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집
학교 사정으로 인근 성당에 산 지 반년이다. 얹혀살려면 염치가 있어야 하는 법. 드물지 않게 본당 신부의 부탁을 받아 미사를 봉헌해주고 있다. 제법 몸에 익을 때도 되었건만 미사 끝머리에서는 여전히 신경이 곤두선다. 성당 입구의 벽시계를 힐끔거린다. 본당 신부의 당부 때문이다. 주중 미사는 30분, 주일 미사는 1시간을 넘기지 말라는 지침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 새벽에는 출근으로 바쁘고, 주일에는 바로 이어지는 미사로 나고 드는 차량들이 꼬여 자주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이다. 미사 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차량들을 보고 있으면 빌딩들로 둘러싸인 이 신도시가 지닌 일상의 속도가 새삼스럽다. 그것은 늦잠에 허겁지겁 해치우던 어린 시절 아침 등굣길의 엄마 밥상의 든든한 냄새와는 분명 다른 헛헛함, 금속성의 맛이다.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 서울 약현성당. 사진출처: 천주교 서울대교구/*이 사진은 본문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옛사람들에게 성당은 어떤 곳이었을까. 높고 육중한 아치가 얽혀 있는 성당 천장을 머리에 이고 머릿수건을 한 아낙이 겨울을 날 땔감인지 잔나뭇가지들을 한가득 허리춤에 품고 있다. 멀지 않은 기둥에 나귀가 묶여 있고 저 멀리 화면 구석에는 반대편 창에서 들어온 볕이 끊어진 어둑한 곳에 사내가 짚단을 깔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과거 유럽의 도상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다. 성당이라는 지엄한 곳에 곤궁한 일상의 군상들과 도구들이 뒤섞여 있다. 짐작하던 것과 달리 중세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경계가 모호했다. 홍수나 폭설, 전쟁과 같은 재해와 재난에 돌로 지은 성당만큼 견고한 피신처는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집 없는 이들이 아예 눌러앉아 사는 곳이기도 했고 낡은 가구를 쌓아두거나 심지어 소, 돼지 따위의 가축들의 우리로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들이 시사하는 것이 등짐 두어 번이면 지어 나를 수 있었던 남루한 살림살이가 전부였던 당시 일상의 곤궁함만은 아니겠다. 그것은 일상이 종교라는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어 있었다는 사뭇 낯선 사실이다.
본당 신부 돈 카밀로와 공산당원 페포네가 티격태격하면서도 어쨌든 동시대를 함께 걸어가는 일상의 동지로 만났던 것과 같은, 세속적인 것과 거룩한 것 사이의 촘촘한 우정은 어느새 문학적 상상력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 사람들의 소소한 하루와 가까워지려 성당의 일부 공간을 카페 등으로 궁여지책 만들고는 있다지만, 그런 공간이 성난 비를 피하고 샛바람을 막아주던 그 옛날 성당의 실재감 있는 든든함과 비교될 리 없다. 교회는 그들에게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난처이자 집이며, 가난한 살림살이들을 펼쳐놓고 밥을 지어 먹어도 괜찮은 넉넉함이며, 누구라도 깃들 수 있는 공유지였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거룩한 것이라는 명제는 적어도 그들에게는 두터운 신학서적을 빌리지 않고서라도 몸이 먼저 알아 애써 이야기할 필요 없는 것이었다.
몰아치는 일상을 뒤로하고 잠시 머물러 숨을 고르고 다시 생존의 전장으로 나설 여백 같은 종교라면 얼마나 비천한가. 정작 벽을 헐어 지어야 하는 것은 카페가 아니라 시대의 천박함에 쓸려나갈 목숨들의 ‘야전병원’이 아닐까. 그래야만 교회를 사람들의 집이라 하지 않겠는가.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