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전통학문이 애지중지하던 단어들, 이를테면 인간애, 공정, 양심 따위의 가치들은 시장논리가 삶의 원리로 내면화된 사회에선 모두 무용한 것들이다. 자본주의가 “그다지 이타적이지 않은 목적에 자본이 투입되는 방식”(페르낭 브로델) 모두를 일컫는 것이라면, 저 낱말들보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 시장이 집어삼킨 것이 어디 교육뿐일까. 종교의 사정도 딱하다. 세속화된 종교, 이젠 새로울 것도 없다. 이를 과도기의 위기나 진통쯤으로 둘러대기엔 이미 너무 먼 길을 왔다.
» 세월호 생존 3학년 졸업식이 열린 12일 낮 단원고 졸업생과 시민들이 교실 존치를 요구하며 경기 안산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원지 세월호 합동분향소에서 단원고로 침묵행진을 마친 뒤 희생 학생들의 책상에 국화를 헌화하고 있다. 안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수입이 짭짤한 양모 생산을 위해 농사를 짓던 소작인들을 몰아내고 농토를 목양지로 전환하던 수백년 전 영국. ‘유토피아’(토머스 모어)가 그리는 이 차가운 현실 속 “욕심 많고 난폭한 양들”은 우리에게 작품만큼이나 ‘고전’이 되었다. 인격 없는 교육, 가르침 없는 대학, 희생 없는 신앙, 사람 섬기기를 멈춘 종교, 모두 실재를 배반한 도구들, 본성을 거스른 난폭한 양들이다. 유토피아가 묘사하는 다음 대목은 더욱 음울하다. 집과 마을마저 남김없이 먹어치운 들판에 덩그러니 건물 하나만 남았다. 양들의 우리로 쓰기 위한 교회다. 묵시치고는 끔찍하게 사실적이다.
이쯤 되면 차라리 난폭한 양들에게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나앉은 거리가 더 실재의 학교요 종교에 가깝다. 적어도 곤궁한 거기에선 학교나 교회에서 사멸해가는 저 쓸모없는 낱말들, 그것도 오장육부, 살과 피로 이루어진 가장 숭고한 가치,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적어도 그 자리에선 은유나 상징이 아닌 강도 만난 이를 보듬는 진짜 손들을 잡아볼 수 있지 않은가. 자식의 마지막 시간이 여전히 궁금한 부모들의 광장, 삼성 반도체 희생자 가족들이 풀어내는 매일 저녁 역전 길모퉁이의 이야기, 사람답게 사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 해고 노동자들의 팔뚝질. 이보다 실재감 있고 간절한 기도가, 배움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며칠 전 타계한 신영복 선생이 나눈 두 부류의 인간이다. 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자는 세상을 자신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하는 자라고 했다. 전자가 자기계발서류의 인간이라면 후자는 고전 같은 사람일 테다. 그러나 정작 인간 역사를 지탱하고 앞으로 밀고 나간 이들은 노교수의 말대로 후자의 사람들이겠다. 쓸데없이 고귀하고, 숭고하게 어리석은, 고전이 결코 털어낼 수 없는 이 무용의 단어들이 그럼에도 교단과 설교대의 유일한 언어여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