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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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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밝혀 요망진 솜씨로 수백 가닥 한 올 한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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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순자 중요무형문화재 갓일장

 q3.jpg» 생활력이 강한 제주의 여인들은 낮에 물질과 농사일을 하고, 밤엔 말총을 엮어 갓의 머리 부분인 총모자를 만들었다. 강순자 갓일장이 총모자를 만들고 있다.


 물질·호미질 마친 제주여인들
 밤이면 동네 일청에 모여
  
 가늘디가는 말총 엮어 
 매미날개처럼 보일 듯 말 듯 
    
 도중에 한올이라도 끊어지면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전수받은 친정어머니 스승은
 인간문화재 1호 장인 
  
 며느리와 딸이 뒤이어
 삶의 애환이 씨줄-날줄로


흰색 도포에 검은 갓은 흑백의 품위있는 조화를 이루며, 한때 우리민족의 상징이었다. 갓은 쓴 것 같지도 않게 가볍고, 섬세하게 짜인 차양 위에 내리쬐는 햇살은 얼굴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워 은근한 멋을 풍긴다. 보일 듯 말 듯 투명한 갓은 매미 날개보다 더 얇고 섬세하게 짤 수 있는 전통의 말총 직조술이 있어서 가능했다.
 구한말 단발령 이전에 이 땅의 성인 남자들은 도포에 갓을 갖춰야 문밖 출입이 가능했다. 갓이 워낙 비싸 한번 구입하면 낡았다고 해서 쉽게 교체할 수도 없었다. ‘갓 쓰고 망신당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갓은 인격과 기품의 상징이었다. 방을 나설 때 착용해 외출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비로소 벗었다. 세월의 때를 머금어 구멍 나고 해져도 수리해 쓰는 것이 관습이었다. 권문세도가는 옥이나 호박 장식을 한 화려한 갓을 쓰고 멋을 부렸고, 가난한 민초들은 해진 갓을 소중히 평생 곁에 두고 살았다. 

q1.jpg» 말총은 여러 가닥을 엮어 사용한다. 강순자 장인이 섬세한 손놀림으로 말총을 다루고 있다. 강 장인이 만든 총모자는 마치 기계로 짠 듯 세밀하고 정교하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갓은 제주에서 만들었다.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제주 방언으로 ‘요망진’(손재주가 좋은) 여인네들이 낮에는 바다에서 숨을 참으며 물질을 하고, 돌이 많은 밭에서 호미질을 해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에는 동네 일청(모여서 하는 작업장)에 모여 호롱불빛 아래서 새벽까지 말꼬리털(말총)을 결었다. 말꼬리털을 꼬아 엮어가며 갓의 머리 부분인 총모자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꼬리 10가닥 가운데 총모자 작업에 쓸 수 있는 것은 2~3가닥뿐이다. 한가닥 한가닥을 집어 올려 팽팽하게 당겨서 강도를 느낀다. 도중에 한올이라도 끊어지면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한다. 그러니 말총 한가닥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중요무형문화재 4호 갓일장 강순자(69) 장인은 어릴 때부터 말총에 익숙했다. 동네 주민의 80%가 말꼬리털을 엮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갓을 만들어야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강 장인의 친정어머니(김인·1920~2015)는 이 분야 인간문화재였다. 어머니는 갓일장 인간문화재 1호였던 오송죽 장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았다. 5남2녀의 남매 가운데 네번째로 태어난 강 장인은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중학교 진학을 못 했다. 공부하고 싶어서 떼를 쓰곤 했지만, 일찍 돈벌이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미용 기술을 배웠다. 물질도 싫었고, 말총과 밤을 지내기도 싫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막내 아이를 낳은 서른한살 때에야 비로소 어머니 뒤를 잇기로 결심했다. 자녀 가운데 가장 꼼꼼한 성격의 강 장인을 어머니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서 끈질기게 설득했기 때문이다.

q2.jpg

 “어머니는 7살부터 할머니에게 말총 엮는 일을 배웠다고 말씀하셨어요.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작업대의 높이가 아이들에겐 안 맞아 방석까지 깔아 높였어요. 힘들어하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누구든지 인내심만 있으면 이 일을 할 수 있단다. 힘들어도 참아라. 제주에선 부지런하기만 하면 돈은 벌 수 있단다.’”
 하지만 일은 너무 힘들었다. 고르고 고른 말총 8줄을 반으로 접어 16가닥을 한 묶음으로 만든다. 4묶음을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엮어 총모자 모양을 한 나무로 만든 작업대인 일골에 압정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갓의 꼭대기 부분(천박)부터 겯기 시작한다. 섬세하고도 정밀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농대(바늘대)를 사용하며 끊임없이 계속해야 한다. 언뜻 단순한 작업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무릎과 어깨에 심한 고통이 따른다. 인내력에다가 고도의 집중력, 그리고 고강도 노동이다.
 모자 윗부분엔 80줄이었던 날줄이 완성 때는 400줄로 늘어난다. 옆면을 겯는 몸줄도 200줄 가까이 된다. 촘촘할수록 상품이다. 재료가 가늘고 약하다 보니 잠깐 한눈판 사이에 지금껏 해온 작업이 수포로 돌아간다. 
 “작업을 오래 하다 보면 눈과 허리가 많이 아프고, 망막이 찢어진 분들도 있어요.”
 텔레비전의 사극에 나오는 갓은 대부분 모조품이지만, 국악인이나 무속인들은 아직도 제주에서 만든 진품 갓을 쓰는 일들이 많다. “제주산 말의 말총은 거칠고 짧아요. 수입한 말총은 부드럽고 길어요. 그래서 쓰는 재료의 반은 수입한 말총을 씁니다.”  
 이제는 눈도 흐려지고, 오금이 자주 저려 한달에 2개 이상의 총모자를 만들기가 어렵다. 다행히 며느리(강병희·44)와 딸(양윤희·40)이 강 장인의 일을 잇고 있다. ‘제주 딸’의 피가 꾸준히 흐른다.
 제주/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갓일장이란
 총모자·양태·입자 3분야 별도로
 신분과 관직 나타내는 상징으로

갓을 만드는 갓일은 컵을 뒤집어 놓은 형태의 갓모자 부분을 말꼬리털(말총)로 만드는 총모자와 대나무를 잘게 쪼개 얽어서 햇빛 가리개를 만드는 양태, 그리고 이 둘을 조립하는 입자로 나뉜다. 세 분야는 재료와 제조공정이 달라 별도 작업을 거쳐 갓이 만들어진다. 전통적으로 제주에서 총모자와 양태를 만들면 통영이나 거제의 입자장이 이를 하나의 갓으로 완성시켰다. 1964년 공예 분야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됐고, 세 분야 장인을 합쳐 갓일장으로 부른다.
 갓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나고, 문헌상으로는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돼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양식미를 갖춘 공예품으로 발전했고, 사대부의 신분을 상징하는 의관으로 자리잡았다. 
 갓은 상투 튼 머리에 망건과 탕건을 쓰고 그 위에 쓰는데, 외출 때나 의례행사 등 의관을 갖추어야 할 때 사용되었다. 갓은 흑칠이 본색이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그 색을 달리하였다. 붉은 옻칠을 한 주립은 무관 당상관이 왕의 행차를 수행할 때 착용하였고, 백립은 상복에 착용했다.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해 의관제도에 귀천의 차별이 사라졌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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