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방 주인은 어디 갔는가? 10일 오후 진도 팽목항에서 진도군청 직원들과 대학생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한 학생의 주인 잃은 가방속 물품을 말린 뒤 다시 넣고 있다. 가방속엔 친구들과 나눠 먹을 새우깡을 비롯한 과자와 손거울에 맘이 짠하다.진도 팽목항에선 태풍이 지난간 뒤 햇볕이 나자 해경이 바다속 세월호에서나 인근 해역에서 수거한 유류품을 세탁뒤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다. 진도/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예비부부는 난감해했다. 신부인 내게 성당이 아닌 일반식장 주례를 부탁하기 미안했음이다. 소박한 혼례미사를 꿈꿨던 친구들이다. 신자가 아닌 양가 부모들의 반대도 반대지만 남들처럼, 그만큼은 해야 한다는 성화에 이미 지쳐 보였다. 식장에, 혼수에, 신접살림까지. 미안하지만 이야기에 도통 집중할 수 없었다. 듣는 내내 아득해졌다. 하필 왜 그때 아침나절 신문에서 보았던 국가인권위원회 전광판 위의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키운 깻잎이 생각난 것일까. 생의 새로운 마디를 재잘거리며 설계하는 이들과 벼랑 끝에서 사투를 벌이는 노동자들. 죽을 각오로 매달려 있는 이들과, 그들이 키워낸 여린 생명. 이런 모순투성이의 희극이 어디 있을까. 어쩌자고 난 이런 생각을 지금 하는 것일까. 하지만 모두 어엿한 현실 아닌가.
깜깜한 절벽을 더듬는 그 손으로 노동자들은 깻잎을 키워냈다. 잘은 몰라도, 그들이 깡통에 담겨진 흙에서 키운 것은 내 눈앞 청춘들의 자잘한 고민들이고, 저 아래 무심한 일상들의 평범한 하루였을 것이다. 밋밋한 하루가 누군가에겐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것이 되어버린 현실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 사실을 알아버린 나는 또 얼마나 불편한가.
저마다 낯익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이다. 좁다란 고공에서 꼬박 나야 했던 노동자의 사계절을 봄날의 예비부부가 헤아릴 수 없듯이 무심한, 짐짓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한 저 아래 세상은 전광판 위의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현실이리라. 이 모순된 시선들이 교차할 때 삶은 돌연 낯선 것이 된다. 순간 세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집가고 장가가는” 저 고요한 일상은 참기 힘든 허위일 뿐이다. 낯선 세상은 그래서 불편하고 그렇기에 진실된 것이기도 하다.
»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국가인권위 옥상에서 고공농성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45)씨와 한규협(41)씨가 11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비전 위에 올라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장하며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황광모 기자 hkmpooh@yna.co.kr
익숙한 것들이 더는 익숙한 것이 아니게 될 때 사람들은 두렵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어린 예수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다. 낯익은 세상이 무너진 자리로 들어서는 것은 그렇게 불편함이고 감당해야 할 진실이다. 예수는 쉬지 않고 낯익은 세상의 화면을 찢어 저 건너 낯선 세상을 안내했다. 더러는 제자들마저 그런 예수가 거북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바다에서 건져 온 주인 잃은 교복, 뭉개진 안면. 세월호 참사와 광주민주항쟁. 우리의 4월과 5월의 달력이 품고 있는 불편함이다. 아무리 되짚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다. 더러는 그것을 다시 헤집는 이유가 뭐냐고 항변할 테고, 진상규명은 세금이 들어가는 일이니 신중해야 하며, 경제 회생을 도모할 때라 말할 게다. 사실 그것은 애국도 이념도 아니다. 낯익은 세상이 허물어진 후 바닥을 드러낼 조악한 현실이 두려워서다. 진실은 그들에게 두려움이요 소요인 것이다.
예수의 죄목이 소요죄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익숙한,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세상을 흔들고 술렁이게 한 탓이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은 유일하지도 참되지도 않았다. 낯선 장면으로 마음이 헤집어진 이들의 세상 역시 더는 잠잠할 수 없다. 목숨보다 돈을 헤아리는 이 세상보다 깡통만한 크기의 땅에서 자란 저 여린 생명이 더 참이고 진실한 것임을 돌연 알아버린 까닭이다.
장동훈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