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에서 앵봉산까지 함께 산행한 배우 윤태웅
꼭 걷고 싶은 길이었다. 산악마라톤 하는 선배가 그 길에 대해 매혹적인 글을 써놓았더랬다. 다른 데도 아니고 서울의 수색역 쪽에서 시작하는 산길이라 했다. 마음만 먹으면 냉큼 갈 수 있는 곳이다. 근데 자꾸 넓고 큰 산만 찾아다니다 보니, 그 길에 오르지 못했다.
봄이 지나가기 전에 이번에는 꼭 들러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찾아보니 수색역에서 구파발역까지 가는데, 서울 둘레길이 이어지면서 7코스로 명명되어 있었다. 난이도도 중급으로 표시된 것을 보니 평지를 걷는 것보다야 나을 터이다. 디지털미디어역에서 불광천을 타고 증산역에 가서 올라가는 법도 있었다. 최근에 불광천을 타고 연신내까지 가보거나, 거꾸로 걸어 한강으로 나가 합정역이나 마포역까지 걸어본지라 봉산에서 앵봉산에 이른다는 이 길을 꼭 걸어보기로 했다.
이 길을 함께 걸은 이는 배우 윤태웅. 마침 일정이 없다 해서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기로 했다. 기실 산에 가자고 해야 할 이는 태웅 씨다. 체육대학을 나온지라 몸 쓰는 일에는 그가 나보다 훨씬 낫다. 근데 이상하다. 등산은 특별한 관심이 있어야 좋아하는지라, 만나서 산 이야기하는 사람은 오히려 백면서생인 나다.
태웅 씨는 어릴 적부터 태권도를 좋아했다. 어릴 적 태권도를 가르쳐준 사범님하고는 지금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해병대도 사범님 때문에 갔더랬다. 사범님이 해병대 출신인지라 무도를 익히며 존경하게 된 스승의 길을 뒤쫓고 싶어서였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상당히 부드러운데, 그 안에는 태권도로 단련된 몸과 정신이라는 강한 기운이 스며 있는 셈이다.
태웅 씨는 스포츠 집안이다. 아버님이 축구선수 출신이다. 축구로 대학까지 가고 나중에 국가대표로 뽑히기까지 했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표선수로 뛰지는 못했다. 은행 팀에서 선수로 뛰다가 부상 때문에 행원으로 일하셨다. 여동생도 어릴 적부터 태권도를 배웠고, 체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언더그라운드 댄서로 활동한다.
윤태웅이란 이름을 알린 건 1988년이었다. 서울올림픽 개막식 행사 가운데 하나로 태권도 격파시범이 끝났다. 잠시 후 흰 반바지에 하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누구나 그 장면을 보며 소년이 굴렁쇠를 쓰러트리면 어찌하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을 터다. 이어령의 아이디어로 알려진 이 장면은 떠들썩한 잔치 한마당을 정적의 기운으로 일순간 휩싸 세계인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소년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손을 흔들어 박수환호를 받았고, 이어 굴렁쇠를 마저 굴려 운동장 끝으로 사라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어령은 침묵과 비움을 통해 융합과 소통의 메시지를 세계에 보내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엄청 부담된 퍼포먼스였다. 이 장면은 지금까지도 서울올림픽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 때 그 소년이 바로 태웅 씨다.
나중에 굴렁쇠 소년이라 칭해진 이 역할을 태웅 씨가 맡은 계기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지겹기도 할 테다. 그래도 혹 알려진 게 잘못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세간에 알려진 대로다.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것은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이었다. 바로 그날이 생일인 아이들을 뽑아 서울올림픽 행사에 출연하는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태웅 씨는 사마란치 올림픽 위원장이 그 유명한 말, 그러니까 쎄울(!)이라고 하던 날이 귀빠진 날이었다. 어머니가 행사안내를 보고 응모했는데, 덜컥 합격해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진짜 궁금했던 건 어린 아이가 느꼈을 법한 중압감인데, 그런 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굴렁쇠 굴리는 일이 어렵지도 않았고, 이어령 선생이 굴렁쇠가 쓰러지면 당황하지 말고 다시 굴리면 된다고 격려해주기도 해서였다. 하긴, 아이가 굴렁쇠 굴리다 쓰러트린다고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히려 당황하지 않고 다시 굴리면 그것도 연출이겠거니 하겠지.
봉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증산역 쪽으로 나와 있었다. 그렇지만 수색역에서 산이 바로 보이는지라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침 경찰이 있길래 물었더니, 어디로 가든지 다 산이 나온다는 선문답을 해준다. 마침 점심때라 동네 짜장면 집에 들어가서 요기하기로 했다. 누추하기는 했지만 동네에서 중국음식 배달하며 장사하려면 기본적인 맛은 지키려니 한데다, 당연히 길을 알고 있으리라 여겨서였다. 음식은 먹을만 했고, 길도 알아냈다. 수색동 주민센터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전아파트가 나왔고, 그 고갯길로 올라가면 어린이집이 나오는데, 옆으로 봉산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잔뜩 기대하고 올라간 산인데, (말투로 보건대 실망했다가 나오리라 예상했겠지만) 둘 다 감탄했다. 오른쪽으로는 아파트가 도열해 있는데, 트레킹하기 좋은 작은길이 이어져 있었다.
걸으면서 보니 서울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왼쪽으로는 고양시 원흥지구였다. 언젠가는 아파트로 가득 차겠지만 아직은 택지만 조성한지라 덜 답답했다. 서울에 이런 길이 있었는데, 너무 무심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졌다면, 평범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에 이런 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수색이 서울의 서쪽 끝이고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인지라 더 할퀴고 깎이지 않은 덕인지 모르겠다.
태웅 씨는 본디 체육교사가 꿈이었다. 굴렁쇠 소년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부모님은 태웅 씨 를 평범하게 키우느라 애쓰셨다. 아이가 유명해져 한몫 챙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하셨다. 큰일을 치러낸 소년치고는 큰 탈 없이 자란 데는 부모님의 공이 컸다. 그러다 문득, 배우가 되고 싶었다. 계기는 대학수업 시간이었다. 스포츠사회학을 전공한 교수님이 발표와 토론으로 수업을 이끌었다. 아무래도 몸이 앞서는 학생들인지라 힘들어했는데, 태웅 씨는 적성에 맞았다. 말로 누군가를 설득해나가는 과정이 신났다. 수업을 하면서 무대 위에서 웃음과 울음을 주는 배우를 떠올렸다. 해보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할리우드 키드처럼 살아온 것도 배우의 꿈을 꾸게 한 원인(遠因)이 되었더랬다. 마음먹은 지 2년 만에, 그러니까 2006년 ‘19, 그리고 80’에 출연하면서 배우가 되었다.
배우 윤태웅.
봉산은 평탄했다. 산 밑 마을에서 사람도 제법 많이 올라왔다. 시설도 잘 갖추어졌다. 길을 걸으며 문득 초입을 찾지 못해 잠시 헤맸던 생각이 났다. 길이 처음부터 있을 리 만무다. 사람들이 가고나니 길이 열린다. 그러면 되었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과연 그럴까? 당연히 길이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하지만 길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는 않는다. 들어가는 길을 잘 알려주어야 하고, 갈림길 표시도 정확히 해주어야 하고, 남은 거리도 알려주어야 한다. 지칠만한 곳에 쉼터도 마련해주면 더 좋은 법이다. 긴 세월 무명으로 보내다 일약 스타가 돼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이 있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따라하면 다 될 듯하다. 하지만, 어찌 그렇던가. 길이 열렸다 해서 그 길이 내 길이 되지는 않는다. 길 가는 이들을 지켜보며 격려하고 응원하고 후원해야 하는 이유다.
태웅 씨한테 강한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마이클 키튼의 열연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연출이 빛났던 영화 <버드맨>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였다. 히어로 무비 <버드맨>으로 할리우드에서 상종가를 날렸던 인기 배우는 이제 한낱 퇴물배우로 전락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마약에 찌든 딸내미를 건사하기도 힘들다. 돈도 바닥이 났다. 영광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을 종결할 수는 없었다.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파구는 연극이었다. 무대에서 영혼을 불사르고 싶었던 열정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연출까지 도맡다보니,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졌다. 제작비도 모자랐고, 배우도 골머리를 앓게 했다. 더욱이 평론가는 대놓고 백안시했다. 그때 유혹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시, 버드맨으로 돌아가라고, 이런 하찮은 연극에 매달리지 말라고.
태웅 씨는 이 영화를 보며 굴렁쇠 소년이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유혹했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대체로 감언이설이었고 이용하려고만 했고 노력의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 남들만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니다. 배우의 길로 접어 들고 나서 힘들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내면에서 슬그머니 똬리를 틀던 유혹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굴렁쇠 소년이라 해서 더 많은 기회를 누려보라고. 하지만 태웅 씨는 지금껏 그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다. 어린 날의 성취를 바탕으로 오늘의 영광을 누리려 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다시 버드맨으로 돌아가지 않을 때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었듯, 태웅 씨는 굴렁쇠 소년이란 월계관을 쓰지 않을 때 자신이 진정한 연기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봉산을 내려오니 넓은 찻길이 나왔다. 서오릉으로 가는 길이다. 도로를 건너니 앵봉산으로 둘레길이 이어졌다. 봉산은 능선이 완만했는데, 앵봉산은 제법 등산 기분을 내게 했다. 어디인가 했더니, 서오릉 뒷산이었다. 앵봉산 능선을 타면 구파발 역이 나온다. 차를 타고 지나다 엎핏 본 산의 속내가 이토록 풍요로울 줄 몰랐다. 북한산을 축소한 산이라 여기면 되는데다 조망도 좋았다. 나오는 길을 보니 평소 구파발 버스정류장에서 보았던, 쓰레기 소각장인 은평환경플랜트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구파발에서 수색역 쪽으로 가도 되는 길이다.
태웅 씨는 재주가 많다. 오랫동안 태권도를 하며 심신을 단련해왔다. 사진도 재능이 있어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원로작가한테 지도도 받았다. 내 사진도 찍어준지라 프로필 사진으로 종종 써먹는다. 바리스타 일도 척척 잘해낸다. 그가 타준 커피를 마시면 웬만한 커피전문점 커피도 맛없다 여길 정도다. 연기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한눈팔지 않을 뿐이다. 본디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지라, 연기력을 키우려 애썼다. 지인의 소개로 한양대 연극학과 최형인 교수의 수업을 청강하며 지도를 받았다. 연극이나 뮤지컬에도 기회 닿는 대로 출연해 선배 연기자나 연출의 도움을 받는다. 때로는 나이어린 친구의 매서운 질책도 몸에 좋은 쓴 약이라 여기고 경청했다. 하나,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다. 남들이 다 간 길이라 해도 누구나 걸을 수 있는 법은 아니다. 시쳇말로 멘탈이 강하지 않고는 자기를 지키기 어려운 직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웅 씨는 잘 버텨내고 있다. 스스로 바탕이 되는 힘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연기를 하면서 어떤 틀을 깨지 못한다는 말을 몇 차례 들었다. 원인은 분명히 심리적인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심리학을 전공한 수녀님한테 상담을 받았다. 연기자로서 내면에서 더 폭발적인 힘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냈다. 태웅 씨가 말한대로 심리상담은 들여다보게 한 힘이었다.
또 하나는 가톨릭 신앙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시복식 행사의 청년리더로 참여했다. 자칫 가벼워지고 흔들리기 쉬운 삶에 신앙은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는 힘이 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독서. 내가 태웅 씨를 만난 것은 한 독서모임에서다.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이해력이 높아 어려운 고전의 내용도 잘 파악한다. 지켜보니 글재주도 있어 사진을 찍고 그에 대한 단상을 써보라고 부추기고 있다. 태웅 씨는 책읽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었다고 한다.
길을 걷는 이에게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 누구도 대신 걸을 수 없으며 스스로 걸어가야 한다는. 삶이란 이래서 어려운 법이다. 기다란다고 기회가 무조건 오는 바도 아니다. 그 시간에 땀흘려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제 갈 길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늘 긴장하고 준비하고 단련해야만 한다. 배우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남들이 알아보아 주고, 써줘야 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믿는 것은 지금처럼만 자신을 다져나간다면, 태웅 씨에게 뭇 스타가 걸어간 길이 열리리라는 점이다. 중심을 잃지 않고 내면을 성찰하고, 세상을 직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바라건대, 그 길에 있을 때 상처받은 무리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 길의 끝에도 영광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