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비야(非山非野)라고 했다. 가장 이상적인 수행공간이요 기도터 풍수지리의 기본이라 하겠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깊은 산속이요, 동구를 나서면 바로 저자거리다. 마을의 가장자리이면서 산 언저리에 터를 잡았다. 탁발 다니기도 수월하고 법을 전하기도 용이하면서 수행하기 좋은 까닭이다. 더불어 이런저런 걱정거리를 안고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접근성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도 있어야 한다. 오래 전부터 새 절을 지을 때는 가능한 한 그런 자리를 선호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도시는 몇십년만에 팽창에 팽창을 거듭했고 그 옛날 비산비야였던 절 자리는 어느 새 도심 한가운데 섬으로 바뀌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밤낮 없이 번거러운 시정(市井)과 진배없는 공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음이 있으면 양도 있기 마련이다. 대신 많은 사람이 찾는 ‘동네 절’로서 역할에는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천년 후까지 내다보면서 지속가능한 비산비야의 명당자리를 고르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 시절 경기도 의왕 청계산은 한양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까닭에 산짐승 발자국만 듬성듬성 찍혀있고 인적마저 드문 깊은 산골짜기인 그야말로 비야(非野)였다. 1970년대 이후 수도권으로 이천만명 가량의 인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산은 깎여나가고 하천은 메워지면서 시가지가 만들어졌고 아파트와 주택가와 상가가 세워졌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제대로 보여 주었다. 더불어 오랜 세월동안 심산유곡이었던 청계산 입구까지 도시가 이어졌다. 앞으로는 이미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고, 그 곁에는 높다란 다리교각이 새로 만들어지는 걸로 미뤄보건데 또 신작로가 더해질 모양이다. 그 와중에 절 입구까지 마을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찰 주변의 자연환경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 절 자리는 어느 새 비산비야의 명당자리로 변했다. 알고보면 명당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월이 흐르면서 더 좋아지는 터도 있고 더 나빠지는 터도 있기 마련이다.
기록에 의하면 퇴락한 의왕 청계사는 팔백년 전 중창의 계기를 맞이했다. 중창주 조인규(1237~1308)거사는 평양 변두리에 생활 기반을 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읽을줄 아는 비범한 안목을 지닌 슬기로운 인물이었다. 원나라 힘이 고려에 미칠 무렵 몽골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탁월한 통역실력으로 고려왕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이미 왕조는 기울어가는 석양이었다. 떠오르는 태양 조선왕조 창업 대열에 한몸을 던졌다. 이 집안은 왕비를 3명 배출한 명문가로 성장했다. 거기에 더하여 유명 고승 2명까지 배출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字)를 거진(去塵:번뇌를 제거하다)이라고 부를 만큼 불교의 가르침에도 심취했다.
그 시절 청계산은 평양 조씨의 문중 산이었던 같다. 그는 일찍이 청계산에 별장을 짓고 또 소당(小堂)을 지었다. 그 곳에서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때로는 찾아 온 문우들과 시를 읊조렸다. 목은 이색・변계랑 등의 시가 오늘까지 전해온다. 근처에 자리한 문중사찰격인 청계사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까지 주도했다. 절 안에는 그의 사당을 따로 지을 만큼 큰 공덕주였다. 청계사 경내에 있는 보통사람 키 높이만한 오래된 사적비 앞에 섰다. 가람의 당우를 일신한 거진 거사의 업적에 대하여 돌아가신 지 300여년 후, 후손이 촘촘하게 기록하여 세운 것이다. 어른키 높이에 두손으로 안을 수 있을 정도의 폭을 가진 16세기 비석이다. 오백년동안 이 자리를 꿋꿋히 지켜낸 것이다. 최근(2000년)에도 후손이 사찰진입로 확장은 물론 주변 경관을 위한 수림 조성에 기여한 공로를 기록한 공덕비가 더해졌다.
꽃의 아름다움은 열흘을 넘을 수 없고, 권력은 십년을 지키기 어렵다. 또 삼대이상 이어지는 부자 집안 역시 드문 것이 세속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 가문의 융성은 오백년 이상 이어졌다고 한다. 언제나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었으며, 해야할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실천했고 이웃에도 아낌 없이 베풀었으며 더불어 종교적 공덕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