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주교 할아버지
스스로 낮아지고 장애인을 높이는 김성수 주교의 삶
26년 전 6·10 민주항쟁의 서막을 열었던 성공회 김성수 주교는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고향 강화도의 땅을 기증해 지적장애인 재활공동체 ‘우리 마을’을 설립해 장애인 50여명의 재활을 돕고 있다. 노후 걱정을 덜 수 있도록 장애인 양로원도 지을 계획이다.
“남몰래 봉사하고 약자들을 돕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따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돼”
인천 강화도 온수리 공설운동장 뒤편으로 돌아가면 멋진 돌담과 어우러진 목조건물이 나온다. 성공회 김성수(83) 주교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을 위해 설립한 ‘우리 마을’이다.
“할아버지, 어제 연극 재미있졌져~”
점심을 먹고 돌담 아래 나란히 앉은 김 주교에게 한 ‘친구’가 전날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 연극인 김민기씨 초청으로 가서 본 <슈퍼맨처럼>이 재미있었다고 말하자 “나도 좋았져”, “그치!”라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거든다. 그러다 한 ‘여성 친구’는 과자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김 주교의 입에 넣어준다.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적장애인들의 호칭은 ‘친구’다. 친구들의 평균 연령은 30대 중반. 정신 연령은 서너살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까지 다양하다.
2층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작업장에서 작업하던 ‘여성 친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송중기에게 시집간다고 자랑하곤 했단다. 그 친구를 보고 김 주교가 “누구한테 시집간다고 했지?”라고 물으니, ‘신화’란다. 김 주교가 “그사이에 벌써 신랑이 바뀌었어?”라고 하자, “나는 원래부터 우리 신화 오빠가 제일 좋았다”고 다섯살배기처럼 응석을 부린다. 영락없는 손녀와 할아버지다.
누가 그를 1987년 6월10일 서울시청 앞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4·13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 6·10 국민대회의 서막을 열었던 그 ‘김성수 주교’라고 생각할까. 그는 당시 디제이(김대중 전 대통령), 와이에스(김영삼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 김승훈 신부 등과 함께 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켜 민주항쟁의 불씨를 지핀 주역 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는 “나야 젊은 신부들이 하라는 대로나 했지 뭘 아나. 교회까지 빼앗기고 경찰서 앞에서 예배를 봐야 했던 박형규 목사님 같은 분이 정말 고생한 분이지”라고 말한다. 최초의 독립관구장으로서 대한성공회를 이끌 때도, 4년 전 이곳에 오기 전까지 8년간 성공회대 총장을 하면서도 그가 한 일은 없단다.
“내가 뭐 아는 게 있어야 내 마음대로 하지, 모르니 남들이 하자는 대로나 한 것이지.”
노자는 최고의 삶으로 물 같은 삶을 꼽았다. 노구의 그에게서 여전히 물오른 나무의 청춘이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물처럼 유연한 기운이 흐르기 때문일까. ‘우리 마을’ 앞 공설운동장 터 3천평까지 강화군에 기부했던 그는 “다 조상 땅이지 내 땅이냐”고 말한다. 14년 전 김 주교가 장애인 시설을 만든다고 했을 때 길상면 이장들 가운데 한명도 반대하지 않았다니 ‘인자무적’(仁者無敵·어진 이에겐 적이 없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198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 재임시 회장단과 함께 1년에 한번씩 눈을 가리거나 휠체어를 타고 종로를 지나는 장애인 체험을 했다. 지도자들이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적 여론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강화도 지주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가 어떻게 그런 공감 능력을 갖게 됐을까.
그는 “고교 3학년 때 급성 폐병에 걸려 10년 가까이 낙향해 어려운 시골 사람들의 삶을 보고, 신학교 때 대천덕 신부의 가르침에 따라 직접 농사도 지어보고 탄광촌에 들어가 일해본 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지금도 이름도 말도 없이 남몰래 봉사하고 약자들을 돕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따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돼”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그가 이렇게 낮아지는 동안 장애인은 높아진다. 그가 이끄는 기도는 어느 교회의 기도와 다르다. 집안의 수치로서 방치되거나 버려지기도 한 장애인들의 기도는 “우리는 최고다”이다. 식사 전 기도 시간에 그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우리는”을 외치면 친구들이 다 함께 “최고다”를 외친다.
평생 부모의 한이 되었던 장애인들은 이곳 콩나물공장과 양계장, 전자부품 조립공장, 제과제빵공장 등에서 일해 각자 30만~80만원가량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50여명의 ‘친구’ 중 절반가량은 이곳 기숙사에서 살고, 나머지는 인근에서 출퇴근하면서 자활을 모색하고 있다.
“이 친구들 부모들의 기도는 ‘내가 우리 아이보다 하루라도 늦게 죽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는 장애인들이 정년 은퇴를 해야 하는 58살이 되어도 계속 이곳에 살면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래서 선친에게 물려받은 땅을 마저 기부해 장애인 양로원을 지을 계획이다.
‘우리 마을’은 인천시교육청과 함께 인천시내 고교의 장애인들이 2박3일씩 이곳에 머물며 콩나물공장과 제과제빵 등 직업 체험을 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 마을’을 장애인들이 배우고 일하고 쉴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 마을’이 있는 온수리에선 온천이 나올 법한 지명인데 온천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자신을 비워서 장애인들과 벗이 된 이가 ‘성스런 물’(성수)이고 ‘따뜻한 물’(온수)이 되어 흐르고 있다. 김 주교는 올해 만해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강화도/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