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창] 열린 눈 트인 귀
아베 시대, 일본의 지성 이에나가를 떠올린다
길희성(서강대 명예교수·강화도 심도학사 원장)
비단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망언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이 미쳤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들이 일본 정치인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극우파들이 활개를 치도록 방치하고 용납하는 일본 사회 전체가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매스컴과 유권자들을 제일 무서워한다는데, 미국이나 중국에는 설설 기고 한국을 향해서는 마치 맺혔던 한이라도 풀려는 듯 망언과 폭언을 쏟아내는 그들의 행동이 매스컴의 집중포화나 시민단체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는 뉴스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유권자들의 뒷배를 믿는 정치적 타산이 있기에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다는 생각이 든다. 힘은 있기에 세계 평화를 몇 번이나 깨고 주변국들은 물론이고 자국민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국가, 그러나 힘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러한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나는 일본 지성인 한 사람이 있다. 이에나가 사부로(1913~2002)라는 역사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알려진 인물이 아니지만, 새삼 그가 생각나는 것은 그가 전후 일본의 양심을 대표하다시피 할 정도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5년부터 30여년에 걸쳐 자신이 쓴 일본 역사교과서의 검열에 항의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소송 전을 벌여 일본뿐 아니라 세계 지성계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촘스키 등 세계 지성인들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할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가 만약 살아서 현재 일본 정치가 돌아가는 꼴을 본다면 무어라 할지 궁금하다. 100살의 노구를 이끌고 도쿄 중심가에서 1인시위라도 벌이지 않았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이에나가 사부로
내가 이에나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중세불교사상사연구>라는 작은 명저를 통해서 일본 불교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책에서 나는 호넨, 신란, 니치렌, 도겐 등 빛나는 별과 같은 가마쿠라 신불교 지도자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오직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하는 신심 하나로 죄 많은 중생이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철저한 타력신앙운동을 펼쳐 정토진종의 창시자가 된 신란(1173~1262)에 대한 이에나가의 글은 압권이다. 염불이라는 쉬운 수행마저 진실하지 못한 중생으로서는 어렵다고 하면서 타력으로 돌리는 신란의 염불은 실제상 염죄(念罪)로 보아야 한다는 이에나가의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그가 쓴 또 하나의 책이 나를 감동시켰다.
*이에나가 사부로
니시다 기타로와 더불어 이른바 경도학파의 한 축을 형성했던 다나베 하지메의 사상에 관한 연구서인데, ‘전쟁과 철학자’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니시다와 다나베를 비롯한 전쟁 전의 일본 지성인들이 어떻게 교묘한 논리로 군국주의를 옹호했는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다나베는 전후에 <참회도로서의 철학>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자신의 과오를 철학적으로 참회하고 있다. 염불을 염죄로 해석할 정도로 죄의식을 강조하는 역사가 이에나가가 철학자 다나베를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자학사관’을 수정하고 군대를 보유한 ‘정상국가’가 되고자 꿈틀거리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과연 진정한 죄의식이라는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진정한 죄의식과 깊은 뉘우침이 없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며, 행위가 따르지 않는 뉘우침 또한 거짓이다. 이에나가 같은 예외적 존재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대다수가 아직 일본을 용서할 마음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