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 소소한 감정들 포착
전문가의 길 걷다 다른 선택
기간제 연구원 일하며 그림
“불안해도…느린 삶 살고파”
“잘 지내지?” ‘아니! ○○ 우울해. 이러기는 좀 곤란하니까.’
이서현(28)씨가 블로그(http://blog.naver.com/leeojsh)와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leeojsh)에 올린 그림일기 ‘나는 왜 그때 우울하다고 말하지 못했나’의 첫 장면이다. 언제 누구한테 우울하다고 말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이씨의 그림일기를 보며 ‘나도 그렇다’며 공감과 위로의 댓글을 남긴다.
동그란 몸집에 다양한 표정을 담은 그림일기 속 주인공은 심리학 전공자이자 생활인인 이씨가 느끼는 일상의 소소한 감정들을 대변한다. 16컷이 넘지 않는 짧은 그림일기 150여편에는 사회생활과 가족관계에 지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상담심리·우울증과 자살의 문제 등 이씨가 평소 고민해온 생각들을 담은 그림일기는 블로그에서는 하루에 많게는 2000명 정도가 보며, 페이스북 구독자도 8000명이 넘는다.
현재 자살예방기관에서 기간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씨는 한때 임상심리 전문가를 꿈꿨다. 명문대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그는 대학병원 임상심리상담실에서 수련과정 3년만 거치면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월 300만원 이상인 업계 최고 급여를 주고 가장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던 수련 과정이었지만, 수련생들이 겪는 군대식 문화, 장시간 노동에 지쳐갔다.
씨는 108명(전체의 약 10%)의 수련생 또는 전문가를 상대로 ‘임상심리 전문가 수련생 노동환경 실태조사’를 진행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장시간 노동, 낮은 급여, 체계적이지 못한 교육 등 수련생들이 겪는 고통이 실태조사를 통해 드러나자, 임상심리학회도 처우 개선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블로그를 통해 수련생을 위한 노동법을 설명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3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며 일을 그만뒀고, 이제는 남는 시간에 컴퓨터로 그림일기를 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림일기마다 수십개의 댓글을 주고받으며 또다른 심리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다른 길’을 선택한 이씨는 요즘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좋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림일기도 그가 찾은 새로운 방법이다. 동시에 그동안 빠르게만 살아왔는데 이제는 천천히 살아보고 싶다. 자신처럼 삶의 속도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씨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느린 삶’을 찾았지만 불안은 그대로다. 하지만 나 스스로 원한 불편함이니 받아들일 수 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우리 현소은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