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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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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행복을 구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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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구하는  기도

“먼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마태 6,24~34)

 

 

나는 무엇을 먹고 누리면서 살아갈까 걱정하지 않는다.

저 하늘을 나는 참새의 자유를 보아라. 누가 저들의 양식을 걱정해 주는가?

풀 사이 소담스레 핀 야생화의 아름다움을 보거라.

진시황제, 당태종, 양귀비가 제아무리 호사롭다 한들

어찌 저 들꽃 한 송이의 기품에 비길 수 있으랴?

저 자유와 기품은 바로 아버지의 것으로  내게 거저 주시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내가 유대인의 유명한 랍비가 되어야 행복할까?

그렇다면 엘리야가 될까 모세가 될까 예언자가 되어야 할까? 

명품이나 거부의 유산이나 수억의 연봉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만물의 주인이신 그 분이 ‘보기에 좋아하심에서 행복하다.

그 분의 의(義)와 뜻을 따름에, 그 분께서 원하시는 삶에서 행복하다.

그러므로 나는 머리둘 곳조차 없지만 내게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어련히 알아서 챙기시겠는가?

 

prayer.jpg

*기도하는 천사.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연주의 인생관을 읽습니다. 자본주의 최후의 타락 현상, 소비문화 시대, 진실한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제자의 삶에 절대 핵심적 가치관을 교육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공부시키는데 올인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대학을 졸업해도 해마다 고3 졸업생 수치 기준하여 단 2% 만이 정규직(인턴 포함)에 취업합니다. 그나마 엄청난 교육비 지출로 박터지게 경쟁시켜 승리한 결과이겠지요.  98%의 운명은...? 

 

명문대학 출신은 간판으로 인정받는데, 지방대학 출신은 실력으로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토록 몸부림쳐 시험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할런지 모릅니다. 자녀들은 원형 경기장에 출전을 준비하는 검투사처럼 보입니다. 이제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취업 준비학교가 된지 오래입니다.

 

공부시키는 목적은 무엇인가?   높은 연봉, 혹은  퇴직까지 안정적인 직종을 얻게 해주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 소박한 서민들의 생각이고 부모 마음이겠지요. 자격증을 가지고, 지위를 확보한 사람은 적게 일하고 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많은 돈을 받고  어려운 일을 힘들게 해야 하는 사람은 시간제 임금에 일자리조차 보장을 받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니까 명문대학을 보내려는 목적은 솔직하게 말하면 쉬운 일이나 적은 일을 하고 많은 보수를 받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행복은 돈으로부터 온다.’는 신앙이 준 것 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시민으로 그것을 피해 살아갈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는 건강과 돈과 보석, 명예와 권력까지 세상 최고의 행복이 가득 쌓인 창고가 있습니다. 지상의 자녀들이 그것을 달라고 청원하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내어 주시지요. 기도만 하면 들어 주신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

 

우선 건강을 청하거나 재물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 한 가지 더, 하나 더 계속해서 죽는 날까지 청원하다 마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미련한 기도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주님, 청하오니, 행복 창고의 열쇠를 저에게 주십시오.”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천상의 지혜를 얻은 자라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까요.

 

“주님, 당신은 무엇이건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니 감히 청합니다.  제가 저 행복 창고에 있는 것을 가지지 않고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무엇을 통한 행복이 아니라 행복 자체를 청하는 것, 과정을 통하지 않고 목적 자체를 구하는 진실로 행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부자로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가진 것만으로 만족하여 사는 것이다.”-톨스토이-

 

우리는 산상설교의 참된 행복을 구하며 스승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악령의 사술에 취해 살아갑니다. 기술문명과 상품주의 마케팅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생명과 죽음의 길을 볼줄 알아야 합니다. 명품과 상류층 사교클럽과 과시적 소비습관... 모두가 선망하듯 하지만 그것은 악령의 것입니다.

 

더 고급을 선호하고 상류사회를 모방하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바로 악령이 내 의식을 쓰다듬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각성해야 합니다. 악령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먹고 입고 소유해야만 세상에서 인정받고 행복할까?

 

그 해답을 드라마의 허상이나 부유층의 사치를 모방하면서 그들의 경제 수준을 선망하며 언젠가 행복하게 될 자신의 미래로 설정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상류층을 심리적으로 동일시 여기고 동지로 삼습니다. 같은 편이 되는 겁니다.

 

부자들이 생각할 때는 같잖게 보고 기업과 정당들은 그들 심리를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새로운 기술 상품과 디자인과 터무니 없는 명품을 소개합니다.

“이것을 따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같이 된단다. 어서 따 먹으렴, 팔이 안닿는다구? 사다리를 구입해라. 아니면 일꾼을 시키면 되지... ”

 

부유층으로 구성된 정치 정당은 자신들과 손잡은 강대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과 재벌들이 요구하는 정책을 만듭니다. 그런 정책은 결과적으로 서민 대중을 희생시키는 것이 뻔한 일인데도 그들은 곧 자기 편이라고 여기면서 그들을 지지하고 투표합니다. 부러움의 시선이란 곧 악령의 웃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허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도 인간이기에 그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러움을 버리지 못해 악령의 마술에 걸려 넘어지지만 노예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도 스승의 가르침과 복음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혼연일체가 된 계급은 지배하지 못할 대상도 일도 없지만 그들이 지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복음 말씀의 위력입니다. 변사도의 권력도 협박도 회유도 성춘향의 절개를 꺾지 못했듯이 소비문화의 악령은 예수 제자의 삶을 꺾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솔로몬의 영화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소유의 삶으로 악령을 알아보는 눈을 탑재하였으니 부러움의 시선이 없고 악마의 미소가 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행복을 구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2015. 6. 20) *

 

님이 오시나 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 발자국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

님이 가시나 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님 발자국 소리, 밤비 그치는 소리.

밤비처럼 왔다가 밤비처럼 돌아가는 내 님은 비의 나그네~~

내려라 밤비야 주룩주룩 내려라 ~ ~     (그 다음 가사가 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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