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언더우드 아펜젤러를 만든 지성의 힘
아펜젤러의 모교인 명문사학 드루대에서 공부중인 학생들
아펜젤러의 어린시절 큰 영향을 미친 메노나이트와 아미쉬마을에서 마차를 끄는 모습.
130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은 제국 열강이 압력으로 제3세계를 굴복시켜 그 문호를 열었을 때 빨리 선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복음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언더우드의 모교로 제국주의적 선교의 선봉장이었던 미국 뉴브런즈윅신학교의 그레그 매스트 총장은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가 꾸린 답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은 19세기 미국식 복음을 증거하기보다는 좀 더 성숙해져 서로 대화하고 나누면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30년 전 이미 그런 성숙한 선교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이 놀랍다. 자신의 선교적 욕망만을 앞세우기보다는 약자와 여성들을 위한 고아원과 병원, 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는 27살 때 고아원(경신학교 전신)을 개원하고, 30살 때 한영 사전을 편찬하고, 이어 와이엠시에이(YMCA·기독교청년회)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를 열었다. 아펜젤러는 28살 때 첫 근대식 고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전신인 영어학교를 열어 남들이 현재의 권력만을 다툴때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 미래권력을 양성했다. 또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독립협회 창설을 도왔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한달 뒤 들어와 애오개, 남대문, 동대문에 병원을 세우고, 이화학당(이화여대 전신)을 연 스크랜턴 모자도 있다. 교회 몇개 세우고 자기 신자수 불리는 선교방식과는 너무도 멀다.
그들의 선교가 당시 ‘양코배기들이 아이들을 몰래 잡아다가 간을 꺼내먹는다’는 말을 믿을 정도로 서양인을 오랑캐 취급한 조선인들에게 다가서기위한 우회 전략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광범위한 혜택은 조선의 약자들을 보듬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선사회의 질적인 변혁을 이끈 폭넓은 시야는 선교 열정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대에 바로 선교의 열매를 거둬 뭔가를 누리려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장기적 비전을 갖고 움직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겐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사고를 지배한 선교제일주의나 근본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인문정신과 공동체적 박애정신이란 두가지 점이 뚜렷하게 발견된다. 이번 답사는 그런 성장 배경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언더우드가 학창시절 살았던 마을에 위치해 그가 다닌 그로브개혁교회
언더우드의 모교인 뉴브런즈윅신학교의 김진홍 교수와 코클리 교수가 언더우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랭커스터의 장로회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언더우드의 사진과 문서들.
언더우드 등 초기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조선에서 찍은 모습
언더우드가 설립한 평양신학교의 졸업생들.
■인문정신과 합리성 키운 다양한 경험과 교육
지난 7일 뉴저지주 허드슨 카운티 북부에 있는 노스버건 46번가를 찾았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2년간 프랑스에서 학교에 다니던 언더우드가 12살 때 이주해 살던 마을이다. 입구엔 언더우드가 학창시절 다닌, 아담한 그로브개혁교회가 있다. 언더우드의 유해가 1999년 서울의 양화진선교사묘역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묘소가 있던 곳엔 비석만 남아 있다. 아직도 남아있는 묘비엔 ‘32년간의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소천했다’고 써있다.
서민 주택가에 있던 이 교회는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교회다. 영국에서 태어나 파리와 미국에서 공부해 ‘국제 시민’으로 자란 언더우드가 다양한 이민자들과 마을과 교회에서 애환을 함께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는 이 교회에서 멘토인 마본 목사를 만난다. 마본 목사는 뉴브런즈윅신학교 교수로서도 그를 가르쳤다. 뉴브런즈윅신학교 존 코클리 교수는 “마본 목사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에다가, 13개의 교회를 분립 개척할 정도로 사업적 수완이 능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도 훗날 타자기 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둔 큰형의 권유로 안식년 휴가 때 파리에서 타자기 회사를 관리할 정도로 사업가적 자질을 보였다. 이는 그가 연세대를 설립하면서 처음부터 상과대를 포함한 계기가 됐다.
언더우드는 다양한 나라와 사람들을 경험한 데 그치지 않고 학문적 열정을 불태웠다. 이 마을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11마일이나 떨어진 뉴욕대까지 걸어다녔다고 한다. 더구나 그는 신학교 졸업학년 때 의학을 따로 1년 더 공부하기도 했다. 코클리 교수는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처럼 결정적인 회심 같은 종교적 체험 없이 경건하게 자랐다. 신학교도 학생들이 공부하는 동안엔 설교하는 것도 금지시키고 공부만 하게 하는 풍토였다”고 말했다. 그는 종교적 충동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장기적 비전을 실행할 수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던 셈이다.
아펜젤러의 경우도 18살 때 회심을 체험한 뒤 감리교인이 되어 머리보다는 가슴의 열정을 중시했지만, 랭커스터의 프랭클린&마셜대학과 드루신학교에서 감성보다는 이성적 신앙의 중요성을 다시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코클리 교수는 “아펜젤러가 프랭클린&마셜대학에서 지적인 깊이를 존중하는 머서스버그신학을 존중했고, 훗날 드루신학교에선 신비주의보다 이성을 강조한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과학시대에 대한 개방성을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아펜젤러의 유년기에 영향을 미친 메노나이트들의 농장 모습
아펜젤러의 선교보고서 등을 보관하고 있는 드루대의 고문서실.
아펜젤러가 보낸, 선교보고서
아펜젤러가 살았던, 드루대의 기숙사.
■ 박애와 봉사의 씨앗이 된 순수 신앙
필라델피아 랭커스터 시내에서 차로 40분쯤 달리면 밀스트림로드에서 가끔씩 마차가 눈에 띈다. 아직도 기계 문명을 거부한 채 전기도 사용하지 않고 마차를 타고 다니며 기계 없이 농사를 짓고 그리스도의 비폭력적인 초기 공동체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아미쉬’ 사람들이다. 아펜젤러의 어머니와 같은 스위스·독일계 이민자들이 주로 사는 이 인근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가 섞여 산다. 비폭력 평화영성과 공동체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같지만, 메노나이트는 전기와 기계를 사용하고, 아미쉬는 이마저 거부한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곳을 안내한 미주 목회자 출신 윤사무엘 감람산선교신학교 총장은 “아펜젤러는 메노나이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모국어인 독일어를 사용했고, 사회봉사와 선교, 공동체, 단순한 삶, 상부상조를 강조한 메노나이트 영성 속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그가 사학 명문 드루신학교에서 학문을 읽히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능한 인물이면서도, 늘 순수한 박애정신을 잃지 않은 것은 어린 시절 메노나이트 영성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불과 44살에 목포 앞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녀를 구하려다 실종돼 현재 양화진선교사묘역엔 그의 빈 무덤만이 있다. 아펜젤러의 유년기를 결정지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의 고장엔 초기의 순수성이 그리운 한국 교회에서도 주목하는 곳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목사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와 광림교회 김선도 원로목사,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 등도 이곳을 여러차례 다녀갔다고 한다.
허드슨카운티·랭커스터/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