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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공자의 등불이 된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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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명장면] 안연, 누항의 구도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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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br>자왈 현재 회야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 인불감기우 회야 불개기락 현재 회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회는! 한 광주리 밥과 한 표주박 물로 누추한 곳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어질구나, 회여! - ‘옹야’ 9장
 
 1. 학인(學人)
 나, 이생이 본 안연은 우선 공부하는 사람의 모범이었다. 타고난 재능이 빼어났음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배움을 좋아하되, 배움의 대가를 구하지 않았다. 진실로 배움을 즐기는 자였다. 공부에 몰입한 모습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말하기보다 듣고 사색하기를 먼저했다. 질문은 의문이 차오를 때 예를 갖춰서 하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여 평이한 말을 골랐다. 대답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형식으로 했다. 글은 과장하거나 과도한 표현을 즐기지 않았고, 주장은 정연하기가 오히려 담백했다. 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즐기는 것에 대하여는 시를 짓고, 따스한 문장의 산문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남긴 스승에 대한 송가는 그 절창의 일편(一片)이다.
 안연은 또한 자신에게 쏟아지는 선망과 질시의 양면을 잘 알고 있었다. 군자는 지식의 질량(質量)이 아니라 인격의 수양으로 달성되고 또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의 공부 목표는 언제나 출세나 명성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선성(善性)을 쌓아 ‘심재’(心齋·심신을 청정하게 가다듬어 비우는 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좋은 성정(性情)은 하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온전히 자기 것인 양 여겨서는 안된다. 좋은 자질은 천하의 공물(公物)이니,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 자질을 더욱 갈고 닦아 마침내 세상을 위해 써야 한다.’
 안연은 그런 생각을 하는 류의 사람이었다.
 선생님, 저는 자기의 선성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 공업을 함부로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공야장’ 25장)
 평소 자신이 소망하는 인간상을 묻는 공자의 질문에 안연이 한 이 간결한 대답이야말로, 안연 자신이 생전에 그려보인 자화상 중 가장 자신의 본모습에 가까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호학(好學)
 안연이 별다른 업적없이 일찍 죽은 것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호평은 공자의 칭찬에만 의거한 과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가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났을지는 모르나, 공자에 대한 존경말고는 공동체를 위해 기여한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나에게까지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생전의 안회를 본 사람이라 하기에 묻습니다만, 그가 묵이식지(默而識之·묵묵히 스스로 깨달아 이해함)한다면서 문일지십(聞一知十·하나를 들어 열을 깨우침)하는 천재인 것은 또 어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설사 그렇더라도 그는 벼슬은커녕, 자기 밥벌이도 제대로 못한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안회는 사회적으로는 부적응자이고, 가장으로서는 무책임했습니다.” 나, 이생이 여행 도중에 이런 오해의 험담을 들을 때면, 나는 선생님이 안연에 대해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를 모르는 사람들의 의혹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나도 한때는 그랬으니까요. 처음 그를 가르칠 때에 그는 내 말을 듣기만 하고, 자기 생각을 잘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 공부를 따라오기에는 뭔가 부족한 젊은이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평소 생활과 공부를 나란히 살펴보니 가르침을 익힘에 한 점 게으름이 없었습니다.(‘자한’ 19장) 게다가 그는 내가 가르치는 바 이상의 이치를 스스로 찾아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배움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 스스로를 속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안회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위정’ 9장)
 또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권면하면서 안회를 염두에 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전하기도 하였다.
 “군자는 모름지기 배부르게 먹는 것과 안락한 거처를 바라지 않는다. 행동은 늘 민첩하게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하며,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학문을 좋아한다고 할 수가 있다.”(君子 食無求飽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학이’ 14장①)
 공자가 죽기 1년 쯤 전에 노나라 임금 애공이 공문의 여러 준재들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의 제자 중에 누가 ‘호학’합니까?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가 ‘호학자’입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으며, 허물을 되풀이 하지 않습니다.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그 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未聞好學者也) -‘옹야’ 2장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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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이때도 선생님이 수많은 제자 중에 죽은 안연만을 오직 ‘호학자’라고 한데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선생님 문하에 크고 작은 제자들이 3천여명, 그 가운데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가 어찌 없을 것인가? 그런데 유독 안연만을 호학했다고 하시는 것은 일찍 죽은 안연에 대한 애닯음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호학’이 지식의 기계적인 습득과 축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의문이 그리 부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는 호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소리높여 외쳤다.
 “공문의 교학에서 지(知)의 학습은 예(禮)의 실행과 더불어 학문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지식은 정신을 함양하는 수단의 하나로, 지가 아무리 넓고 깊어도 그것을 예로써 세우지 못한다면 진정한 학인(學人)이라고 할 수 없지요. 궁극적으로 학문은 천인합덕(天人合德)이라는 도의 체득과 체현에 요구되는 필요조건일뿐 충분 조건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선생님께 전인적인 선비상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도에 뜻을 둔 자, 덕성에 근거하고 인에 의지하는 자, 또한 예술의 경지를 거닐 줄 아는 자.(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술이’ 6장③
 학문은 도에 뜻을 두는 행위의 시작이다. 도란 “아침에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만큼”(朝聞道 夕死可矣-‘이인’편 8장④)의 그런 궁극의 희열이다. 그러므로 공자에게도 도는 현세의 도덕마저 초월하는 진리, 또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었다. 공자가 말한 ‘호학’의 진정한 의미가 여기에 있었기에, 공자가 말년에 이른 경지를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공자가 말한 ‘호학’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공자는 열 다섯에 진정한 학문이 무엇인지를 직관했습니다. 서른 살에는 예로써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지요. 마흔에 이르러서는 불혹(不惑)했다고 하는 바, 지자불혹(知者不惑)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쉰에는 지식과 경험의 총합이 지향해 가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 즉 천명(天命)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순에는 이순이라 하여 천명에 순종한다는 것의 본뜻을 말씀하셨고, 일흔 무렵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마음이 가는대로 하여도 세상의 도를 벗어나지 않는’,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불멸하는 진리의 실재를 통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⑤
 이것이 공자의 일생으로 표현되는 ‘호학’의 과정이요, 목표이다. 그리하여 후대의 유가들에게 ‘배움(學)’은 ‘성인의 도’를 구하는 과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호학’은 학문하는 선비의 존재이유가 되었고, 공자에 의해 그 최초 실천자의 영광이 안연에게 돌아갔다. 훗날의 한 사유(師儒)는 제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호학이란 성인의 도를 배우는 과정이다.”
 “성인이 배워서 될 수 있는 경지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 방법이 궁금합니다.”
 “안연이 성인의 가르침을 잘 실행하였다. 예가 아니면 보지 않고, 예가 아니면 듣지 않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그런 안연을 일컬어 ‘한 가지 선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간직하여 잃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신의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한 번 저지른 실수는 두번 다시 저지르지 않음’을 호학자의 표상으로 높이셨다. 이것이 ‘호학’의 돈독함이요, 배움으로 가는 길이다. 안연은 그것을 이미 알았으니, 밝고 굳센 학인이었다. 그가 살아서 몇 해를 더 ‘호학’하였다면, 아마도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⑥
 후대 사람들은 요절한 안회를 안자(顔子)로 높이고 복성(復聖)이라 추존했다. 복성은 공자의 ‘성인됨’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란 의미였다. 어떤 유가는 ‘복성 안연’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⑦를 지어 불렀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즐거운 것인데,     人心本自樂
 스스로 사사로운 욕망에 묶이고 만다.    自將私欲縛
 사욕이 싹트려고 할 때는               私欲一萌時
 착한 본성(양지)으로 돌아가 자각하라.    良知還自覺
 한번의 자각으로 사욕을 물리치니        一覺便消除
 마음은 본래대로 즐거워진다.            人心依舊樂
 즐거움은 이 배움을 즐거워 하는 것이고,   樂是樂此學
 배움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學是學此樂
 즐겁지 않으면 배우는 것이 아니며,      不樂不是學,
 배우지 않으면 즐겁지 않은 것이다.      不學不是樂.
 즐거운 후에 배우고                   樂便然後學,
 배운 후에 즐겁다.                     學便然後樂.
 즐거움이 배움이고                    樂是學,
 배움은 즐거움이다.                   學是樂.
 오호!                               嗚呼!
 천하의 즐거움이 어찌 이 배움만 하겠으며 天下之樂何如此學
 천하의 배움이 어찌 이 즐거움만 하랴!    天下之學何如此樂!
 
 3. 극기복례
 안연은 공자가 ‘인의 경지에 들었으며, 도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이라고 인정한 유일무이한 제자이다. 공자는 이 젊은 도학자에게 인의 요체를 전수했다. 애인(愛人), 즉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仁)의 외피라면, 남을 사랑하는 인은 무엇으로 작동시키는가? 애기(愛己)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인의 출발이다. 진정한 ‘애기’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이기심을 이기는 것이다.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그 예가 나와 남을 사랑으로 묶어준다. 그것이 인의 한 모습이다.
 이것은 아무나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으므로, 공자는 안연에게 먼저 이 요체를 전수했다. 아마도 공자는 그 무렵 안연만이 진실된 인의 체현이 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회라면 인의 본뜻을 세상에 전파할 수 있으리라…’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顔淵問仁. 子曰)
 나의 욕망을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 (克己復禮爲仁)
 하루동안만이라도 욕망을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올 것이다. (一日 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인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니, 어찌 남에게 있다고 하겠는가?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안연이 그 세목을 듣고 싶다고 청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非禮勿動)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겠나이다.(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안연’ 1장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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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이와 같은 인의 덕목을 다른 제자들은 한결같이 어렵게 여겼다. 공자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배우는 사람의 수준과 처지에 맞게 인을 설명하시되, 하나의 말로는 정의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은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처음부터 실천불가능한 덕목이라면 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안연을 일찌기 그 점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특출한 제자였다.
 인이 멀리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내가 하고자 하면 이르는 것이다! -‘술이’ 29장⑨
 언젠가 내가 이 말씀에 대해 안연에게 해석을 청하자 그는 내게 이렇게 반문했다.
 “그대는 순임금을 아시는가? 순임금은 어떤 분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임금이고 나는 백면서생에 불과하지만,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자 노력한다면 또한 순임금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맹자> ‘등문공 장구 상’)
 사람은 학문으로 그 천성을 갈고 닦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이 스승과 제자의 전수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4. 문명에의 참여
 공자는 안연과 깊은 철학적 대화를 나누기를 즐겨했다. 다른 제자들과는 흔하게 나눈 정치술에 관한 대화도 안연과 더불어서는 어느새 문명을 이룩하는 기술의 하나로서 설파되었다. 어느날 공자가 동문들에게 정치를 강학하는 자리에서 안연이 ‘나라를 위하는 법(위방·爲邦)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라의 책력을 사용하며(行夏之時)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乘殷之輅)
 주나라의 관을 쓰겠다(服周之冕)
 음악은 소무를 기준으로 삼고(樂則韶舞)
 사람은 교묘한 자를 멀리할 것이다.(遠녕人) -‘위령공’ 10장⑩
 
 회야. 너라면 이해할 것이다. 나라를 위함이 무엇인가? 억지로 다스리지 않는 것이다.
 달력은 전쟁하기 좋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농사짓기에 좋은 것을 채택하며,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자들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절제를 생활화하며,
 문화는 고전을 기본으로 삼아 부유한 자들이 퇴폐로 빠지지 않게 하며,
 변칙을 즐겨하는 자와는 더불어 정사를 같이하지 않는다.
 정치를 묻는 안연에게 공자는 정치학이나 경제학의 언어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간의 품성에 대한 성찰에서 그 대답을 구하고 있다. 진정한 정치란 문명의 계승과 발전에 참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란 사실을 이 제자만큼은 통찰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리라.
 공자의 가르침 속에 내재되어 있는 초월적인 종교성과 불멸하는 문명에의 확신은 어쩌면 안연에게만 전수된 것이었다. 그가 불행히도 일찍 죽었기에 그 도는 후세에 전해지지 못했지만 사제간 전수의 의미만큼은 후대에 계승되었다.
 도의 전수는 기예의 전수와 다르며, 진실한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사제간의 전승은 단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 뿐이고, 깊이 연구하여 깨닫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큰 줄기에서는 반드시 서로 뜻이 통해야 비로소 ‘전수’(傳)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師道)를 배반한 것이며 전수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생명에 관한 것은 특수하며, 또한 대체로 공통적이다. 만약 서로 통하면 전후는 서로 찬란히 빛나고 창조는 중복되니 이른바 ‘도는 하나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전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찌 앵무새가 말을 배우는 것처럼 완전히 똑같음과 양적인 과다와 언어의 유사성만을 비교하여 전수의 유무를 논할 수 있겠는가?⑪
 누군가가 물었다.
 “공자는 도통을 이은 안연이 많은 사업을 계승해 주기를 바랬는데, 그만 안연이 일찍 죽는 바람에 그 도가 전해질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믿을 수 있는 말입니까?”
 “공자께서 안연에게 무엇을 분부하였으며, 분부한 내용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내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말 그대로 도가 끊어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또한 내가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모릅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말이 지금까지 사람들 마음 속에 전해지고 있다면 거기에 오히려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각자 노력하여 공자와 안연이 서로 전하고자 했던 바를 스스로 찾아보기 바랍니다.”⑫

 5. 안씨지유(顔氏之儒)
 안연이 죽고 공자께서도 돌아가신 뒤 공문은 8개의 문파로 분열되어 정통성을 다투었다.(<한비자> ‘현학’) 그 중에 ‘안씨의 유’라고 불린 일파가 있었다. 안씨는 노나라의 유가 종족으로, 공자의 유력한 70여 제자 중에서도 단일 성씨로는 6명으로 가장 많았다. 공자의 외가도 안씨였으니, 공자 사후 안씨의 유는 제법 세력있는 유가로 발전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씨지유’가 집단보다는 ‘단독자’ 안연의 ‘구도(求道)’에서 연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이생은 공자의 행적을 좇아 황하와 회수 사이를 여행할 때, 거기서 한 사상을 만난 적이 있었다. 훗날 도가(道家) 또는 노장(老莊)으로 불리게 될 사상집단의 원조들이었는데,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안연의 사색을 닮아 있었다. 나의 여정이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자 사태는 더욱 분명해졌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노래하는 이 평화사상가들은 종종 알 수 없는 우화를 지어 거기에 자신들의 교학을 실어 전파했는데, 기이하게도 공자와 안연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깨달은 자’로서. 비록 당시에는 잘 알 수 없었으나, 그 우화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나는 한 가지 추정에 도달하고 있었다. 안연이야말로 어쩌면 공자의 도가 남방으로 전해지는 다리였다는 것을.
 “안연이 유가와 도가를 잇는 다리라니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꼭 그렇다고 단정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 해두지요. 사상의 계보라는 것이 두부모 자르듯이 딱 갈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그 다리론의 실마리를 공자의 말년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유랑하던 공자께서는 현실에서의 실패를 자인하고 계씨의 보호 아래 귀국하는 굴욕을 감수하셨습니다. 게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제자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셨지요. 그때 공자는 현실 너머의 도를 응시하셨고, 그 구도의 동반자가 안연이었습니다. 어쩌면 안연은 스승인 공자를 제외한다면, 초기 유가 중에서 스스로 도의 문을 열고 들어간 최초의 철학자였을 겁니다. 공자가 안연을 두고 ‘도에 가까왔다’고 하신 것은 결코 허사(虛辭)가 아닙니다.
 “안연의 도는 어떻게 비롯되었을까요?”
 “14년의 망명생활은 공문에게는 고난과 인내의 시간이었지만, 안연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상은 현실을 떠날 수 없지만, 그 현실과 멀리 있을수록 성숙의 시간을 가지는 이치처럼 말이지요. 더욱 그 현실이 생사를 넘나드는 절박함의 연속이라면, 그 사색은 더욱 치열하게 이상을 추구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 이상태의 철학적 건설이야말로 안연의 지성과 체질에 부합했고, 공자는 그런 안연과 더불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더욱 담금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역부족을 말하고, 조금 도를 낮추라며 스승에게 현실과의 타협을 말할 때도, 안연만은 오직 전력을 다해 도를 추구할 것을 스승에게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스승의 인도 속에서 그렇게 조금씩 스승의 분신이 되어갔던 거지요. 그런데 그 행복한 망명의 시간이 끝나버렸습니다. 스승은 굴욕을 받아들였고, 사형사제들은 출세의 단맛에 물들어갔습니다. 이제 누가 있어 교단의 순수성을 사수하겠습니까? 누가 있어 스승의 이데아를 전승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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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나, 이생의 회고를 듣고 있던 누군가가 젖어드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점차 죽음에 다가서는 노년의 공자에게 그런 안회는 등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갑자기 꺼졌습니다. 공자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구도의 빛이 그렇게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겁니다. 미래는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공자가 안연의 부음을 듣고 스스로를 내던지듯 통곡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⑬
 
 6. 안회와 장주
 안연이 죽은 후 그의 도학은 속유(俗儒)와 천유(賤儒)와 부유(腐儒)의 배척과 조롱을 받고 세상을 떠돌다가 마침내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에게서 생명과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중원의 남쪽에 패망한 은나라 후손들이 모여 사는 송나라 몽 땅에 장주(莊周)라는 이름의 하급 관리가 있었다. 그는 종종 공자와 안연을 등장시키는 우화를 짓고 있었다.
 안회가 물었다.
 스승님. 마음을 티끌 하나 없이 씻는 경지가 있습니까? 敢問心齋
 공자가 대답했다.
 너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라. 若一志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无聽之以耳而聽之以心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无聽之以心而聽之以氣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며, 耳止於聽
 마음이란 밖에서 들어온 것에 맞추어 깨달을 뿐이다. 心止於符
 기는 텅 빈 채로 사물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虛而待物者也
 도는 바로 이러한 빈 상태에 모이는 것이다. 唯道集虛
 이것을 마음의 재계라고 한다. 虛者心齋也 - <장자> ‘인간세’ 1장
 
 우화는 공자와 안연을 다시 재회시켜 심재의 대화를 나누게 한다.
 회는 진보했습니다. 回益也
 무엇을 말함이냐? 何謂也
 예악을 잊었습니다. 回忘禮樂矣
 좋구나.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可矣, 猶未也
 인의도 잊었습니다. 回忘仁義矣
 좋구나.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저는 좌망했습니다. 回坐忘矣
 좌망이라? 何謂坐忘
 팔다리도 없고(墜肢體), 총명도 사라지고(黜聰明), 형체를 떠나고 지각도 제거하여(離形去知) 모든 장애와 차별을 넘어 하나로 동화되는 것(同於大通), 이를 일러 좌망이라고 합니다(此謂坐忘).
 하나됨(同)은 좋고싫음의 구별이 없고(同則無好也), 만물과 더불어 변화하는 것(化則無常也). 과연 회는 뛰어나구나(而果其賢乎)! 나도 너의 뒤를 따르고 싶구나.(丘也請從後也)”-<장자> ‘대종사’ 9장
 
 안연이 유가와 도가를 잇는 교량이었다는 생각은 유가들의 언어 속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이처럼 남방의 우화 속에는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안회와 장주는 이미 시공을 넘어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7. 안회를 조상하며
 안연에 대한 회고를 마치면서 나는 죽은 안연의 얼굴에 희미하게 남은 미소의 의미를 떠올리 지 않을 수 없다.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하다는 뜻 같기도 하고, 또는 덧없는 인생의 회한이 묻어있는 듯한 그 복잡한 미소를 나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안연이 죽고 8백여년 뒤에 태어나 그의 삶을 흠모한 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제문⑭을 직접 썼는데, 그것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멀리 추억 속에 묻었던 안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안연의 제문을 읽고 있는 듯 해서이다. 시인 자신도 어쩌면 이승의 빛 저편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안연을 생각하면서 이 제문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침내 다시 안연의 무덤을 찾아가 8백여년 후에 쓰여진 한 유자의 제문을 읽어드리기로 했다. 비록 그는 누항에서 홀로 죽어갔으나 그가 남긴 빛이 과연 어디까지 뻗어가고 있는지를 그에게 기쁘게 ‘보고’ 드리는 심정으로.
 연은 장차 잠시 깃들었던 인생이란 여관을 떠나 
 영원한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노라.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운명이 주어졌으니
 밥소쿠리와 표주박은 자주 비었고,
 거친 베옷 한 벌로 겨울을 지냈노라.
 그러나 마음은 늘 기쁘게 물을 긷고 땔나무를 졌네.
 밤에는 즐겁게 독서하고 또한 음악을 사랑했네.
 뭇 사람들은 한번의 인생을 아까워하여
 살아서는 남의 존경을 기대하고
 죽어서는 남의 그리움 받기를 바라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걸었으니, 
 지금껏 세상사람들과 달랐네.
 살아서 사랑받기를 영광으로 삼지 않았으니,
 혼탁한 세상이 어찌 나를 검게 물들일 수 있었으랴.
 높은 봉분과 울타리가 없어도 해와 달은 뜨고 지는데
 부귀도 명예도 구한 바 없었으니, 죽어서 무슨 찬양을 바랄 것인가. 
 인생은 실로 이루기 어려운 것
 죽은 뒤의 삶은 또 어떠할까?
 아아, 슬프도다.
 
 8. 사족
 시인은 성이 도(陶), 호가 연명(淵明)이며, 이름은 잠(潛)이다. 잠은 그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개명한 이름이다. 안회의 호가 자연(子淵)이고 이름 회(回)가 물이 도는 모양을 상형한 글자임을 생각할 때, 그가 호를 ‘맑은 연못’이란 의미의 연명이라 하고, 이름을 ‘물 속에 잠긴다’는 뜻의 ‘잠’으로 바꾼 것은 어쩌면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여생을 ‘불개기락(不改其樂)’하는 안연의 도에 고요히 침잠하기를 바랐던 때문이리라.
 어느덧 안회처럼 백두(白頭)가 되어 버린 나, 이생은 이제는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한 철인의 무덤에 술을 뿌리며 이렇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학이편 14장
 子曰 君子 食無求飽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음식을 꼭 배부르게 먹기를 바라지 않고, 거처를 꼭 편안하게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일을 할 적엔 민첩하게 하고 말을 할 적엔 신중하게 하며, (의심이 있으면) 도덕이 높은 스승에게 나아가서 그 시비를 물어서 바로잡는다면, 그 사람은 학문(배우고 묻는 일)을 좋아한다고 일컬을 수가 있겠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군자는 먹어도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 (또) 맡은 일은 민첩하되 말은 삼가며, 도 있는 이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잡는다. (이렇다면) 호학이라 이를 만할 터!
 L-The Master said, “He who aims to be a man of complete virtue in his food does not seek to gratify his appetite, nor in his dwelling place does he seek the appliances of ease; he is earnest in what he is doing, and careful in his speech; he frequents the company of men of principle that he may be rectified:-- such a person may be said indeed to love to learn.”
 ② 옹야편 2장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애공문 제자숙위호학 공자대왈 유안회자호학 불천노 불이과 불행단명사의 금야즉망 미문호학자야)
 이-애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제자 중에서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란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허물을 두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수명이 짧아 죽었으므로 지금은 (안회 같은 제자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배-애공이 물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호학한가? 공자, 받잡고 아뢰었다. 안회라는 녀석이 ‘호학’하였습니다. 노여움을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거듭하지 않았지요. 불행히 명이 짧아 죽고 난 다음에는, 없습니다. ‘호학’하는 자에 관해 듣지 못했습니다. 
 L-The Duke Ai asked which of the disciples loved to learn. Confucius replied to him, “There was Yen Hui; HE loved to learn. He did not transfer his anger; he did not repeat a fault. Unfortunately, his appointed time was short and he died; and now there is not such another. I have not yet heard of any one who loves to learn as he did.”
 ③ 술이편 6장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자왈 지어도 거어덕 의어인 유어예)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도에 뜻을 두며,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며, 예술에 적성을 찾는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기대며, 예에 노닐리라.
 L-The Master said, “Let the will be set on the path of duty, let every attainment in what is good be firmly grasped, let perfect virtue be accorded with, let relaxation and enjoyment be found in the polite arts.”
 ④ 이인편 8장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자왈 조문도 석가사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아침에 정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만족하겠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니.
 L-The Master said, “If a man in the morning hear the right way, he may die in the evening without regret.”
 ⑤ 풍우란, <중국철학소사>
 ⑥ 정이천, <근사록> 제2권
 ⑦ 왕간, <낙학가(樂學歌)>. 채인후의 <공자의 철학>에서 재인용.
 ⑧ 안연편 1장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안연문인 자왈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안연왈 청문기목. 자왈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 안연왈 회수불민 청사사어의)
  이-안연이 인에 대해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자기의 사욕을 이겨내고 예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자기의 사욕을 이겨내고 예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실행하는 일이 자기 몸에 달려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달려있겠는가.” 안연이 그 조목에 대하여 다시 물으니,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예절에 어긋나면 보지도 말아야 하며, 예절에 어긋나면 듣지도 말아야 하며, 예절에 어긋나면 말하지도 말아야 하며, 예절에 어긋나면 행동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안연이 말하였다. “제가 비록 자질이 명민하지 못하나 이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배-안연이 인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극기복례하면 ‘인’이 되는 게지. 어느 날 문득 저를 이겨 예로 돌아오면, 온 천하가 ‘인’으로 귀의할 것이니, ‘인’이 저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느냐? 안연이 말하였다. 청컨대 그 세목을 여쭙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질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질 말아라. 안연이 말하였다. 제가 비록 명민하진 못하나, 청컨대 이 말씀을 일삼고자 합니다.
 L-Yen Yuan asked about perfect virtue. The Master said, “To subdue one’s self and return to propriety, is perfect virtue. If a man can for one day subdue himself and return to propriety, all under heaven will ascribe perfect virtue to him. Is the practice of perfect virtue from a man himself, or is it from others?” Yen Yuan said, “I beg to ask the steps of that process.” The Master replied, “Look not at what is contrary to propriety; listen not to what is contrary to propriety; speak not what is contrary to propriety; make no movement which is contrary to propriety.” Yen Yuan then said, “Though I am deficient in intelligence and vigour, I will make it my business to practise this lesson.”
 ⑨ 술이편 29장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자왈 인원호재 아욕인 사인지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인이 먼 곳에 있겠는가. 내가 인을 찾으려고 한다면, 인은 곧 이르게 될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인’이 먼 데 있더냐? 내가 ‘인’을 하고자 하면 거기에 ‘인’이 깃들이는 것을.
 L-The Master said, “Is virtue a thing remote? I wish to be virtuous, and lo! virtue is at hand.”
 ⑩ 위령공편 10장
 顔淵問爲邦 子曰 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녕人 鄭聲 淫 녕人 殆(안연문위방 자왈 행하지시 승은지락 복주지면 악즉소무 방정성 원녕인 정성 음 녕인 태)
 이-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음악은 순제의 소와 무를 연주할 것이며, 정나라의 음악은 추방하고 영인을 멀리해야 할 것이니, 정나라의 음악은 음탕하고, 영인은 위태롭기 때문이다.”
 배-안연이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하나라의 책력을 사용하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의복을 입고, 음악은 소와 무를 쓸 일이다. (반면) 정나라 노래는 내치고, 간사한 사람은 멀리할 일이다. 정나라 노래는 음탕하고, 간사한 사람은 위태롭나니.
 L- Yen Yuan asked how the government of a country should be administered. The Master said, “Follow the seasons of Hsia, ride in the state carriage of Yin, wear the ceremonial cap of Chau, let the music be the Shao with its pantomimes. Banish the songs of Chang, and keep far from specious talkers. The songs of Chang are licentious; specious talkers are dangerous.”
 ⑪ 모종삼, <심체와 성체> 중에서. 채인후의 <공자의 철학>에서 재인용.
 ⑫ 채인후, <공자의 철학>
 ⑬ 시라카와 시즈카, <공자전>에서 인용 후 각색.
 ⑭ 도연명의 자제문(自祭文)에서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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