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남쪽 끝 바닷가 어느 작은 도시에 들렀을 때 “여기에서 얼굴 자랑하지 말라(미인이 많다는 의미)”는 ‘동네광고’를 들었다. 그곳에 머무는 지인들이 서울나들이를 했다. 이중섭 그림전 등 몇몇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문화비를 마련하고 시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종로 인근에 숙소를 예약해 둔 덕분에 저녁밥을 함께하는 마지막 일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여름 저녁은 어둠이 늦게 깔리는지라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자리를 파하면서 이튿날 몇몇 새벽형 인간과 함께 아침공양도 같이 하자는 초청이 다시 이어졌다.
인사동 입구의 그 빵집은 아침 일찍 문을 연다. 숙소에서 내려다보니 오늘따라 둥근 실내등이 여러 개 켜진 그 가게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온다. 이내 아침잠이 없다는 이의 전화번호가 찍혔다. 그 가게에서 해외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기분을 내며 빵과 커피를 시켰다. 그 사이에 시간차를 두고 몇몇이 출근하는 길에 빵을 사서 들고 나간다. “모두들 이렇게 열심히 사는구나”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건널목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렸다.
한옥이 밀집한 지역인 북촌의 이른 아침 나들이는 처음이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본의 아니게 가이드를 겸하며 둘러보았다. 방문객으로 붐비는 한낮이나 저녁의 관광지 느낌과는 사뭇 다른 차분하면서도 평범한 동네 분위기를 만날 수 있었다. 남매가 등교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의 출근 차량에 오르면서 까르르 웃는 소리는 골목 안쪽으로 울려 퍼지며 메아리가 된다.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이 오토바이를 매만지다가 뭔가 공구를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간다. 열린 대문 사이로 살림집의 드러난 속살도 슬쩍 훔쳐본다. 호젓함을 즐기려는 부지런한 일본관광객 네다섯 명이 인솔자 안내에 따라 다니며 아침 미소를 날리는 것을 보는 것도 구경거리다.
주민이 살고 있으니 떠들지 말아달라는 주문이 적힌 현수막이 곳곳에 있을 만큼 5년만에 다시 찾은 조계사 북쪽마을은 몇 년 사이에 풍광이 많이 바꿨다. 늘어난 가게는 화려해졌고 증가된 인파는 소란스럽다. 자주 가던 사찰음식 전문 식당은 이미 서촌으로 옮겼고 그 자리는 리모델링한 화려한 커피숍이 대신하고 있다. 인근 언덕길에 자리 잡은 비교적 오래된 ㅁ자 한옥인 전통찻집이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전통죽을 아침메뉴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삼청공원 입구에서 큰길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예약전화를 하면 내 목소리를 기억해주는, 중국 유명 여배우 이름을 딴 그 중식당이 없어진 것은 다시 종로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서운한 부분이다. 건물 전면의 통유리 창문은 이제 반짝이 별과 현란한 물결무늬가 그려진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 길에 자리 잡고 있던 몇몇 유명 한정식집도 모두 간판을 내렸다. 오래된 동네가 이제 ‘아재세대’는 더 이상 북촌과 삼청동에 오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 아닌 압력을 행사하는 느낌이다. 구세대 음식인 칼국수마저 줄을 서서 기다릴 수 없는 성정 때문에 맛도 못보고 돌아섰던 기억까지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쨌거나 모든 것은 변해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도 보인다. 젊은 세대가 이 거리에서 한복 체험을 즐기는 풍광이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맵시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삼십여 년을 하루같이 한복(물론 승복)생활을 하면서 내린 결론은 ‘간지나게’ 입으려면 자주 입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경복궁 담장길에서 임금님 패션을 만났다. 소화시키기 어려운 옷도 선뜻 입는 그 용기가 더없이 가상하다. 왕들도 가끔 어의(御衣)가 아니라 평상한복 차림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대궐문을 나와 근엄함을 잊는 시간을 가졌다. 격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너무 좋아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따라온 내관에게 이렇게 투덜거렸다.
“궁 싫어! 궁(에 돌아가기)싫어!”
원철 스님/ 조계종 포교연구실장