
교회, 세상을 성화시키는 전위대
메데인과 푸에블라에서 이뤄진 성과와 비견할만한 일이 한국교회에서도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1965년 마지막 회기를 원주교구장으로 참석했던 지학순 주교는 1973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라는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교서는 “올해 우리 교구의 활동목표는 새로운 신학의 토대 위에서 사회정의의 구체적 실천을 조직 전개하고, 저소득층과 근로계층에 속하는 절대 다수의 가난한 대중 속에 들어가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의 주인임을 깨닫고 자기의 마땅한 권리를 되찾아 생활과 현실을 항상 개선하도록 복음을 전하며, 실제에 있어 그들을 협동생활로 조직 교양하여 구체적인 생활의 진보 속에서 그리스도를 육신화 시키는 것에 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지학순 주교는 사제들에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본정신과 교황 요한 23세, 바오로 6세의 모든 사회회칙을 열심히 학습하도록 독려했다. 또한 새로운 신학적 관점을 수립하고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교회에서 사목경험을 배우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본당과 공소를 모든 교우, 모든 민중의 협동생활의 기지로, 공동체화의 터전으로 발전시키도록” 고무했다. 당시 원주교구는 본당과 공소를 지역사회에 자유롭게 개방해, 신자들과 지역민과 거리감을 줄여갔다. 지학순 주교는 ‘세상에 열린 교회’를 희망했던 것이다.
지학순 주교는 1973년 7월 19일자 공문을 통해 ‘복음간추림’(<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분도출판사, 1973)을 교구민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해, 신자들이 이 책을 휴대하고 다니며 읽고, 노래나 연극, 그림으로 만들어 보급시켰다. 사제들에게는 미사마저도 꼭 성당이 아니더라도 노동현장이나 집, 야외에서 형편이 닿는 대로 봉헌하도록 지시하고, “사랑으로 뭉쳐 전진할 때 우리 교구는 세상을 성화하는 전위대로 하느님의 기수로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히 평신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지학순 주교의 지지에 힘입어, 한국사회의 수많은 대안운동이 원주에서 시작되었다. 유신정권 당시의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지역개발과 협동조합운동, 한살림운동 등이 원주에서 싹을 띄웠다. 지역사회와 지역교회의 궁합이 이처럼 잘 맞은 경우는 한국교회 역사상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은 곧 지학순 주교의 경험이 다른 교구에 좀처럼 확산되지 못했다는 뜻이기에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가난’을 다시 복권시키는 프란치스코 교황
지난 3월 13일 새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출은 그 이름만큼이나 신선했다. 그분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고 예수회원이라는 점, 신문지상에서 보는 그의 행보가 낱낱이 신선한 감동을 자아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좌를 권력의 중심으로 보기보다 ‘봉사’의 중심으로 보고, 자신을 ‘로마주교’라고 지칭함으로써 지역교회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인상을 주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 오롯이 계승되고 있다는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특별히 새 교황의 선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가난’과 ‘청빈’이었다. 세상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청빈한 삶을 선택한 교황이어서, 강우일 주교(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제주교구장)은 그를 교황(敎皇)이라기보다 ‘교종’(教宗)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전했다. 최근 교황이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에 대한 시성절차를 재개시키고, 첫 사회회칙으로 ‘가난’의 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보도가 이어지기도 했다.
지난 4월 9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나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고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의 대변인”이라고 말했다. 이는 곧 사목의 본령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즉 사회사목적 관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실상 사회교리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교회에게도 ‘쇄신을 요청하는’ 새로운 도전이 된다.
ⓒ한상봉 기자
이 참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그리스도인, 부자로 살아도 되는가?>(김영봉, IVP, 2003)라는 책에서 기도문 한편을 소개한다.
아버지,
저를 소수 유색인종으로 나게 하셔서
인종차별의 질병을 예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강한 자, 다수의 편에서 차별을 하는 것보다
약한 자, 소수의 편에서 차별당하는 것이
차라리 행복합니다.
차별하는 죄를 피할 수 있어 행복하고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여 행복합니다.
이 복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저를 부잣집 자손으로 나게 하지 않으시고
부에 집착하지 않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호의호식하고 베풀며 사는 것보다
소박하게 살며
베풂의 대상으로 내려앉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남의 몫을 가로채는 죄를 범하지 않으니 행복하고
부로 인해 눈이 가려지지 않으니 행복합니다.
이 복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저를 권력자의 자손으로 나게 하지 않으시고
권력의 자리에 앉히지도 않으심을 감사합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망각하고 신처럼 구느니
무력한 자리에서 자신을 제대로 보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권력으로 착각에 빠지지 않으니 감사하고
권력으로 눈이 가려지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이 복에 감사드립니다.
오,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이렇게 낫게 하셔서
이렇게 행복하게 하시니!
그러나 아버지!
저는 좀 배웠다는 생각 때문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아픔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저의 작은 배움이 제 눈을 멀게 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작은 명예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 사람들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 명예가 제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성직이
세상에서 고투하며 살아야 하는 신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게 합니다.
성직 때문에 저는 성소 안에 갇혀 버렸습니다.
제게 주어진 교수직이
하루 벌어 먹어야 하는 사람들,
땀 흘려 일하고 거친 손으로 밥 먹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 직업이 저를 고립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제게 주신 복입니다만,
저는 그것을 불행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이 불행을 다시 행복으로 만들도록
저를 낮추어 주십시오.
제 눈을 열어 주시고,
제 마음을 녹여 주시고,
제 고립을 풀어 주소서.
그 길을 제게 가르치시고
그 길을 걷도록 힘을 주십시오.
제가 걷겠습니다.
아버지!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