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명장면】공자, 정치개혁을 시작하다
人之言 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子違也
인지언 왈 여무락호위군 유기언이막자위야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여기선이막지위야, 불역선호.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여불선이막지위야, 불기호일언이상방호?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요. ‘임금이 임금이라서 기쁜게 아니라, 말을 하면 아무도 거역하지 못하는게 즐거운 거라고.’
그 임금의 말이 옳아서 어기지 않는거라면 모르지만, 만일 임금의 말이 그른데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치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자로’편 15장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1. 공자에게 벼슬이란
앞편에서 공자가 사관(仕官)하게 된 경위를 서술했다. 이제 벼슬할 때의 일을 전하기에 앞서 공자에게 벼슬살이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공자가 벼슬하는 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윗사람의 눈에 들어 승진했느냐 하는 따위는 공자라는 사람을 논함에 있어 정말이지 중요하지 않다. 벼슬살이나 정치라는 행위는 그 속성상 세속의 한가운데 있다. 인(仁)과 양립하기 어렵다. 공자와 같은 사유(師儒) 출신으로 무력으로 정권 획득을 시도했던 양호(陽虎)는 ‘부(富)하고자 하는가, 인(仁)을 잊어라’①며 권력추구의 속성을 갈파했다. 아무리 성인같은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벼슬살이를 잘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의 인(仁)을 의심할 것이다. 형편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의 권능을 의심할 것이다. 부하고 귀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래도 성인의 사업 목록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번쯤 세속의 공자를 들여다보고 갈 이유는 있다.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공자가 자기 삶의 한 시점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떤 인격과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어떤 비전으로 자기 계획을 실현하려 하는가를 건너다 보는 것은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성인이라 해도 인간의 시간을 사는 법이니, 거기서도 뭔가 얻어갈 게 있지 않을까, 여기는 것이 우리네 소인(小人)의 마음이다.
후세 사람들은 말하기를, 공자를 성인이라 한다. 나, 이생이 지켜본 당세에도 공자를 성인으로 흠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자 자공은 스승을 해와 달에 비견(‘자장’편 24장)하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공자에게 ‘나면서부터 아는 자이십니까?’하고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아비생이지지자, 호고민이구지자야’(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술이’편 19장)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닙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써 구하는 자일 뿐입니다.’ 라고. 또 누군가 공자를 성(聖)하고 인(仁)하다고 칭송하자, 공자는 ‘내 어찌 그것을 감당하겠습니까’(若聖與仁 則吾豈敢-‘술이’편 33장②), 라며 선을 그었다. 공자는 일평생 어느 상황에서도 자신을 성인이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교리의 창시자로 추앙될 것이란 환상도 없었다. 오히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음(‘술이’편 20장)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이 신비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공자의 성인됨은 공자가 성인이 아님을 자각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공자는 처음부터 완정(完定)한 인격으로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다. 공자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한 이상을 향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밀고 나갔을 뿐이다. 그의 위대성에는 그래서 한 인간의 분투(奮鬪)가 강물을 이루고 있다. 숱한 도전들, 길고 긴 방랑과 좌절의 비애을 통해 삶 전체가 하나의 사상으로 응축된 사람이다. 공자라는 사람에게 성인의 광배(光背)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데아를 체현(體現)하기 위해 일생을 투쟁한 사람에게 바쳐진 헌사이다.
인간 공자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높이 나아가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 임무와 지위를 선의(善意)를 다해 사용하고자 했다. 벼슬도, 정치도 용(用)이었다. 그 용의 체(體)는 그가 꿈꾼 변혁된 세상이었고, 자신은 그 꿈 속에서 사표(師表)인 주공(周公)과 더불어 노니는 것(‘술이’편 5장)이었다. 그것은 사물의 안팎처럼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사문(斯文)을 자임한 자, 문명을 계승한다는 자부에 찬 수명(受命)이었다.(‘자한’편 5장③)
2. 협곡회맹
공자는 51살 때 벼슬길에 오른 후 약 5년간 노나라 정치에 몸담았다. 공자는 중도의 재(宰·재상)라는 지방장관직으로 벼슬길이 나간 지 얼마되지 않아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이는 공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약진이었는데, 그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공자가 중도재로 일한지 1년쯤 지났을 때, 최악의 관계에 있던 노나라와 제나라가 국교를 재개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가신의 신분으로 노나라 실권을 장악한 양호(陽虎)가 제나라의 은밀한 지원 아래 막부(幕府)를 독점하려다 실패하고 달아난 직후였음을 생각하면, 이 국교 정상화는 예상하기 어려운 반전이었다.
이 무렵 중국은 북방의 진(晉)나라와 남방의 초(楚)나라가 패권을 겨루는 가운데 동방의 제(齊)나라가 부강한 경제를 바탕으로 빠르게 부흥하고 있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약소국 노나라는 진나라의 보호 아래 제나라의 침략의지를 근근히 막아내고 있었다. 양호가 국경지대의 노나라 영토를 바치는 조건으로 제나라에 망명한 것이 바로 이즈음이다. 제나라는 처음에는 양호와 손잡는 듯 하다가 결국엔 국익을 선택한다. 제나라는 노나라에게 양호의 추방과 영토 반환을 조건으로 진나라 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제안했고, 영토 수복이 최우선이었던 노나라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렇게 하여
여러차례 전투를 치르며 원한을 쌓았던 두 나라가 동맹을 맺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저 유명한 ‘협곡회맹(夾谷會盟)’이다.
회담이 다가오자 노나라에서는 걱정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번 회맹을 통해 주변국가들에게 위세를 과시하고 싶은 제나라가 노나라를 하대하려 할 것이 분명했으나 이를 피해갈 뾰죽한 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제나라는 천박한 나라다. 주공의 나라로서 어떻게 고개를 숙일 수 있는가!”
그러나 힘있는 자가 칼자루를 쥐는 법. 게다가 이번 회담은 빼앗긴 땅을 돌려받기 위함이 아닌가. 시쳇말로 제나라는 갑, 노나라는 을의 신세였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삼환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최악의 경우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이라도 필요했다. 그때 이들에게 떠오른 ‘신의 한 수’가 공자였다.
“공구는 제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예악의 달인입니다. 주례(周禮)에 관해 그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제나라에는 안영이 있는데, 들으니 생사를 알 수 없을만큼 노쇠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쪽에 공구가 있고 저쪽에는 안영이 없는 한, 패업(覇業)의 허상에 취해 있는 제나라 임금이 예론을 피해가지 못할 것입니다.④”
맹의자의 강력한 추천에 계환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여 공자는 서기 전 500년 여름, 제나라 땅 축기의 한 협곡에서 열린 노나라와 제나라의 회맹에서 임금을 보좌하게 되었다. 공자 나이 52살 때였다. 공자는 이 회담에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임금과 조정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협곡 회맹에서 선생님의 활약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군들 선생님을 등용하지 않겠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로는 이 때를 회상하게 되면 항상 뿌듯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3. 공자, 예로써 임금을 보좌하다
드디어 두 나라 임금과 신하들은 협곡에 장막을 치고 회맹에 들어갔다. 공자가 노정공을 보좌하고 있다는 소식은 세작들에 의해 이미 제나라 조정에도 알려져 있었다. 제경공이 우려했다. “공구는 일찌기 재상(안영)도 견제한 예교의 달인⑤. 안자(晏子)가 없는 지금 누가 나를 보좌할꼬?”
대신 여미가 말했다.
“공구가 예교에 밝기는 하나, 무용(武勇)엔 약합니다. 용병(庸兵)을 풀어 무력시위를 벌이면 노후(魯侯)가 겁을 먹고 공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제나라는 이런 전략 하에 최근 병합한 래이(萊夷⑥)의 군대를 풀어 무력시위를 벌였다. ‘오랑캐’로 겁박하면, 노나라 대신들이 겁을 먹고 자신들의 뜻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과연 회담장은 살벌하기만 했다. 대규모 이민족 군대의 깃발과 창은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무지한 야만족이 난폭한 일이라도 벌인다면…’ 노나라 군신들은 모두 오금이 저렸다. 이때 계환자의 시선이 공자에게 쏠렸다.
‘어찌하면 좋겠소?’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공자가 임금에게 조용히 말했다.
“회담장에 들어가지 마시고 막사에서 쉬고 계십시오.”
그리고 사관들을 모아 제경공 앞으로 보내는 공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공자가 주도하여 작성한 항의문의 요지는 이러했다.
두나라 임금이 회합하여 우호를 맺는 자리에 오랑캐의 군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나라 사이의 비례(非禮)입니다. 저들이 뜻밖의 난동을 부린다면, 우리도 부득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태가 진정으로 임금께서 바라는 친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왕실의 제후로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원방(遠方)의 나라는 중원을 도모할 수 없고, 오랑캐가 중화의 문명을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이적(夷狄)의 무리가 신성한 회맹의 자리를 침범할 수 없고, 같은 제후국이 무력으로 우호국을 핍박하는 것은 왕도를 받드는 제후의 도리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후가 된 자로서 이런 부덕한 일을 자행한다면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며, 스스로 덕을 버리고 도의를 내팽개치는 것이며, 사람으로서는 예를 잃고 짐승이 되는 행위입니다. 현군(賢君)의 도를 아시는 임금께서 이런 불명예를 모르고 계실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좌전> 노정공 10년)
한마디로 말해, 예를 따르면 패자의 소리를 들을 것이요, 무력으로 취하려 든다면 부덕(不德)의 오명을 감수하라는 말이었다. 제경공은 50년 가까이 재위하며 패자(覇者)의 소리를 듣고 싶은 노회한 임금. 노나라에서 보내온 빈틈없는 항의문이 뜻하는 바를 금세 알아챘다. ‘저 위대한 환공⑦께서 연 의상지회(衣裳之會·일체의 무력을 배제하고 예의로써 우호하는 회맹)의 위명(威名)을 따르라는 뜻이겠지…’
제경공이 물끄러미 죽간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심드렁하니 말했다.
“본래 저들 땅을 돌려주며 이름을 얻는 것인데, 공연히 창칼을 휘둘렀다는 험담을 들을 필요는 없지…래이를 물려라.”
우방국의 예로 맹약식이 끝나고 철수를 앞둔 즈음에 제나라에서 다시 사절이 왔다. 제경공이 노나라 군신을 위로하는 연회를 열겠으니 모두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도 노림수가 있었다. 회맹은 두 나라가 대등한 지위로 진행되었지만, 두 임금이 참석하는 연회가 열리게 되면 노정공이 연장자인 제경공을 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제나라가 바라는 바이고 노나라는 원하는 바가 아닌 장면이다.
공자가 또 해결사로 나섰다. 공자는 같은 유사(儒士)인 제나라 대부 양구거(梁丘據)를 찾아가 말했다.
“그대도 우리 노나라와 제나라가 공히 따르는 전범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회맹이 끝나고 다시 연회를 여는 일은 실무자들을 이중으로 수고롭게 할뿐입니다. 또 두 임금이 연회를 하려면 그에 맞는 격식을 갖춰야 하는데, 희준(犧尊·소 모양의 술잔)과 상준(象尊·코끼리 모양의 술잔)의 주기(酒器)는 궁문 밖으로 나올 수 없고, 법도에 맞는 가악(嘉樂)은 야외에서는 제대로 연주하기 어렵습니다. 향연을 열어 희상과 가악을 다 갖추어쓰면 이는 예를 버리는 것이고, 그것을 갖추지 않고 거행하려면 가짜를 대신 써야 합니다. 가짜 기물을 사용하는 것은 두 나라 임금을 욕보이는 것이며, 예를 버리면 임금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무릇 향연이란 덕을 밝히는 것인데, 덕을 밝힐 수 없다면 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좌전> 노정공 10년)
양구거는 공자의 빈틈없는 예론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양구거가 돌아가 제경공에게 이를 고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제나라는 더이상 연회를 열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협곡의 회맹에서 두나라는 서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았다. 제경공은 노나라를 진나라 동맹에서 빼내 자기에게복속시키고, 회맹에서 예를 따름으로써 외교적 승리와 함께 관후한 ‘패자’라는 명성을 취했다. 노나라는 눈엣가시 양호를 멀리 송나라로 내쫓고 국경지대 요충지 세 곳을 되찾았다. 삼환도 전통적인 지지세력인 진나라에게 급한 사정을 설명하고 뇌물을 듬뿍 안기면 정권 유지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모두가 잃은 것이 없는 계산서를 받아든 기분이었다. 특히 제나라와의 회맹을 통해 모처럼 노나라 군주의 지위를 과시한 노정공은 새삼 공자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4. 과장된 전승들
협곡의 회맹에서 공자가 한자루의 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예로써 나라의 위신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당시 뿐아니라 후세에도 널리 추종자들을 고무시켰다. 협곡회맹에서의 공자의 활약상은 여러 세대와 여러 지역에 걸쳐서 확대 재생산되어 공자의 “권능을 증거하는” 예화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공자 사후 나,이생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들은 바, 대부분의 영웅담은 천유(賤儒)와 천묵(賤墨)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꾸며진 것들이었다. 또 유가가 타락하면서 생겨난 속유(俗儒)와 사이비들이 공자를 팔아 사리(私利)를 취하려 조작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항간의 순진한 사람들은 공자를 존숭한 나머지 이런 조작된 신화를 사실로 여겼고, 급기야 각종 사서(史書)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대표적인 몇가지를 열거해 보겠다.
첫째, 협곡회맹이 순전히 공자 때문에 열렸다는 설이다. 노나라가 공자를 등용하자, 제나라는 성인 공자의 ‘권능’이 두려운 나머지 우호 사절을 보내 회담을 청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벼슬도 특별보좌역 정도가 아니라 상(相·재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협곡회맹은 국제관계의 변화 때문에 열렸고, 공자는 임금을 자문하는(相) 역할이었다. 공자가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가 회담의 원인이나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 이는 속유들이 조종을 팔아 ‘장사’를 해먹었다는 증거가 될 뿐이다.
둘째, 협곡에 갈때 공자가 무비를 갖추자고 강력히 주장하여, 노나라가 좌우 양 사마가 지휘하는 군대를 이끌고 갔다는 설이다. 그러나 공자는 병사(兵事)를 멀리한데다, 관여할 신분도 아니었다. 노나라 사마 벼슬엔 좌우가 따로 없었다. 창칼을 겨누어온 적국간의 회담인데 임금이 소풍가듯 비무장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제나라도 래이의 병력을 잔뜩 끌고와 무력시위를 벌이지 않았는가. 이는 병법에 밝은 ‘라이벌’ 묵가를 의식한 나머지 유가쪽에서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
셋째, 두 임금이 회맹할 때 제나라가 창칼을 휘두르고 북을 두드리며 음악을 연주하여 위세를 과시하자, 공자가 제단의 계단에 뛰어올라가 음악의 잘못됨을 꾸짖자, 제경공이 부끄럽게 여겨 연주를 중지하게 하였다는 설이다. 이것은 거의 연극의 한 장면 같다. 아마도 음악의 달인인 공자가 제나라쪽의 음악 연주를 듣다가 잘못된 점을 발견하여 바로잡아준 정도의 일은 있었을 것이나, 공자의 신분으로 임금들이 마주선 제단에 뛰어오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배우와 난쟁이가 연희를 벌이자 공자가 ‘제후를 미혹시키는 짓’이라며 관리를 시켜 이들의 팔다리를 잘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따위의 이야기는 묵가쪽이 유가의 허위허례를 폭로하기 위해 유포시킨 것이 분명하다.
압권은 노나라가 제나라로부터 영토를 반환받은 것이 모두 공자의 공로라는 것이다. 회맹이 끝나자 제경공은 공자의 활약상을 높이 평가하며 신하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노나라는 군자의 도로써 그 군주를 보필하는데 그대들은 단지 오랑캐의 도로써 과인을 가르쳐 죄를 짓게 하였다.” 그러자 담당 관리가 “군자의 잘못은 물질로 사과하고 소인은 꾸민 말로 사과한다”면서 임금에게 물질로 사과할 것을 권하였고, 제경공이 사죄의 뜻으로 노나라 땅을 반환했다는 이야기다.일국이 노획한 영토를 일개 사족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반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경공이 공자를 경외하여 신하를 꾸짖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당시 제나라에서 성행한 노자류의 말투⑧가 이야기 속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도가 우위의 제나라에서 유가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일 것이다.(이상 최술의 <수사고신록>에서 인용하여 재구성)
이상의 사례들은 겉으로는 한결같이 공자를 높이고 있으나, 자세히 따져보면 사리에 맞는 것이 거의 없다. 이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결과적으로는 공자를 모함하는 함정이 되고 있었다. 당시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유묵노장(儒墨老莊)의 차이를 떠나 모두 이를 통탄해 마지 않았다.
5. 공자, 임금의 근신이 되다
협곡회맹에서 보인 공자의 활약은 확실히 임금 정공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같다. 회맹에서 돌아온 노정공은 공자를 공실 직할지의 사법을 관장하는 사구(司寇·사법기관의 수장)에 임명했다. 공실 사구는 조정 사구보다는 낮은 지위였으나, 임금의 측신이기에 실질적인 발언권은 결코 낮지 않았다. 특히 당시 노나라 사구직을 세습하던 장(臧)씨 가문이 계환자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정에서는 공자가 사실상 노나라 사구였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공자는 사구가 되자 ‘명판결보다는 처음부터 송사가 없도록 하겠다’는 평소 다짐처럼 형벌보다는 예교로 백성들을 인도했다. 공자가 사구가 된 후 공실 관할지에서는 뚜렷한 변화들이 생겨났다.
“심유씨라는 악덕 정육업자가 있었다. 아침에 양에게 물을 먹여 살찐 것처럼 속여 팔았는데, 공자가 사구가 된 뒤로는 그 짓을 하지 못했다. 가축시장에서 소와 말 값을 조작하여 폭리를 취하는 조폭같은 자가 있었으나, 공자가 사구가되자 함부로 가격을 장난치지 못했다. 병든 남편을 학대하고 행실이 거친 여자가 있었다. 공자가 사구가 되자 집안사람들이 그 여자를 내쫓았다. 사치와 방종을 일삼던 망나니 호족 2세는 더이상 자기 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외국으로 달아났다. 사람들은 시장 바닥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지 않았고, 타지에서 장사온 사람이 담당 관리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도 안심하고 지내다 갈 수 있었다.” (<공자가어>)
공자의 신망이 높아지자 노정공이 공자를 치하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삼환의 눈을 피해 공자와 정견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가지고 싶었던 차였다. 공자는 자로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공은 가슴 속에 묻어놓고 있던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권이 계씨에게 넘어간지 벌써 4대째, 공실은 정치하는 법조차 잊었다오. 어떻게 하는 것이 군주의 정치요?”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는 덕으로 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북극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뭇별들이 그리로 향하는 것과 같습니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향할 공)之) -‘위정’편 1장
“신하가 그 뭇별과 같지 않다면 북극성인들 무슨 소용인가요?”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임금으로서는 뼈아픈 토로였다. 그러나 공자의 답변은 여전히 예(禮)의 범위를 떠나지 않는다.
임금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진심을 다바쳐 임금을 섬겨야 합니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팔일’편 19장⑨
“그대는 신하들이 과인에게 진심을 다바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정공은 내심 공자가 영혼없는 대답만 하는 것 같아 저으기 실망스러웠다. 말로야 무얼 못할까… 잠시 화제를 돌렸다가 정공이 다시 비아냥대듯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있습니까?(一言而可以興邦, 有諸)
공자가 말한다.
말이 그와 같은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하지요. ‘임금 노릇하기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않다’고. 만일 임금 노릇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임금 노릇을 하면, 이런 말 하나가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 曰, 爲君難, 爲臣不易,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정공이 공자에게 어떤 기백을 느꼈는지 그도 자세를 고치고 재차 묻는다.
그렇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데 정말 그러합니까?(一言而喪邦, 有諸)
공자 또한 자세를 바로잡고 힘주어 말한다.
한마디 말이 꼭 그와 같은지 기약할 수는 없겠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 노릇이 좋은 게 아니라, 말을 하면 아무도 거역하지 않는게 줄거운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임금의 말이 옳아 누구도 어기지 않는다면 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임금의 말이 옳지 않은데도 거역하지 않는다면, 임금의 그 한마디가 나라를 망치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습니까?(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子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이상 ‘자로’편 15장⑩
정공은 술잔을 든 채 창가로 가더니 한동안 말없이 도성을 바라다 보았다.
6. 소공의 묘역을 바로잡다
공자가 정공에게 다가가 읍한 뒤 말했다.
“이 기회를 빌어 아뢸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요?”
“돌아가신 선공의 묘역을 정비하고자 합니다.”
정공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공자를 돌아보았다.
공자가 말한 선공은 임금 정공의 형으로, 계씨의 전제에 대항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오히려 쫓겨나 외국에서 죽은 소공을 말한다. 소공이 죽어서 고국에 돌아오자 당시 집권자인 계환자의 아버지 계평자는 자신을 몰아내려한 소공을 역대 임금들이 묻힌 묘역 밖에다 묻어버렸다.(<좌전>노정공 2년) 공자도 망명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장례식을 지켜보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공자가 이때 ‘언젠가 노나라 정치에 참여하면 이 비례(非禮)부터 바로잡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예상대로라면 바야흐로, 때가 된 것이다.
그랬다. 소공의 묘역 재정비는 과거의 잘못된 장례를 예법대로 바로잡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계평자의 비례를 공개적으로 꾸짖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씨로서는 선대의 문제를 다시꺼내어 정치적 쟁점으로 삼으려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
계씨 손에 옹립된 정공에게도 이 묘역 문제는 늘 마음의 짐이었다. 그러니 정공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은 의여(계평자)가 주장한 일이 아니오? 지금 그의 아들(계환자)이 집정인데, 아비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을 어찌 하겠소? 잘못 건드렸다간…”
이때 자로가 다가와 거들었다.
“제가 사구를 대신하여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비교적 사(斯·계환자의 이름)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온데, 결론부터 말해 사는 이 일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공은 자로의 단언에 또한번 놀랐다.
“어째서인가?”
“선공의 묘역을 정한 것은 의여이지만, 그 일이 어찌 그 사람만의 일이겠습니까? 그때 의여의 신하 중 상당수가 이 일에 찬동하였습니다. 참람한 짓을 하고 달아난 양호가 대표적이지요. 지금 의여는 죽고 없으나, 이들은 여전히 계씨의 막부 안에서 발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례를 바로잡게 되면 그 일에 찬동했던 자들에게 주인을 잘못 모신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구신(舊臣)들의 담합에 시달리고 있는 사로서는 차도(借刀)의 계(計·차도지계·남의 칼로 적을 친다는 뜻)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아버지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인데…”
“의여가 죽고 사가 집정을 이은 지 5년째인데, 사는 자신의 막부조차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는 양호에게 목숨까지 빼앗길 뻔 했습니다. 지금은 공산불요와 동생 계오가 본읍을 점거한 채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막부의 구신들은 후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겉으로만 받드는 체 하고 있습니다. 사가 장차 명실공히 가문과 막부의 수장자리를 실질적으로 계승하려면 자기를 견제하는 아버지 가신들을 솎아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내심 이번 일을 그 계기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공자가 나섰다.
“중원의 많은 군주들이 참주들에게 군권을 빼앗기고 있고, 참주들은 또 자신들의 가신들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참주의 무리나 배신(陪臣·임금의 입장에서 신하의 신하)의 무리나 한결같이 하극상이라는 자기 모순에 발이 걸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이번 ‘역사 바로세우기’의 명분을 반대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이번 기회에 선공의 명예를 회복시킴으로써 조정의 위엄을 조금이나마 되찾기를 바랍니다.”
정공은 비로소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공자가 말한 북극성과 뭇별의 의미, 군주와 신하 사이의 의리가 무엇인지, 어떤 깨달음이 전율처럼 다가왔다.
“좋소이다! 이제 과인은 공문에 인재가 많음을 알았소. 그대들과 더불어 정사를 논하니 가슴이 다 후련하구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7. 공자, 개혁의 깃발을 들다 ‘삼도휴’에 나서다
공자와 자로는 임금의 윤허와 계환자의 묵시적인 동의 아래 소공의 묘역을 새로 건설했다. 공자가 명분(반대파들은 매우 교묘한 술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에 의거하여 묘역을 바로 잡자, 애초 소공의 장례를 주도했던 대부들과 계씨 막부의 옛 가신들은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 빠른 가로들은 병이나 노년을 핑계로 낙향하거나 사직계를 내고 물러났다. 일거에 막부의 실권을 회복하기 시작한 계환자 및 삼환의 수장들은 새삼 공문의 ‘정치적 감각’을 감탄해 마지 않았다. 계환자는 마침내 공문의 신진사류를 대표하여 자로를 계환부(계씨의 사저)의 재(가신들의 수장)로 삼기에 이르렀다. 자로의 등용처럼 구신들이 물러난 빈 자리를 채운 것은 신진 사류(士類)들이었다. 공문(孔門)은 그 대표적인 인재풀이었다. 소공의 묘역 정비를 통해 조정과 참주 양쪽의 지지를 동시에 확보한 신진 사류들이 막부의 원로들을 밀어내고 정국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 정점에 공문의 수장인 공자가 있음은 물론이었다. 자로가 언젠가 당시의 기분을 들려주었다.
“계씨의 전제가 백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적폐가 있었던가. 이제 저 철방톱같은 보수 기득권 사족들을 몰아내고, 제대로 공부가 되어있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선비들이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나갔다. 참신하고 능력있는 신진 사류라면 당연히 우리 공문의 준재들말고 누가 있겠는가! 으하하하. ”
공자의 뜻은 자로와는 조금 달랐다. 아니 달랐다기보다는 스케일이 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자는 이상주의자. 비록 겉으로는 참주인 계씨와 손을 잡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지만, 그의 정치적 이상은 더 크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참주들과 결탁하여 그들이 흘려주는 높은 자리나 기름진 녹봉을 받아먹고 있어서야 사대부라고 할 수없다. 노나라의 정치를 바로 세우고자 궐기하는 것은 개인이나 문벌의 이익이 아니라 백성을 기름지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백성의 이익을 위해 의를 다투는 사람, 정치는 군주로 하여금 백성을 위해 덕치를 펴는 마당.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오랫동안 노나라 정치를 질식시켜온 저 부패한 참주정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것이 내가 정치판에 들어온 초심이 아닌가!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초심을 실천하는 일에 나서고자 한다.’
벼슬길에 들어선 지 3년.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 정치의 오랜 적폐를 청산하는 개혁에 착수했다. 이른바 ‘삼도의 휴’(三都墮·노나라 집권당인 계손, 숙손, 맹손씨의 본읍이자 사병기지를 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혁파하고자 한 공자의 정책)가 그것이었다.(계속)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맹자>등문공 장구 상 陽虎曰 爲富不仁矣 爲仁不富矣(양호왈 위부불인의 위인불부의) 부하려면 인하지 못하고, 인하고자 하면 부할 수 없다.
② 술이편 33장 子曰 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자왈 약성여인 즉오개감 억위지불염 회인불권 즉가위운이이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성지(聖智)와 인덕(仁德)의 경우는 내가 감히 자처할 수가 없지만, (성지와 인덕의 도리를) 배우기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내가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가령 성과 인인즉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으랴. 혹 그렇게 되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으르지 않는 거라면 몰라도. L-The Master said, “The sage and the man of perfect virtue, how dare I rank myself with them? It may simply be said of me, that I strive to become such without satiety, and teach others without weariness.”
③ 자한편 5장 (…)曰 文王旣沒 文不在慈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왈 문왕기몰 문부재자호 천지장상사문야 후사자부득여어사문야) 이-(…)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왕께서 별세하셨으니, 문물(예악제도)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늘이 이 문물을 없애버리려 하셨다면, 살아있는 내가 이 문물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배-(…)말씀하시다.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문이 나에게 있지않겠느냐! 하느님이 장차 ‘이 문명(斯文)’을 없애려 할진댄 나를 이 문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려니와,(…) L-(…) He said, “After the death of King Wan, was not the cause of truth lodged here in me? If Heaven had wished to let this cause of truth perish, then I, a future mortal, should not have got such a relation to that cause.(…)”
④ <사기>에는 이때 안영이 회담에 참석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의심하고 있다. 안영이 이전 역사에 보이는 것은 18년 전인 노소공 25년(서기전 517년)이 마지막이다. 안영은 이미 사망했거나 살아있다해도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협곡회맹에 안영이 등장하는 전승은 오로지 공자를 돋보이기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⑤<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제나라에서 벼슬을 구할 때, 재상 안영이 ‘유학은 공허하다’는 이유로 공자의 기용을 막았다고 한다.
⑥동이(東夷)의 일파. 은나라 때부터 산동반도 연해에 선주했다. 어업과 염전, 제철 기술이 발달했고, 중국 최초로 수전(水田)을 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나라는 래이를 병합함으로써 군사, 경제 양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우리나라 동래(東萊)의 지명은 래이족의 지명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⑦제환공(재위 서기전 685~643)은 제나라 15대 군주로 춘추오패의 첫손에 꼽힌다.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아 패업을 쟁취했다.
⑧ ‘군자는 물질로 사과하고, 소인은 꾸민 말로 사과한다’는 대목을 말한다. 이런 대조법은 도가가 말로만 예를 외치는 인색한 유가를 비난하기 위해 즐겨쓴 수법의 하나다. <사기> ‘공자세가’ 에서 공자가 노자와 헤어질 때 노자는 공자에게 “군자는 재물로 배웅하고 인자는 말로써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⑨ 팔일편 19장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정공문군사신 신사군 여지하. 공자대왈 군사신이례 신사군이충) 이-정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며,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임금은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며,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기는 것입니다.” 배-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을 물었다. 공자가 받잡고 아뢰었다.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진심(忠)’으로 섬기는 법입니다. L-The Duke Ting asked how a prince should employ his ministers, and how ministers should serve their prince. Confucius replied, “A prince should employ his minister according to the rules of propriety; ministers should serve their prince with faithfulness.”
⑩ 자로편 15장 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정공문 일언이가이흥방 유저).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공자대왈 언불가이약시기기야)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인지언왈 위군난 위신불이)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여지위군지난야 불기호일언이흥방호). 曰 一言而喪邦 有諸(왈 일언이상방 유저).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공자대왈 언불가이약시기기야)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子違也(인지언왈 여무락호위군 유기언이막자위야).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여기선이박지위야 불역선호).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여불선이막지위야 불기호일언이상방호). 이-노나라 정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성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을 이와 같이 (꼭 그렇게 된다고) 기약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임금 구실을 하기 어렵고, 신하 구실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니, 임금 구실을 하기가 어려운 줄 안다면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성하게 할 수가 있다고 기필할 수 없겠습니까?” 정공이 다시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멸망하게 할수가 있다 하는데, 그런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말을 이와 같이 (꼭 그렇게 된다고) 기필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임금 자신이) 나는 임금이 된 것은 즐거울 것이 없고, 다만내가 한 말에 어기는 사람이 없는 것만이 즐거울 뿐이다’라고 말하니, 만일 임금 자신의 말이 유익한 말이고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반대로) 만일 임금 자신의 말이 유익하지 않는 말인데도 이를 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이것은 한마디 말로 나라를 멸망하게 할 수 있다고 기필할 수가 없겠습니까?” 배-정공이 물었다. “말 한마디에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던데 그렇소? 공자, 아뢰었다. 말이 어디 꼭 그렇겠습니까마는,사람들 말에 “임금 노릇 하기 어렵고, 남의 신하 노릇 하기 쉽지 않다”고 하더이다. 만일 임금 노릇 하기 어려운 줄 안다면, 말 한마디가 나라 일으킬 실마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공이) 말하였다. “한마디에 나라를 잃는 수도 있다”던데 그렇소? 공자, 아뢰었다. 말이 어디 꼭 그렇겠습니까마는, 사람들 말에 “임금 노릇 하는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 아무도 거역하지 않는게 즐겁다”는 말이 있더이다. 만일 그 말이 선한데 누구도 어기지 않는다면 또한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허나) 선하지 않은데도 거역하지 않는다면, 한마디가 나라 망칠 실마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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