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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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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23단’ 비구니 스님, 재난 현장이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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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재난구호안전봉사회 차린 현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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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우슈 검도 킥복싱 등 무술 섭렵
20대 땐 종로 뒷골목 맞짱 고수
 
30대엔 ‘타이거 문’ 애칭 아이돌
인기 배우, 스턴트 우먼, 표지 모델…

한 순간 연예인 인기 무의미 느껴
34살에 단박에 머리 깎고 출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
‘세월호’ 때 팽목항 45일간 함께
 
노숙자와 독거노인 찾아
월동 준비 등 작은 봉사부터



그는 한때 종로 뒷거리 맞짱 뜨기의 고수였다. 빠른 몸놀림과 정확한 주먹으로 그는 자신과 붙은 상대를 단 일합에 제압하곤 했다. 쓰러진 상대는 결코 자신을 보내버린 주먹의 소유자가 여자인줄 몰랐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가죽장갑을 끼고,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그를 여자로 생각하긴 어려웠다. “만약 제가 여자인 것을 알면 상대는 결코 지려고 하지 않고 끈질기게 대들었어요. 나름대로 주먹을 쓴다고 하던 노는 아이들이었는데 여자와 맞짱 떠 진다는 것은 대단한 부끄럼이었겠죠. 그래서 가능한 한방에 끝내고 자리를 떴어요. 그것이 상대 주먹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어요.”
 비구니 현해(54·)스님의 20대 초반 이야기이다. 호랑이띠인 그는 ‘타이거문(달빛 호랑이)’이라는 애칭으로 30대 초반엔 ‘아이돌’로 활약했다. 당시 인기 배우이자, 스턴트 우먼이었다. 대부분 여성 주간지와 월간지는 그를 표지모델로 모시기 바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속세를 떠났다. 모든 것이 무상했을까?
 그는 충남 당진의 평범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오빠가 8명이 있었고, 유일한 딸인 그는 귀여움 받고 자란 막내였다. 오빠들 중엔 운동선수가 많았다. 마라톤과 권투 선수 출신도 있었고, 경찰도 있었다. 그러니 그는 선머슴으로 자랐다. 공부보다는 운동이, 그 가운데에서도 몸과 몸을 부딪치는 격투기가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육상선수였다. 중학교 들어가선 온갖 무술을 배웠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그는 이미 어떤 남자와 겨루어도 밀리지 않는 무술의 고수가 됐다. 태권도, 우슈, 격투기, 검도 등. 킥복싱은 동양챔피언이 되어 15차 방어전까지 치렀다. 암벽타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여성무술시범단 ‘영웅여걸’의 핵심으로 활약했고, 국내 스턴트 우먼 1세대였다.
 긴 칼과 짧은 칼 두 개를 허리에 찬 그는 명함을 공중에 손으로 튕겨 날린 뒤, 칼을 전광석화처럼 뽑아들어 허공에 있는 명함을 반쪽 내 다시 손으로 반쪽 난 명함을 받아내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때 각종 무술 단수를 합치니 23단이었다. 태권도 4단, 우슈 5단, 킥복싱 5단, 거합도 5단 등등. 세계적인 영화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왔고, 국내 대기업에서 광고 모델 제의도 왔다. 영화 주인공으로 발탁돼 촬영하기도 했다. 격투기엔 대적할 여자선수가 없어서 남자 선수와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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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 연예인의 화려함이나, 인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속세를 떠났어요.”  34살이 되던 1995년 뒤늦게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큰 스님이 출가를 권했고, 그는 망설임 없이 머리를 깎았다. ‘어진 바다’라는 뜻의 법명 ‘현해(賢海)’를 얻고, 직지사에서 사미니계를 받았다. 
 수행의 길은 어려웠다. “많이 답답했어요. 불경을 외우는 것도 힘들고 엄한 규율을 따르기도 쉽지 않았어요. 나를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하심(下心)을 갖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어요.” 스님이 되고 나서도 타고난 끼와 운동에 대한 열정은 누를 수는 없었다.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로 포교활동을 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는 45일간 팽목항 현장에서 유가족을 위해 봉사를 했다. 봉사는 그의 수행이자 포교활동이었다. “선방을 나와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뒤늦게 출가해서 큰스님들처럼 되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재난 현장에 법당을 차리고 자비 공덕을 베풀자는 결심을 했어요.”
  경비행기 조종 자격증도 땄다. “경비행기를 몰고 일본과 중국을 거쳐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까지 가보는 게 목표였어요.”
 이제는 체계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재난구호단체를 설립했다. “대만의 비구니 스님이 창설한 봉사단체 ‘자비공덕회’를 보고 재난 현장에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단체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난해 숭실사이버대학 소방방재학과에 입학했다. 전문성을 갖추고 싶었다. 지난달에는 국민안전처로부터 사단법인 ‘대한재난구호안전봉사회’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다음달 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출범식을 갖는다. “작은 봉사부터 시작해야겠죠. 노숙자와 독거노인을 찾아가 월동 준비를 도와주고 목욕 봉사를 할 것입니다. 분야별 전문가를 초빙해 봉사자를 재난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도 갖추려고 합니다.”
 현해 스님의 법당은 따로 없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입니다. 재난 현장이나 저의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는 제 차가 바로 법당입니다.”
 소속된 법당이 없으니 자유롭다. 요즘은 구호단체 설립을 마무리하느라 서울 도심에서 거처한다. 아침이면 청계천 주변을 달린다. 비록 젊을 때의 날렵한 몸은 아니지만 강한 무공의 깊은 내공이 짙게 풍긴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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