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사 공소, 화합과 상생의 상징
내가 사는 이웃마을(원주시 판부면 서곡리)에는 특이한 이름의 ‘공소’가 있다. 공소란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뜻한다. 그 교회 이름이 ‘후리사 공소.’ 공소 앞에 붙은 ‘후리사’는 불교 사원 명칭이다. 구전에 의하면, 후리사는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서곡 대사라는 이가 이 지역에 절을 세우고 후리사(厚里寺)라고 했다고 한다. 9층 석탑까지 있었으며 승려 수십 명이 수도하는 대사찰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절터만 남아 있고 탑의 파편들이 발견된다.
*후리사 공소
놀랍지 않은가. 다른 종교의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평소 종교간의 화합과 상생에 깊은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그 이름을 알고는 가슴이 뛰었다. 마침 나는 파견예술인으로 그 마을의 문화유산을 탐구할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곧 조사에 착수했다. 먼저 후리사 공소의 회장이라는 이를 찾아갔다. 그는 자기네 공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찾아온 나를 환대하며 오래된 자료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문순 야고보라는 이가 1994년에 서툰 육필로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그 자료를 보니, 후리사(혹은 후리절)는 본래 절의 명칭이지만, 이 마을의 이름으로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마을 경로당의 이름도 ‘후리절 경로당’으로 되어 있다.
천주교는 본래 교회 명칭을 지을 때 주로 마을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그런 관습으로 후리사 공소의 이름도 지었던 것이다.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면 이 마을은 언제쯤 생겼을까. 천주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뭐라고 불렀을까. 이문순 야고버의 증언에 의하면,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없고, 마을에 옹기가마터가 있어 옹기 장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로 짐작하면, 천주교 박해시대에 천주학쟁이들이 피난을 와서 옹기를 구워 팔면서 외부와 접촉을 끊고 숨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던 곳이었으리라. 이문순 아고보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1910년경에는 약 16~17가구가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당시는 마을 전체가 천주교 신자였으며, 마을에는 옹기가마가 두 군데나 있었고, 옹기가마 하나는 현재 동그랑산 공동묘지 밑에 있었으며, 옹기가마와 옹기점이 같이 있어 항아리들을 주로 만들었는데 또 하나의 옹기가마는 현재 천주교 공소 강당 뒷밭에 있었고, 옹기점은 강당 앞에 있었으며 주로 자배기 물동이 옹배기를 만들었다.”
그때로부터 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옹기터를 찾아볼 수 없으나, 천주교 박해시대에 박해를 피해 은둔한 이들이 옹기를 구워 생계를 꾸려갔다는 기록이 한국천주교 박해사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문순 야고보의 증언은 신빙성을 더한다.(이런 증언을 한 이문순 야고보는 1901년 생이라고 한다). 더욱이 천주교의 전래에 큰 공을 세운 분으로 알려진 이하진과 그의 증손주(?)인 이가환의 사적비가 후리사 공소로부터 차량으로 10여분 거리의 분지골이라는 곳에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작은 공소지만 후리사 공소가 천주교의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
이하진과 이가환이 누구던가. 이하진은 조정의 사신으로 중국을 왕래하면서 천주학을 접한 후 자신의 친척인 이승훈을 자비로 중국까지 유학을 보낸 인물이며, 또 정조 시대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낸 이가환은 신묘박해 때 천주교의 수괴로 지목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후리사 공소
나는 이런 자료들을 접하며 후리사 공소에 대한 문헌이 더 있을까 탐문해 보았으나 더 이상의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불교 사원 명칭을 천주교 공소 이름으로 썼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기독교를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인식하지 않던가. 아무리 마을의 이름을 교회의 명칭으로 하는 관례가 있다 하더라도, 만일 공소 이름을 지었던 이들의 가슴 속에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있었다면, 그런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대 신자나 성직자들이 관용의 의식이 부족했다면, 공소 명칭을 바꾸려 시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소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이나 공소가 속해 있는 본당의 주교님 같은 분은 후리사 공소란 명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교님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자랑스러워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타종교의 명칭을 천주교의 이름으로 채택했다는 건, 관용의 마음을 지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신앙의 선배들이 자랑스럽죠.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이런 교회 명칭이 없을 겁니다.”
나는 공소 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오늘 우리가 이 지구별 위에서 공생하기 위해서는 화합과 상생의 지혜는 필수적이다. 어떤 종교든, 적어도 지구별 인류의 공생을 지지하는 종교라면, 그 종지(宗旨)는 자비와 관용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숱한 전쟁을 보며 그 종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종교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종교는 지구 위의 삶의 한 형식이다. 지구별이 사라지면 종교 또한 존속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오늘날 종교간, 혹은 종파간의 갈등과 투쟁은, 그 동안 종교가 담지해온 화합과 상생이라는 자비의 미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나는 ‘후리사 공소’를 만났다. 그런 명칭을 지은 이들은 사실상 별 생각 없이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명칭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오늘날 이슬람 국가(IS)를 지향하는 광적인 단체가 그러하듯이 종교간의 끝없는 대립과 갈등이 세계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현실에서,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후리사 공소는 ‘화합과 상생’의 한 상징으로 그 이름이 찬연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