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스테이, 영오당을 찾다
동호인들은 작년가을 직접 덖었다는 차를 몇봉지 들고서 해인사를 찾아왔다. 곁에는 달필 사인펜체로 '매율원 차'라는 상표를 달았고 덖은 날짜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답방삼아 올봄에 영오당(迎吾堂)으로 갔다. 안채 옆면에 눈썹처마를 달아낸 공간에는 무쇠솥이 두어개 걸려 있었다. 장작불을 다룰 수 있을만큼 프로가 아닌지라 가스불 장치를 했노라고 미리 설명해준다. 집 뒤편으로는 대나무가 듬성듬성 긴 담처럼 둘러섰고 한 켠에는 차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당주(堂主) 어른은 기존의 수십년 된 고가를 손봐서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었고, 살림집인 안채는 몇 년 전에 새로 지었다고 했다. 잔디마당과 장독대 그리고 새 정자까지 어우러져 손때가 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호의 기원은 안산(案山)이 오산(鰲山 자라모양의 산)인 까닭이다. '오산을 맞이하는 집'에서 비롯되었다. 존경하는 어른이 은퇴하여 무등산 자락을 끌어안는 자리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영서당(迎瑞堂)'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무등산의 또다른 이름이 서석산이다. 주상절리인 서석대라는 명소를 품고있다. 그 작명방식을 그대로 빌려왔다.
'오(鰲)'자는 어려운 글자이다. 한국 최초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은 설잠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金鰲新話)』 산실인 경주남산의 이명도 '금오산'이다. 누구든지 옥편에서 그 글자를 찾아봐야 할 만큼, 흔한 글자는 아니다. 한문에 생경한 뒷세대들에게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과감하게 '오(吾)'자로 바꾸었다. 누구든지 이 집에 오면 타인이 아니라 내(吾)가 된다. 즉 누구나 주인이 된다는 의미라는 해설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손님과 주인을 구별하지 않는 집이라고 했다. 임제(臨濟?~867)선사의 빈주불이(賓主不二)를 추구했다. 진정한 빈주불이는 주인과 객이 서로 주인과 객이라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는 빈주쌍망(賓主雙忘)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이기도 하다.
물론 퇴근시 '주인인 나를 늘 반갑게 맞이해주는 집'이기도 하다. 조금 멀긴 하지만 교통체증이 없어 인근의 도회지에 자리잡은 대학까지 오고 가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고. 밤길에는 고라니를 만날 정도로 한적하고 운치있는 길이다. 직장근처 아파트에 살다가 층간소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본래부터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을 선호했던 성정도 한 몫 했다. 지리산을 뒤에 두고 섬진강이 앞에 흐르는 금환낙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자리)의 명당을 눈여겨 봐두고 있던 참이였다. 강의 북쪽을 양(陽)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수 이북의 땅을 한양(漢陽)이라고 했다던가. 물론 볕이 잘 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더불어 도선국사께서 풍수이론을 연마한 곳이라는 스토리텔링까지 합해진 곳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 자리의 터를 만나기 전부터 유명고택인 쌍산재(雙山齋)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어귀에 있는 '당몰샘'이라는 명천(名泉) 때문이다. 차를 좋아하다보니 좋은 물을 찾게 되고 좋은 물을 찾다보니 이곳을 분주하게 드나든 것이다. 소문만큼 양명하고 물이 좋았다. 당연히 장수마을이기도 했다. 물 때문에 왔다가 곁의 쌍산재 주인을 만났고, 안면을 트게 되었고, 급기야 이제는 같은동네의 주민이 된 것이다.
일행과 마실삼아 종가집 쌍산재를 찾았다. 해주 오씨 집안의 젊은 종손은 큰 키에 안경너머 큰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6대로 이어 온 200년된 집안을 안내해 주었다. 자연석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입구의 살림집보다도 더 아늑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크게 인공미를 더하지 않는 자연스런 한국식 정원이 펼쳐진다. 압권은 쪽문을 열고 나간 후에 펼쳐진 작은 저수지의 풍광이다. 두루두루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조건을 갖춘 한옥저택이었다. 하지만 한옥은 사람이 살아야만 보존이 되는 집이다. 지주(地主)제도를 지탱해 오던 대가족 체제는 해체되었고, 핵가족의 대세는 종가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집을 보존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한옥스테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옥스테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에 집 뒷켠을 달아내어 화장실과 세면장을 설치했고, 사람들이 편리하게 머물수 있도록 여타시설도 함께 갖추었다. 따지고 보면 한옥스테이 원조격에 해당하는 집이기도 하다. 지금은 템플스테이 만큼이나 한옥스테이도 저변화되었다.
다시 영오당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본 동네 우편물 문패는 특이했다. 병기한 이름 뒤에 괄호를 하고서 '사위'라고 부기했고, 안주인 이름 뒤에도 '00댁'이라는 택호를 빠트리지 않는다. 혈연을 이어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업을 이어가는 것도 그 못지 않음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렸을 때 명절에 큰집에 가면 친인척들에게 불리는 숙모의 택호는 '신동(新洞)댁'이었다. 외가가 '신기(新基)부락'인 까닭이다. 우리말로 하면 '새마을'쯤 될 것 같다. 육이오 때 피난을 다녀 왔더니 동네가 전쟁와중에 불타고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을 아예 양지바른 터로 옮겨 새로 만든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더불어 숙부도 고향어른들은 '신동양반'이라고 호칭했다. 그야말로 그 시절에도 별로 유명하지도 않는 평범한 아낙네의 신랑도 '누구의 남편'으로 불렸던 것이다. 씨족사회의 '가부장 제도'이라는 엄격한 강령 속에서도 여인중심의 또다른 질서가 있었던 것이다.
팽주에게 4명이상의 손님은 버겁기 마련이다. 10여명 남짓의 손님 아니 주인들에게 당주가 '노동처럼'바삐 뽑아주는 여러 종류의 차를 음미하였다. 차 자리를 파한 이후에 이루어진 한옥스테이의 절정은 안채 다락방 공개였다. 특이한 상량글이 유독 눈에 띄었다.
"원이천지인 공위미복당(願以天地人 共爲美福堂)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아름답고 복된 집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형식적인 장황한 상량문을 생략하고 표면에 간단하게 부기했다고 한다.
해가 지고 주변은 이미 어둑하다.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답게 서재에 따로 붙인 '고금학려(古今學廬 옛과 지금을 공부하는 곳)'라는 작은 편액을 뒤로 하고서 아쉽지만 대문을 나섰다. 템플스테이와 한옥스테이를 함께 할 수 있는 도반이 기다리고 있는 남해 용문사로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