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 저런 사람, 하나의 눈으로만 보면죽은 것을 보든지, 내 눈이 죽은 것신념도 신앙도 고정되면 죽은 것이고 이데올로기
» 미국 텍사스 사우스 파드레 섬 해변에 모래로 만든 예수 얼굴 조각이 놓여 있다. (AP=연합뉴스)
진흙에 불과했던 존재에 하느님의 숨결이 들어오니 육신 생명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물질로 들어와 생명을 일으킨 현상을 신명이라고 합니다. 신명이 나면 존재가 실현됩니다. 꽃이 피고 사람은 웃고 강아지는 날뛰고 새는 노래합니다. 신명 난 상태가 웃음이고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생명의 최고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외에 일흔두 제자를 선발하여 그들에게도 악령을 물리칠 능력을 주셔서 파견하셨습니다. 그들은 악령을 추방 시켰고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에서 꺼꾸러지는 것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기분이 좋으셨고 신명이 나셨습니다. 그래서 감사기도를 드리셨지요.
이 순간의 예수님 표정이 어땠을까 궁금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시고 박장대소 허허 껄껄 끽끽 웃으셨습니다. 복음서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분위기가 그렇다고요.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이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을까요?
»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발견된 1300년 전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의 자애로운 모습.경주/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왼쪽) 중국 허베이 우한 제2중학교앞에 세워진 대형 공자 흉상 (AP=연합뉴스)
공자님도 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렸다!’ 슬피 통곡하셨고 예수님도 라자로의 죽음에, 예루살렘의 운명을 내려다보시며, 또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청원하며 슬피 우셨습니다. 희로애락이 온전해야 인간입니다. 아픔에 슬퍼하는 인간이 기쁨에 웃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 부처님의 미소는 알면서 예수님 공자님의 웃음과 기쁨은 모른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현의 권위와 이미지에 대한 학습된 결과일 뿐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빈 무덤 속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슬피 울 때에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느냐?’며 깨우쳐 주셨습니다.
생명의 특징은 운동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변화합니다. 오늘은 어제의 내가 아니며 새로운 나입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러하신 분, 나는 이런 사람, 너는 저런 사람, 그렇게 하나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한다면 죽은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내 눈이 죽었던지. 가족과 이웃 친구들의 모습을 대할 때도 고정관념으로 보게 되면 그를 죽은 자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내 눈이 죽었던지. 내가 어제의 나로 변함없는 모습일 때 나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나는 늘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 목적이 수행입니다. 변함없는 것은 박제된 것이고 웃음이 없는 성현의 얼굴이 되고 맙니다. 믿음도 신념도 신앙도 변함없이 고정되면 죽은 것이고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는 그가 어떤 감정으로 듣고 있는지 눈치를 보면서 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들으려면 예수님의 눈치를 보면서 들어야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듣는 내 이해의 초점이 맞을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할 때는 항상 예수님의 표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을 감추시고 저 철부지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를 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신명이 가득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신명이 충만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됩니다. (2015. 12. 1) *
※이 글은 <산 위의 마을> ‘취화당’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