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한 풍요'를 소망하다
문득 ‘검소한 풍요’란 말이 밝게 다가온다. 강요가 아닌 자유로움을 통해 사회적 성숙을 이루고 정신적 풍요를 안겨줄 활동을 하는 삶의 방식이다. 정민 교수에게서 배운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 삶의 태도라고 옮길 수 있을지.
지난봄, 자살한 기업인이 남긴 메모와 그 조사, 그에 이은 후임 총리의 인사청문회로 한참 수선스러울 때 신문에서 본 우루과이의 퇴임 대통령 무히카에 관한 뉴스는 당연히 신선했다. “전 재산이 낡은 자동차 한 대, 대통령 월급의 90퍼센트를 기부, 대통령궁을 노숙자들에게 제공…” 등등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의 이야기는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어린 날에 읽은 옛날이야기 한 자락이 떠올랐다. “옛날 옛적 한 임금님이 큰 병에 걸려”로 시작하는 그 이야기는 백약을 써도 효험을 얻지 못하던 참에 한 명의가 “다른 약은 모두 쓸데없고 딱 하나뿐…”이라며 준 처방이 “이
세상 아무 근심걱정 없는 부부의 속곳을 달인 물”이었단다. 방방곡곡을 뒤져 정말 근심걱정 없는 한 노부부를 마침내 찾아냈다. 벽촌의 부부가 끼니 잇기 어렵게 가난하지만 환한 웃음과 덕담으로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확인하자 사정을 말하고 속곳 한 벌을 청했다. 그러자 두 내외는 뜻밖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했다. “아뿔싸, 저희는 가난해서 속곳이 한 벌도 없는데….”
그 이야기를 읽는 어린 내가 생각한 것은 이 세상 근심걱정 하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다는 교훈이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이야기를 읽으며 그 옛날이야기를 회상하는 지금 그것은 외려, 가난해야 근심걱정이 없어진다라는 지혜였다. 가난해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행복하다는, 뒤집힌 가난의 모습이다.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는 ‘가난’이란 말을 달리 해석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며 자기를 가난하다고 말해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말은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행복=물질/욕망’으로 공리화하면서 서양인은 물질을 늘림으로써 행복을 얻으려 하지만 동양인은 욕망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키우려 했다는 말을 상기시켰다.
무히카의 대담집 서문에서 우루과이 대사를 지낸 최연충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리는 데 대해 “천만의 말씀!”이라고 한마디로 자른다. “그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다만 청빈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 세상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이라며 “나는 간소하게 살기로 결심했다. 많은 것들을 소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무히카의 말을 인용한다. 새뮤얼슨이 지적한 동양적 행복관에 동조하는 듯한 무히카는 “우리는 인간관계 회복에 꼭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는 문명 속에 살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바로 사랑, 우정, 모험, 연대, 그리고 가족”임을 강조한다.
*잡초를 벗삼아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불편당의 권포근, 고진하 부부. 사진 조현 기자
나는 그 비슷한 우리의 예를 <한겨레> ‘휴심정’(2015. 5.27)에서 보았다. 목사이자 시인인 고진하 부부다. 원주 변두리 농가에 월세로 든 집에서 목수일로 손질하고 텃밭을 일구며 사는 재미에 정들어 도시적 편리를 외면한 낡은 집을 아예 구입해 ‘불편당’이란 당호를 짓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부인은 잡초로 여겨온 것들을 길러 찬거리로 만들고 동네 사람들에게 요가를 가르치기도 하며 시인 부부는 이웃들과 어울려 “잡초처럼 역경에도 두려움 없이 낮고 푸르게 자라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삶에 스며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탈도시적 삶의 모습을 소개한 기자는 “머리를 쓰는 도시인들은 이기적이 되기 쉽고 제 잘난 맛에 살지만, 노동을 하고 사는 이 마을 이웃들은 가슴이 따뜻하다”는 고 시인의 말을 옮기며 “흐물흐물하던 팔에도 근육이 생겼다. 백면서생 고 시인의 에너지가 머리에서 손발로 내려온 건 장족의 진화였다”고 묘사했다. 한 달에 100만원으로 족히 살고 있다는 그도 무히카처럼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에서도 인간의 삶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며 “오늘날 인간이 개인으로서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아직도 “생존의 문제가 우리 삶의 밑바탕에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부자가 될수록 심리적 경험으로서의 ‘희소성’은 더욱더 두드러지게 된다. 재화를 생산하는 우리의 능력이 점점 쌓여가지만 자연의 결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그보다 훨씬 더 잰걸음으로 앞질러간다”고 말한다.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가진 자의 끝없는 욕망을 짚은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를 쓰면서 하일브로너는 “가장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부족으로 다가갈수록 이 개인의 불안정성이 몇 배로 줄어든다”며 자본주의 단계 이전의 삶의 방식에서 인간적 행복이 오히려 더 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무히카나 고진하가 청빈과 노동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괜한 허영은 아니었다. 젊은 소설가 이장욱은 한 단편소설에서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지고 사회가 불안정해진 러시아에서 “사람들이 왜 자꾸 불안해지는 거지? 사람들은 왜 싫어지는 거야?”라며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움직이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것을 사람들이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라는 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심리적 세태에 회의를 던진다.
나는 굳이 편을 갈라야 한다면 자본주의 쪽에 서겠지만, 다행히 어떤 이념을 내세울 만큼 가난한 적도, 부자인 때도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다. 그러기에, 경제가 좋아져야 하고 삶은 발전해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주장에 수긍하지만, 그럼에도 그 경제가 우리 삶의 토대를 허물고 삶다운 삶을 어지럽히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이 탓만이 아니리라. 속곳 없는 가난한 부부 이야기를 읽던 60여년 전보다 벌이가 300배 이상 늘었는데도 여전한 돈벌이의 탐욕스러움, 벼락부자의 설쳐댐, ‘과시적 소비’와 정경 유착의 뻔뻔함 등 돈을 업고 활개 치는 점잖지 못한 우리 성장주의자들의 천박한 황금만능주의가 안쓰럽고 안타까워진다. 장관 교체 때마다 열리는 인사청문회에서 후보로 지명된 명사들의 치부들이 들춰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해댄 욕망으로 이루어진 우리 ‘근대화의 역사’를 측은히 여기게 되면서, 차라리 이 산업화 시대의 인사들이 저지른 일련의 축재 관행들을 한시적으로나마 톨레랑스로 사면해주어야 나라에 필요한 인물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까지 했다.
그런 내 울울한 눈길에 문득 ‘검소한 풍요’란 말이 밝게 다가온다. 이 모순어법의 아름다운 말은 경제학자 자크 들로르가 만든 것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언론인 앙드레 고르가 <에콜로지카>에서 추구한 ‘충분한 것의 공통규범’에 절묘하게 갖다 붙인 것이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추세와 결별하고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이, 더 잘하기를 지향하는 삶의 모델”을 가리키는 이 ‘충분한 것의 공통규범’은 강요가 아닌 자유로움을 통해 사회적 성숙을 이루고 정신적 풍요를 안겨줄 활동을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창출된 ‘내재적 부’는 “생물환경의 질, 교육의 질, 연대관계,
상부상조 조직, 공통의 상식과 실질적 지식의 확산, 일상의 상호작용 속에 반영되고 펼쳐지는 문화 등” 상품 형식으로는 교환될 수 없는 내면 가치들이다. 요컨대 ‘검소한 풍요’란 가격을 붙일 수 없는 삶의 질과 그 의미로써 성숙한 정신과 세련된 품위를 보여준다. 그 모습을 정민 교수에게서 배운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光而不耀) 삶의 태도라고 내 식으로 옮길 수 있을지.
김병익 문학평론가
*한겨레 오피니언면 특별기고에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95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