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매화와 들매화
봄매화를 보려고 일부러 화엄사를 찾았다. 꽃을 찾는 일은 개화일시까지 맞춰야 하는 까다롭고 정성스런 나들이다. 지인의 문자정보처럼 각황전 옆 홍매는 절정이었다. 만개할 때는 그 빛깔이 붉다못해 검은 빛까지 나는지라 '흑매'라고 불릴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예로부터 탐매객(探梅客)을 끊임없이 불러들인 명품이기도 하다. 아니냐 다를까 뷰~포인터는 물론 주변까지 '셀카'족 상춘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순간포착'디지털 시대에 정겨운 아날로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게 아닌가? 홍매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있는 작은 전각의 댓돌 위에 설치한 캔버스 앞에서 팔레트를 든 채 가만히 꽃을 응시하는 화가의 경이로운 모습을 만난 것이다. 옛 묵객들이 사용했던 화선지와 먹물대신 화려한 물감으로 헝겊 위에 매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주변의 어수선함에도 아랑곳없이 홍매가 흑매로 변해가는 순간을 포착하는 바쁜 붓놀림이 연신 이어진다. 이미 몇일을 머물렀는지 화폭은 거의 완성단계다. 카메라 렌즈에는 홍매지만 화가의 눈에는 이미 흑매로 바뀌어 있었다. 강렬한 색깔의 그림과 부드러운 빛깔의 실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육안(肉眼)과 심안(心眼)의 차이만큼 그림과 사진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서로 다른 매화를 담아내고 있다.
한참 후에 발걸음을 옮겼다. 대숲길을 지나면서 무위(無爲)의 들매화를 만났다. 언덕아래 버려진 것처럼 서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의 들매화였다. 홍매화에 비한다면 보통사람들의 눈길조차 제대로 받지못한 소박한 야생매다. 그 앞은 한산했고 안내판 마저 없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산짐승이 잘익은 매실을 먹은 후 나온 배설물을 거름삼아 그 씨앗이 발아했을 것이다. 또 동자승이 설익은 것을 먹다가 배탈로 인하여 화장실에 도착하기 전에 쏟아버린 설사 속의 씨앗일 수도 있겠다.
야생인지라 꽃은 작고 듬성듬성 피지만 단아한 기품과 진한 향기 및 '자연산'이라는 희귀성으로 인하여 법당 옆 화려한 인공미의 홍매를 제치고 '천연기념물 제845호'로 지정되는 저력을 보여 주었다. '토종매화 연구의 학술적 가치'가 전문학자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까닭이다. 대중의 눈과 전문가의 안목은 카메라 눈과 화가의 눈만큼 다르다는 것을 두 매화는 함께 보여준다.
하긴 모든 것을 동시에 갖출 수는 없다. 각각 인위(人爲)와 무위(無爲)의 두 얼굴이기도 하다. 홍매화는 그 자태와 서 있는 자리로 보건데 감각이 예사롭지 않는 이가 심었을 것이고, 또 오랜 시간동안 세세한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야생매는 몇백년 동안 순전히 자기 힘으로 풍우와 추위를 이겨내며 그 자리를 꼿꼿히 지켜왔을 것이다. 이제 홍매는 빛깔로 사람을 모우고, 야생매는 향기로 벌나비를 모우면서 봄날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