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남편이 장학금도 교수자리도 교회도 늘 뺏기고 쫓겨나고 하는데...
일산 정발산성당에서 일산 시민들을 위해 열린 즉문즉설 강연입니다. 어떻게 성당이 스님의 강연장소가 된 것일까요? 과거 일산 부근에 있는 화정 성당에서 성당 측 주최로 스님의 즉문즉설을 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이번에 이 성당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중의 열띤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오른 스님의 뒤편엔 커다란 십자가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시금 장소를 제공해준 성당 쪽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사실 처음 천주교가 이 땅에 전파될 때 절에서 장소를 제공한 일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도 함께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스님이 성당에서 강의하는 게 빚진 게 아닌 까닭
“오늘 우리가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장소로 성당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신 신부님과 여기 성당에 나오시는 형제자매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작년에 전 세계 115개 도시를 115일간 다니면서 강의를 할 때 미국과 중남미에서는 성당에서 제일 많이 강의를 했습니다. 거기는 따로 공공장소가 없어서 주로 성당을 많이 이용했어요.
그때 제가 ‘성당을 빌려서 강의를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빚진 건 아닙니다’ 하고 농담을 했어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올 때 탄압을 피해 산속 암자에 가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첫 전래지가 천진암입니다. 천주교가 탄압받을 때 불교인들도 장소 제공자라 해서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스님이 성당을 좀 사용해도 큰 빚이 아니라고 농담하고 웃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성당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오늘은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특정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 이야기를 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이런저런 인생의 애환이나 인생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해보는 시간이에요.”
쓰레기가 곧 거름이고 번뇌가 곧 깨달음
이어서 스님은 쓰레기가 곧 거름이라고 하면서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즉문즉설의 취지를 알려주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쓰레기라고 하면 버려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쓰레기가 곧 거름입니다. 거름은 가장 요긴한 것이고 쓰레기는 가장 쓸모없는 것인데, 쓰레기가 곧 거름이에요. 그것을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해요. ‘번뇌’는 ‘고뇌’를 뜻합니다. ‘보리’는 인도 말 ‘보디(bodhi)’에서 왔는데 ‘깨달음’이란 뜻이에요. 번뇌가 곧 깨달음이다, 쓰레기가 곧 거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똥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져요. 오물이라고 보면 갖다 버려야 하고, 거름이라고 보면 주워 와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이웃집에 가서 놀다가도 똥오줌이 마려우면 자기 집에 가서 누고 왔어요. 거름이기 때문입니다. (웃음) 오늘 대화에서 쓰레기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나와도 그걸 잘 살펴보면 쓰레기가 아니라 거름입니다. 자,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유학 장학생 뽑혔는데 선발자가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귀국해 교수 후보에 1등이었는데 인맥에 밀리고시골 교회 5년째 일궜는데 장로·권사가 내쫓고시어머니는 악담을 퍼붓고 화풀이하고너무 힘들어 가끔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목사님을 남편으로 둔 아내가 고민을 털어놨습니다.“지혜롭고 자애로우신 스님께 여쭐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모두 큰 웃음)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남편에게 길이 열리지 않고 악한 일을 겪으니 괴롭습니다. 남편은 개신교 목사님인데 국내에서 석사를 마치고 세계 유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형제 많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남편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모 단체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결국은 장학금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발자가 자기 지인으로 장학금 수여자를 변경해서 가로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실망이 컸지만 꿈이 있었기에 열심히 했습니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 돌아와 연구하며 강사 생활을 하다가 교수로 임용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연구 실적이나 심사기준에서 1등이었던 남편이 아니라 2등인 사람이 인맥을 내세워 임용되었습니다. 많이 울고 절망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 곳에 있으리라 믿고 견뎠습니다.그러다가 어떤 교회에 초빙이 되어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제 남편 전에 여러 명의 목사님을 핍박해서 내쫓은 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교회 역사가 그렇다보니 성도님들이 다 떠나버리고 시골의 집성촌처럼 한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소수만 남아 있었고, 개중 대부분이 장로님과 권사님들이었습니다. 남편은 6년 동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사랑으로 성도들을 보살피고 교회 재건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5년째 되던 해부터 1년 동안 핍박과 조롱과 멸시와 인격모독을 비롯한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혀 결국 남편은 올해 3월에 사임했습니다. 용서하자 마음먹다가도 장로며 교회가 어찌 이리 악할 수 있나 싶어 참담하고 억울합니다.(질문자 울먹임)이런 나날이 2년 정도 계속되다 보니 마음도 몸도 많이 상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기도해야 남편의 길이 열릴까요? 어떻게 해야 늘 최선을 다하지만 빼앗기기만 하는 남편한테 하나님께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지도자로서의 길을 열어주실까요?더불어 여쭙고 싶은 한 가지는 가족과의 관계입니다. 시어머니는 삶이 힘들다 보니 제게 악담을 퍼붓거나 화풀이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동안은 이해하고 살았는데 우리 부부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 나니 부모 형제가 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 서운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부끄럽게도 가끔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제가 너무 가치 없는 존재로 느껴집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지 세상의 길을 따를지 선택
“이분을 위해 큰 격려의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청중 박수)
“이건 어떤 인생의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것인지, 세상의 길을 따를 것인지를 먼저 선택하셔야 해요. 관점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때문에 지금 혼란스럽지 않나 싶거든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세상의 길을 따른다는 관점에서 보면 굉장한 고난을 겪고 있지요.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문제인데, 질문자는 지금 세상의 길이라는 관점을 갖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되고,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느라 원망도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질문자의 신앙은 그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돌봐주기를 바라는, 즉 나를 중심으로 놓고 하나님의 복을 비는 신앙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까지도 원망스럽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목사의 길을 갈 때는 세속의 이익이나 명예나 직위를 추구하는 길을 간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 즉 고난의 길을 선택한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이 길은 축복받은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생각하니까 혼란스러운 거예요.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신 분이잖아요. 한번도 사회 기득권층으로부터 예수님이 인정받거나 환영받은 적이 없고, 마지막에는 혹세무민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형 언도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교회를 다녀서, 크리스마스 연극을 할 때마다 동방박사 역을 했습니다.(청중 웃음) 아기 인형을 구유에 뉘어 놓고 ‘동방 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 이렇게 노래부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렇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와서 가장 높은 지위로 올라가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평생을 고난의 길만 걸으셨어요. 한 번도 환영받는 길을 걸은 적이 없어요.
고문 당하다가 비로소 눈에 뜨인 말,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제가 1980년대에 고문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무턱대고 잡아가서 ‘네 죄를 네가 알렷다‘ 하고 때리다가 물고문도 했어요. 영문도 모른 채 고문당하는 게 너무너무 억울해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제 손에 총이 있었으면 그 사람들을 다 쏴 버렸을 겁니다. 저는 그때 나를 봤어요. 그 사람들은 말로는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도 나를 때리고 고문할 뿐이지 실제로 죽이려고는 안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로 다 죽여 버리려 했거든요. 총이 없어서 못 쐈을 뿐이죠. 그때 그런 나를 보고 제가 굉장히 놀랐습니다. ’내가 엄청나게 독한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됐어요.
전에는 성경을 늘 읽어도 눈에 안 띄었는데, 그런 자기 모습을 본 뒤 성경을 읽었을 때 제일 눈에 띄는 말이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였습니다. 저는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말이었어요. 기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무릎을 꿇었을 정도로 예수님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사람의 몸을 가진 분이 한 말씀이지만 사람으로서는 그런 마음을 낼 수가 없어요. 저는 평소에 도인인 척 살다가 당해보니까 악심이 마구 솟구치는데, 맞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신성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고문당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어요. 그렇게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중에는 저를 고문하는 세 명의 장정이 악마 같은 사람들로 보였어요.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은 둘이었지만 저를 고문한 사람은 셋이었습니다.(청중 웃음) 그런데 고문하다가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요. 저를 위해서 쉬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힘들어서 쉬면서 담배도 피우고 잡담을 나눕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11월 15일, 예비고사일이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수능시험날이죠. 제가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고 있는데, 옆에서 자기들끼리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한 명이 동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야, 오늘 우리 딸이 시험을 잘 쳐야 할 텐데. 잘못 쳐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못 가고 지방대에 가면 내 박봉에 그걸 어떻게 뒷바라지하겠어? 그래도 서울 시내 대학에는 붙어야 어떻게 공부를 시키지 않겠냐.’
고문자도 평범한 아빠, ‘저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그때 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악마인 줄 알았더니 악마가 아니고 그냥 우리 주위에 있는 애들 아빠인 거예요. 아까 저한테 그렇게 악독하게 굴던 사람들이 앉아서 담배 피우면서 하는 이야기가 딸 걱정인 거예요. 퇴근하고 집에 가면 저 사람도 한 아이의 사랑하는 아버지, 한 여인의 사랑하는 남편, 한 노인의 사랑하는 아들일 겁니다. 고문실을 나가서 사무실에 앉으면 착실한 직장인이고요.
그때 제 속에 있던 분노와 증오심이 확 녹아내렸어요. 제가 그 경험을 안 했다면 아마 고문당한 경험이 굉장한 상처가 되어서 ‘이놈의 자식들, 나가기만 해봐라. 다 죽여버린다’ 이러거나 나중에 민주화가 된 뒤에 그 명단을 찾아서 처벌하려 들었을 거예요. 수행자가 증오심을 갖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경험을 통해서 제가 증오심을 내려놓게 됐어요.
이 경험을 하고 나니 그 전에는 아무리 읽어도 안 보이던 성경 구절이, 그리고 그 뒤 구절이 눈에 딱 들어왔어요. 예수님 말씀을 보면 그 뒤 구절이 ‘저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입니다. 고문당하는 제게는 죽일 놈들이지만, 그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공무 집행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요즘 말로 하면 교도관들입니다. 사형 선고를 내렸으니 그 사람들이 집행을 하는데, 그 당시 사형 집행 방식이 교수형도 아니고 총살형도 아니고 십자가형이었어요. 거기 매달아뒀다가 죽으면 내리고 다시 새로운 사형수를 매다는 일을 어부가 물고기를 잡듯이 매일 출근해서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신 겁니다. 그러니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이런 말이 가능한 거예요. 저도 그 악심이 내려 놓아진 것은 용서해 주고 싶어서 혹은 용서를 하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이해를 했기 때문이었어요. 딸 입학시험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냥 평범한 시민이었구나. 나에게는 악마 같지만 자기들은 전혀 모르고 그냥 공무 집행하는 중이구나’하고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미움도, 전생의 죄도, 사주팔자도 아닌...
남편이 그리스도의 길을 간다면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미움도 아니고 불교로 말하면 전생의 죄도 아니고, 또 사주팔자 탓도 아닙니다. 이 길을 선택하면 이렇게 가는 거예요. 이때 이런 고난을 딛고 가지 않고 대형 교회의 목사님처럼 환영받고 간다면 예수님께서 채찍으로 쫓아낸 유대의 랍비나 율법주의 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볼 때는 남편은 지극히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어요.
그러니 질문자가 ‘내 남편’이라는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분’으로 바라보도록 관점을 좀 바꿔야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관점을 바꿔버리면 아무것도 문제가 안 돼요. 시어머니도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로 보지 않고 아들로 보니까 그래요. 섭섭하니까 ‘우리 아들은 원래 똑똑하고 착했는데 며느리 때문에 그리 되었다. 네가 들어와서 이 모양이 됐다’ 이렇게 생각해서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아내인 나도 남편의 삶 때문에 이렇게 힘든데 자기 아들이 그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실지 이해해 드려야 합니다. 내 힘듦을 어머니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말고요. 남편이 겪는 어려움을 아내가 보는 것보다는 아들이 겪는 어려움을 어미가 보는 게 훨씬 더 힘듭니다. 질문자도 자식이 있으니 알 거예요. 그러니 ‘아이고, 나도 이런데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실까?’ 하고 어머니를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주세요’는 잘못된 기도,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부처님이나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방식이 조금 잘못되었어요.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비는 걸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은혜를 입었다’고 하고 안 해주면 ‘기도해봐야 소용 없더라. 믿어봐야 소용 없더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신앙을 자기가 부정하는 게 됩니다.
‘이렇게 해주세요’ 라는 말은 굉장히 정중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명령입니다.(청중 웃음) ‘내가 이게 필요하니 가져와라. 안 가져오면 안 믿을 테다’ 이런 뜻이거든요. 이건 신앙이 아니에요. 그분은 나보다 훨씬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래서 전지(全知)하신 그분께서 다 아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그분께서 다 아셔서 이게 나한테 좋다면 그쪽으로 인도하실 거예요. 시험에 합격하는 게 나한테 좋다면 합격하는 쪽으로 인도하실 테고, 합격하는 게 당장은 좋아 보여도 사실은 안 좋다면 또 합격하지 않는 쪽으로 인도하실 거예요. 그건 그분한테 맡겨야 해요. 이것을 뜻하는 신앙고백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항상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 기도만 해야 합니다. ‘해주세요’라는 기도는 해주면 고맙고 안 해주면 미운 거예요. ‘주님,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를 하면 이미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둘에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은총이 항상 나와 함께하기 때문에, 주어진 이 길은 모두 주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자연히 물 흐르듯이 좋은 길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관점을 잘못 잡아서 세속의 관점에서 보다 보니까 힘이 들어요. 물론 사연을 들으면 절절히 이해가 됩니다.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건너왔고, 건너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쪽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길을 아주 순조로이 잘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몇 년이나 일한 사람을 쫓아냈다고 하지만 그래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아니잖아요.” (청중 웃음)
“그렇죠.”
“십자가에 못 박아도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하는데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쯤이야 어때요. 게다가 별로 좋지도 않은 교회라면서요.(청중 웃음) 좋지 않다고 해서 내가 나와버리면 사랑이 아니라 분별이에요. 그런데 자기들이 싫다고 가라고 했으니 내 잘못은 없어요. 그러니 그것은 주님께서 오히려 길을 열어주신 거예요. 내가 못 견뎌서 나오면 내 공부가 덜 된 것이지만 그쪽에서 나가라고 하니 아주 잘 된 겁니다. 생각을 이렇게 좀 바꾸시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 말씀드리고 이제 질문자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봅시다.”
나도 아내가 있다면 이러고 돌아다니는 것에 잔소리 안 할까요?
“남편은 제게 스님이 해주신 말씀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 십자가를 거부하고는 살 수가 없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은 그런 게 아니다. 이 길도 십자가의 길인데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는 건 신앙인의 양심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오늘 스님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그런 관점으로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은 남편이 저를 가장 불편해하는 것 같아요. 본인은 본인의 신앙 고백대로 양심적으로 그 길을 갔는데, 저는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학식이 너무 아깝다고 여겼거든요.” (질문자 한숨)
“그 재능이 속인으로서는 아까운 게 맞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게 만약 부인이 있어서 이러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잔소리를 할까요? 안 할까요?(청중 웃음)
대기업이든 관공서든 요청받아서 강의를 해주면 200만~300만원씩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강의를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저는 강의료를 안 받아요. 초청 강의는 안 가고 무료 강의만 합니다. 그런데 마누라가 있으면 잔소리하겠죠. ‘왜 그렇게 밤잠도 못 자고 종일 차로 돌아다니면서 자기 몸을 혹사하고, 준다는 돈도 안 받느냐?’(청중 웃음)
맞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원래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절을 짓는 거야 원하는 신도들이 알아서 짓는 것이지만, 수행자 개인이 받을 수 있는 것은 입는 옷과 먹는 음식과 아플 때 쓰는 약과 잘 때 바닥에 까는 자리뿐입니다. 다른 건 못 받게 되어 있어요. 물론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좀 달라지긴 했지만요. 그러니 그걸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른 거예요.
부모의 야단이나 주변의 유혹에 넘어가면 이 길을 못 갑니다. 어머니가 ‘네가 꼭 내 죽는 꼴을 봐야 되겠냐’ 이러다가 설령 정말로 돌아가신다 해도, 이 길을 가려면 ‘네. 어머니는 성인이시니까 어머니 알아서 하십시오. 장례는 치러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해요. 제가 지금 웃고 있지만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길을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질문자의 남편인 목사님은 한 가지 잘못한 게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의 길을 가려면 혼자 가지, 왜 이렇게 예쁜 여성을 데려다가 고생을 시켜요? 두 가지 길을 다 가려니까 그분도 힘든 거예요.” (청중 웃음)
“그런 것 같습니다.”
부처님 아내도 출가해버렸는데, 그냥 확 목사가 돼버리세요
“그래도 이왕 갔으니까, 이제 질문자가 ‘남편’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려야 돼요. 자꾸 ‘남편’을 내세우면 죽을 때까지 이 번뇌가 끝이 안 나요. 부처님은 결혼해도 부인을 버리고 갔다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부인이 출가해서 비구니가 됐어요. 질문자도 그냥 목사가 돼버리세요.(청중 박장대소)
그렇게 관점을 딱 바꿔주는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같이 사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세요. 그리고 신부님이나 스님들처럼 그냥 자기 길 가도록 항상 응원해주세요. 아무 관계 없는 신자들도 응원해주는데 하물며 함께 사는 아내가 응원해주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아이고, 저렇게 좋은 재능을 썩히니 아깝다. 제대로 하면 총장도, 교수도, 유명한 목사도 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 하면 안돼요. 그런 재능을 다 버리고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길이 막혔다고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들어보니 질문자의 남편은 굉장히 훌륭한 분입니다. (청중 박수)
아내로서는 좀 맘에 안 드는 게 이해는 됩니다. 안타까운 것도 이해는 돼요.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길로 잘 가는 길이에요. 한방에서 자는 사이면 목사님이 하는 이야기도 남편 이야기로 들리지 목사님 이야기로 안 들려요. 질문자가 자꾸 남편으로 보고 이야기를 하면 질문자도 힘들고 남편도 힘드니까 그냥 목사님으로 보세요.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잖아요.
저는 그런 목사님을 눈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던데요. 그러니 좋은 목사님을 존경하는 자세로 뒷바라지해주세요. 그렇다고 뭐 재물 같은 것으로 뒷바라지하려 생각하면 안 돼요. 고난을 묵묵히 감내함으로 해서 영성이 더 성숙하는 쪽으로 가도록 도와드리세요. 그렇게 관점을 바꾸셔서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듬뿍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네, 스님. 감사합니다.”(청중 박수)
울먹이며 질문하던 여성 분은 스님의 답변을 듣고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이 글은 정토회 ‘스님의 하루’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