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하게 고통을 캐묻다
유년의 풍경, 아름다움과 고달픔
“아름답다.” 유년의 눈에 비친 세상 풍경입니다. 저는 1962년에 호남의 어느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궁핍한 일상 속에서도 소년의 가슴은 날마다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푸른 모싯잎 색깔을 한 시린 하늘에 느릿하게 기어가고, 때로는물 흐르듯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을 작은 도랑에 흐르는 물소리는 더없이 정겨웠습니다. 처녀 누나들과 아줌마들이 두들기는 빨래 방망이 소리와 간간 정겨운 전라도 사투리가오월 햇살에 튕겨 나와 반짝거렸습니다. 너른 들판에 씨 뿌리면 새싹이 돋고 자라서 벼와 보리가 일렁이는 모습은 늘 신비였습니다.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중에서
그런데 유년의 가슴에 맺힌 삶의 또 하나의 풍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고달프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네 분들이 가정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극심한 가뭄을 원망하며 논밭에서 뙤약볕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 시절, 마을 사람들에게 늙음과 죽음은 그리 불안과 공포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저 자연스런 순리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당면한 고통은 열심히 일해도 식량을 걱정해야 하는 경제적인 궁핍이었습니다. 자녀들을 중학교에도 진학시킬 수 없는 형편을 숙명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앞날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은 체념과 자책이며 원망과 방황입니다.
마을 사람들 더러는 노름과 술에 빠져 그나마 있는 적은 가산을 탕진하고 부인과 가족을 더 심한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욕하고 다투었습니다. 소년은 의아했습니다. 산은 아름답고 들녘은 평화로운데, 태양은 찬란하고 바람은 시원한데, 사람들은 왜 절망 가득한 한숨을 쉬고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일하고 해가 한참 저물어서 일을 끝내는 농부들은 왜 의식주에 늘 불안해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그만한 결실을 얻어야 하는데 왜 그리 안 되는 것일까, 하고 의심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 공장으로 돈 벌러 간 마을의 형들과 누나들의 고생하는 소식이 들려오고, 때로는 나쁜 길로 빠졌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훗날 유년을 기억해 보니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고통을 소년은 먼저 알았던 것 같습니다. 소년이 목격한 고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생의 여덟 가지 고통에서 후반부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구부득고求不得苦, 간절히 희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원증회고怨憎會苦와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감내해야 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가까이 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 이성과 감각이 헛된 꿈을 꾸고 멈출 줄 모르는 욕구가 주는 고통입니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고통
그런데 말입니다. 60~70년대 농촌 마을의 이런 삶의 힘겨움과 버거움이 오늘날 산업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양산과 고용 불안, 양극화, 생태계의 혼란과 파괴, 농촌사회의 피폐, 계층 간의 갈등, 감정 노동자들이 겪는 모멸과 압박감 등이 우리를 힘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중세 서구사회에서 발생된 종교 갈등은 오늘도 지구촌 곳곳을 전쟁과 살상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간의 갈등과 투쟁이 주는 고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도 의아합니다. 단군 이래로 가장 고학력의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이 최고로 높아진 사회에서, 왜 모두가 서로 돕고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복잡한 현실의 현상에 대해 우리는 단순하고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정말 인류는 고대부터 지금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그 핵심 원인은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의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행복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선언이 여전히 무색한 오늘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싯다르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를 통해 소년은 먹고 사는 문제,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다툼이 만든 고통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생로병사’라는 고통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준 책 『석가모니 일대기』에 청년 싯다르타는 이렇게 한탄하고 절망하였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고통이다. 늙어가는 것도, 병드는 것도 고통이다.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도 고통이다.” 그리고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6년 수행하여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고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한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이후 45년간 중생을 위해 자상하게 가르침을 설하고 자비의 손길을 베푼 부처님은 제게 실로 자상하고 경이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만남 한편으로 소년의 생각 한 켠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생로병사가 왜 그리도 출세와 부귀를 버릴 만큼 장애물인지, 그리고 태어나면 늙고 죽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모두들 생일을 축하하는데 태어나는 일이 왜 축복이 아니고 고통이라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은 여전히 늙었으며 때로는 병에 시달리기도 했고 80세에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에게는 싯다르타가 느낀 생의 문제가 공감되지 않았습니다. 풍족한 생활을 하고 많이 배우고 서로가 돕고 살면 행복할 터인데 왜 생로병사에 덜미가 잡혀 부귀영화를 포기하는지 말입니다. 머리가 뛰어나고 천재적인 발상을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여러 세상, 여러 사람과 여러 일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이 세상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과 인간사회는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욕망이 치성하여 갈등하고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고통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개개인이 심리적으로 겪는 고통의 가지 수와 상태는 훨씬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많이 배우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죄를 범하고 스스로 목숨을 마감합니다. 힘들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앞날의 밝은 빛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별하고 탁월한 『중론』의 길
여전히 늘 묻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고통에서 탈출하는 길은 어디에 어떻게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동서남북 네 방향의 문에서 생에 대한 의문을 품고 길을 찾는 청년 싯다르타의 심정으로서 있습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싯다르타는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습니다. 목숨을 건 고행을 감행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에 헤매는 세상의 벗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수행을 지도하였습니다. 가르침을 받은 벗들이 깨달음을 얻고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지금, 나는 싯다르타의 길을 가고자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세간의 벗들도 고통을 벗고 행복과 안락을 얻고자 마음을 내었습니다. 고통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일, 이것을 우리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합니다. 이고득락의 희구는 시간과 공간, 종교를 넘어 모든 인류의 염원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보편적인 이 염원을 이루는일이 그리 단순하고 쉽지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지만 영원히 멈추게 하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몇 개의 고통을 감소시킬 수는 있지만 모든 고통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주거와 고용, 질병과 노후 생활에 불안을 없애고 안정을 찾을 수는 있으나, 개인의 마음과 습관에 깃든 온갖 심리적인 불안과 불만, 자꾸만 어긋나기만 하는 언행의 습관은 생활환경의 안정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어찌해야 할까요. 이 길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그 길이 있기는 할까요.
길은 있습니다. 길을 찾는 길에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과 눈 밝은 역대 스님들의 논서와 깨침의 말씀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서 부처님 입멸 후 제2의 부처라고 불린, 팔종八宗의 조사 나가르주나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저서 『중론』에서 우리는 고통을 영원히 소멸하는 활로를 찾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오로지 인간의 고통을 소멸하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중론』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고통을 소멸하는 길이 여느 말씀보다 특별하고 탁월합니다. 어떻게 특별하고 탁월하냐고요? 마음에 상처 받고 방황하는 이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치유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치유법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진단과 처방을 내립니다.
“위대한 성인께서는 갖가지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空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중론』제13 「관행품」의 주장입니다. 나와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수정하는 것, 존재를 보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하여 고통을 소멸하는 치유법입니다. 눈병이 걸린 이에게 색안경을 씌우는 일은 근본적 치유가 아닙니다. 몸에 먼지와 땀이 가득하여 악취가 나는 사람이 향수를 바르는 일은 올바른 처방이 아닙니다. 나가르주나는 눈병이 왜 걸렸는가를 알아서 병의 원인을 제거하라고 합니다. 향수를 바르지 말고 먼지와 땀을 씻어내고 악취를 없애고 쾌청한 몸을 만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중론』은 나,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합니다. 그래야만 온갖 것들에게 세뇌되어 오염된 생각과 감정과 행위를 걷어내고 자유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