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목사는 교회를 세습했다. 아버지가 은퇴한 교회를 물려받아 담임목사가 되었다. 수십년 전 아버지는 이 교회에 부임했고, 김 목사는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교회 사택은 자기 집이었고 교회 마당은 자기 놀이터였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는 목사가 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자연스레 교회를 집안의 가업으로 여겼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하는 것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인들 생각은 달랐다.
김 목사의 아버지는 독재자였다. 교인들을 무시하고 뭐든지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불장군 목회자였다. 나이 든 교인들은 ‘목사님 뜻은 하나님 뜻’이라며 따랐지만, 젊은이들은 달랐다. 여러 번 건의를 올렸으나 돌아오는 건 ‘목사에게 반항하면 지옥 간다’는 저주 설교였다. 유일한 희망은 김 목사가 정년퇴임하는 것, 그리고 교인들과 소통할 줄 아는 올바른 목사가 부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 후임으로 올 줄이야. 교회를 자기 집처럼, 아버지의 독단적인 목회를 사명으로 여기는 아들이 교회를 세습할 줄이야.
사실 김 목사는 대단한 효자다. 전통적인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아들이다. 기독교 신앙에 따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 제5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는 신앙인이다. 이런 그에게 과연 누가 돌을 던지랴?
그러나 예수는 좀 달랐다. 그는 노부모를 봉양할 도리를 버리고 나이 서른에 집을 떠난 지 삼년 만에 어머니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예수는 불효자였다. 김 목사가 믿고 따른 유교 문화와 유대 전통을 따른다면 말이다. 예수는 왜 그랬을까?
예수의 어머니가 ‘아들이 귀신 들려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되어 찾아갔더니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이것은 종교를 위해 부모마저 포기하라는 이단 집단의 패륜적 주장을 지지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 만연한 혈연에 근거한 폐쇄적인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개방적인 가족주의를 가르치는 말씀이다.
예수도 십계명을 알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즉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부모 자식만 싸고도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가족주의를 넘어서, 타인의 부모 자식도 돌아보는 크고 넓은 이타적인 가족주의를 실천했다. 사실 예수의 불효는, 불효가 아니라 ‘더 큰 효도’였다.
한 개인의 아버지 사랑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대통령의 노력은 가족이기주의와 다름없다.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그동안 매도된 5·16 군사정변과 10월 유신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아 아버지의 억울한 수치를 벗겨드리고 그분의 명예를 빛나게 회복하는 것이 나의 정치”라고 노골적으로 밝힌 바 있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효심이 갸륵하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려다가, 그 아버지로 인해 고통당한 수많은 우리들의 아버지의 역사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는 ‘더 큰 효도’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