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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애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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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안연, 누항의 구도자<상>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자왈 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 인불감기우 회야 불개기락 현재 회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회는! 한 광주리 밥과 한 표주박 물로 누추한 곳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어질구나, 회여! 

- ‘옹야’편 9장

  

  

 

1. 천상여(天喪予)!

안회(顔回)가 죽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누항(陋巷)의 작은 집 흙벽에 기대어 그는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한 손에는 붓을, 또 한 손에는 죽간을 쥔 채였다. 무엇을 생각하던 중이었는 지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희미한 체온처럼 남아 있었다.

그의 부음을 들은 공자는 한동안 망연자실하다가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으로 폐부를 찔린 사람처럼 두 번을 거듭하여 탄식하셨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噫 天喪予)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天喪予)!“ -‘선진’편 8장①

이내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흐느낌이 통곡으로 바뀌어 소리가 밖에 까지 들리자 제자들이 걱정하며 모여들었다. 누군가 선생님의 애통함이 지나쳐 몸이 상하실까 저어하여 이를 상기시켜드렸다. 그러나 공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애곡(哀哭)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회를 위해 통곡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有慟乎 非夫人之爲慟 而誰爲) - ‘선진’편 9장②

 

안회가 죽고 2년 뒤였다. 노나라 임금 애공과 집정인 계강자가 연로한 공자에게 공문(孔門)의 후사(後嗣)를 염두에 두고 물었다.

 “선생님의 제자 중에 누가 제일 호학자입니까(弟子孰爲好學)?”

공자께서 그때 하신 대답을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선생님은 질문을 들으시고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셨다. 화풍(和風)이 일고 경운(慶雲)이 떠가는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이윽고 말씀하셨다.

  “안회가 학문을 좋아하였습니다.(有顔回者好學)

   불행히도 일찍 죽었습니다.(不幸短命死矣)

   지금 그는 가고 없습니다.(今也則亡)”  -‘옹야’편 2장, ‘선진’편 6장③ 

 

gongja28.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2. 회하감사(回何敢死) 

안회는 공자의 애제자로서 스승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공자가 안회를 자신을 뛰어넘을 ‘후생가외’로 여겼다면(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 ‘자한’편 22장), 안회는 그런 스승을 아버지처럼 여겼다(回也 視予猶父也 - ‘선진’편 10장)


이런 일화가 있다. 망명 중의 일이었는데, 자기를 자랑하는 법이 결코 없었던 안회를 대신하여 친구 염유(염구라고도 한다)가 공문의 후배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광 땅에서 우리를 양호의 무리로 오인한 사람들에게 불시에 공격 당하는 바람에 일행이 모두 뿔뿔히 흩어졌지. 나중에 겨우 한 곳에 다시 모였는데 안회가 보이지 않는 거야.  한참을 걱정하고 있는데 안회가 흙투성이 꼴로 나타났지. 그때 선생님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안회를 얼싸안고는 외치듯 말씀하셨지.

  ‘이 놈아! 나는 네가 죽은 줄만 알았다(吾以女爲死矣)!’

그때 안회가 뭐라고 한 줄 아시는가? 허허.

   ‘선생님!  선생님이 계신데 어찌 제가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子在 回何敢死)?’” -‘선진’편 22장④

 

공자가 14년만에 귀국해 학당이 중수(重修)되자, 향학열에 불타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 안팎에서 모여들었다. 증참, 자장, 자하, 자유 등 공문의 3세대 제자들로서 훗날 유학(儒學)을 전 중국에 퍼뜨리는데 기여한 준재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여러 사형 가운데 특히 안회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훗날 증자(曾子)로 추존된 증참이 대표적이다. 그가 안회를 회고한 말이 남아 전하고 있다.

  “그 옛날 선생님의 문하에 이런 사람이 있었지요.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말입니다. 본인의 능력이 출중한데도 자기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물으며, 자기가 많이 아는 사람임에도 자기보다 지식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있지만 없는 듯이 한 걸음 물러서 있고, 내면이 꽉 차있으면서 늘 빈 듯이 자기를 낮춥니다. 모욕을 받아도 모르고 저지른 짓이려니 여겼습니다.  옛날 나에게 그런 사형이 있었습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 ‘태백’편 5장⑤

 

나, 이생도 학교 문앞을 쓸다가, 입교를 청하러 오는 동안(童顔)의 문도들에게 주유천하의 일화를 침튀기며 들려줄 때면 마치 내가 안회라도 된 듯한 착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갓 일꾼에 불과한 나, 이생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자 영광이었다.

  “선생님은 중국 제일의 현자, 안회님은 선생님의 첫 손 꼽는 제자. 여러분도 곧 알게 되겠지만, 안회님이 스승님을 위해 지은 송(頌 ) 한 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송을 듣고도 가슴에 학문의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선비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우러러 볼수록 높기만 하네(仰之彌高)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네(鑽之彌堅)

 바라보매 앞에 계신 듯 한데(瞻之在前)

 어느새 뒤에 계시네(忽諺在後)

 우리 선생님(夫子)

 차근차근 배움의 길로 이끄시어(循循然善誘人)

 학문으로  넓혀주시고(博我以文)

 예로써 단속해 주시네(約我以禮)

 공부를 그만 두고자 하여도 그만둘 수 없게 하시고(欲罷不能)

 갖은 노력을 다해 좇아보지만(旣竭吾才)

 선생님의 가르침 여전히 우뚝하기만 하네(如有所立卓爾)

 따라가려 아무리 애를 써도(雖欲從之)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末由也已) - ‘자한’편 10장⑥

 

gongja22.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3.안자약전(顔子略傳)

안회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서른 살 아래이다. 자가 자연(子淵)이어서 공문에서는 보통 안연(顔淵)이라 불렸다.

그의 아버지 안로(顔路 ·로는 자이며, 이름은 무요(無繇)이다)는 공자 학당 초기의 문도로 여겨질만큼 어려서부터 공자와 아는 사이였다. 안연은 십대 초반부터 공자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공자와 안로의 친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밝은 공자는 안연의 출중한 천품을 금세 알아보고 그를 매우 아꼈다. 안연 또한 공자의 인격과 박학을 흠모한 나머지 친아버지 이상의 부정(父情)을 공자에게서 느끼게 되었다.


이 전설적인 사제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였는 지는 앞에서 말한 광 땅의 일화가 잘 보여주고 있지만, 두 사람의 존경과 사랑은 단지 인간적인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공자는 안연에게서 자신을 뛰어넘어 미지에 세계로 뻗어가는 어떤 초월성을 느끼고 있었고, 안회는 공자에게서 영원불변의 이데아를 예지(豫知)하고 있었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벌판에서 공자 일행이 굶주림의 고난을 겪을 때, 자로와 자공 등이 군자의 환란을 슬퍼하고 공자도 한때 절망감에 빠졌을 때였다. 공자가 안연을 붙잡고 한탄했다.

 “회야, 우리가 들짐승도 아닌데 굶주린 채 들판을 헤매고 있구나. 과연 나의 도에 잘못이 있단 말인가?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때 안연이 한 대답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 이생의 가슴은 뜨거운 감동으로 벅차오른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원대하므로 천하의 그 누구도 선생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여도 선생님께서 추진하여 그것을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은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군자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도가 닦이지 않는 것은 도를 닦는 자의 치욕이요, 도가 닦여진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의 치욕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군자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참모습이 드러납니다(夫子之道至大 故天下莫能用. 雖然 夫子推而行之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夫道之不脩也 是吾醜也,

夫道旣已大脩而不用 是有國者之醜也 .不容何病. 不容然後見君子).” -<사기> ‘공자세가’

공자는 어쩌면 안연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자칫 놓칠 뻔한 구도심(求道心)을 다시금 부여잡게 되었을 지 모른다. 안연이라는 이 젊은 친구가 뿜어내는 빛을 경탄스럽게 바라보면서 말이다.

  

안연은 성품이 온화하고 말수가 적었다. 깊은 독서와 사색으로 인해 스물 아홉에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사기> ‘중니제자열전’) 정좌하고 있으면 잔잔한 호수같았고, 움직이면 아득히 높은 나무 위를 스치는 바람 같았다. 있는 것 같으면서 없고, 없는듯 한데 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이 물이 일정한 곳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모양을 본 뜬 ‘돌 회(回)’로 쓰여지고, 자가 깊은 못에서 물이 돌고 있는 모양을 뜻하는 ‘연못 연(淵)’자인 것을 보면 이는 그의 성정(性情)과도 무관하지 않은 작명일 듯하다. 그는 자로와 더불어 14년간의 망명생활을 줄곧 공자 곁을 지켰던 제자이다. 훗날 사람들이 공자의 망명시절에 제자들이 맡았던 역할을 비교하면서 자로를 왕의 장수로, 자공을 왕의 사신으로, 재여를 왕의 장관에 비유할 때, 안회는 왕을 보필하는 재상(王之輔相)에 비유했다. (<사기>, ‘공자세가’) 그만큼 그는 공자를 가까이서 시종하며 보좌한 사람이었다.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38살이었던 안연은 재건한 공문의 새 문도들을 교육하는 일에 진력했다.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의 성품과 잘 맞았다. 그리하여 공자도 “회의 노력으로 인해 내가 제자들과 더욱 가까와졌다”(<사기>,‘중니제자열전’)며 안연의 열정을 상찬했다. 공자는 심지어 “안회는 나를 돕는 자가 아니라”는 역설적인 말씀도 하셨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어서(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 無所不說 -‘선진’편 3장⑦), 다른 사람들이 안연처럼 의심을 일으키지 않는 바람에 오히려 공부에 지장을 받는다는 뜻이었으니 극찬이 아닐 수 없었다.

 

안연은 빈한한 가문 출신인데다 천성적으로 물욕이 없어 죽을 때까지 “끼니를 거를 만큼”(<사기> ‘중니제자열전’) 가난했다. 그의 집은 곡부의 빈민가에 있었는데 변변한 잠자리와 식탁도 없이 오로지 목간과 죽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공자는 평소 청빈한 안연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또한 큰 자랑으로 여겼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광주리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근심하여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회여!(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옹야’편 9장⑧ 

 

그런 안연이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먼저 죽자 공자의 상심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시자(侍者)가 예법에 어긋난다며 만류해도 공자는 한사코 통곡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공자는 제자들이 안연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를 말리며, 청렴한 빈사(貧士)답게 검소하게 장송(葬送)할 것을 당부했다. 이는 다소 뜻밖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비쳐졌다.

 “선생님은 그토록 사랑하신 안회의 후장(厚葬)을 어째서 못마땅해 하시는 것일까? 연로하셔서 판단력이 흐려지신건가?” 


나, 이생이 당시를 지켜본 바로는, 안연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이끈 사람은 염유였다. 염유는 집정인 계강자의 가재(家宰)로 당시 공문에서는 가장 출세한 제자였다. 그는 계강자를 설득해 공자의 귀국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안연이 타고난 철학자라면 염유는 공자도 그 실무능력을 인정한 뛰어난 행정가였다. 공문이 재건된 후 처음으로 곡부에서 치러지는 명성높은 문도의 장례식이 어떻게 치러져야 장차 공문의 위세가 높아지고, 자신을 비롯한 문도들이 후광(後光)을 입는 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난해 리(공자의 아들)의 장례식은 귀국 직후라 경황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회는 우리 문도 제일의 덕성처사(德盛處士). 공문의 예(禮)가 얼마나 성대하고 장려한 지를 곡부 사람 모두에게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공자는 염유를 비롯한 주요 제자들의 그런 정치적 계산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공자가 귀국해 목격한 것은 그 옛날 함께 풍찬노숙하던 제자들이 아니었다. 권력에의 추종으로 어느새 닳고 때묻은 정치꾼으로 변질된 모습들이었다. 안연의 죽음은 이처럼 공자와 출세한 제자들간에 불화가 싹트던 무렵의 ‘사건’이었다. 평소 안연과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그의 죽음이 닥치자 너도 나도 앞다퉈 추념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름기 낀 제자들에게 공자는 느린 말투로 간곡하게 말했다.

 

 회의 죽음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는 우리들 중에 가장 도(道)에 가까왔으며, 가난을 편하게 여겼던 사람이다.(回也 其庶乎 屢空) -‘선진’편 18장

 

안연의 아버지 안로는 한술 더 떠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 장례 비용을 대줄 것을 청했다. 안로는 공자가 어렸을 적에 안씨 가문에 신세를 진데다, 안회를 아들처럼 사랑했으니, 자신이 그런 청을 넣을 수 있다고 여겼을지는 모르지만 비례(非禮)임에는 틀림없었다. 안로가 무례를 저질러가면서까지 공자에게 이런 청을 넣은데 대해 당시에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그 가운데 이런 소문이 있었다. 안연은 벼슬이 없는 일개 사(士)의 신분이지만, 그의 명성을 고려해 대부(大夫)의 예로 장사 지낼 수 있도록 공자의 동의를 얻어보라는 부추김을 안로가 받았다는 설이다.


 “안연을 따르는 문도들은 대개 벼슬보다 은일(隱逸)을 숭상하는 도학자(道學者)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의 가르침은 본래 인(仁)의 체득에 있는데, 일부 출세주의자들이 정치와 처세의 술로 가르침을 오염시키고 있다며 분개하고 있었지요. 속으로는 안연을 조소하면서 자기들의 명성과 이익을 위해 겉으로는 애도하는 척하는 자들의 위선에 그들 역시 심한 구역질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안연 사형이야말로 선생님의 도를 진실로 이해하고 따른 유일한 제자라고 믿어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도를 제대로 전승하기 위해 죽은 사형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특별한 사승(師承)의 표시를 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안로의 수레 건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공자께서는 그런 의도를 가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안연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이 실상은 ‘파당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었음을 통찰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회의 죽음을 더럽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는 그 마음이 석 달동안이나 인(仁)에서 떠나지 않을 만큼 우리들 중에 가장 인(仁)에 가까운 사람이었다(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 ‘옹야’편 5장⑩

  

공자는 안로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말로 당신의 뜻을 전했다.

 “재주가 있으나 없으나 부모에게 자식은 다 같은 것.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도 외곽(시신을 넣은 관을 안치하는 덧널) 따위는 쓰지 않았소. 수레는 대부가 조정에 출입할 때 타고 다니라고 나라에서 준 것이 아니요? 사사로이 처분해서는 안될 물건입니다(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 死 有棺以無槨 吾不道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道行也).”- ‘선진’편 7장⑪


공문의 번영을 위한 정치적 이해타산도, 학통의 계승이란 명분도 모두 공자가 안회를 장송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지사(志士)답게 떠나보내 주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회에 대한 공자의 작별 방식이었다.  또한 안연 자신도 진심으로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공자가 믿는 바였다.

 

안연의 장례식은 공문을 이끌고 있는 현실파의 의도대로 성대하게 거행됐다. 안로가 원했던 두꺼운 덧널도 썼고, 대부에 준하는 격도 갖추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비례(非禮)라고 시비하지 않았다. 안연의 시체와 함께 묻혀버렸으면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자칫하면 삐져나올지모를 미소를 꼭꼭 감춰야 하기도 했을테니 말이다.

  ‘회는 양심을 찌르는 가시같은 존재. 이제 가버렸으니 더는 비교 당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날 안연의 장구(葬柩)가 공문을 떠난 뒤 공자는 거처에 돌아와 홀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여겼지만, 나는 그를 자식처럼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회는 제자이면서 또한 나의 스승이기도 하였음을 너희들은 끝내 살펴주지 않았다. 오늘 회를 저렇게 보낸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다(回也 視予猶父也 予不得視猶子也. 非我也 夫二三子也). -‘선진’편 10장⑫

 

3년 후.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정원을 거닐던 공자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꽃밭을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싹이 나고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가 하면, 꽃을 피우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있기도 하지(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 - ‘자한’편 21장⑬

  

그러면서 안연을 추억하시던 끝이었는지, 아니면 그와 더불어 당신의 죽음까지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를 말씀을 토해내셨다.

 

 애석하구나,  비록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보았느니라. 오직 앞으로 나아가며 멈추는 것을 몰랐던 한 사람을. 子謂顔淵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자한’편 20장⑭ 

 

4. 안씨(顔氏)의 서(書)

안연은 공자와 함께 망명지에서 돌아온 지 불과 2년 만인 서기전 482년에 마흔 살의 나이로 죽었다. 벼슬없는 유사(儒士)였으며, 남긴 재산은 입고 있던 옷 한벌 뿐이었다. 그는 평생 공자의 언행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 공자와 그 사상에 대한 정밀한 기록을 작성했다. 훗날 나, 이생이 장주(莊周)의 고향 지방을 여행하면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안씨지서(顔氏之書)’라 불린 그 죽간들은 그가 죽은 뒤에 이를 탐낸 동문들이 앞다퉈 가져가는 바람에 간 곳조차 모른 채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훗날 공자의 어록에 담긴 구도(求道)의 편린들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안연이 남긴 죽간에서 비롯되고 있음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절 안연과 같은 영혼의 인간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그토록 순수하고 장엄하게 기록할 수 있었으랴.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선진편 8장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안연사 자왈 희 천상여 천상여)

 이-안연이 죽으니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슬프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배-안연이 죽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아아! 하느님이 날 버리시는구나. 하느님이 날 버리시는구나.

 L-When Yen Yuan died, the Master said, “Alas! Heaven is destroying me! Heaven is destroying me!”

 

 ② 선진편 9장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 而誰爲(안연사 자곡지통 종자왈 자통의 왈 유통호 비부인지위통 이수위)

 이-안연이 죽으니, 스승께서 통곡하며 슬퍼하셨다. 시종(侍從)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너무 슬퍼하십니다”라고 하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무 슬퍼한 일이 있는가, 이 사람을 위해 슬퍼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는가?”

   배-안연이 죽었다. 공자의 곡소리가 지나치게 슬펐다. 주변의 제자가 말했다. 선생님, 슬픔이 지나치십니다. (공자) 말씀하시다. 지나쳤더냐? (허나) 저 사람을 위해 지나치지 않고, 또 누굴 위해서 지나친단 말이냐?

 L-When Yen Yuan died, the Master bewailed him exceedingly, and the disciples who were with him said, “Master, your grief is excessive?”  “Is it excessive?” said he. “If I am not to mourn bitterly for this man, for whom should I mourn?”

 

 ③선진편 6장

 季康子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계강자문 제자숙위호학 공자대왈 유안회자호학 불행단명사의 금야즉망)

 이-계강자가 “제자 가운데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제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었는데, 운수가 없어서 수명이 짧아 죽었으니, 지금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없습니다.”

 배-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호학하는가? 공자, 대하여 말씀하시다. 안회라는 녀석이 호학하였는데 불행히 명이 짧아 죽었지요. 이제는 없소이다.

 L-Chi K‘ang asked which of the disciples loved to learn. Confucius replied to him, “There was Yen Hui; he loved to learn. Unfortunately his appointed time was short, and he died. Now there is no one who loves to learn, as he did.”

 

 ④선진편 22장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자외어광 안연후 자왈 오이여위사의 왈 자재 회하감사)

 이-스승께서 광 땅에서 박해를 받아 조심하고 계실 때 안연이 동행하다 뒤쳐져 있었는데, (안연이 오자) 스승께서 그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안연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니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

 배-선생님이 광 땅에서 위험에 처하였는데 안연이 뒤에 처졌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난,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하였다. 선생님이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L-The Master was put in fear in K‘wang and Yen Yuan fell behind. The Master, on his rejoining him, said, “I thought you had died.” Hui replied, “While you were alive, how should I presume to die?”

 

 ⑤태백편 5장

 曾子曰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 吾友嘗從事於斯矣(증자왈 이능문어불능 이다문어과 유약무 실약허 범이불교 석자 오우상종사어사의)

 이-증자께서 말씀하셨다. “재능이 있으면서도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물어보며, 학식이 많으면서도 학식이 적은 사람에게 물어보며, 학식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하고, 학식이 충실하면서도 공허한 것처럼 하며,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시비를 쟁변(爭辨)하지 않는 것은 옛적에 나의 벗이 일찍이 이런 일에 종사(從事·마음과 힘을 다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증자가 말하였다.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묻고, 많아도 적은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것 같고, 가득 찼으면서도 빈 듯하고, 덤벼들어도 허물하지 않음이여! 옛날 내 벗이 일찍이 이러하였느니.

 L-The philosopher Tsang said, “Gifted with ability, and yet putting questions to those who were not so; possessed of much, and yet putting questions to those possessed of little; having, as though he had not; full, and yet counting himself as empty; offended against, and yet entering into no altercation; formerly I had a friend who pursued this style of conduct.”

 

 ⑥자한편 10장

   顔淵위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諺在後(안연위연탄왈 앙지미고 찬지미견 첨지재전 홀언재후)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부자순순연선유인 박아이문 약아이례)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욕파불능 기갈오재 여유소립탁이 수욕종지 미유야이)

 이-안연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며 말하였다. “스승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 높아지고, 뚫을수록 더 단단해지며, 금방 볼때에는 앞에 있는 듯하더니 문득 뒤에 가 있구나. 스승님께서는 차근차근 사람들을 잘 이끌어 널리 학문을 닦아 사리를 밝히도록 하고, 자기 몸을 예의로 지키도록 하셨다. (이와 같은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될 수가 없어서 나의 재주를 있는대로 다 써 보니 스승님의 도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구나. 비록 따라가고자 했지만 따라갈 길이 없었다.”

 배-안연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며, ‘앞에 계신가’하여 바라보면 문득 뒤에 계시네! 선생님은 순순하게 사람을 잘 이끄시니, 글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요약하게 해주셨으니. 그만두려 해도 그럴 수 없고, 이미 나의 재주를 다 쏟았건만 또 저기 우뚝 서 계시네. 또 좇고자 하나,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다네.

 L-Yen Yuan, in admiration of the Master‘s doctrines, sighed and said, “I looked up to them, and they seemed to become more high; I tried to penetrate them, and they seemed to become more firm; I looked at them before me, and suddenly they seemed to be behind. The Master, by orderly method, skilfully leads men on. He enlarged my mind with learning, and taught me the restraints of propriety. When I wish to give over the study of his doctrines, I cannot do so, and having exerted all my ability, there seems something to stand right up before me; but though I wish to follow and lay hold of it, I really find no way to do so.”

 

 ⑦선진편 3장

 子曰 回也 非助我者也 於吾言 無所不說(자왈 회야 비조아자야 어오언 부소불열)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 내가 말할 때에는 (언제든지) 요해(瞭解)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회는 날 돕는 녀석이 아니다. 내 말에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L-The Master said, “Hui gives me no assistance. There is nothing that I say in which he does not delight.”

 

 ⑧옹야편 9장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자왈 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 인불감기우 회야불개기락 현재 회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현철하구나, 안회여. 대그릇에 담은 밥을 먹고 표주박에 담은 국물을 마시며 좁은 시골에 사는 고생을 남들은 견디지 못하는데도, 안회는 정도(正道)를 즐기는 그 마음을 고치지 않고 있으니, 현철하구나, 안회여.”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어질구나. 회는! 한 그릇의 밥과 한 모금의 물로, 달동네에서 사는구나.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거늘 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구나. 회는!

  L-The Master said, “Admirable indeed was the virtue of Hui! With a single bamboo dish of rice, a single gourd dish of drink, and living in his mean narrow lane, while others could not have endured the distress, he did not allow his joy to be affected by it. Admirable indeed was the virtue of Hui!”

 

 ⑨선진편 18장

   子曰 回也 其庶乎 屢空 賜 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자왈 회야 기서호 누공 사 불수명 이화식언 억즉누중)

 이-스승게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학문은) 도에 가까우나 (생활은) 자주 끼니를 굶는 편이다. 사(자공)는 명운을 받지 않고서도 재물을 늘렸으며, 억측(億測)하면 (그 말이) 자주 맞는 편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회는 거의 다 된 사람인데, 쌀독은 자주 비었더니. 자공은 전업으로(命) 삼지 않았어도 재산을 잘 길렀고, 억측하여도 자주 적중하더니라.

  L-The Master said, “There is Hui! He has nearly attained to perfect virtue. He is often in want. ‘Ts‘ze does not acquiesce in the appointments of Heaven, and his goods are increased by him. Yet his judgments are often correct.’

 

 ⑩옹야편 5장

 子曰 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 則日月至焉 而已矣(자왈 회야 기심 삼월불위인 기여 즉일월지언 이이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그의 마음이 석 달 동이나 인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 또는 한달에 한 번 인에 이르고 있을 뿐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안회는 그 마음가짐이 석 달 동안 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머지 녀석들인즉 하루나 한 달에 한번 닿을 정도고.

  L-The Master said, “Such was Hui that for three months there would be nothing in his mind contrary to perfect virtue. The others may attain to this on some days or in some months, but nothing more.”

 

 ⑪선진편 7장

 顔淵死 顔路請子之車 以爲之槨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 死 有棺以無槨 吾不道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道行也(안연사 안로청자지거 이위지곽 자왈 재부재 역각언기자야 리야 사 유관이무곽 오부도행이위지곽 이오종대부지후 불가도행야)

 이-안연이 죽으니 안로가 스승의 수레를 팔아 덧널(槨)을 만들 비용을 마련하기를 요청하므로,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재주가 있든 재주가 없든 다 각기 자기 자식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내 아들) 이(鯉)가 죽었을 때는 관만 마련하고 덧널은 마련하지 못했었다. 내가 수레를 팔아 걸어다니며 덧널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대부의 신분이기 때문에 수레 없이 걸어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배-안연이 죽었다. 안로가 공자의 수레로써 아들의 곽 만들기를 청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재주가 있건 없건, 또 다들 제 자식을 아끼는 법.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도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지. (더욱이) 나는 걸어다닐 수가 없는 처지라네. 회를 위해 곽을 만들고 나면, 대부의 뒤를 좇을 적에 나는 걸을 수 밖에 없게 되는데…

 L-When Yen Yuan died, Yen Lu begged the carriage of the Master to sell and get an outer shell for his son‘s coffin. The Master said, “Every one calls his son his son, whether he has talents or has not talents. There was Li; when he died, he had a coffin but no outer shell. I would not walk on foot to get a shell for him, because, having followed in the rear of the great officers, it was not proper that I should walk on foot.”

 

 ⑫선진편 10장

 顔淵死  門人欲厚葬之 子曰 不可(안연사 문인욕후장지 자왈 불가)

 門人 厚葬之 子曰 回也 視予猶父也 予不得視猶子也 非我也 夫二三子也(문인 후장지 자왈 회야 시여유부야 여부득시유자야 비아야 부이삼자야)

 이-안연이 죽으니 문인들이 장례를 융성하게 치르려 하므로, 스승께서 “그 일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문인들이 장례를 융성하게 치르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나를 대우하기를 자기 아버지처럼 여겼으나, 나는 그를 대우하기를 내 자식처럼 여기지 못했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의 짓이다.”

 배-안연이 죽었다. 문인들이 두터이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안 된다. (헌데) 문인들이 두터이 장례를 치러버렸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회는 날 아비처럼 여겼거늘, 나는 자식처럼 여기지 못하고 말았구나. (회야!)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니라, 너의 동료들이니라.

 L-When Yen Yuan died, the disciples wished to give him a great funeral, and the Master said, “You may not do so.” The disciples did bury him in great style. The Master said, “Hui behaved towards me as his father. I have not been able to treat him as my son. The fault is not mine; it belongs to you, O disciples.”

 

 ⑬자한편 21장

 子曰 苗而不秀者有矣夫 秀而不實者有矣夫(자왈 묘이불수자유의부 수이부실자유의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곡식이 싹은 났으나 이삭은 패지 못하는 것도 있고, 이삭은 패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게 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싹으로서 꽃 피우지 못한 자도 있고, 꽃피우고도 열매 맺지 못한 자도 있게 마련.

 L-The Master said, ‘There are cases in which the blade springs, but the plant does not go on to flower! There are cases where it flowers, but no fruit is subsequently produced!’

 

 ⑭자한편 20장

 子謂顔淵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자위안연왈 석호 오견기진야 미견기지야)

 이-스승께서 안연을 두고 이렇게 평론하였다. “애석하구나. (그의 죽음이여) 나는 그가 전진하는 것만 보았을 뿐, 중지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배-선생님, 안연을 일러 말씀하시다. 안타깝구나! 내,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으되 멈추는 것은 보지 못했으니.

   L-The Master said of Yen Yuan, “Alas! I saw his constant advance. I never saw him stop in his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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