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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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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노자, 그 잃어버린 이야기노담일사老聃逸事<하>

  

  

1. 내게 지킬 몸이 없다면

10년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렀다. 때는 서기전 506년 낙양의 뜨거운 태양이 기울기 시작한 가을이었다. 낙양(洛陽)은 낙수(洛水)의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낙양의 북쪽은 망산(芒山)이 가로막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도읍 서쪽에 왕성(王城)이 있고, 동남쪽으로 성주(成周)성이 새로 들어서 있다. 망산은 왕실의 사냥터였으나 주나라가 쇠락하면서 북쪽지역은 점차 귀족들의 묘지로 변해갔다. 그 북망산 자락 끝에 은퇴한 한 늙은 태사(太史)가 초옥을 지어 살고 있었다. 수장실의 사(史)에서 물러난 뒤 은거에 들어간 ‘노담 선생’이었다. 노담은 60여세의 나이에 머리도 백발이 되었으나 몸은 젊은이 못지 않게 가벼웠다. 사람들은 본래 장로(노담의 할아버지를 말한다)의 집안은 양생술이 비전(秘傳)하여 대대로 백수(百壽)를 우습게 여긴다며 노담도 분명 그럴 것이라며 부러워했다.

 

노담은 이 누옥에서 늙은 아내와 단 둘이 살았다.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연금하듯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대나무숲 속에 감춘 채 서실(書室)에 자신을 파묻고 있었다. 사람들은 간혹 그가 달밤에 거문고를 연주하며 읊는 시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수가 전해진다.

   

 영화(榮華)와 내처짐은 놀라듯이 받으라

 큰 근심을 내 몸같이 귀하게 여겨라

 영화와 내처짐을 놀란듯이 함은 무슨 뜻인가

 영화는 은총을 입음이니

 얻을 때는 기뻐 놀라듯이 받고

 잃을 때는 슬퍼 놀라듯이 잃어야

 한 몸을 지킨다네.

 큰 근심을 내 몸처럼 귀히 여김은 무슨 뜻인가

 사람에게 큰 근심이  생기는 까닭은

 자기에게 몸이 있기 때문.

 내게 지킬 몸이 없다면

 내게 무슨 근심이 있으랴.

 寵辱若驚(총욕약경)/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寵爲下(총위하)/得之若驚(득지약경)/失之若驚(

실지약경)/是謂寵辱若驚(시위총욕약경)/何謂貴大患若身(하위귀대환약신)/吾所以有大患者/爲吾有身/及吾無身/吾有何患 ① 

 

이날도 그가 금을 켜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한때 그가 수장실에서 데리고 있던 제자이자 부하 관리였다.

“선생님. 저희를 도와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동쪽 노나라에서 방문단이 와 있습니다. 최근 노나라에서 개정보수한 노나라 사서인 <노춘추>(魯春秋)와 노나라 역법책인 <역상>(易象)을 바치겠다고 가져왔는데 저희 수준으로는 아직 완전한 독해가 무리라 선생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 방문단 중에 공구(孔丘)라는 선비가 있는데 그가 자신이 편수한 책들을 가져와 경사(京師·서울)의 여러 현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니 선생님께서 한번 만나주실 것을 청합니다. 방문단장으로 온 맹의자라는 젊은 대부가 매우 부유하므로…”

“허명에 들뜬 유자를 만나주면 우리가 올 겨울을 조금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뜻이냐?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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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례노담'작자미상,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아래)'공자견노자', 동한 산동 가상 제산촌 출토 화상석


2. 거인의 조우

노담이 이때 ‘노나라에서 온 공구라는 유사(儒士)’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전설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주로 공자가 노담에게 주례(周禮), 즉 주나라의 예악제도에 관해 궁금한 것을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식이다. 공자가 주나라에 와서 주례를 배운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동쪽의 전통있는 제후국 노나라에서 학숙을 열고 있는 사유(師儒)라면 천하의 중심인 낙양에 와서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예악제도의 핵심을 전수받고자 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일이다. 역시 각종 전승이 말해 주듯이 공자 일행이 낙양 왕실공족의 묘당을 방문해 제식(祭式)과 시설을 관찰하고 궁금한 것에 대해 문답했다는 것도 기본 팩트만큼은 분명 실제로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공자가 주례를 배웠다는 것은 단지 예악제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실 공자가 배우러 간 주례는 작게는 예악제도이고, 넓게는 주나라의 정치 제도와 운용에 관한 것이었다. 즉 천하를 다스리는  ‘치도(治道)’였다. 당시의 정치적 용어로 예는 모범적인 규범이나 제도를 의미하므로 주례는 곧 주나라 봉건제도의 핵심 규범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례를 직접 견문하러온 공자와, 공자보다 20년 가까이 나이가 위인 노자가 처음 수인사를 하고 나눴을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자면, 어느 전승에는 노자가 묻고 공자가 대답하는 이런 대화가 기록돼 있다.

  

  “내가 들으니 그대가 북방에서 온 현자라고 하는데 그대는 도(道)를 터득하였소?”  子亦得道乎?

  “아직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未得也.

  “선생은 어느 분야의 도를 찾고 있소?” 子惡乎求之哉?

  “저는 법도(法度)에서 도를 구하고 있는데 5년이 지나도록 아직 못찾고 있습니다.” 吾求之於度數 五年而未得也.

  “그럼 또 어느 분야에서 도를 찾고 있소?” 子又惡乎求之哉?

  “음양에서 찾아보고 있는데 12년이 지나도록 못찾고 있습니다.” 吾求之於陰陽 十有二年而未得.  -<장자> `천운’편

   

이 대화는 당연히 두 사람이 구도(求道)에 관하여 나눈 대화로 전해지고 있지만, 나, 이생이 훗날 들은 바로는 기실 이런 대화였다.

   

 “내가 들으니 선생께서는 북방의 현자(賢者)라고 하는데, 그대는 벼슬을 하시었소?”

 “아직 벼슬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는 어느 분야의 벼슬을 구하고 있소?”

 “저는 도수(수학)에 능하여 벼슬을 찾고 있는데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럼 또 어느 분야에서 벼슬을 구하고 있소?”

 “음양술로 찾아보고 있는데 12년이 지나도록 못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성인이 이런 비루한 대화를 나눴다고 하면 몹시 화를 냈다. 그러나 구도(求道)에 관한 문답으로 알려진 이 대화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주나라 관헌들이 상부에 보고한 노담과 노나라 방문단의 `면담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 서로의 처지를 탐색하고 대화의 수준과 범위를 찾기 위해 ‘호구 조사’처럼 가볍지만 팩트가 살아있는 대화를 나눴고 이 다분히 형식적인 대화를 면담을 참관한 관리들이 충실하게 ‘녹취’하여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이 보고서의 이면(裡面)을 훗날의 장자(莊子)는 용케도 간파했던 것이며, 그것이 오랜 세월의 윤색과 사상의 습합 과정을 거치면서 두 성인간의 구도에 관한 문답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등장하는 ‘도수’나 ‘음양술’ 따위는 후대 사람들이 생각한 것이고, 실제로는 육예 중 기능적인 분야로 일찌감치 분류된 수(數)나 태사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易) 분야였을 것이다.)

  

3. 천도(天道)와 인도(人道)

아마도 두 사람의 진정한 철학적 대화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하는 수준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노담은 물론 공자도 사상가였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의 수준을 파악하여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은 후에는 예법이나 정치에 관한 주제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일반적 의미에서 진리라고 말해지는 도에 관하여서도 서로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공자 입장에서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자기보다 한참 연상에다 문화의 중심지 낙양에서 손꼽히는 철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란 다시 얻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예법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덧 미묘한 차이점을 서로 발견해가기 시작했다. 관헌들은 그 대화가 상례(喪禮)에 관한 일반적인 대화라고 여기고 기록했지만, 대화는 점차 암호와 같은 중의적 의미를 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귀족이 미성년자로 죽었을 때의 상례(喪禮), 상중(喪中)에 전투를 하는 것이 예에 맞는 지 여부, 임금이 죽거나 망명할때 신주(神主)를 어떻게 보관하는 지의 여부 등(<예기> ‘증자문’편)을 차례로 논했는데, 예리한 감각을 가진 지식인이 다른 방식으로 들으면, 꼭 주나라 왕실에서 벌어진 왕자들간의 내전과 관련된 사례를 토론하는 것처럼 들을 수도 있었다.  이 대화 기록은 조정에 보고된 면담 문서가 전란 중에 망실될 때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만,  상례에 관한 다음과 같은 두 사람의 문답은 그 대화의 실상을 파편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공자 “장례 행렬이 떠나는 도중에 일식(日飾)을 만나면 어찌해야 합니까?”

 노담 “당연히 멈추고 일식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다시 해가 밝아지면 출발합니다. 그것이 예(禮)입니다.”

 공자 “대저 영구(靈柩)는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법이고, 일식은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것. 계속 가는 것이 예가 아닐까요?”

 노담 “밤중에 별을 보고서라도 계속 가야 하는 사람은 죄를 입고 가는 자이거나, 부모가 죽어서 달려가는 사람 뿐입니다. 일식은 깜깜한 밤이니(별빛도 없는 위험한 밤길을 무리하게 가다보면 부모상을 입고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군자는 예를 행하되 남의 어버이를 근심에 빠지게 하지 않습니다.” -<예기> `증자문’②

     

노담은 사실 이 대화때문에 공구라는 사람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었다. 애초 상례에 대한 문답으로 시작한 대화가 이 대목에 이르러 자신들도 모르게 자기 사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한 본래의 대화는 기실 이런 문답이었을 것이다.

   

 공자 “인도(人道·인간의 도리)와 천도(天道·자연의 법칙)가 부딪치는 일이 있습니까?”

 노담 “그런 일이 생기면 천도를 따르는 것이 순리이지요.”

 공자 “죽음은 돌이킬 수 없고 천도의 움직임은 사람이 감히 알 수 없으니, 사람에게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운 것’이라 들었습니다③. 인도로 천도를 헤쳐나가는 것이 인간을 위한 길이 아닙니까?”

 노담 “억지로 인도와 천도를 나누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인위(人爲)의 도는 예법을 구하지만, 무위(無爲)의 천도는 보이지 않는 사람까지 구합니다. 어느 쪽이 더 인간을 위한 길일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침내 끝났다. 몇날 며칠이 계속되고 얼마나 많은 대화가 더 있었는 지 알길은 없다. 그러나 끝은 있었을 것이다. 노담의 서실을 나올때 공자가 읍하며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자 노담도 공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며 진심으로 답례했다. 두 사람은 대나무숲길을 나란히 걸으며 마지막 대화를 이어갔다. 공자가 몇 번인가 망설이는 듯 하다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노사의 가르침 평생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참으로 깊고 넓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젊어 세상을 구하는 일에 대한 미련을 아주 거두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인도로 천도에 다가서고 싶습니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을 꿈꾸는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감히 한 마디 말할 기회를 주신다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도를 넓히지, 도가 사람을 넓혀주지는 않는다(人能弘道 非道弘人-<논어> 위령공편 28장④)고 믿습니다.”

  

두 사람은 이 역사적인 조우에서 많은 사상적 교감을 나누었으리라 추정된다. 두 사람을 조종(祖宗)으로 삼은 학파의 사상발전사를 보면 서로의 사상을 흡수통합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근본적으로 가진 생각의 차이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인생의 풍파를 뼈아프게 겪어본 노담의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러했다. 공자는 앞에서 본 대화의 내용처럼 아직 벼슬하기 전의 학사였으며, 그만큼 원기왕성하고 미래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 인의(仁義)의 명분으로 출사의 도를 주창하는 공자의 모습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노담 자신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젊은 모습이기도 하였기에.

   

  태자가 돌아가시기 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하구나. 아, 그때 나는 얼마나 뜨거운 열정과 야망을 가졌던가…

  

노담은 진정 공자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고 있었다. 인간도 천지인 삼재(三才)의 일원이므로 그냥 천도의 뒤만 따르고 싶지는 않다는 인간성에 대한 저 자부, 인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 인도로서 천도의 천도다움을 보이겠다는 저 기개가 노담은 부러웠다. 그러나 그런만큼 그에게 또한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진실로 사람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깊고 아득한 심연같은 우주의 본질을. 인위의 눈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무위의 세계를. 오직 욕망을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천도회귀(天道回歸)의 진리만이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크고 넓은 허정(虛靜)의 바다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대나무 숲끝에서 노담이 공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가난하고 벼슬도 없는 몸이라 먼 길 돌아갈 그대에게 마땅히 줄 선물이 없구려. 그러나 인자(仁者)는 좋은 말로 배웅할 수 있는 자라고 하니, 조금 더 인생을 살아본 사람으로 그대에게 말하오. 내가 보니 그대는 인과 의, 지혜와 용기를 모두 겸비한 군자요. 뜻이 원대하고 생각 또한 깊소. 그러나 귀 밝고 눈이 밝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위험을 불러들일 수 있소. 다른 사람의 질시를 부르기 때문이오. 널리 세상사와 인간사에 박학하여 그것으로 권도(權道)를 통찰하는 사람은 또한 그것으로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자이오. 자신이 밝을수록 다른 사람의 오점을 세상에 잘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라오. 진정 효를 아는 자는 함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된 자는 섣불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라오. 허허.부디 이 늙은이의 말이 그대의 전도(前途)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오. ” -<사기> `공자세가‘를 인용하여 각색

  

공자가 수레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노사(老師),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노담이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이 늙은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지 모르겠으나, 꼭 얼굴을 다시보지 않더라도 재회할 수 있는 길은 많을 것이오.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라여 봅시다 그려.”

공자 일행의 수레가 멀어져 보이지 않자, 노담이 시동을 불렀다. “얘야, 소를 끌고 오너라. 내 오늘은 곡신의 집에서 한 잔해야 겠구나.”

노담이 푸른 소를 타고 오솔길을 따라 골짜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스라히 안개가 그가 떠난 자취를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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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전설에 따르면 노자는 물소를 타고 주나라를 떠났다. 출처 : 위키피디아

(오른쪽)중국에 있는 노자의 동상


4. 화광동진(和光同塵)

노담이 공자의 방문을 받고 주도(周道)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눈 이듬해 낙양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왕성에서는 만세 소리가 높았으나, 낙양의  뒷골목에서는 탄식과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해 멀리 초나라로 망명한 서왕이 낙양 조정에서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집요하게 서왕의 목숨을 노리던 경왕은 서기전 506년 오나라 왕 합려가 오자서가 지휘하는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 영도를 함락시킨 전란의 소용돌이를 틈타 왕실의 맏형이자 자신의 이복형인 왕자 조를 죽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비록 왕위쟁탈전을 벌인 사이라 해도 이미 11년 전 패배해 천리 밖으로 달아난 형을 동생이 혼란을 틈타 몰래 살해한 비정한 사건은 서왕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많은 낙양지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한 아비를 가진 형제이건만

 아, 증오의 끝없음이여, 인간의 추악함이여…

  

낙양은 또다시 거대한 후폭풍에 휩싸였다. 서왕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동안 물밑에 잠복해 있던 지지세력들의 분노를 한순간에 폭발시켰다. 서왕의 망명 조정과 낙양의 왕성에서 숨죽이며 살던 서왕 지지세력이 연합해 들고 일어났다. 여기에 선왕인 경왕(景王)과 동맹관계였던 정(鄭)나라 사람들과 정나라 출신의 백공(百工) 집단이 가담해 반란의 규모는 성주의 동왕 조정을 뒤엎을 정도로 컸다. 왕과 측근들은 정신없이 진나라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 반란도 강력한 진나라 군대 앞에서는 시간문제였다.  이듬해 반란군은 진나라 군대에 밀려 궤산하고 동왕이 다시 진나라 군대의 보호 아래 낙양에 복귀함으로써 장장 17년간 계속된 동서왕의 분조(分朝)가 마침내 끝났다. 이 마지막 내전에서 살아남은 서왕파 잔존세력은 모두 낙양을 떠나 중국 전토로 흩어졌다. 이 유망민들의 이동을 따라 문화와 사상도 이동했다. 노담이란 사람의 사상도 이 유랑의 여정을 따라 전파되고 씨뿌려졌을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말하는 `노자 사상’의 출발이었다.

  

난이 끝나자 낙양에 평화가 찾아왔다. 서왕 조를 암살하고 잔존세력까지 소탕한 동왕 조정은 이제 두발을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궁성은 다시 화려해지고 낙양의 거리도 활기를 되찾았다. 어린 왕을 겁박하여 서형을 죽이게 한 측근들은 벌써부터 태평성대를 운위했다. 그러나 노담의 귀에 그것은 태평가가 아니라 동주(東周)의 몰락을 알리는 만가(晩歌)처럼 들렸다. 노담은 마침내 이 환멸로 가득찬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나이 67세, 더는 낙양의 곡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노담이 낙양을 떠나면서 남긴 시가 세상에 전해진다.

  

 나에게 약간의 지혜가 있으니

 비로소 대도(大道)를 가리라.

 하늘의 도리를 두려워 하리라.

 대도(大道)는 평탄하건만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하니

 궁성은 안락하나 들판은 황폐하고 창고는 텅 비었네

 화려한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찬 무리들

 물리도록 먹고 마셔도 재물이 넘쳐 흐르니

   아, 이것이 도(盜)가 아니고 무엇이랴!

 아, 이것은 정녕 도(道)가 아니리라! 

 使我介然有知/行於大道/唯施是畏/大道甚夷/而民好徑/朝甚除/田甚蕪/倉甚虛/服文綵/帶利劍/厭飮食/財貨有餘/是謂盜과/非

道也哉 ⑤

    

노담은 어디로 갔는가?

수장실의 사관들 사이에 은밀히 돈 소문에 따르면, 노담이 함곡관을 나가 서쪽 진(秦)나라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이 사실처럼 돈 것은 함곡관의 관령이 한때 노담과 함께 수장실에서 근무했던 윤희(尹喜)라는 전직 사관이란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소문의 내용은 노담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부인과 함께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와서 관령의 도움으로 함곡관을 넘어 서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윤희는 감숙지방 천수 땅 사람으로 낙양의 대부였으나 서왕과 동왕의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일찌기 지방관을 자처하여 함곡관의 관령이 되었다. 그래서 그를 관윤(關尹)이라고도 한다. 관윤은 노담처럼 천문과 역법에 능통했다. 그는 왕실 도서관에서 노담과 함께 일하며 학문을 논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종종 노담의 제자를 자처했다. 사람들은 노담과 윤희의 교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언제나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경지를 내세우고 만물과 하나가 되는 태일(太一)을 으뜸으로 삼았다. 연약하고 겸손한 것으로 외표를 삼고 텅 비워두어 만물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그 실질로 삼았다.”-<장자> `천하’편

   

노담은 낙양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 관윤에게 은밀히 ‘절성기지(絶聖棄智: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린다-<노자> 19장⑥)’  4자가 쓰여진 죽간을 보냈다. 관윤은 노담에게 망명의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담연독거’(澹然獨居:맑고 깨끗하게 혼자 있다-<장자> 천하편⑦ )’ 4자로 답간을 써서 그가 와도 좋음을 알렸다.

함곡관 관사에서 두 사람이 보낸 작별의 밤에 노담은 관윤에게 자신이 평생 써온 시편들을 맡겼다.

 

 “집에 두고 오기도 그렇고, 먼길에 가져가기도 어려우니…”

 “무엇입니까?”

 “노래라고 할까? 기도라고 할까? 나는 사관으로서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의 전통을 지켜왔지만, 가슴에 이는 불길을 견딜 수 없을 때면 남몰래 몇자씩 적어놓은 것이라오. 세상이 이 늙은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되거든 그대가 이 노래를 세상에 던져주오.”

그러면서 거문고에 맞춰 시를 읊어 작별의 인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가득 찬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만 못하다네           

 날카롭게 갈아 지닐수록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네                  

 금과 옥이 넘치면                           

   지킬 수 없게 되고                           

 부귀하여 교만하면                         

 자기 허물만 남길 뿐이네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라.                               

   

 도는 텅 비어 있어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다네.      

 깊고 깊으니 만물의 근원같도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움을 풀어헤치고                  

 빛을 퍼지게 하고                             

 티끌과 함께 티끌이 된다네.                

 맑고 맑아 늘 있는 것 같아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네   

 만물을 지은 한울님보다 먼저이려나…  

 持而盈之(지이영지)/不如其已(불여기이)/취而절之(취이절지)/不可長保(불가장보)/金玉滿堂(금옥만당)/莫之能守(막지능수

)/富貴而驕(부귀이교)/自遺其咎(자유기구)/功遂身退(공수신퇴)/天之道(천지도)⑧

 道沖(도충)/而用之或不盈(이용지혹불영)/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挫其銳(좌기예)/解其紛(해기분)/和其光(화기광

)/同其塵(동기진)/湛兮似或存(담혜사혹존)/吾不知誰之子(오부지수지자)/象帝之先(상제지선)⑨

 

노담이 관윤에게 전한 서물(書物)의 전모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이 서물은 관윤이 비밀스럽게 소장하고 있다가 죽을 때 자신의 후학들에게 전했다고 하는데, 후학들이 오랜 세월 그것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의 첨삭과 증보가 있었다고 여겨질 뿐이다. 또 누군가의 의해 상권이<도(道)>편, 하권이 <덕(德)>편으로 편집되었다고도 전한다. 이 <도>와 <덕>은 나중에 도가 학파에 의해 <도덕경>으로 높여졌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해지는 <노자 도덕경> 또는 <노자>이다.  5천 언(言)으로 이뤄진 이 서물이  애초 노담이 관윤에게 건넨 것과 얼마나 가깝고 먼 지는 알 수 없다.

  

노담이 이때 함곡관을 나갔기에 사람들은 그가 서쪽으로 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는 노담이 낙양 조정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노담이 실제로 향한 곳은 남쪽 초나라였는데, 당시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관윤 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담은 함곡관을 나갔다가 밤을 이용해 되돌아온 뒤 관윤으로부터 수레와 역부를 제공받아 남쪽 초나라로 떠났던 것이다. 노담이 초나라로 간 이유는 오직 한가지. 서왕 조정의 몰락으로 산실(散失)의 위기에 있던 왕실 전적을 재수집하고 복구하여 2천5백년을 전해온 위대한 고도(古道)를 훼손없이 후대에 전하고자 한 사관으로서의 마지막 사명감 때문이었다.

 

어느날 초나라 수도 영도에 눈빛 형형한 백발의 늙은이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거리 한 모퉁이에 죽간점을 열고 낡아 못쓰게 된 죽간과 목간들을 수집했는데, 그가 해독하지 못하는 책권(冊券)이 없을 만큼 학식이 뛰어났다.  이 백발의 노인에 대한 소문은 곧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의 죽간점에는 학문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 늙은 서생을  ‘높은 선생님’ 즉 ‘노자(老子)’라고 존칭하였다.  ‘노자’라 불리운 이 노인이 그후로 얼마나 더 영도에 머물며 낙양의 학문을 전수했는 지는 전해진 바가 없다. 다만 이 시기를 전후하여 초나라 문화가 중원 문화를 방불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철학과 예술 방면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초나라를 비롯한 중국 남방지역에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만물제동(萬物諸同)’을 기본 테제로 하는 초월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사상이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중국 고대 사상사(思想史)가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철학사조는 훗날 노자와 장자를 양대 종주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이를 통칭하여 `노장 사상’이라고 하였다.  

   

5. 불멸의 전설

노담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를 봤다는 소문이 보통 사람의 수명보다 더 길었던 탓인지, 그가 160여살 또는 200여살을 살았다는 믿기 어려운 전승이 사서(史書)에까지 올라 있다. 노담이 오래 살았다는, 예를 들어 태어날때 이미 80살의 백발노인같았다는 등의 전설은 아마도 그가 양생술을 비전한 장로(長老) 집안 출신이란 점과, 중국 남방 지역에 그와 비슷한 행적을 가진 어떤 노현인(老賢人)이 장수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반면, 항간에 떠도는 그의 생존기간이 황당할 정도로 긴 것을 의심한 사람들은 노담이 어쩌면 후대의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그래서 사마천과 같은 위대한 역사가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은군자, 즉 ‘숨어사는 군자’라고 얼버무리듯 명명했던 것이니 그 심정을 이해할 만 하다. 그러니 세속의 보통사람들이 노자가 불사영생(不死永生)한다고 믿은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주나라 왕실 사관 노담은 분명히 실존한 `사람’이므로 오래 살았을지언정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은둔의 철인은 죽음을 향해가는 동안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숨은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가 남긴 시에 이런 것이 전해진다.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하고                   

 자기를 아는 자를 밝다고 한다.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있다 하고                    

 자기를 이기는 자를 강하다고 한다.                

 족함을 아는 자는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자는 뜻이 있다.                         

 그 마땅함을 잃지 않는 자가 오래 가고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자를 오랜 산다고 한다.  

   知人者智(지인자지)/自知者明(자지자명)/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自勝者强(자승자강)/知足者富(지족자부)/强行者有志(

강행자유지)/不失其所者久(부실기소자구)/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⑩

 

그는 사라졌으나 그의 5천 언은 남아서 그의 존재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름붙일 수 없었던 노담 시편들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마침내 <노자>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것은 어쩌면 그가 세상을 등지고 숨을 때의 뜻이 실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노담의 사상은 초월과 은일의 남방사상과 결합하여 무위자연의 이른바 ‘노자 사상’을 배태하였고, 만물제동(萬物諸同) 사상의 장자(莊子)와 더불어 마침내 도가(道家)사상으로 합일되었다. 전란을 피해 중국 전역으로 흩어져간 낙양의 디아스포라 가운데 일부 장인 집단(백공·百工)은 평등사상과 자신들의 기술력을 결합하여 비전(非戰)과 겸애(兼愛)라는 위대한 인류애를 담은 묵가(墨家)사상으로 나아갔다. 부국강병을 위한 강력한 통제시스템을 창안한 법가(法家)는 법치의 첫머리에 노자사상을 왕관처럼 얹어 놓았다. 냉철한 현실주의자들인 법가가 왜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주장한 ‘노자’를 법치(法治)의 왕관으로 삼았는가? ‘군주가 허정무위(虛靜無爲)하면 신하는 두려워 긴장한다’는 노자 속의 제왕학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진나라 왕 정(政·진시황)은 이런 법가라는 호랑이 등 위에서 천하를 통일했고, 또 자멸했다. 진의 뒤를 이은 한 제국은 법치의 유산 위에 유가의 덕치(德治)를  왕관으로 얹음으로써 마침내  ‘외유내법(外儒內法)’이라는 동아시아의  특유의 통치원리를 수립했다.

법가가 도가를 끌어들여 천하를 아우르던 동안 ‘주나라 태자의 스승’ 노담이 연마했던 ‘승자의 철학’과 `훼절한 사유(師儒)‘ 노담이 심취한 ‘패자의 철학’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유가가 백가의 으뜸이 되어 ‘제국의 철학’으로 부활하고 있을 때 장자 학파는 반체제 사상을 고양시켰는데, 그들은 그 누구부다 노담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이 장자의 이름을 빌어 쓴 노담 행장에 이런 말이 전해진다.

   

 “노담이 말하였다.

 ‘수컷에 대해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되리라.

 순백함(영예)을 알면서도 그 굴욕을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되리라.’⑪

 다른 사람들은 앞서기를 좋아하는데, 그만 홀로 뒤에 서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세상의 굴욕을 받아들여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득 찬 것을 좋아하는데, 그만 홀로 텅 빈 것을 좋아했다.  그는 또 천하의 묵은 때를 모두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열매를 취할 때, 그는 홀로 텅 빈 것을 취하였다. 저장하는 것이 없었기에 언제나 모든 것에 여유로웠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니, 자기를 소모시키려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함이 없음으로써 교묘함을 비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운을 좇는데, 그만 홀로 자기를 굽힘으로써 온전함을 지켰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 순간에 적합하게 행동함으로써 재앙을 피하라.’

 그는 가장 심오한 것을 만물의 뿌리라고 여기고 모든 실은 매듭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단단하면 부서지고, 예리하면 무뎌진다.’

 그는 항상 다른 사물들을 위해 자리를 내줄만큼 자신을 넓히고, 다른 사람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관윤과) 노담은 과연 지극한 경지에 올랐다고 할 만하다. 그 폭넓음과 광대함에 있어서는 실로 옛날의 참사람(古之博大眞人)이었다.”

-<장자> `천하’편

  

노담에 대한 장자의 이런 평가가 실재 인물로서 노담과 얼마나 부합하는 지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후학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는 노담이라는 사람과 후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믿는 노담을 적절히 섞어 `역사 속에 살다 간 인간 노담’이 아니라 자신들의 간절한 희망 속에 담긴 ‘사상의 노자’를 탄생시켰다. 그런 점에서 노담은 노자가 아니지만, 노자는 노담이다. 노담은 한 사람의 노자지만, 노자는 여러 사람의 노담이다.

  

노담, 혹은 `늙은이 선생’으로서 노자에게 배운 사람들 중에 남방 사람들이 많았다. 정치적 좌절과 인간성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무위자연설은 남방의 은일과 허무사상과 교합하면서 때로는 강력한 정치 사상으로, 때로는 처절한 패배의 문학으로, 또는 인간성을 한없이 높은 수준으로 고양하는 초월의 철학으로 수세기에 걸쳐 여러가지 얼굴로 거듭 태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장하게 승화한 것이 남방문학의 절정인 <초사(楚辭)> 였다.

 

굴원(屈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은주 삼대의 고전(古典)과 지식인들이 주나라 서왕(西王)의 망명길을 따라 초나라로 이동하고, 노담이 뒤따라 남쪽으로 간 지 약 일백수십여년이 뒤 초나라의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중원의 전통사상을 흠뻑 흡수했던 대시인이었다. 그는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유배지를 떠돌며 좌절과 원망으로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는데,  그가 죽기 전에 썼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굴원이 쫓겨나 강담에서 노닐 때

 못가를 거닐며 시를 읊었네

 얼굴은 해쓱하고 형색은 초췌했네 

 어부가 이를 보고 물었네

 그대는 고귀한 대부가 아니오

 어찌 이런 곳까지 왔는가.

  

 굴원이 말한다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홀로 맑고

 뭇 사람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소.

 그래서 쫓겨난 것이라오.

  

 어부가 말한다.

 성인은 사물에 막히는 바가 없어

 세상과 더불어 옮겨다닌다오.

 세상 사람이 모두 흐리거든

 어찌하여 함께 진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세상 사람이 모두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같이 술찌게미를 먹고 바닥까지 술을 핥지 않고

 어찌하여 혼자 깊이 생각하고 우뚝 서서

 스스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는가.

   

 굴원이 말한다.

 내가 일찌기 들으니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어찌 이런 깨끗한 몸에

 더러운 것을 받게 할 수 있으랴.

 차라리 상수의 물에 빠져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이렇게 희디 흰 몸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쓴단 말인가.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돛대를 두드리고 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으리라

 드디어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네.⑫  

 

노자는 그 누구도 실존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2천5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노담, 혹은 노자는 같은 사람, 혹은 다른 사람으로 ‘여전히 실존한다’. 이 약전(略傳)은 그리하여 불멸하는 노담의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이거나 ‘잃어버린 이야기’이다. 공자의 행적을 좇다가 길을 잘못들어 안개 속을 걷는 사람마냥 실전(失傳)의 미로를 헤매었던 나, 이생은 이제 그 끊어진 최후의 종적 앞에서 무딘 붓을 내려 놓는다. 먼 하늘에 무연히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또한 생각에 잠긴다. 굴원이 만난 어부는 누구였으며, 어부에게 굴원은 누구의 초상(肖像)인지를.   <끝>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노자>13장 부분

  (본문 인용문 동일)/故貴以身爲天下(고귀이신위천하)/若可寄天下(약가기천하)/愛以身爲天下(애이신위천하)/若可托天下(약가탁천하). 

 

 ② <예기> ‘증자문’(이상옥 역)

 曾子問曰 葬引 至于긍(길긍) 日有食之 則有變乎 且不乎. 孔子曰 昔者 吾從老聃 助葬於巷黨 及긍 日有食之. 老聃曰 丘 止柩就道右 止哭而聽變. 旣明反 而后行. 曰 禮也. 反葬而丘問之曰 夫柩 不可而反者也. 日有食之 不知其已之遲數 則豈如行哉. 老聃曰 (중략) 見星而行者 有罪人與奔父母之喪者乎.  日有食之. 安知其不見星也. 且君子行禮 不以人之親 점(학질점)患. 吾聞諸老聃云.

 증자가 물었다. “장례에 있어서 발인하여 길에 이르렀을 때에 일식이 있으면 무언가 별다른 조치를 취합니까? 아니면 어떤 조치도 안합니까?” 공자가 말씀하였다. “옛날에 내가 노담을 따라 항당에서 남의 장사(葬事)를 돕고 있었는데 도중에 일식이 일어났다. 노담이 말하였다. ‘구야, 영구(靈柩)를 멈추어 길 오른쪽에 놓고 곡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일식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일광이 회복된 뒤에 행진하며,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이다.’ 라고 노담이 말했다.” 장사를 치르고 돌아와서 구가 물었다. “대체로 영구는 한 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빨리 묘지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고, 일식은 언제 끝날 지 모른 것이므로 기다리는 것 보다 전진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노담이 말하였다. “

(중략) 별을 보고 가는 자는 오직 죄인이거나 부모의 상에 분상(奔喪)하는 자 뿐인 것이다. 일식이 있으니, 어찌 별을 보지 않을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 군자는 예를 행하는데 있어서 남의 어버이로 하여금 위망의 근심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와같이 노담에게 배웠다.”

  

 ③ 춘추전국 시대 정나라의 정치가 자산(子産·?~B.C522)이 한 말이다. 공자는 서른 살 정도 위였던 자산을 존경하고 그의 정치사상을 흡수했다.

 

 ④<논어> ‘위령공’편 28장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자왈 인능홍도 비도홍인)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도의 본체를 넓힐 수가 있고, 도가 사람의 마음을 넓힐 수는 없는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힐 수는 없는 법.

    L-The Master said, “A man can enlarge the principles which he follows; those principles do not enlarge the

man.”

 

 ⑤ <노자> 53장 전문

 

   ⑥ <노자> 19장 부분 인용

 絶聖棄知(절성기지)民利百倍(민리백배)/絶仁棄義(절인기의)民復孝慈(민복효자)/絶巧棄利(절교기리) 盜賊無有(도적무유).(하략)

 성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이 백배가 된다.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이 효도와 사랑으로 돌아간다. 기교를 끊고 이익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하략)

   

   ⑦ <장자> ‘천하’편 부분 인용

 以本爲精(이본위정) 以物爲粗(이물위조) 以有積爲不足(이유적위부족) 澹然獨與神明居(담연독여신명거) 古之道術 有在於是者(고지도술 유재어시자).

 근본을 정채로 삼고, 외형을 조잡하게 여긴다. 축적하는 따위는 족하게 여기지 않고, 담담하게 홀로 신명과 더불어 거한다. 고도(古道)란 대개 여기에 있다.

 

 ⑧ <노자> 9장 전문

  

 ⑨ <노자> 4장 전문

 

   ⑩ <노자> 33장 전문

 

   ⑪ <노자> 28장 부분

 知其雄(지기웅) 守其雌(수기자) 爲天下谿(위천하계) (…) 知其榮(지기영) 守其辱(수기욕) 爲天下谷(위천하곡)(…)

 

  ⑫ <초사(楚辭)> `어부(漁父)‘ 전문

 屈原旣放/游於江潭/行吟澤畔/顔色憔悴/形容枯槁/漁父見而問之曰/子非三閭大夫與/何故至於斯//屈原曰/擧世皆濁我獨淸/衆人皆醉我獨醒/是以見放//漁父曰/聖人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世人皆濁/何不굴(흐릴굴)其泥/而揚其波/衆人皆醉/何不포(저녁밥포)其糟/而철(드리마실철)其시(술거를시)/何故深思高擧/自令放爲//屈原曰/吾聞之/新沐者必彈冠/新浴者必振衣/安能以身之察察/受物之汶汶者乎/寧赴湘流/葬江魚之腹中/安能以皓皓之白/而蒙世俗之塵埃乎//漁父莞爾而笑/鼓예(노예)而去/乃歌曰/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遂去不復與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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