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만약 당신을 노리는 누군가는 당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당신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손자병법은 승리하려거든 지피지기(知彼知己)하라고 했다. 상대도 모르고 나도 모르면 그 싸움은 해보나 마나라는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25일)을 맞아 곳곳에 연등이 걸렸다. 연등은 무지를 밝히는 지혜를 상징한다. 무엇에 무지한가. 모든 것의 출발선인 ‘나’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왕궁을 떠나 ‘내가 누구인지’를 명상해 ‘무아’(無我)을 깨달았다. ‘어떤 존재든 변하기에 나라고 규정지을 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동시대 그리스에선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그것은 재벌이나 왕이라 할지라도 늙고 병들고 죽고 말 것이 분명하니 욕심만 좇지 말고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라는 경고였다. 또한 너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라는 인권선언이었다. 전자는 집착을 놓고 자유로워지라는 것이고, 후자는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500여년이 지났다. 과학문명은 개벽 중이지만 정신은 여전히 ‘자아도착’의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성격유형과 에니어그램, 체질론, 마인드프리즘, 사주, 혈액형, 체형, 관상 등을 통해 자신을 알려고도 해보지만, 여전히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는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누군가는 당신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검색·구매하는지 파악하고 있다. 위치추적기(GPS)가 보여주는 곳과 인터넷, 모바일, 에스엔에스, 신용카드, 현금영수증 등을 통해 관심사와 소비 내역을 추적하면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무색하게 할 만큼 뻔한 ‘유아’(有我)의 패턴이 파악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컴퓨터나 모바일엔 옆사람의 것과는 다른 광고가 뜬다. 당신이 한번이라도 클릭했거나 당신의 살 만한 품목이 손짓한다. 최근 미국의 이모션트라는 업체에선 감정분석 소프트웨어까지 만들어 매장에 들어온 고객의 표정을 읽어 구매를 유도하겠다고 나섰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편의를 돕는 헬스케어 제품들은 스마트폰으로 걸음 수, 활동량, 체지방, 체온, 혈압, 혈당, 심박수, 심전도를 측정한다. 최근 일본에서 개발된 ‘트리플더블유’라는 기기는 초음파 센서로 변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몇 분 뒤에 변을 볼 것인지도 알아낸다. 스마트폰과 초소형 기기를 통해 뱃속까지 파악하는 것이다.
봉건사회 계급사회를 넘어 한명 한명의 개성과 인권이 중시되는 민주사회가 도래해 현대인들이 자유로워진 것 같다. 하지만 천수(千手: 천 개의 손)를 뻗은 채 천안(千眼: 천 개의 눈)을 번득이며 그들을 잡으려는 노예사냥이 시작됐다.
인터넷 검색 데이터는 물론 에스엔에스에 별생각 없이 올린 ‘ㅋㅋㅋ’, ‘ㅠㅠ’가 당신이 선거에서 누구를 찍을 것인지, 당신에게 어떤 밑밥을 던지면 바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리며 낚싯밥을 물 것인지 판단 자료가 된다. 붓다의 기대대로 무아를 깨닫지 못하고 유아적 업습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가일 수 있다.
앞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욕구를 파악하고 분석해 구매로 연결짓는 기업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선거도 유권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읽어내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그런 정보들을 장악한 빅데이터가 특정 세력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지난 대선에서 국가정보원의 공작이 보여줬다. 국가와 대기업의 빅데이터는 ‘전지전능’해지려 들 것이다.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신(神)처럼 군림하려 할 것이다. 현대인은 ‘부처님 손바닥 위’가 아니라 그들의 손바닥 위에 놓일 수 있다. 먹이와 놀 만한 장난감을 주고 그 안에서 모든 걸 해결케 하는 건 야생동물을 사육짐승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은 현대인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기 전에, 그들에게 잡혀 사육되고 있다. 그러니 욕망대로 습성대로 본능대로, 편안한 짐승으로 전락하려는 순간마다 다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