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유토피아를 품고 살아갑니다. 유토피아는 이상향(理想鄕: 이상적인 곳), 희랍어로는 ‘여기 아닌 땅’이란 뜻입니다. 70년대 말(박신부 인물 핸섬하고 혈기왕성하던 청년시절) ‘고래사냥’이라는 영화와 송창식의 노래가 있었어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금지곡이기도 했습니다. 좌절의 시대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자유의 꿈을 ‘작은 예쁜 고래 한 마리’로 풍자했던 노래입니다.
» 제주 서귀포 앞바다에서 도약하며 놀고 있는 남방큰돌고래. 돌고래의 불법포획을 막기 위해서는 보전에 어민이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사진=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누구나 유토피아를 향한, 좀더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로망이 있습니다. 멀리 벌판을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 자신의 몸이 실려 있는 듯 합니다. 지금도 단양 같은 시골 역에서 열차를 타려면 플랫폼에 나가서 기다려야 합니다. 플랫폼에 서있을 때의 기분이 있습니다.
여객선의 뱃고동이 울리는 부두 가에서 느껴지는 기분도 그러하고, 공항 대합실에 있으면 왠지 마음 설레고 가벼운 흥분과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이상향에의 감성, 마음속에 사는 예쁜 고래 한 마리가 유영하는 순간이겠지요.
여객터미널, 플랫폼, 부두, 공항에 있는 이들은 모두 어딘가로 가는 사람들. 그들과 나를 태우고 떠나게 될 기차와 비행기 여객선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을 떠나게 하는 것만으로 내가 평소 동경하는 세계, ‘여기 아니 땅’을 로망하게 합니다. 꿈속에서는 실제로 다녀오기도 하지요.
곧바로 찾아오는 일장춘몽의 현실일지라도 내 마음속에 사는 고래는 죽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이상의 삶이 성취되는 것, 문제가 해결되는 것, 구원자란 문제 해결자, 구세주는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이란 뜻이지요. 타볼산에 올라 기도하던 제자들은 이른 봄의 꿈이었지만 이상향의 성취를 경험합니다. 깨어나고 싶지 않아 초막을 짓고 눌러 살고 싶은 꿈이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상한 춘몽이 아니라 유토피아가 실현 가능한 세계임을 계시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뽑은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스페인 마리날레다의 시청 인근거리에 그려진 벽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라고 적혀 있다. 한겨레21 자료사진
구원의 세계, 이상향의 유토피아는 눈부시게 빛나는 천상의 차원이었지만 그 실현은 지상의 역사에 있습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한 통속이신 예수님은 동시에 인간 삶에 함께하시는 분이시니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이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상향을 가졌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기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의 고향 에덴을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유구한 인류의 구세사를 운영해 오셨습니다. 가정교육이라는 관습을 통해 예의염치를 가르치셨고 종교와 철학의 역사, 석가, 공맹, 성현과 현자들의 고전과 경전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의 말씀입니다.
인류는 지상을 천국으로 만들고 사는 법, 구원의 삶에 대한 해답, 이상향 성취의 길을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겁니다. 다만 실행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잘 건설하고 공동생활을 잘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행복의 길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함을 믿지 않고 다른 것에서 구원을 찾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 웹사이트‘산위의마을입니다’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