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복 목사의 ‘종교개혁 현장 순례’
» 얀 후스가 화형당한 장소에 그를 기려 놓아둔 검은 바위인 ‘후스의 돌’. 그의 예언대로 그가 처형되고 100년 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실현됐다.
후스-루터-칼뱅, 500년 전 목숨 건교회와 사회 변혁 정신 생생사형 선고 내린 공의회 건물 앞에교회와 성직자 타락 조롱 동상처형장 검은 바위 ‘후스의 돌’ 앞지금도 추모의 발길 흔적페스트 창궐로 물품 태우던 곳에서루터가 파문 교서 불태워교황을 페스트와 같은 존재로칼뱅 묘는 공동묘지에 무덤번호만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려는 표지
크리스챤아카데미 이근복 원장이 지난 1월18일부터 10일간 종교개혁의 현장이었던 유럽을 답사하고 글을 보냈다.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앞둔 시점에서 유럽 교회와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꾼 종교개혁의 정신과 전개 과정이 교회와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얀 후스(1372~1415)는 체코의 신학자로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 화형을 당했다. 그가 처형당한 콘스탄츠(독일)를 방문한 날의 아침은 쌀쌀하였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처형장에는 누군가 꽃을 갖다 놓은 흔적이 있는 작은 검은 바위 한 개(후스의 돌)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단지 후스의 탄생일과 사망일이 적힌 그 검은 돌이 큰 울림을 주었다. 1415년 7월6일, 후스는 화형당할 때 이렇게 예언했다고 한다. “나는 한 마리 거위 구이가 되지만 100년 후에는 백조로 부활할 것이다!” 정말로 약 100년 뒤인 1519년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후스가 옳았다!”고 외쳤다고 하니 그가 의연하게 외친 예언은 그대로 이뤄졌다.
화형 때 한 예언 100년 뒤 그대로
후스는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하고 찬송가를 만들어 보급하고 신학 사상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설교를 금지당하고 추방당하여 유배생활을 하지만 그의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화체설과 교황 무오설을 부정하고, 고해성사와 독신을 거부하고, 성찬에서 평신도들에게도 빵과 함께 포도주잔을 나누고,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알렸던 까닭에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콘스탄츠공의회가 열렸던 보덴 호숫가 건물은 치욕스런 역사를 묻어버리려는 듯 호텔로 쓰이고 있었다. 그런데 호수 선착장에 서 있는 큰 동상이 흥미로웠다. 다리를 드러낸 여인상의 두 팔 양손에는 벌거숭이 황제와 교황이 앉아 있는데, 3분마다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당시 고위 성직자가 모이는 공의회가 열리면 창녀들이 집결하였다고 한다. 후대에 이런 교회 타락상에 분개한 이들이 후스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건물 앞에 이런 동상을 세워 후스가 옳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 마르틴 루터가 11개월 동안 머물렀던 아이제나흐(독일)의 바르트부르크성. 이 성에는 루터의 방이 있는데, 벽에 마귀 형상이 있다.
아이제나흐(독일)에는 루터가 1521년 5월부터 11개월 동안 머물렀던 바르트부르크성이 있다. 음산한 날씨에 잔설이 남아 있는 산 정상에 숨차게 올라보니 난공불락인 성이 떡 버티고 있었다. 루터의 방은 2~3평 남짓한 작은 방으로, 그가 번역한 성서가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벽난로밖에 없었다. 유심히 보니 작은 마귀 형상이 벽에 걸려 있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피신시킨 성의 이 작은 방에서 루터는 “내가 정말 옳은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많이 번민하고 갈등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마귀도 나타났다고 한다. 루터가 자기를 괴롭히는 마귀에게 잉크병을 던져 그 잉크 자국이 남아 있다는 말도 있다는데 흔적은 볼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마귀의 형상을 걸었나 보다. 고립무원의 성 안에서 그는 답답하고 불안하였고 때로 회의감이 드는 자신과 치열하게 씨름한 것이다.
두세 평 단촐한 방에 마귀상이
그는 다행히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용기를 얻고 평정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도는 내가 할 근심걱정을 하나님이 하도록 하는 것이다”라는 루터의 말이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고민하던 루터는 “하나님, 교회가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저는 잠자러 갑니다”라고 기도한 후 편히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고뇌하는 중에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당시 신부들이 독점한 라틴어 성서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던 평신도들이 스스로 성서를 읽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했고, 백성들이 문맹을 깨치도록 만들어 종교개혁운동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루터는 에르푸르트대학교에서 인문학과를 졸업하고 부친의 뜻을 따라 출세가 보장된 법학을 공부했다. 어느 날 루터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벼락을 만나 내면에 숨어 있던 공포와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그 일로 구원에 대한 고뇌를 하게 되었고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505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안쪽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루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극도의 경건생활을 하고, 절제와 금욕으로 치열하게 수행하였으나 풀리지 않는 구원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분투했을 루터를 상상한 것은, 기념품점에 있던 루터 흉상이 너무 근엄하여서였을까?
수도원 본당의 바닥에는 수도원장 자카리아스 무덤의 동판이 있었는데 여기서 루터는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전통에 따라 서원을 하였다. 그런데 이 자카리아스는 후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콘스탄츠공의회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자카리아스 무덤 동판에 엎드려 사제 서원을 한 루터가 “우리 모두는 후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종교개혁에 나섰으니 역사의 오묘함이란!
인문주의 토대, 첫 저서가 인문학책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4인의 기념조형물에서 칼뱅은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 약간 앞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칼뱅은 첫 저서로 인문학 책을 쓸 정도로 인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인문주의 토대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펼쳤다. ‘칼뱅의 강당’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제네바의 목사들과 함께 성서공부모임을 한 곳으로 재교육 과정인 공동성서연구를 통해 실력을 향상시켰고, 더불어 개혁운동을 확장할 수 있었다.
»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칼뱅 등 종교개혁자 4인의 기념조형물 앞에 선 이근복 목사.
그가 25년간 목회한 생피에르교회에서 설교단을 바라보니 힘차게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는 이곳에 ‘제네바아카데미’를 열고 인문주의에 기초한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교육을 하였다. 칼뱅의 묘는 유언에 따라 공동묘지에 묻혀 무덤번호만 있다고 한다. 지금의 작은 표지판도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고 한 그의 고귀한 삶의 표지를 보는 것 같았다.
마지막날 이른 아침, 우리는 ‘루터의 참나무’란 유적으로 갔다. 1520년, 루터가 동료 교수들과 신학생들 앞에서 교황 레오 10세의 파문 교서를 불태운 곳을 기념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300주년 기념으로 1830년에 심은 참나무가 서 있는 곳이었다. 여기는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병균을 박멸하기 위해 물품들을 태우던 장소였다고 한다. 루터가 일부러 여기서 교서를 태움으로 교황을 페스트와 같은 존재로 각인시킨 것이다. 루터가 마음의 결단을 한 대단한 장소라서 우리는 다 함께 루터의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루터의 결단이 느껴져서 묵묵히 서 있는 참나무를 자꾸만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교회와 사회의 새날 열 거울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는 1529년 루터파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정책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데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에 개신교의 지향점이 담겨 있다. 현실 교회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교회의 새로운 길을 만들고 진정한 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번 여정에서 내내 마음속으로 질문한 주제가 있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던지는 정신과 의미를 한국 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와 어떻게 공유하여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까?”
종교영역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변혁을 가져온 500년 전의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오늘의 우리 상황에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뜻과 믿음을 같이하는 이들과 더불어 기도하고 고뇌하며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루터나 칼뱅 같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개혁자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힘을 모으고, 함께 고난의 길에 동역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번에 종교개혁 현장에서 반성한 것은 한국 교회 개혁을 꿈꾸는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에 비추어보면 치열성이 없고, 실력이 모자라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있는 점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회의 변혁을 위해 다 함께 목숨마저 걸면서까지 치열하게 헌신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종교개혁 현장에서 개혁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배움으로써, 함께 한국 교회와 사회의 새날을 열어나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글·사진 이근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