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건영그룹 회장인 엄상호 불교인재원 이사장 절 수행
“모든 것의 근원 살피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어”
염주에는 108개의 염주알이 있다. 염주알은 백팔번뇌를 상징한다. 염주를 돌리는 것은 108가지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의미이다. 그의 염주에는 염주알이 111개다. 그가 특별히 만든 염주이다. 그는 새벽 4시부터 1시간 동안 이 염주를 세 바퀴 돌린다. 불경을 외우고 절을 하며 돌린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염주알 한 알을 돌리니 매일 333배다. 벌써 30년째이다. 매달 만 배를 넘게 하는 셈이다. 집 안에 모신 도자기 불상 앞에서 하는 333배 덕인지 그의 얼굴에는 붉은 빛이 난다. 투명한 듯도 하다. 70대 중반의 나이에 보기 드문 건강한 혈색이다. 333배를 한 뒤로는 무릎 관절염과 허리 디스크도 깨끗이 사라졌다.
엄상호(72) 불교인재원 이사장은 한때 재계 30위 안에 들었던 건영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그룹이 해체되는 사업상 좌절을 겪었지만 마음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사회활동을 한다. 불교 수행 덕이라고 한다.
그에겐 특별한 체험이 있다. 40대 중반 대기업을 운영하던 그는 마음 깊숙이 고민이 있었다. 죽음이 두려웠다. 어릴 때부터 절에 다니며 불심을 키웠지만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항상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피땀 흘려 키워온 기업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가족과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환생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언젠가 지구도 멸망하면 그나마 나의 존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그런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이 왔어요.”
그날 새벽도 명상에 빠져있었다. 멀리 깜깜한 동쪽 하늘에서 태양 같은 불덩어리가 기운차게 그를 향해 날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불덩어리는 그의 가슴을 세차게 치고 사라졌다. “그 순간 깨달았어요.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우주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고. 그래서 내 존재는 영원할 수 있다고…”
그는 성철 스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불교 전국신도회 부회장이었던 1982년, 신년 하례를 위해 해인사를 찾아 성철 스님을 처음 친견했다. 성철 스님을 뵈려면 누구나 3000배를 해야 했다. 그에게는 3000배를 하지 않고 뵐 수 있는 ‘인연’이 주어졌다. “남들은 3000배를 올리고 스님을 뵙는데, 신도회 간부라고 절을 안하고 스님을 뵈니 불경스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에 3000배를 올리고 다시 스님을 찾았죠. 당시 사업한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저에게 스님의 법문은 큰 위안이 됐어요.”
그후 엄 이사장은 틈나는 대로 절 수행을 했다. 1080배, 1000배, 300배 등을 하면서 절 수행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절을 해보니까 108배는 좀 짧고, 1080배는 좀 길고, 불교와 인연이 있는 숫자인 333배가 제일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성철 스님은 그에게 지금의 건강을 선물한 셈이다. 그는 2013년부터 2년 간 성철 스님의 수행처들을 순례하는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수행도량 순례단’을 이끌기도 했다.
그는 ‘불덩어리 체험’을 한 뒤 더욱 절 수행에 몰두했다. 회사에서는 수근거렸다고 한다. “회장님이 이상해졌다”고. 하지만 그가 회삿일을 멀리 할수록 사업은 잘됐다고 한다. 위기감을 느낀 직원들이 더욱 열심히 한 탓이라고 한다.
그가 불교인재원 이사장을 2009년부터 맡게 된 데에도 각별한 사연이 있다. 그가 전국 신도회 고문이던 시절 한 중년 신사가 찾아와 무릎을 꿇더니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엄 이사장의 부친인 엄희섭 건영그룹 명예회장의 불사금을 관리했는데, 명예회장이 치매에 시달리는 틈을 타서 적지않은 돈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던 그는 해남 대흥사에 가서 참회 기도를 하다가 ‘돈을 주인에게 돌려줘라’는 부처님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 이사장에게 돈을 돌려주러 왔다는 것이다. 엄 이사장은 이 돈을 중앙신도회에 시주했고, 이 돈은 불교인재원 설립의 큰 종잣돈이 됐다고 한다.
그는 최근엔 통일 운동에 힘쓰고 있다. 역시 성철 스님 때문이다. “어느 날 성철 스님이 꿈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특유의 빠르고 부정확한 발음으로 ‘통일을 위해 기도해. 통일 기도를 해’라고 일갈하시고 사라지셨어요. 그래서 우리 민족의 최고 숙제인 통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는 불교 신도로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고 있다.
엄 이사장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을 깊이 새기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의 근원을 살피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어요. 그 뜻을 알고 세상만물을 보면 덤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생겨요.”
불교인재원은 일반인들의 불교 이해를 돕기 위해 서울 견지동 조계종 전법회관 선운당에서 1차로 인도불교, 2차로 중국불교를 강의했고, 26일부터는 한국불교 강좌를 연다. 5월13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후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열리는 이 강좌에서는 한국불교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도록 5대 적멸보궁 창건주 자장율사부터 무애행의 원효대사, 화엄사상의 중심 의상대사, 태고 보우 스님 등을 소개한다. 문의 (02)1661-1108.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