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계성체대회 참석 박정일 주교
» 박정일 주교는 평생 종교인으로 살아온 구순의 나이임에도 자신의 신앙심과 믿음이 부족하다고 한다. 지난달말 필리핀 세부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에 참가한 박 주교가 세부 시내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신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4년마다 열리는 대회 연속 7번 동참전세계 돌며 믿음 나눠평남 벽촌서 태어나 초등5 때 성당에죽을 고비 넘기며 6·25 때 월남다니던 신학교 따라 제주로 피란또 한번 죽을 고비 넘겨로마 유학 가 7년 만에 사제 서품박사과정 준비 중 귀국“불안하고 괴로운 직책 수행했지만다시 태어나도 이 길이 좋아”
“어느 날 한 수녀가 나에게 묻더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느냐고? 그래서 ‘당연하지. 난 이 길이 좋아’라고 대답했어. 그랬더니 그 수녀는 ‘전 아니에요.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을 하고 싶어요’라고 하더군. 하하하.”
평생 종교인으로 살았다. 나이 90살. 북한에서 태어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월남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됐고, 하느님의 길을 걸었다. 친구들은 대부분 저세상으로 갔지만, 아직 은퇴 주교로 활동을 한다. 행운이다. 별다른 질병도 없었다. 3년 전 디스크 수술을 했지만 활동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내가 진짜 강복을 주는지 자신없어”
지난 1월24일부터 필리핀 세부에서 8일 동안 열린 제51차 세계성체대회에 참석했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성체대회에 7번 연속 참가했다. 거의 30년 전세계를 돌며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믿음을 나눈 셈이다. 세 차례 교구를 옮기며 주교도 했다. 교황청에서 5년마다 하는 주교들의 사도좌 방문도 7번 참가했다. 해외 신자 담당 주교로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자공동체를 방문했으니 많이 돌아다닌 셈이다. 이번 성체대회에 참가한 한국 순례단 50여명 가운데 가장 고령이다.
» 1백만명의 가톨릭 신도들이 촛불을 들고 성체행렬을 따르고 있다.
“정말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실 건가요?” “그럼, 다른 이들이 결혼생활 하는 것을 보니 너무 어려워. 난 그런 생활 못할 것 같아. 마음 안 맞는 이들과 평생 억지로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박정일 주교([♣사진♣])는 부드럽고 인자한 미소로 신도들의 환영을 받는다. 많은 신자들이 그에게 축복을 받길 원한다. 그는 미안하다고 한다. “내가 믿음이 아직 약해. 신자들에게 강복을 기원하면서 머리를 감싸지만 자신이 없어. 진짜 내가 강복을 주는지. 어릴 때부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강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신부들을 보면 부럽기만 해. 그들의 뿌리 깊은 믿음이 부러운 거야.”
사제 생활 60년에 가까운 박 주교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고, 강복을 의심한다고 하니 정말 신앙인의 길이 얼마나 멀고 어려운지를 느끼게 된다. 그의 삶이 궁금했다. 얼마나 많은 위기가 있었을까? 그는 차분하고, 정확한 기억으로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만약 그때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40㎞ 떨어진 평안남도 평원군 동송면 청룡리의 벽촌에서 태어난 그는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의 4남3녀 가운데 셋째였다. 집안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삼촌의 자전거를 타고 20리 떨어진 성당에 가서 미사를 봤다. 개신교 계통의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진학한 그는 한 신부님의 영향으로 신학교를 가서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향에 돌아와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으나 부모님은 반대를 했다. 하지만 그런 반대 탓인지 위장병에 시달리는 등 몸이 계속 아프자, 어렵사리 허락을 받았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경영하는 덕원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평양의 공산 정권은 종교 탄압을 시작했고, 1949년 5월 학교를 폐쇄시켰다. 6·25 한국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 허락도 없이 혼자 남쪽으로 넘어가려고 결심했다.
» 아기 예수를 손에 들고 경배하는 춤을 추고 있는 세부 원주민.
“어렵게 수소문해 찾은 안내원이 보위부 끄나풀이었어. 3·8선을 건너기 위해 한밤중에 나섰는데 갑자기 안내자가 어떤 집 안으로 앞장서 들어가는 거야. 집안에는 제복을 입은 정치보위부원들이 있었어. 간첩이냐고 추궁받으며 구타를 당하고, 해주의 ‘38 정치보위부 유치장’에 갇혔어. 고문과 협박을 받으며 신문을 받다가 두 달 만에 풀려났어.”
고향에서 그는 인민군에게 징집돼 끌려가다가 탈출했다. 마침 고향 근처를 가던 길이라 가능했다. “만약 그때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그는 중공군이 고향에 밀어닥치기 직전에 평양에 나와서 남한으로 갈 길을 찾았다. 평양 교구장 서리이던 안 주교가 신원보증서를 써주었다. 그는 월남하려는 신자들에게 신원보증서를 밤을 새워가며 써줬다고 한다.
“곁에서 방귀 뀌는 소리에도 놀라”
대동강변으로 갔는데,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미 대동강 인도교와 철교는 폭격으로 다 부서지고 군인들을 위한 임시 부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안 주교가 써준 증명서를 부교를 건너는 지프차 운전병마다에게 보이며 태워주기를 간청했다. 계속 거절을 당하다가 호주 군인한테 겨우 허락을 얻었다. 임진강을 건너 정처 없이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손에 든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서 한동안 맨발로 걷기도 했다.
평양을 떠나 20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혜화동 신학교에 가서 당시 신학교 학장이었던 정규만 신부에게 입학을 허락받고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초만원인 피난 열차의 꼭대기에 타고 대구에 도착해 먼저 온 20여명의 신학생들과 주교관 부속건물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러다 신학교가 제주도로 피란 가는 바람에 부산에서 상륙정을 타고 제주도 화순 앞바다에 도착했다. 서귀포읍 공소 성당에서 먹고 자면서 신학을 공부했다.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며 어려운 피난생활을 했다.
“그때 다시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겼어. 한라산에 숨어 있는 공비들이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해치곤 했어. 다른 신학생과 함께 불침번을 섰어. 총도 없이 맨몸이었지. 캄캄한 밤에 수십명의 공비들이 마을을 습격했어. 총을 쏘고, 사람들을 잡아갔어. 다행히 내가 있던 원두막을 그냥 지나쳤어. 못 본 거지. 밤새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어. 바로 옆으로 그들이 지나쳤는데, 하도 긴장한 탓인지 곁에 있던 신학생이 방귀를 뀌는 거야. 얼마나 놀랐던지.”
“좌불안석이 이젠 좌편안석”
전세가 호전돼 부산으로 신학교가 옮겨갔고, 그는 로마로 유학 가라는 명을 받았다. 그때에는 로마에 한국 사람으로는 신학생 다섯 명과 신부 두세 분, 그리고 일반 유학생 한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에는 주재 한국 대사관은 물론 영사관도 없었다. 그가 다닌 우르바노 신학교에는 30개 나라의 학생들이 있었다. 모든 학과 강의와 시험이 라틴말로 진행돼 첫 학기에는 강의를 거의 못 알아들었다. 철학 3년, 신학 4년을 마치고 1958년 11월23일 44명의 동료와 함께 사제로 서품됐다. 사제 서품 때에 사제들이 택하는 성경 구절을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로 정했다. 부족한 몸이 하느님의 큰 사랑으로 사제가 되었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새겼다.
사회학 석사 학위도 마치고, 박사과정을 준비하다가 귀국하라는 명을 받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신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사제의 수가 많이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경남 문산 본당에서 3년을 사목했고, 이어서 진주 옥봉 본당에서 4년을 사목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지금 광주가톨릭대학)의 교수가 돼 사회학과 기초윤리 신학을 강의했다. 본래 말주변이 없는데다 전공을 하지도 않은 윤리신학을 가르치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1977년 5월 제주교구 초대 주교로 임명돼 5년간 제주교구장을 하다가 전주교구장으로 7년을, 마산교구장으로 14년을 봉직하고 2002년 11월11일 현직 주교로서의 26년을 마쳤다. 2003년부터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초대위원장을 맡아 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이끌었다. 그가 가장 보람있게 여기는 일이다.
“기쁜 일도 있었지만 회한도 많아. 갓 사제가 되었을 때에 신자들이 “신부님!” 하고 부를 때 너무 어색했어. “주교님!” “의장님!”이라고 불릴 때는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어. 불안하고 괴로운 직책을 수행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면서 “좌불안석(坐不安席)이 이제 좌편안석(坐便安席)이 됐다”고 심정을 표현했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참다운 믿음을 갖고 싶어. 때가 늦었다고 생각 안 해.”
세부/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